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8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오 5,43~48)
So be perfect,
just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마케도니아 교회의 신자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모금한 사실을 코린토 교회의 신자들에게 소개한다. 마케도니아 교회의 신자들은 가난 속에서도 기쁘게 구제 활동에 참여하였고 이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은총이 되었다고 전하며, 코린토 교회의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 이를 실천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는 구약의 가르침을 더욱 적극적으로 실천할 것을 당부하시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랑’이요, 그것을 가장 결정적으로 드러낸 가르침이 바로 ‘원수 사랑’입니다. 그렇지만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하게 느껴집니다. 자신에게 큰 상처와 피해를 준 사람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고통 속에 있는데, 어떻게 그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의 상처도 육신의 상처와 비슷합니다.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온전히 치유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육신이 큰 병에 걸려서 완전히 낫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마음의 상처도 완전히 낫지 못한 채 생각만 해도 계속 쓰라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은 원수에게 받은 상처가 낫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결심하고 하느님께 바쳐야 할 종교적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셨지만 손에는 못자국이, 허리에는 창에 찔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그에 대한 미움이 없어야 가능하다고들 합니다. 또한 원수에게 받은 상처가 완전히 나아야 비로소 그를 사랑할 수 있다고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랑을 감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감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있고, 의지를 가지고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엄연히 다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감정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의 의지적인 결단을 내리라는 그분의 명령입니다.
완전함은 내어 맡김
-현우석 신부-
예수님이 직접 오늘 복음 말씀을 하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했을 거예요. 그 자리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을 겁니다. 왜냐구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충격적인데, 거기다 하느님처럼 완전해지라고까지 말씀하셨으니까요. 저도 예수님께 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게 가능해요? 이게 최선입니까?”
그래서 만약에 예수님이 원수를 미워하라고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참 속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충분히 미워할 만한 짓을 한 사람을 대놓고 싫어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거 같고요. 마음속으로만 하던 욕을 바가지로 해도 괜찮을 거고, 하느님께 큰 잘못을 저지른 인간에게 저주를 내려달라고 기도해도 괜찮겠죠.
그렇게 되면 여기저기에서 ‘욕설’과 ‘증오’가 넘실넘실 횡행하는 그런 사회가 될 거 같아요. 원수를 미워해도 된다고 하셨으니 그리스도교 신자들까지도 얼마나 거리낌 없이, 양심의 가책 없이 말하고 행동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건 아니다.’ 싶습니다.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무리한 요구임이 분명하지만요. 그걸 아시는 예수님은 우리 힘으로는 안 되며 하느님만이 가능하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되라는 그분의 말씀에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내어 맡기라는 예수님의 요청이 숨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세상에 그 누구도 고통과 시련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특히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게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왜 그렇지 못한가를 말하면서 불공평한 세상이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세상에 일정하게 정해진 삶의 표준이나 기준이 있을까요? 즉, 행복과 불행이라는 구분을 정확하게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남과 나를 비교하면서 ‘그래서 내가 불행한 것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왜 나만 불행하고 이렇게 못 살까? 왜 나만 가진 돈도 그리고 재능도 없을까? 왜 나만 부모 복이 없고 자식 복이 없을까? 왜 나만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의 기준은 남에게 두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기준은 나에게서 시작되며, 스스로 행복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불행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도 가장 행복한 사람임을 자처하면서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세상의 기준을 쫓으려고 하기 보다는, 그 행복을 자기 자신 안에서 찾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해주시는 길은 세상의 기준을 통해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그리고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기준으로는 있을 수 없으며, 또 몇몇은 당연히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시해주시는 길은 나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반드시 올바른 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면서 판단하고 비판하는 길이 아닌, 무조건적인 사랑의 길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가장 올바른 길이기도 합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할 때의 내 마음을, 다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품고 있을 때 과연 편안하고 행복하셨습니까?
