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4년 가해 11월17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청주] 믿음의 눈을 떠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묵시 1,1-4.5ㄴ; 2,1-5ㄱ
† 복음 루카 18,35-43
엘리사벳 성녀는 1207년 헝가리에서 공주로 태어났다. 남부럽지 않게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참회와
고행의 생활을 하며 많은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엘리사벳은 남편이
전쟁으로 사망하자 재속프란치스코회에 가입하여 기도 생활과 자선
활동에 전념하였다. 1231년 스물넷의 이른 나이에 선종한 그녀는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재속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쓴다. 그중 에페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인내심이 없는 그들을
질책하며,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기억하고 회개의 길을 걸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이르셨을 때 한 눈먼 거지가 사람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그분께 다가와 자비를 베풀어 주십사고 부르짖는다.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주시자 그는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른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은 엘리사벳 성녀의 기념일입니다. 1207년 헝가리의 공주로 태어난
그녀는 어린 나이에 독일 한 지역의 영주가 될 사람과 혼인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윤택한 시집에서 살며 보여 준 삶의 방식은 참으로
파격적이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의 굶주림과 고통에 무관심한 가운데 호의호식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영주 부인이 아니었습니다. 늘 예수님의 고통에 함께하려고
애쓰는 여인이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당시 귀족들의 부가 가난한 이를
착취하고 전쟁에서 약탈한 결과라는 것을 직시하는 복음적 비판 정신을
가진 명민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검소한 옷차림을 하면서 화려한
식단을 멀리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음식을 제공하고 아픈 이들을
돌보았습니다. 이는 당시의 엄격한 신분제와 귀족 여인의 생활 관습을
생각하면 상상하기조차 힘든 애덕의 실천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당연히 성안의 귀족들에게 많은 미움과 반발을
샀습니다. 그녀를 잘 이해하고 깊이 사랑하던 남편이 불행히도 전쟁에서
전사했을 때, 성안의 귀족들은 그녀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결국 그녀는 성에서 추방당합니다. 그녀는 이제 정말로 ‘가난한 이’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 큰 시련에서 더욱 깊은 신앙으로 가난한 이들과
하나 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재속프란치스코회 회원으로서 끊임없이
기도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하고 가장 비참한 처지의 환자들을
돌보았던 것입니다.
스물넷의 이른 나이에 선종한 그녀의 삶은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면서
애덕 활동의 고귀함을 깨닫게 합니다. 엘리사벳 성녀는 참된 그리스도교
정신인 ‘애덕의 실천’이 자리 잡게 하는 데 크나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 채 애덕의 실천으로 일관한 그녀의 삶은 오늘
우리에게도 큰 가르침을 줍니다. 지금의 안락과 풍요가 사회적 차원에서
누군가의 몫을 부당하게 빼앗은 결과에서 온 것은 아닌지, 우리 사회가
가난하고 약한 이의 아픔과 절규를 애써 외면하며 끼리끼리 희희낙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삶의 모습을 돌아보도록 말없이 권고합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귿은 믿음을 가지고
2014년 가해 11월17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루카 18,35-43
얼마 전에 신학생들과 함께 차를 타고 어디를 가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보통 차를 타면 목적지에 가기 위해 곧바로 내비게이션을 켭니다. 하지만
이 장소는 제가 전에 가본 적이 있었고, 그래서 어느 정도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대략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내비게이션을 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한 신학생이 묻더군요.
“신부님, 그곳 잘 아세요? 내비게이션 켜지 않아도 되요?”
저는 “글쎄?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대충은 알 것 같아. 그러니까
내비게이션 없이도 갈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지요. 그리고 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길을 잘못 들어서 몇 십 분의 시간을 길에서 쓸데없이
소비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내비게이션을 켜기만 했어도, 또한 길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사람들에게 물어만 보았어도 시간을 소비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을 미뤄서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할 수 있는
일도 스스로를 가둬놓는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인해서 실제로 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들 앞에 나서는데 있어서
자신감 없는 모습, 모든 것을 귀찮게 생각하는 게으름,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교만함 등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을 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모범을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찾을
수 있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눈 먼 소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치유능력을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끈질기게 애원했습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아프거나 어떤 장애가 있는 것을 죄의 결과로 생각했던 당시의 관습을
생각했을 때, 사람의 말 한 마디에 외축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즉,
잠자코 있으라는 꾸짖음에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인간적인 체면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혼자 튀는 행동으로
인해 사람의 주목을 받는다는 것이 나이 많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부끄러운
상황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에게 다가오는 어떤 장애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해야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으로부터 자비를 받아야 한다는 것뿐이었지요.
