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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손교회 중고청년대학부 원문보기 글쓴이: 모황민
[구약연구20]
솔로몬의 잠언
본서는 히브리 지혜문학의 백미로 삶의 거의 모든 부분에 걸쳐 도덕적이고 교훈적이며 신앙적인 격언이 고도의 비유법과 세련된 대귀법 등을 통해 기술되어 있어,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깨달아 이를 실천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개요>
*제목: 잠언
‘속담들’, ‘격언들’이란 의미를 갖는 ‘미쉘레’와 이스라엘 최고의 지혜자 ‘솔로몬’의 이름이 결합된 ‘솔로몬의 잠언’(히, 미숼레 쉘로모)이 원래 제목입니다. 한편, 우리 말 ‘잠언’은 ‘경계가 되는 짧은 말’이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자: 솔로몬 외 몇 명
대부분은 본서에서 밝혔다시피(1:1; 10:1; 25:1), 이스라엘 최고의 지혜자인 솔로몬의 잠언이며(1~9장; 10:1~22; 16:25~29장), 지혜자 아굴(30장)과 왕이자 지혜자인 르무엘의 어머니(31장)의 잠언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르무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위하여’로, 솔로몬 왕 역시 여디디야, 즉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라고 불리었다는 점에서 솔로몬의 다른 이름으로 추측되기도 함).
한편, 솔로몬은 재위 당시 잠언 3,000과 노래 1,005편을 지었는데(왕상4:32) 그중 8백여 편의 잠언이 여기에 수록된 것입니다. 참고로, 25장부터 29장까지는 (본서에 기록되어 있다시피) 유다 왕 히스기야의 서기관들에 의해 후대 편집된 부분입니다.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니라.”(잠25:1)
*기록연대: B.C.950~700년경
대부분 솔로몬의 작품인 만큼 그의 재위기간(B.C.970~931) 중에 기록된 것으로 생각되며, 솔로몬 사후 240여 년 후인 히스기야 왕(B.C.728~687년경) 때에 서기관들에 의해 한데 모아져서 편집된 것으로 보입니다(25:1).
*기록목적: 서두에 기록된 대로(1:1~7), 본서의 기록목적은 어리석은 자에게 슬기로움을,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지혜 있는 자에게 보다 풍부한 학식을, 명철한 자에게 지략을 주기 위함이며, 무엇보다도 결국 모든 이들로 하여금 여호와 경외하는 것이 곧 지식의 근본임을 깨닫고 그 길로 인도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참고로, 본서의 주요 저자인 솔로몬은 시, 비유, 간단한 질문, 짧은 이야기, 격언 등 기억에 뚜렷이 남을 만한 표현법을 통해 삶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지혜들을 전하고자 본서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핵심단어: 지혜(Wisdom)
본서에 41회나 언급되고 있는 ‘지혜’(히, 호크마)는 잠언을 이해하는 열쇠로 훈계, 이해, 명철, 슬기, 근신, 학식, 지식 등의 뜻을 가집니다. 특히 본서는 상대적으로 아무리 우수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만물의 창조자이자 통치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 및 신앙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적인 의미에서 진정하고 완전한 지혜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7; 15: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15:33)
한편, 본서는 강조적인 표현을 위해 지혜를 여인으로 의인화하거나(7:4; 8:1~9 등) 심지어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 한 바 있습니다(8:22~36).