우리들 모두가 완전한 사랑 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서 결정적인 말씀을 하시지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에 맞게 살지 못한다고 우리들을 곧바로 벌하십니까? 아니지요. 하느님께서는 완전한 사랑을 가지고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면서 우리 편이 되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가지고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완전한 사랑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그 완전한 사람이 될 때 완전한 행복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 공지사항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제가 오늘부터 16일까지 덕적도로 신학생 하계MT를 다녀옵니다. 그래서 16일까지 새벽 묵상 글을 올릴 수 없다는 점,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하계MT 잘 다녀올 수 있도록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그럼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양승국신부-
<완전한 사람=겸손한 사람>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붙들고 한동안 묵상을 해봤습니다. 완벽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일까? 대단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일까? 특별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일까? 천사 같은 존재가 되라는 말씀일까?
우리의 불완전한 처지를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 능력 밖의 목표, 도달 불가능한 목표를 기대하시는 것을 아닐 텐데, 하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고민 끝에 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사람, 자신의 내면 안에 하느님의 품성을 지닌 사람, 하느님의 크신 자비, 그분이 지니신 연민의 정을 지닌 사람, 측은지심을 지닌 사람이 되어라, 하는 말씀이 아닐까요?
그 사람은 결국 그릇이 큰 사람, 세상만사 모든 일을 잘 포용하는 사람,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은총도 모든 것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깨닫는 사람, 인생의 굴곡, 삶의 성패 여부에 연연하지 않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덕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의 덕입니다. 그런데 겸손이란 또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크심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그분 앞에 나란 존재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로구나, 하는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아무 것도 아닌 나를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불러주셨구나, 투박한 질그릇 같은 나에게 고귀한 가치와 품성을 부여해주셨구나, 그분으로 인해 나는 의미있는 존재로구나, 그분을 떠나서 나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로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 겸손이 아닐까요?
그분 사랑 없이 나는 단 한순간도 바로 설수 없는 흔들리는 존재이구나, 그분의 현존으로 인해 오늘 내가 사는구나, 그분의 자비로 인해 오늘 내가 빛을 발하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겸손한 자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겸손의 덕을 지닌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이 뒤따르는데, 그것은 아무리 짓눌려도 다시 일어설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거운 십자가가 따라 다닌다 하더라도 기쁘게 십자가를 지고 갈 용기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직면하기 어려운 사건, 대하기 이웃이라 할지라도 미소 지으며 맞이할 여유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의 덕을 지닌 사람에게는 기적까지 일어납니다. 원수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기 위하여
-안승태 신부-
사랑의 완성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원수 사랑’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주신 예수님은 실제로 당신의 삶을 통하여 특별히 십자가 죽음 안에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웃과 원수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참으로 가까운 사이였던 사람들이 어떠한 사건과 계기로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원수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사람이기에 악한 의도로 누군가의 원수가 되기 위하여 악을 꾸미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원수도 아니고 사람이 고의로 악을 꾸미지도 않는다면 이 세상에 원수 관계를 만드는 것은 악의 세력이요 죄의 소행입니다. 죄악을 미워하되 사람은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악인도 선인도 의로운 이도 불의한 이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음은 우리 인간의 나약함을 아시는 아버지로서의 완전한 사랑의 표현방식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우리에게 현재 원수로 다가오는 이들을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 이웃으로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어떠한 형제를 원수로 여기고 있다면 우리가 같은 아버지로 고백하고 기도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슬프게 해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좁은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
- 이자희수녀-
◆“언젠가 예수께서는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요한 14, 9)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초상화는 하느님을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이 누구인지를 느끼게 해준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상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린 그리스도상은 하느님의 얼굴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런 얼굴이었다. 하느님의 얼굴에 인간의 침과 욕설이 묻어 있다는 것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 그런데 그것이 현실이었다. 하느님은 그 침과 욕설을 깨끗한 수건으로 닦지 않으신다. 그 비참한 얼굴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제민, 「우리가 예수를 찾는 이유는 ?」 에서)