우리는 지금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고 있었을까요? 뒤로 미루고,
할 수 없다고 포기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할 수
있어야 하며, 이 적극적인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으며, 주님께
찬미의 기도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한 번도 실수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한 번도 새로운 것을 시도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아인슈타인).
어느 여판사의 감동적인 이야기(인터넷에서 퍼온 글)
서울 서초동 소년 법정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서울 도심에서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난 혐의로 구속된 소녀는 방청석에 홀어머니를
지켜보는 가운데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용한 법정 안에 중년의
여성 부장판사가 들어와 무거운 보호 처분을 예상하고 어깨가 잔뜩
움츠리고 있던 소녀를 향하여 나지막이 다정한 목소리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날따라 힘차게 외쳐 보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게 생겼다.’
라고 예상치 못한 재판장의 요구에 잠시 머뭇거리던 소녀는 나지막하게
“나는 이 세상에서...”라며 입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 큰 소리로
나를 따라 하라고 하면서 “나는 이 세상이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큰 목소리로 따라하던 소녀는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라고 외칠 때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소녀는 작년 가을부터 14건의 절도, 폭행 등 범죄를 저질러 소년 법정에
섰던 전력이 있었으므로 이번에도 동일한 수법으로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판사는 소녀를 법정에서 일어나 외치기로 판결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판사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이 소녀가 작년 초까지만 해도 어려운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였으며 장래
간호사를 꿈꾸던 발랄한 학생이었는데 작년 초 귀가 길에서 남학생 여러
명에게 끌려가 집단폭행을 당하면서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당시 후유증으로 병원의 치료를 받았고 그 충격으로 홀어머니는
신체 일부가 마비되기까지 하였으며 소녀는 학교를 겉돌았고 심지어 비행
청소년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판사는 다시 법정에서 지켜보던 참관인들 앞에서 말을 이었습니다.
“이 소녀는 가해자로 재판에 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 누가 가해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아이의 잘못의 책임이
있다면 여기에 앉아있는 여러분과 우리 자신입니다. 이 소녀가 다시 이
세상에서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잃어버린 자존심을
우리가 다시 찾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눈시울이 붉어진 판사는 눈물이 범벅이 된 소녀를 법대 앞으로
불러세워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중요할까요. 그건 바로 너야. 이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그리고는 두 손을 쭉 뻗어 소녀의 손을 잡아주면서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꼭 안아주고 싶지만 너와 나 사이에는 법대가 가로막혀
있어 이 정도밖에 할 수 없어 미안하구나.”
이 사건은 금년 4월에 서울 서초동 법원청사 소년 법정에서 16세 소녀에게
서울 가정법원 김귀옥 부장판사가 판결을 내렸던 사건으로 이례적인 불
처분 결정으로 참여관 및 실무관 그리고 방청인들까지 눈물을 흘리게 했던
사건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청주] 믿음의 눈을 떠야 한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연중 33주간 월요일(루카18,35-43)
2014년 가해 11월17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루카 18,35-43
믿음의 눈을 떠야
이탈리아의 ‘시모네 아레나’라는 사람은 시력이 6.0 이라고 합니다.
800미터 거리에서 20센티로 쓴 글씨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는 아주
멀리 있는 것도 잘 봅니다. 그렇다고 그가 늘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기도 하지만 볼 것, 안 볼 것 다 보면 오히려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잘 보지만 혹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면 그는
불행합니다. 육신의 눈이 중요하지만 내면의 세계를 보는 마음의 눈은 더
소중하고 내세의 세계를 보는 영혼의 눈은 더 더욱 고귀합니다.
어떤 눈 먼 이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38)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가던 사람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이웃사촌’이라
했는데 아무래도 눈 먼 소경은 이웃을 잘못 만났습니다. 절박한 부르짖음을
외면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눈을 가졌다 할지라도 마음의 눈은 뜨지
못했습니다. 정작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외쳐야 할
사람은 눈먼 소경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웃의 마음을
읽고 그의 부족함을 채워야 할진대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고 있었으니
그들이 소경입니다.