*핵심구절: 1장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핵심장: 제31장
본서의 마지막 잠언인 제31장은 르무엘 왕의 어머니가 그의 아들에게 준 잠언으로 ‘통치자가 가져야 할 자세 및 현숙한 여인이 지녀야 할 지혜’에 대한 교훈을 다룸으로써 내용상 잠언 전체의 부록적인 성격과 더불어 결론적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제: 본서 자체가 일관성 있는 주제를 논리적 순서에 따라 편집했다거나 역사적 사건을 시간순서에 따라 기록한 책이 아니므로 본서의 주제를 찾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다만, 각종 주제 가운데서 보다 강조되고 있는 바를 12가지 정도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혜와 우매함’, ‘하나님께 대한 경배’, ‘선과 악’, ‘생명과 죽음’, ‘언어생활’, ‘가정생활’, ‘성실과 게으름’, ‘이웃’, ‘부와 가난’, ‘겸손과 교만’, ‘성공과 패망’, ‘현숙한 아내’
*내용전개:
1)머리말(1:1~7) -표제(1:1) 및 목적(1:2~6), 주제(1:7)가 각각 나타나고 있습니다.
2)젊은이들을 위한 15가지 교훈(1:8~9:18): 주로 일반적인 원칙이나 결과 위주로 서술됨.
-부모를 공경하라(1:8,9)/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악한 친구를 멀리하라(1:10~19)/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지혜를 찾으라(1:20~2:22)/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혜의 유익(3:1~26)/ ‘지혜는 그 얻는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선행에 힘쓰라(3:27~35) /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지혜에 관한 아비의 훈계(4:1~13)/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악한 자를 멀리하라(4:14~22)/ ‘사악한 자의 길에 들어가지 말며...’
-마음을 지키라(4:23~27)/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간음하지 말라(5:1~14)/ ‘네 길을 그(음녀)에게서 멀리하라 ...가까이 가지 말라’
-아내를 사랑하라(5:15~23)/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보증하지 말라(6:1~5)/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 보증하였으면 ...’
-게으르지 말라(6:6~19)/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간음하지 말라(6:20~7:27)/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지혜를 칭찬하며 감탄함(8:1~9:12)/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미련한 여인(9:13~18)/ ‘미련한 여인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3)여러 주제로 구성된 총 375개의 솔로몬의 잠언(10:1~22:16)
(1)의인과 악인의 대조(10:1~15:33): 여기에서는 지혜와 어리석음,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의인과 악인의 결과적 차이들이 주로 대조적인 문구를 통해 구체적이고 다양한 예증들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10:1) /“의입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어 죽느니라.”(10:21)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는 것 같이 명철한 자는 지혜로 낙을 삼느니라.”(10:23)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공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11:18)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12;15)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쉬우니라.”(14:6)
(2)경건한 삶에 대한 격려(16:1~22:16): 여기서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가되, 미련하게 행하지 말고 파당과 이기주의, 무분별한 사귐을 경계하며 신중하고 인자한 마음으로 진리를 행하며 정직히 행하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뢰함으로써 살아갈 것 등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16:3)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18:1)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21:3)
4)총 36개로 구성된 이름 모를 현자의 잠언(22:17~24:34)
이는 작자 미상인 부분으로 2박자, 3박자, 5박자, 6박자 형식 등 다양한 박자를 구비한 대귀법이 골고루 사용되었으며 솔로몬의 잠언(10:1~22:16)과는 별도로 독립된 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한편, 여기서는 이웃을 압제하지 말고 자기 사업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은 물론, 탐욕을 멀리하고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말며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악을 버리고 지혜롭고 부지런하게 의를 행하라는 권면이 담겨져 있습니다.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22:17) /“이것도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이라...”(24:23)
5)히스기야 왕 당시에 편집된 솔로몬의 잠언(25:1~29:37)
