술 이야기
날만 새면 우리 집 사랑방에는 갓 쓴 노인들로 붐비었다. 이 고을 저 고을 선비들이 할아버지를 뵈러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이분들의 대접을 위해 할머니와 어머니께서는 쉴 새 없이 술상을 들이느라 애를 쓰시었다. 나 또한 할아버지의 교육 방침에 의하여, 철도 들지 않은 꼬마둥이 때부터 사랑방으로 불려가서, 어른들께 일일이 큰절을 드리는 힘겨운 의식을 치르곤 하였다.
인사를 드린 후에는 반드시 술을 따르게 하였는데, 내가 올린 잔을 비우시고는, 윗입술에 허옇게 묻은 탁주를 양손으로 슬쩍 닦으시면서 ‘아, 그 술맛 좋다’는 말씀을 하시고는 ‘안주는 이 고추로 해야지’ 하시면서 내 고추 있는 부분을 슬쩍 손으로 훔치시기도 하시었다. 때로는 허리에 차고 있던 끈주머니를 풀어 돈을 주시기도 하였다. 아마 술을 부어 드린 나에 대한 일종의 인사치레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런데 이러한 술잔 드리기 횟수가 날마다 거듭되면서, 나에게는 하나의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저 술이란 게 어떤 것이기에, 모두들 저렇게 맛이 좋다고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나도 저것을 언제 꼭 한번 맛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때를 기다리던 중에 드디어 그 기회가 왔다. 술자리를 파한 어른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일어서더니 마을 뒤편 언덕으로 올라가는 게 아닌가.
옳다구나 하고 술을 잔에 부어 벌컥벌컥 들이키었다.
내 기억에 그 맛이 어떠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다만 술이 취해서 사랑채에 붙은 툇마루에서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 때, 앞산이 빙빙 돌아갔던 기억만은 생생하다. 이러한 앞산 돌기(?) 시도는 그 후 여러 차례 계속되었는데, 그로 인해 술을 배우게 될 줄이야 내 어찌 알았으랴!
이렇게 하여 나는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일찍 술을 배우게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제법 이력이 날 정도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생전 처음으로 학교라는 데를 가게 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어리둥절하였다. 그때만 해도 옛날이라서 그런 예를 행한 것 같은데, 입학식이 끝나자 학부형들을 모두 큰 교실로 모이게 하고서는 학교에서 막걸리를 대접하였다. 나는 조금 전부터 목이 말라서 할아버지께 조르고 있던 터이었는데, 마침 막걸리가 나왔으니 안성맞춤이었다. 익히 배워 놓은 술이라 한 컵을 주욱 들이키니 금방 갈증이 해소되었다.
그 후 할아버지께서는 이 손자가 성큼성큼 자라는 모습을 보시고는 대견스러워하시면서 나의 등을 쓰다듬기도 하고, 다리 굵기를 가늠해 보기도 하시면서, 그때 그 얘기를 꺼내곤 하시었다. ‘학교에 입학시키러 갔을 때 목이 말라 하더니, 막걸리 한 잔 마시고는 그만 너풀너풀 잘도 뛰어놀던, 그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하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우리집을 방문하신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십 리나 떨어져 있는 도가에 가서 술을 받아왔다. 그런데 오면서 목이 마른 듯하여 주전자를 기울여 조금씩 마신 것이 집에 왔을 때는 근 삼분의 일이나 줄어 있었다.
이렇게 배운 술은 하나의 음식으로 여겨져, 집에서 술이 생기면 3부자가 꼭 한 자리에서 순배(巡杯)로 술을 마셨다. 할아버지께 먼저 부어 드리고, 다음에 그 잔을 아버지께서 받으시면 아버지께 부어 드렸다. 아버지께서 잡수신 후 나에게 잔을 주면서 ‘부어 마셔라’고 하면 내가 자작하여 마시었다.
이렇게 적당히 마셨으므로 술에 취하는 일이 없었고, 또 술을 그야말로 하나의 신성한 음식으로 대하였을 뿐, 이외의 다른 그 무엇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동료나 제자들에게, ‘술을 음식으로 대하지, 알콜로 대하지 말라.’는 말을 종종 한다.