눈먼 이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간절한 심정으로
그렇게 절박하게 매달렸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마침내 눈먼 이는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따랐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받은 은총에 머물지 않고 감사의 삶을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사실 세상에는 여러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가 있고,
소외받은 사람들도 있고, 장애인도 있습니다. 남모르는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이 나보다 죄가 커서, 또는 나보다 천해서 그런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내가 짊어져야할 짐을 대신
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겪어야할 고통을 대신해서 짊어지고 살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편견 없이 바라봐야 하고
더불어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만물의 영장이기도
하지만 연약함을 지닌 피조물입니다. 서로의 불완전함을 보충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눈을 떠야 합니다. 영적인 눈, 믿음의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이웃의 요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기 전에 그의 처지와 절박한 마음을 공감하게 되고
오히려 주님을 불러 세우고 주님께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적인 시력을 키워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구원의 길 -주님을 찾음, 만남, 따름-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1월17일 월요일(뉴튼수도원 7일째),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1207-1231) 기념일,
요한묵1,1-4.5ㄴ;2,1-5ㄱ 루카18,35-43
구원의 길 -주님을 찾음, 만남, 따름-
길잃은 사람들로 가득한 잉여사회 같습니다.
나이들어 갈수록 길잃은 이들은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거리마다 가득한 사람들 대부분 길 잃은 사람들 같습니다. 아예 길에 대한
의식 없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며 살아가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 1길잃은 사람들, 2길을 찾는 사람들, 3길을 찾은 사람들 -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디에 해당됩니까?
'길이 없다' '길이 막혔다' '길을 잃었다', 이런 절망적 상황이라면 참
답답할 것입니다.
누구나 끝없이 난 길을 보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활짝 열리는 느낌일
것입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생각도 들 것입니다.
길(道)과 사람(人)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 서두의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눈 먼'이가 상징하는 바,
신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불쌍한 현대인들 같습니다.
아, 눈은 떴다 해도 눈 먼 걸인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밖으로는 부요하고
행복해 보여도 내면은 잘 들여다 보면 모두가 가난한 눈먼 걸인들입니다.
도대체 기쁨도 자유도 없는, 불행해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길이 상징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파멸로 이르는 죽음의 길, 거짓의 길이 아닌,
구원에 이르는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은 오직 하나 주님뿐입니다.
오늘은 '구원의 길'에 대한 묵상 나눔입니다.
첫째, 주님을 찾으십시오.
길이신 주님을 찾으십시오. 우리 삶은 평생 주님을 찾는 여정입니다.
길을 찾지 않으면 누구나의 가능성이 눈 먼 걸인입니다.
오늘 복음의 길가에 앉아 있는 눈먼 걸인에겐 길이신 주님을 찾는 열정이
있습니다. 눈은 멀었지만 주님을 찾는 열정에 '마음의 귀'는 활짝 열려
있었던 눈 먼 걸인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간절히 갈망하여 찾을 때 주님은 나타나십니다.
갈망에 늘 귀가 열렸던 눈 먼 걸인의 반응이 참으로 신속합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보다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는 없습니다.
전존재의 기도요 간절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잠자코 있으라 꾸짖는 이들의
말림에 아랑곳 없이 재차 소리치는 눈먼 걸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로 우리가 미사 시작하면서, 또 성체를 받아 모시기 전 바치는
자비송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런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송을 바치는지요.
여기에 바탕한 동방수도승들이 숨쉬듯이 끊임없이 바쳤던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둘째, 주님을 만나십시오.
길이신 주님을 간절히 찾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만일 주님을 찾는 열정이
없었더라면 주님을 찾지도 않았고, 하여 주님은 그냥 지나가셨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활짝 열리는 마음의 눈이요 어뒀던 '마음의 길눈'도
밝아집니다.
자비하신 주님이십니다.
불쌍한 눈먼 걸인의 간절한 기도에 즉각 응답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 오라고 분부하셨다.‘
라는 대목이 얼마나 은혜롭고 고마운지요.
사막같은 막막한 세상에서 길이신 주님을 찾아 만난 눈먼 걸인입니다.
예수님과의 대화가 선승(禪僧)들의 선문답 같기도 하고
옛 사막 수도승을 찾았던 구도자와 주고 받은 문답을 연상케 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의 본질적인, 단답을 요구하는 질문입니다.
눈먼 걸인의 대답 역시 전광석화, 지체함이 없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간절하고 절실한 믿음이, 소망이 응축되어 있는 요청입니다.