이는 25장 1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에 의해 수집, 편집된 솔로몬의 잠언들입니다.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니라.” 한편, 당시 편집 작업에 동참했을 것으로 보이는 히스기야의 신하들로는 서기관 셉나와 사관 요아 등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들이 왕을 부르매 힐기야의 아들로서 왕궁의 책임자인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그에게 나가니.”(왕하18:18)
또한, 이 부분에는 10:1~22:16의 그것들과 중복되는 듯한 부분을 더러 포함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그 내용을 더욱 상세히 다루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25~27장에서는 주로 상징 대귀법과 동의 대귀법이, 28~29장은 주로 대조 대귀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1)여러 인간관계에 대한 잠언(25:1~26:28)
: 왕과의 관계(25:1~7), 이웃과의 관계(25:8~20), 원수와의 관계(25:21~24), 자신과의 관계(25:25~28), 미련한 자와의 관계(26:1~12), 게으른 자와의 관계(26:13~16), 험담하는 자와의 관계(26:17~28)
(2)여러 처신에 관한 잠언(27:1~29:27)
6)아굴의 잠언(30:1~33): 이는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으로 그는 솔로몬 측근에서 왕으로 보좌하고 지혜와 시를 함께 읊었던 현자들 중의 한 명으로 추측됩니다.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경고)이니 그가 이디엘 곧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30:1)
참고로, 본문의 ‘이디엘’과 ‘우갈’이 누구인지에 관해서는 (현재로선) 정확한 해석이 거의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본 구절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이 다소 훼손된 흔적이 있음). 현재로선 ‘아굴의 아들 또는 제자’라는 견해와 ‘야굴의 잠언 전체 요약’이라는 견해 등이 있을 뿐입니다. 후자의 견해는 ‘이디엘’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갈’이 ‘강한’이라는 뜻이 각각 지니고 있어 (의미상으로 보자면)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강하고 온전하게 된다’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야굴의 잠언 내용은 ‘지혜를 추구하는 아굴’(1~9절), ‘인간의 대표적인 죄’(10~20절), ‘어리석음과 지혜의 비교’(21~28절) 등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7)르무엘 어머니의 잠언(31:1~31): 먼저, 1~9절 부분은 르무엘 왕의 어머니가 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 필해 염두에 두어야 할 기본적인 주의사항을 가르친 내용입니다. “르무엘 왕이 말씀한 바 곧 그의 어머니가 그를 훈계한 잠언(경고)이라.”(31:1) 본문에 등장하는 르무엘 왕의 모친은 생전에 대비로서 깍듯한 예우를 받았던 것 같으며(왕상2:19;14:21), 어머니로서 왕에게 격려와 충고의 말을 아끼지 않은 듯합니다.
한편, 르무엘 왕이 누구냐에 관해서는 그 의견이 분분하나, 아마도 솔로몬 왕의 이명(異名), 즉 다른 이름이라는 견해가 더욱 설득력 있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솔로몬 왕 또한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헌신되었고 ‘여디디아’ 즉,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고 불리었던 점(삼하12:15) 등으로 보아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뜻을 지닌 ‘르무엘’과 비교적으로 잘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여호와께 사랑을 입음)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삼하12:15)
또한 10~31까지는 ‘현숙한 아내’에 대한 교훈으로, 르무엘의 잠언(30:1~9)과 구별되는 한 편의 잠언입니다(70인역에는 르무엘의 잠언과 본 잠언과의 사이에 무려 5장에 달하는 잠언들이 첨가되어 있음). 본 잠언은 시 9, 10, 25, 119편의 경우와 같이 답관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상적인 아내를 그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현숙한 여인의 조건’으로 ‘하나님 경외’와 ‘성실’ 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물론 ‘여호와 경외’라는 원리는 본서 서두에서 강조된 바 있으며, 또한 전도서의 결론이기도 함).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31:29,30)
성경여행
각각 질문을 읽고 그 물음에 간단하게 답하시오.
1. 솔로몬은 젊은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 )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 )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괄호 안에 들어갈 말들을 차례대로 적으시오. (잠 3:5~7)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여호와, 그
같은 차라 해도 누가 그 운전대를 잡고 있느냐에 따라, 같은 말이라 해도 누가 그 고삐를 쥐고 있느냐에 따라, 같은 바이올린이라 해도 누가 그 활을 쥐고 있느냐에 의해서, 그 성능과 기량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나타날 수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승패를 가르는 주요한 변수가 되기도 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우리의 길을 지도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승패가 좌우되며, 누가 우리의 운전대를 잡고 있느냐에 의해 성공 여부가 결정됩니다. 지금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누가 여러분의 길을 지도하고 있습니까? 혹 여러분 자신입니까?