성 빈첸시오는 신이 인간이 되어 오신 그 위대한 겸손을 닮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치 앞도 못 보는 피조물인 우리가 신이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우리를 위해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을 향한 신의 한없는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 가난한 이들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줄 때, 조건없는 사랑을 실천할 때, 나를 박해한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줄 때,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해 줄 때, 기회가 닿는 대로 선행을 베풀 때, 남을 위해 아낌없이 희생할 때, 말보다는 실천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줄 때, 우리는 분명히 그리고 확실히 좁은 문이신 그분께로 나아갈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이고 그 십자가는 좁은 문입니다. 우리의 희생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신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
완전의 의미
-김찬선시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말씀을 잘 보면 하늘의 아버지는 완전하시지만 우리 인간은 아직 완전한 존재가 못 되었으니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종종 “못된 놈”이라고 욕하는데 그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완전하다면 完全無缺의 의미입니까? 결함(缺陷)이 전혀 없고, 결핍(缺乏)이 전혀 없는 존재입니까? 그것보다는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앞의 얘기를 볼 때 사랑에 있어서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불완전하냐 하면 상대에 따라 사랑이 달라집니다. 사랑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지 않고 상대가 좋은 사람이면 사랑하고 나쁜 사람이면 도저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고백성사를 주다보면 미움의 죄를 많이 고백하는데, 그 미워한 죄를 고백하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나쁜지, 얼마나 나에게 잘못했는지를 한참 나열합니다. 남의 죄를 대신 한참 고백한 뒤에, 그러니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식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기 위해서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좋은 사람만 내 주위에 득실거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에 있어서 완전하려면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 같이 빛을 주시는 하느님처럼 사랑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어야 하고 원수도 원수가 아니어야 합니다. 전에는 원수였었는데 우리의 사랑이 원수를 정복할 정도로 자라나 이제는 더 이상 원수가 아니게 될 때 우리는 완전해진 것입니다. Love conquers enemy!
화학을 전공하는 한 학생이 중간고사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글쎄 시험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는데 뜻밖에도 자기가 전혀 보지 않았던 부분에서 시험문제가 나온 것입니다. 그 시험문제는 ‘석탄으로 알코올을 얻는 방법을 쓰라’였습니다.
보기는 봤는데 도대체 기억이 나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짜내려고 해도 해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을 풀어내는 화학공식이나 부호가 도무지 떠오르지를 않아서 결국 이 학생은 아주 간단하게 답을 이렇게 썼습니다.
“석탄을 팔아서 알코올을 산다.”
학생은 교수님께 호되게 야단을 맞고 낙제까지 당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교수님께서 원하시는 답은 분명히 이것이 아닐 테니까요. 그런데 담당교수님께서는 이 학생을 불러서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요.
“너는 석탄으로 알코올을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찾아냈구나. 물론 내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지만, 너의 새로운 생각에 높은 점수를 주도록 하마. 그러나 다음부터는 열심히 공부해서 내가 원하는 답을 써야 된다. 알았지?”
교수님의 너그러움과 사랑에 이 학생은 홀딱 반하고 말았지요. 그래서 그 뒤 교수님 과목은 더욱 더 열심히 들었고, 다음 시험에서는 교수님께서 원하는 답을 써서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교수님과 학생의 모습이 우리와 주님과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당신의 뜻에 맞게 사랑을 실천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사랑을 실천하기 보다는 내 뜻에 맞게만 행동하면서 죄로 기울어지곤 합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혼을 내실만도 한데 주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 다시 우리들을 받아주시고 토닥거려 주십니다.
이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서 학생이 교수님의 너그러움과 사랑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 사랑은 이 세상의 관점에서는 잘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사랑. 쉽지 않지요. 그러나 원수같이 말을 잘 듣지 않는 나를 그리고 예수님의 뜻에 정반대로 행동하는 나를 용서해주시고 또 크신 사랑으로써 다가오시는 주님을 기억한다면 우리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내가 베푸는 그 사랑은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앞서 학생이 교수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받았지요. 그런데 그 좋은 성적은 누구 것일까요? 교수님 성적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그 학생의 성적이고, 학생만이 혜택을 받은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베푸는 사랑도 하느님 나라에 쌓는 우리의 보물이 되기 때문에 결국은 나에게만 이로운 것입니다.