역시 구도자인 우리의 소망 역시 이것 하나뿐입니다.
제대로 보지 못해 자초하는 온갖 불행들입니다.
주님의 즉각적인 구원의 응답입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말도 글도 기도도 간절하고 절실할수록 짧고 순수한 법입니다.
셋째, 주님을 따르십시오.
주님을 만남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라 길을 나서는 내적여정에 올라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내적여정에 오르지 않을 때 기다리는 것은 나태와 권태의
'일상의 늪'입니다. 주님을 찾아 내적여정의 길에 오를 때는 맑게 흐르는
강물에 맑은 향기이지만 주님을 따라 나서지 않을 때는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에 악취의 내적현실입니다.
주님의 권능의 말씀에 다시 보게 된 눈뜬 걸인은 주님을 따라 나섭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주님을 만남으로 운명이 바뀐 눈 먼 걸인입니다. 마치 개선장군이나 된 듯
찬양의 기쁨 가득한 모습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눈뜬 걸인입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삶보다 행복한 삶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주님을 찾고, 만나고, 따르는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입니다.
주님은 요한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회개한 우리 모두에게 처음 지녔던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고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하느님을 찬양하며
당신을 따라 살게 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8,12).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서울]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2014년 가해 11월17일 월요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루카 18,35-43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을 수 있다.
소년이여 꿈을 가져라!’ 학생 때 많이 듣던 말입니다. 인류 역사 이래로 늘
고난과 고통은 있었습니다. 자연재해, 병원균, 전쟁, 폭력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남북분단, 세대 간의 갈등,
이념의 대립, 취업 문제, 고령화 사회, 자살’ 등과 같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는 사회는 쉽게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류가 문명, 문화, 역사, 예술을 발전시킨 것은 그와 같은
도전을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한줄기 빛을 보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유보다는 존재의 의미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 보다는
질서와 법칙을 찾았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1981년도에 대학입학 학력고사를 보았습니다. 지금은 50이 넘은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느낀 것이
있습니다. ‘행복과 성공은 성적순이 아니었습니다.’ 몇 번을 대학입시에
실패를 했던 친구는 조경 전문가가 되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의대에 가기 위해서 연세대학교를 포기한 친구는 자동차 딜러가 되어서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저의 동창들은 이과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현대,
삼성과 같은 회사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질풍노도와 같은 시대를 온
몸으로 살았습니다. 꿈이 있던 친구들, 꿈을 이루기 위해서 발로 뛰었던
친구들은 어떤 자리에 있어도 기쁘게 사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꿈이 없던
친구들, 몸으로 살지 않았던 친구들은 넘어지면 일어서질 못하는 것을
봅니다. 좋은 직장에 다니던 친구가 어느 날 서울역 지하도에서 노숙자로
지내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대학입학 수학능력
시험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분명하게 말해 주고 싶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닙니다. 인생은 대학 진학으로 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꿈을 꾸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입니다. 인생은 단
하루를 살아도 흑자입니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입니다. 근육
무력증으로 혼자서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분이 살아가는 이야기,
세상의 명예보다는 나눔과 희생의 삶을 선택한 분의 이야기, 장애아를
출산한 분의 이야기들입니다. 글을 쓴 모든 분들은 많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아픔을 딛고서 희망을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분들의 삶을 보면서 저는 무척이나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성녀 엘리사벳은 공주로 태어나서 3자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았지만 남편이 전쟁터에서 죽자,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그들의 벗이 되어 살았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커다란 아픔을 이겨내고,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이 먼 소경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소경은 눈이 멀었지만, 마음의 눈도 멀었습니다. 아무도 소경과 친구가
되어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이 불렀을 때,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바라보았을 때, 소경은 이미 치유를 받았습니다.
소경은 영광을 보았고, 즉시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한 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누군가 나를 보고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라고 말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입니다.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사랑을 품은 나의 예루살렘 여정/
기경호(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
2014년 가해 11월17일 월요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기념
루카 18,35-43(14.11.17)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사랑을 품은 나의 예루살렘 여정
오늘 복음의 바로 앞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다(18,31-34). 수난을 목전에 둔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시선을 향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길가에서 구걸을 하던 눈먼 이가 그분께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18,38).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18,39).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어,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는지 물어본 다음
‘다시 보아라’ 하시며 고쳐주셨다. 그리스-로마 양식의 화려한 건물들이
즐비했던 예리코의 풍경과 길가에 주저앉아 자비를 청하는 소경의 처지가
극단적 대비를 보여준다. 예수께서 소경을 고쳐주신 것은 단지 병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이 극단적 대비를 이루는 삶의 실존 상황에서
그분의 선택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일상의 삶에서
나의 선택은? 더 낮은 곳으로....