잊지 마십시오. 사람이 제아무리 현명하고 지혜롭다 하더라도 한 시간 후에 자신에게 닥칠 일들조차 알지 못하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말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3,14)
그러면 누구여야 합니까? 누가 우리의 길을 지도해주어야 가장 이상적이겠습니까? 만사를 성취하시며(전11:5), 매일같이 우리의 걸음을 주장하시는(잠16:9) 여호와 하나님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오직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주장하시는 복된 인생이십니까?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전11:5)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20:24)
그런 인생이 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첫째,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해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5절)
성경은 왜 우리를 향해 ‘여호와를 신뢰하되 마음을 다하여 그리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도 ‘끊임없이’ 말입니다. (한마디로)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아담의 범죄 이후(창3장), 본성적으로 인간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롬1:28) 태생적으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데 길들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3:10,11)
그런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말은 무엇과도 같습니까? 그것도 마음을 다해서 말입니다. 이는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라는 말(롬11:24)이자 곧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입니다(마16: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게 접붙임을 받았으니...”(롬11:24)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그러니 쉽겠습니까? 아닙니다. 본성을 거스르는 것만큼이나 힘들고 버거운 일이 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반응 역시 어떤 식으로 나타났겠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신뢰 자체를) 억압적인 구속 내지 치명적인 올무로 판단한 채 (하나님에 대한) 지독한 오해와 편견 속에서 (하나님께 대해) 적대적인 방식으로 일관해왔던 것입니다.
한편,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또한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5절) 여기서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은 곧 무엇을 의미합니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기부인’입니다. ‘자기부인’이 없이는 결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물론 이 말을 오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신뢰하는데 거추장스럽고 방해되는 일련의 사고방식을 부정하라는 말이지 우리의 지혜, 경험 전반을 송두리째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 한분만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자신의 명철과 지혜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둘째,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7절)
또한 매일같이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는 복된 인생이 되려면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 입니까? 여태껏 우리가 겪어온 모든 실패가 곧 하나님을 삶의 모든 영역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구요. 어떻습니까? 여전히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살아가시렵니까?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전과 다른 모습들로 인생의 험한 물살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함으로써 말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여기서 ‘인정하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말로만 ‘인정하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음을 다하여 신뢰하는 것’입니다(5절).
따라서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말씀은 결국 무엇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범사에) 하나님을 신뢰하되 마음을 다하여 그리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5절). 그러기 위해선 어찌해야 합니까?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5절).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7절).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그러할 때에라야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의 지혜와 명철이 아무리 탁월하다 한들 하나님의 것에 견줄 바가 되겠습니까? 사람이 지혜롭다 한들 하나님보다 더욱 지혜로울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순 없습니다. 왜 입니까? 그분은 우리를 지으신 조물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분이 어리석다 해도 사람의 가장 탁월한 지혜보다도 훨씬 더 지혜로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은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5)
또한 (이슬비전도편지에서 여운학 장로님이 언급했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반지름에 불과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식이 원의 반지름이라면 그 반지름만한 원둘레가 우리의 지식이 닿지 않는 무지의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cm의 지식을 가진 사람은 그 지식의 분량만큼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의 지식이 1m 정도라면, 그는 자신의 지식이 1cm 때보다 더욱 더 큰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결국 무엇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까? 자신이야말로 가장 무지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 해야겠습니까? 매순간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되, 우리 자신의 명철과 지혜보다도 훨씬 더 하나님을 의지한 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첩경이자 악에서 떠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7절)
2. 잠언서 기자는 ( )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겠지만 ( )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괄호 안에 공통으로 들어갈 말을 쓰시오. (잠 14:4)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소
*없으면 편해 보이는 것들
아이들이 없으면 집안은 조금 깨끗해질지 모르지만 우리는 결국 그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무수한 것들을 놓쳐버리게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환하게 웃을 수 있고 걱정과 근심을 털어버리기도 하며, 경직되고 퍽퍽해지기 쉬운 일상으로부터 탈출, 순수의 세계와 동심의 세계로 되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번득이는 아이디어와 영감 등을 얻기도 합니다.