또한 술은 어른 밑에서 배워야 한다는 말이 얼마나 소중한 가르침인지도 실감하고 있다. 우리 할아버지는 뛰어난 애주가셨다. 어머니께서 자기 전에 술 한 주전자를 걸러 담아서 할아버지 방에 들여놓으면 할아버지께서는 밤중에 그것을 다 잡수시어 아침이면 빈 주전자가 남아 있곤 하였다. 그렇게 술을 잘 잡수셨지만 여든여섯에 돌아가실 때까지 술취정하시는 걸 본 일이 없다. 술을 잡수시면 항상 기분이 좋았을 뿐 일체의 어그러진 일이 없으셨다. 할머니께선 늘 말씀하시기를 ‘아직까지 너의 할아버지를 위해 술국 한번 끓인 일이 없다’ 고 늘 말씀하곤 하셨다.
이와 같이 할아버지께서 술을 좋아하셨고 또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았기 때문에 할머니와 어머니는 늘 술을 빚느라 수고가 많으셨다. 그래서 우리 집 술은 항상 빛깔이 좋았고 맛도 좋았다.
내가 타향에 나가 유학하다가 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께서는 이 아들을 위해 두 가지 음식을 꼭 장만하여 두곤 하시었는데, 그 하나는 큰 닭을 잡아 고아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술을 담가 놓는 것이었다. 객지에서 고생한 아들의 기력을 보해 주기 위해 이 같은 특별 음식을 준비한 것이었다.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술을 그와 같은 중요한 음식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 후 군 복무를 하던 중 첫 휴가를 오게 되었다. 그때도 어머니는 이 두 가지 음식으로 아들의 기운을 북돋워 주었다. 귀대를 앞둔 전날,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술을 잘 먹는데, 군에서는 돈이 없어 술도 제대로 못 마실 텐데, 누룩을 빻아 줄 터이니 부대에 가서 술을 담가 먹어라.’고 하시면서, 술 담그는 방법을 상세히 가르쳐 주셨다.
나는 누룩을 가져와서 어머니께서 시키신 그대로 술을 담갔다. 부대에서 먹던 밥은 스팀으로 찐 것이라, 술 담그기에는 매우 적절한 고두밥이었다. 밥을 싸느랗게 식혀서 버무린 다음, 찬물을 잘박하게 부어서 부대 인근 마을에서 빌려 온 독에다 술을 담갔다. 다 괸 후에 맛을 보니 너무나 술이 잘 되었다.
군대에서 지급되는 모기장으로 술을 걸렀다. 한 동이를 다 거르니 술이 엄청나게 많아서, 그날 저녁에 전 부대원을 내 근무처로 초대하였다. 안주는 라면 국물 한 가지뿐이었으나, 술맛이 좋다고들 칭찬이 자자하였다. 당시에는 밀가루로 만든 술뿐이었는데, 이 술은 보리쌀이 약간 섞이긴 하였으나, 쌀로 만든 술이었기 때문에 술맛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군부대 내에서 술을 담가 먹은 사람은 대한민국 국군 중에 내가 처음이요 마지막이 아닐까 한다.
어떻든 술을 어른 밑에서 일상생활의 일부로서 배운 탓으로, 술을 먹고 실수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직원이 120명이나 되는 직장의 장으로 있을 때였다. 회식이 벌어졌는데 술이 거나하게 돌아 거의 전부가 곤드레 만드레가 되었는데 잔을 많이 받은 나만 곧게 자리를 지켰다. 요즘 음주 운전이 많아져 사회문제가 되곤 하는데 이는 처음에 술을 잘못 배운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향음주례(鄕飮酒禮)식 주법을 익힌 나는, 내 아들에게도 술 먹을 나이가 되면, 올바르게 술 먹는 법을 가르치며 첫 술잔을 나누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느 날 가방을 들고 오는 아들놈의 입에서 술 냄새가 나는 게 아닌가? 순간 가슴 한구석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오다가 우연히 친구 집에 들렀는데, 모두들 억지로 권하는 김에 못 이겨 한 잔 먹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쩌랴, 이미 먹어 버린 것을.
역시 자식이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로구나 하는 씁쓸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아들은 그 아버지보다는 한참이나 늦게 술을 배웠으니 다행이라고 자위하면서 내 방으로 건너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