예수님은 오직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시려고
갈릴래아에서의 행적과 말씀 선포 뿐 아니라 수난의 여정도 죽음도 부활도
받아들이셨다. 그분의 눈길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향한 구원의 여정을 가시면서도 길가에 버려진
이들을 보고 계셨고, 군중의 환성에 잘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은
이들의 구원의 외침을 ‘멈추어’ ‘다가가’ 들어주셨다. 그분은 이 모든 이들을
관대하게 받아들이시는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셨다. 오늘 기념하는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인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은 안락하게 살 수
있는 공주의 신분이었다. 그럼에도 성녀는 “자기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자기
것이 아니고 모두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영적지도신부 콘라트의 편지)고
하면서, 가난하고 고통 받고 굶주린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우리네 삶이 영적으로 영글어가려면 세상의 어떤 기준도 뿌리치고
예수님의 이런 처신과 말씀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그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의 지상순례가 우리 모두를 하늘나라로 이끄셨듯이, 우리도 일상의
모든 움직임이 하느님을 품은 천상순례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사실
우리 인생이 곧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사랑하라. 그리고 원하는 대로 하라!”
(Dilige et quod vis face!)고 하였다. 나의 말과 행위, 눈빛, 보이지 않는
배려, 봉사, 고통 중에 인내함, 오해와 험담 앞에서의 견딤, 시련 중의
기다림, 실패 체험 등 인간사 모든 순간에도, 사랑을 품고, 보고,
받아들이고, 견디고 기다리면 ‘사랑을 낳는다’는 말이다. 나에게 주어지는
24시간 동안 사랑이신 하느님 앞에서 그분의 사랑을 품고 살아간다면
매순간이 기적이 되고 치유를 불러일으키지 않겠는가!
나 자신과 내가 만나고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을 사랑으로 치유하고
행복하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멈추어야’ 한다. 자신을 하느님 앞에 두기
위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내 안에 모셔 들이기 위하여 멈추고, 애정 어린
눈길로 다른 이들의 아픔과 한숨소리를 보고 듣기 위하여 멈추도록 하자.
멈추는 것은 창조의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중요한 사랑의 행위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세상과 인간을 지으신 다음 ‘쉬셨다.’ 우리 삶
전체는 하느님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고, 하느님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며,
그분의 말씀을 삶으로 들려주는 ‘사랑의 메아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나의 생각과 나의 원의에 따른 발걸음을 ‘멈추어야’ 한다.
예수님의 수난의 여정은 ‘사랑의 멈춤’의 고리를 이어가는 영원의
호흡이었다.
우리도 너무나도 바쁜 일상을 멈추어 이 호흡 안으로 들어가자!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해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시자 군중들은 열광했다.
그들은 바로 눈앞에 오신 하느님이시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보기보다는
자신들의 육신적 자유와 외적인 성공에 대한 헛된 기대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인간은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께 길가에 주저앉아 자비를 청하는 가난한 소경과 같은 처지에 있다.