자동차가 없으면 기름 값, 주차, 세차 등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비싼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보험을 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차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주일 아침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주말시간도 내 마음대로 보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억지로 읽지 않아도 되고, 찬양시간 지루하게 앉아서 버티지 않아도 되며, 헌금할 돈으로 내가 사고 싶었던 것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깨닫는데서 오는 감격과 기쁨, 기도응답을 통해 느끼는 평안, 찬양 중에 느끼는 하나님과의 친밀감 등 신앙생활로부터 얻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놓쳐버리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이래도 아이들이 없었으면 합니까? 교회에 안 나왔으면 합니까?
*없으면 당장은 편하겠지요.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잠14:4상)
혹시 소로 쟁기질 하는 모습이나 소달구지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금처럼 편리한 농기계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소의 힘을 빌려 농사를 지어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게으른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소가 없었으면 좋겠다’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소는 살아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매일 먹을 것과 물을 주어야 하고, 배설물을 부지런히 치워주어야만 합니다. 그러다보니 이 모든 게 귀찮아졌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이 사람은 마침내 소를 팔아버리게 됩니다. 소만 없어지면 외양간도 늘 깨끗한 상태로 유지될 테고 더 이상 귀찮게 수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정말 소만 없어지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지금 당장은 편해질지 모르지만 소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잃게 되고 말 것입니다.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잠14:4하) 소가 없는 농부의 처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전에는 밭을 가는 것도 무거운 짐을 나르는 것도 소가 다 해결해주었지만, 소가 없어져버린 이상 이 모든 일들은 이제 농부의 몫이 되어버렸습니다.
*실과 득(잃는 것과 얻는 것)
선택하십시오. 깨끗한 외양간입니까? 아니면 소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많은 혜택들 입니까?
공부는 수고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수고의 대가는 훨씬 값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수고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꿈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은 무척이나 곤욕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꿈의 대가는 그 무엇보다도 값진 것입니다. 꿈은 많은 위협 요소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 때문에 꿈꾸기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제 자리 걸음만 하게 될 것입니다.
통일로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결코 아무 것도 얻을 수도 이룰 수도 없을 것입니다. 전도는 참 수고스럽습니다. 낯선 사람들 비위, 눈치도 보아야 합니다. 거절당하는 수치감도 많이 받게 됩니다. 이상한 사람처럼 여김 받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도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도의 힘, 기쁨을 전혀 맛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 참으로 수고스럽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만나는 그 즐거움,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 읽는 것은 참 수고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얻게 될 무수한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 외양간으로 다시 소를 데려옵시다.
많은 사람들은 외양간 치우기 귀찮아서 소들을 다 치워버립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부터 다시 소들을 외양간으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조금 고생스럽더라도 조금 수고롭더라도 외양간으로 소를 다시 데리고 와야 합니다.
노동이 수고롭다고 하면서 일하지 않는 사람은 삶의 중요한 부분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내 곁에 사람이 없으면, 상처 받는 것이나 마음 상하는 일들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통해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날카롭게) 하느니라.”(잠27:17) 친구는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며 신선한 통찰력과 아이디어를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일(직업)이 없으면, 꾸지람을 듣지 않아도 되고, 간섭도 없고 책임감도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우리는 놓치게 됩니다. 구체적인 계획이나 목표를 세워두지 않으면, 그 목표에 맞춰 살아가느라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계획한 것을 이루고자 나의 모든 시간과 정열을 쏟아 붓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목표가 없으면 이룰 수 있는 것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어떤 일에 대한 도전과 시도가 없으면 실패했을 때의 실망감이나 무기력감 등을 겪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실패가 두려워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제 자리 걸음만 한 채 성장이나 진보 등과는 상관없이 지내게 될 것입니다.
