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내용 |
함북 길주(吉州) 사람이다.나승렬은 최영진(崔英鎭)·최인선(崔仁先)·문치룡(文治龍) 등과 함께 1920년 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담하였다. 그가 가담하여 활동한 이 단체는 1919년 11월 북간도의 연길(延吉)·왕청(汪淸)·화룡(和龍)의 대표들이 모여 조직하였다. 본부는 연길현 춘양향(春陽鄕)에 두었다. 주요 간부는 회장 구춘선(具春先), 부회장 서상용(徐相庸), 참사 최노륜(崔老侖)·이봉우(李鳳雨)·한상우(韓相雨)·정병호(鄭秉浩)·김규찬(金奎燦)·김병호(金秉浩)·진석오(陳錫五), 서무부장 김승국(金昇國), 재무부장 유찬희(柳讚熙), 총무·재정검사위원 김윤덕(金允德)·김치도(金致道)·박용극(朴容極) 등을 들 수 있다.이 대한국민회는 북간도 4개현에 거주하고 있는 40만 한국인들을 기반으로 하여 조직된 단체로서 그 지회만도 80여 개소에 이르렀다. 이러한 대한국민회는 백초구(百草溝)·국자가(局子街)·용정촌(龍井村)·두도구(頭道溝) 등의 상업 지역과 주요 도시 등을 거점으로 삼았다. 아울러 대다수 구성원이 기독교 신자였으므로 기독교도들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 등지에 기본 조직을 갖고 있었다.이 대한국민회에서 나승렬은 경호부장 장성순(張成順)의 부하로 경호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20년 음력 6월 25일 밤에 맹용선(孟龍先)과 함께 대한국민회에서 파견된 임도춘(林道春)의 명령에 따라 북간도 덕신사(德新社) 우동(憂洞)에 거주하는 김순홍(金順弘)이 일본관헌의 밀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를 포살하기 위하여 그 마을로 갔다. 나승렬은 임도춘·맹용선 등이 김운세(金雲世)의 집에서 김순홍을 포박하여 동소(同所)의 동쪽 약 5정 거리 되는 밭으로 납치하여 권총으로 사살할 때, 그 부근을 경계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나승렬은 그 후 1921년 9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살인 및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註·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0집 1140∼1142면 ·동아일보(1921. 7. 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