우리는 아무리 해도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쟁이’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기본을 망각할 때 교만이 용솟음쳐 영성생활은 물론 삶 전체가
전복되어버릴 것이 뻔하다. 오늘도 발걸음을 멈추고, 겸허히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면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로 다가가 ‘더 내어주고 더
나누는’ 일상의 예루살렘 순례를 시작하도록 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2014년 가해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11월17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루카 18,35-43
<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복음: 루카 18,35-43
<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
교구청에 들어온 지 거의 1년이 되어갑니다. 저의 방 거실은 넓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8개의 전구 중 1개가
빠져있었습니다. 그래도 방이 마음에 드니 그 빈 곳이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면서 그 곳에 전구를 끼워 넣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에 관리하시는 직원 분에게 전구를 끼워
넣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분은 바로 전구를 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오직 그 곳만 불을 켰다 껐다 하는 스위치와 상관없이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연유에서였는지 그 하나는 계속
켜 져 있게 설계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전구를 다시
뺐습니다. 전기세만 나오고 큰 유용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 저는 저의 신학교 입학동기가 수도회에 들어가 이제야 서품을 받고
하는 첫 미사를 하는 성당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총회장님의 축사에
“첫 마음을 잊지 마시길 빕니다”라는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저도 처음 사제가 될 때는 차도 안 가지고 옷도 클러지 두 벌만 가지고
핸드폰도 사용하지 않는 가난한 사제가 될 것을 결심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런 결심은 온데간데없고 너무나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건 아마도 처음엔 사제가 된 것만으로도 행복하여 다른 부족함이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감사와 행복이 시들어져 그 부족한 부분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처음엔 방이 맘에 들어 전구 하나가
들어있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살다보니 적응이 되어 이것저것 더
완벽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성령께서는 요한을 시켜 에페소 교회에 이런 편지를 씁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에페소 교회가 잘 하고는 있지만, 첫 마음을 잊은 것에 대해 충고를 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충고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첫
마음으로 성당을 다니고, 첫 마음으로 결혼생활을 하고, 첫 마음으로
사제생활을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너무 커져서
처음의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첫 마음은
그때의 감사와 행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한 유명했던 목사님이 췌장암에 걸려 죽어가면서 마지막
5분 설교를 한 것을 유투브에서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췌장암은
발견되면 이미 말기가 대부분이라 갑자기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그
목사님도 암이 발견되자마자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단계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옷장 문을 열어보니 옷이 옷장에 가득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속옷도 두 벌 지니고 다니지 말라고 가르치셨는데 죽기 직전에
보니 그런 말씀을 무시하고 살아온 자신이 무척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옷들을 당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마지막 설교에는
티셔츠만 걸치고 나왔던 것입니다. 힘이 없어서 많은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신자들이 더 이상 자신을 찾아오지 말라는 것과 그 옷들을 나누어주니
너무 행복하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처음엔 다 행복했습니다. 더 가져야 하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지금 나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나누어 줄 수 있는
상태가 참 행복인 것입니다. 우리도 그 첫 마음, 그 첫 행복을 잊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요셉 신부님의 새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2014~2015년 나해 주일 대축일 복음 묵상집입니다. ^-^
'여인아, 왜 우느냐?'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인격을 내걸고라도 애기들처럼
2014년 가해 11월17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루카 18,35-43
인격을 내걸고라도 애기들처럼
눈치도 안 보고 크게 소리 지르며 애걸복걸하면 봐 줄 때가 많습니다.
말 못하는 애기들이 울면 그건 불편을 알리는 의사표시라 합니다.
그렇다고 욕심이나 고집스런 막무가내로 생떼를 부리는 건 다르다 봅니다.
그런데도 흔히 하늘에 대고 막무가내로 생떼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지요.
기도하는 방법에서 많이 벗어난 태도지요. 인격적 대화를 무시하니까요.
인격을 내걸고라도 애기들처럼 애걸복걸 한다면 하늘 사랑 받을 수 있다네요.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루카 18,42~43)”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단상]
2014년 가해 11월17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제1독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여라.>
▥ 요한 묵시록의 시작입니다. 1,1-4.5ㄴ; 2,1-5ㄱ
복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35-43
연중 제34주간 월요일(2014년 11월 17일)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요즘 기도서를 보는 것이 점점 힘들어집니다. 안경을 쓰기도 하고 벗기도
하지만 글자가 흐릿하기만 합니다. 예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연세 드신 분들이 시편을 읽는데 실수하는 것을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노안이지요. 기도서를 열심히 읽고자 애쓰는 간절히 바라는 노인 형제들을
볼 때마다 존경심이 우러납니다. 그 모습 참 좋아보입니다. 인간 눈에도
이렇게 좋아보이는데 하느님 눈에는 얼마나 더 좋아보이겠습니까. 육신의
눈은 점점 어두워져가지만 마음의 눈을 점점 밝아집니다.
오늘 복음의 눈먼 이처럼 볼 수 없음이 얼마나 고통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보기를 열망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볼 수 없음을 고통스러워 하며 정말
보기를 간절히 애원하고 있는지요. 우리의 삶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육신의 눈으로 보고서는 살 수 없습니다. 내면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
참 모습, 진리, 의미와 가치를 볼 수 있어야지만 인생 길을 굳건히 걸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예리고 눈먼 이의
외침을 우리의 외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인생길을 동행하시는
주님을 뵐 수 있고 또 따라갈 수 있습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