3. 잠언서 기자는 이러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지만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쉽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자입니까? (잠 14:6)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쉬우니라.”
-거만한 자
오늘도 지혜를 찾아 인터넷과 서적들을 뒤지지만, 공허하고 허탈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
문제는 지혜나 지식이 아닌 누구에게 있었다는 말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그 거만함이 지혜를 구하여도 쉽게 얻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거만함이 지혜와 지식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본문은 어떤 자가 지식 얻기 쉽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명철한 자입니다. “...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쉬우니라.”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힘써야 하겠습니까? 명철한 자입니다. 명철해지려면 또한 어찌 해야 합니까? 거만함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사실, ‘거만함’이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가장 지혜롭게 여기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잠3:5,7) 이것이야말로 명철함에 이르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 자신이 거만한 사람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다음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잠9:7~9)
본문은 어떤 사람을 책망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까? 거만한 사람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로부터 감사의 말은커녕 도리 어 미움을 사게 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해주고 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징계나 책망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라는 전제 하에, 그 징계나 책망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거만한 사람 쪽에 가까우며, 반대로 (그 징계나 책망을) 달게 받아들이는 사람일수록 지혜로운 사람 쪽에 더욱 가깝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누군가로부터 권면이나 책망의 말을 받았을 때 주로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까? 혹 상대방을 미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혹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됩니까? 만일 우리가 후자의 경우라면, 감사할 일일 것입니다. 왜 입니까? 지혜 있는 자 쪽에 더욱 가깝기 때문입니다.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잠9:8~9)
4. 잠언서 기자는 무엇을 얻는 사람이 진정 자기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또한 무엇을 지키는 자가 복 받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잠 19:8)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
-지혜, 명철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진정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본문을 통해 정말 우리가 우리 자신, 즉 우리 영혼을 사랑하고 있는지 그 여부를 살펴보고, 혹 그렇지 못하고 있다면 본문을 통해 그 방법을 배워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어떤 자가 자기 영혼을 사랑하는 자라고 증거하고 있습니까? 지혜와 명철을 얻고 그것을 지키는 자입니다.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8절) 예상 밖의 대답이라 구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분명 지혜를 얻는 자가 자기 영혼을 사랑하는 자요 명철을 지키는 자가 진정한 복을 얻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잠언 19장 16절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거니와 자기의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 자는 죽으리라.” 무슨 말입니까? 주의 계명을 좇아 자신의 행실을 삼가는 사람은 자기 영혼을 지킬 수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자는 결코 지켜낼 수 없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날마다 모든 일에 자신의 행실을 삼가고 있습니까? 오직 주의 계명을 따라 말입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119:9) 지혜와 명철 역시 무엇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까? 오직 주의 말씀, 즉 계명으로 말미암아서 입니다. “...내 도를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잠8:32,33)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잠19:20)
그런데 이 계명, 즉 말씀은 무엇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까? 거룩하신 자, 즉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날마다 주의 말씀과 계명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아가고 또한 경외하고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진정 우리 영혼을 사랑하고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잠19:8)
5. 잠언서 기자는 가을에 받을 갈지 않는 사람을 향해 이러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잠 20:4)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
-게으른 자
왜 본문은 가을에 밭을 갈지 않는 자를 향해 ‘게으른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우리는 가나안의 지리적 조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연중) 언제 가장 부드러운 상태가 되는 것일까요? 봄입니까? 아닙니다. (적어도 가나안 땅에서는) 오히려 가을입니다. 가나안 땅은 가을에 흙이 가장 부드러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에서 밭 갈기의 적기는 언제라고 할 수 있습니까? 가을입니다. 만일 이 가을에 밭을 갈아 놓지 않으면, 이듬해에 양식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순 없습니다.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기대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잠20:4) 본문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게으른 사람입니까? 가을에 밭을 갈지 않는 사람입니다. 좋은 환경적 조건이 다 갖추어져도 좀처럼 일하려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찌 된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까? 거둘 때에 구걸할지라도 얻게 못하게 됩니다. 즉, 비천한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가을에 묵은 땅을 기경하고 있습니까?
*가을은 수확의 계절, 동시에 다시 시작하는 계절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며.”(렘4:3)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 역시 양파 등을 가을에 파종하여 이듬해 5~6월에 수확합니다. 어떻습니까? 가을을 여전히 ‘수확의 계절’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이 만드신 작물들 중에는 봄에 파종하여 가을에 거두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양파처럼 가을에 심어 이듬해 봄에 거두는 것들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더 나아가 가을은 수확의 계절임과 동시에 또 다시 시작하는 계절임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 시점에서 어찌해야 합니까? 물론 봄부터 열심히 뿌리고 가꾸어 온 것들을 거두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동시에 또 다른 내일을 위해 다시금 밭 갈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간에 지나간 일들은 다 잊어버리고 오직 앞을 향해, 즉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3:16)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3,14)
지금 다 끝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묵혀 두었던 땅들을 다 갈아엎고 가시덤불 역시 다 뽑아내어 버려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며.”(렘4:3)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10:12)
‘묵은 땅’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일구거나 쓰지 아니하고 묵어 있는 땅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아직까지 일구거나 쓰지 아니하고 묵혀 두고 있는 나의 영역은 없습니까? 다 찾아냅시다. 모조리 찾아내어 기경해야 합니다. 쟁기질을 해야 합니다. 다 갈아엎어야 합니다. 언제 말입니까? 지금입니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그리해야 합니다.
올 해도 가을은 어김없이 우리 곁을 찾아왔습니다. 이 가을을 어찌 보내야 합니까? 그저 작은 수확의 기쁨에 취해 있으려 하십니까? 아니면, 이 가을을 ‘또 다른 시작의 기회’로 삼고 부지런히 나아가시겠습니까? 아직도 가을의 풍성함에만 잔뜩 취해 있고자 하십니까? 아니면, 이 가을을 ‘또 다른 시작의 계기로’ 삼고 나의 묵은 땅들을 하나둘씩 다 갈아엎으시겠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우리의 묵은 땅을 기경해야 할 때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아무리 혹독한 추위와 아픔 등을 견뎌낸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심지 않으면, 아무리 기나긴 밤을 수 없이 지새운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기경해야 합니다. 지금 묵은 땅을 기경하고 지금 심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5~6)
6. 잠언 30장은 아굴의 잠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죽기 전에 꼭 이 두 가지만큼은 꼭 이루어달라고 간구했는데 이는 무엇 무엇입니까? (잠 30:7~9)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를 먹이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 첫째, 헛된 것과 거짓말을 멀리하게 하시며 둘째,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마시되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자신에게 공급해달라는 것입니다.
잠언 30장은 아굴의 잠언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려진 바가 전무하다시피 하나 아마도 솔로몬 왕의 측근에서 왕을 보좌하고 함께 지혜와 시를 함께 읊었던 현자들 중 한 명으로 추측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굴은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2,3절)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찌된 영문입니까? (마치 우주탐사를 계속해가면 갈수록 지구와 그 위에 있는 우리 자신이 한 없이 작아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아 가면 갈수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쌓여 가면 갈수록 그만큼 더 자신의 무지가, 자신의 지혜 없음이 적나라하게 다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날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풍성해지고 있습니까? 매순간 하나님을 알아가는 그 깊이가 깊어져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아가되 무엇을 통하여 그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5절) 네 그렇습니다. (마치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싶으면, 당연히 그 사람이 남겨놓은 글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분을 알아가고 배워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갓난아이들이 그 어미의 품을 갈망하듯 순전하고 신령한 젖인 말씀을 사모하고 갈망하고 있습니까?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솔로몬 역시 하나님께 ‘지혜로운 마음’(개역), 즉 ‘듣는 마음’(개역개정)을 구했는데(왕상3:9)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여 깨닫는 데에서부터 참된 지혜가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3:7~9)
이처럼 하나님을 알아가려다 보면 십중팔구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욱 올바르게 그리고 잘 섬길 수 있을까’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누군가에 대해 알아 가면 갈수록 그 사람에 대해 더 잘해줘야지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아굴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 이 두 가지만큼은 꼭 이루어 주소서.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를 먹이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30:7~9)
아굴의 기도는 무엇이었습니까? ‘헛된 것과 거짓말을 멀리하게 해주소서.’와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마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먹이소서.’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기도제목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그 내용은 한두 번 받고 말 것이 아닌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었으며, 둘째, 두 가지 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욱 올바르고 그리고 잘 섬길 수 있을까 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욱 올바르고, 잘 섬길 수 있을까 하는데 삶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까?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시험해보고 있습니까?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 실험 정신에 투철한 사람들이 됩시다. 발견하는 즉시 실천으로 옮기는 그런 자세와 태도로 말입니다.
또한 (아굴의 기도처럼) 한두 번 받고 말 것이 아닌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할 것들을 구하는 태도를 지닙시다. 본문의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는 “나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내게서 은혜를 취해 가지 마소서.”(70인역)라고 번역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 하나님 한 분만을 바르게 섬기기 위해서 매일 기도해야 할 기도의 제목들이 있습니까? 아직 없다면 오늘 아굴의 기도에서 도전 받으시기 바랍니다.
첫째, 헛된 것과 거짓말을 멀리하게 하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잠언30:8상)
여기서 ‘헛된 것’(히, 솨으)은 ‘파괴하다’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 ‘심령이 황폐한 상태’뿐만 아니라 남에게 해만 되는 ‘헛된 말’까지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헛된 것’이란 ‘헛된 말 또는 일’, ‘해가 되는 말/행동’, ‘쓸데 없는 말/일’, ‘무익한 말/일’ 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굴은 왜 이처럼 ‘헛된 것과 거짓말을 멀리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가 살았던 시대가 ‘온갖 헛된 것들과 거짓들이’ 난무했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진실된 것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그런 사회 말입니다. 아굴은 그런 것들에 의해 자신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히2:1)
우리 역시 심령을 더욱 황폐케 하는 원망과 불평의 말, 해가 되는 ‘헛된 말’ 등을 멀리하게 해달라고, 헛되고 거짓된 것들에 현혹되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날마다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가능한 한 그런 것들로부터 멀리 있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둘째,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마옵소서.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를 먹이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8~9)
아굴은 가난하게도 말고 부하게도 말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대신 무엇을 달라고 하고 있습니까? 오직 필요한 양식, 즉 일용할 양식들로만 채워달라고 했습니다.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8절 하)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무 부하다보면 배불러서 하나님을 잊게 될까 두려우며, 반대로 너무 가난해지다보면 도둑질에 미혹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9)
이로 보건대 사람이란 참으로 연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배부르게 되다보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고, 가난하고 헐벗게 되다보면 생계를 핑계로 너무도 쉽게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 문제없는 평탄한 길만 걷다보면, 마치 내 힘으로 된 것 인양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라고 말하게 되고, 너무 고난 속에서만 지내다보면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영영 등지게 되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굴은 (가난하지도 말고 부하지도 말게 하시고) 오직 일용할 양식, 필요한 양식으로 그때그때 채워달라고, 또한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할 줄 알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형통한 날들만, 맑은 날들만 달라고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