주님 말씀을 철저히 따라야 합니다.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승자는 자기보다 우월한 사람을 보면 존경심을 갖고 배울 점을 찾지만 패자는 질투심을 갖고 그의 갑옷에 구멍 난 곳이 없는지 찾아본다.(J. 하비스)
그리스도인, 완전함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
-이준석 신부-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나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을 친절하게 대할 수 있습니까?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갖은 교묘한 수법으로 내 자존심을 건드리고 내 인격을 무시하고 나를 곤란한 상황으로 몰고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몰랐더라면 그들에게 복수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의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그만하면 대단한 것이다” “마음 좋은 사람이다”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이상 거기에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적의를 품고 해를 가하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실망하거나 두려워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에 이를 수 있습니다.
사랑은 …
- 임순연 수녀-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하기 힘든 대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조건이라고 제시하십니다. 사랑은 내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순간순간 그 대상을 달리하며 다가옵니다. 대상의 변화에 따라 사랑의 표현도 달라지고 내가 전한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잉태하고 살아 움직입니다. 사랑은 생명력을 품고 있기에 나의 작은 사랑의 실천은 나를 살게 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퍼져갑니다. 순간순간 사랑을 전할 기회와 대상이 우리에게 오고, 우리의 선택에 따라 그 순간은 우리에게 구원(은총)의 통로가 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맞는 사랑을 해야겠습니다. 내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고 나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의 나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시기에 그 사랑에 작게나마 보답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완벽주의, 잘못인가?
-전삼용신부-
가만히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완벽해야한다는 것과 완벽해지려하는 것은 비인간적이 된다는 시각 사이에서 갈등을 해 온 것 같습니다. 또 사회에서는 정말 완벽주의란 말이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일반대학 다닐 때 한 여자후배와 함께 걸을 때 후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빠는 빈틈이 없어.”
그래서 자신이 들어올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때 그 말을 듣고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에게 완벽주의가 있어서 사람들이 다가오기 쉽지 않나?’
그래서 일부러라도 빈틈을 많이 보이려 노력했습니다. 본래 말도 잘 안 하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고 농담도 많이 하며 전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걸 원하는 건가?’
신학교에 들어와서는 이런 말도 들었습니다.
“형은 혼자는 잘 살지만 나중에 하느님께 가서 하느님이, ‘왜 너 혼자 왔니? 쓰러져가는 네 형제들은 왜 함께 데려오지 않았니?’하면 어떻게 할 거야? 쓰러질 땐 함께 쓰러지며 같이 가야 되는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먼저 완전해지면 주위 사람들도 함께 좋은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 형제들을 신경 쓰지 못했던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왜들 쓰러지고 그래?’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또 함께 쓰러져보기로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함께 울고 아파하고 싶었습니다.
사제가 되어서도 그런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신부님은 답답하다느니, 인간미가 없다느니,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안 산다느니, 사는 것이 군인 같다느니, 자신은 완벽한 사람은 싫다느니 하는 등의 참 많은 충고를 들었습니다. 저는 전혀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주위 사람들은 여전히 그런 시선으로 저를 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말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도 여러 번 그런 충고대로 되어보려고 했었지만 결국 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저에게도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함께 넘어지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혹 옆에 흔들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기대어 버틸 수 있도록 흔들림 없이 곧바로 서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주위 사람을 위해서도 더 좋습니다. 자존심이 있어서 나에게 기대려 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이젠 완전해지려고 하는 것이 절대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의 이 생각에 힘을 주는 가장 큰 말씀이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과연 불완전한 것이 인간적일까요?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기 때문에 사람을 완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 스스로 불완전해 진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 인간답다는 의미는 완전한 인간을 두고 말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처럼 완전할 수 없어.”라고 하며 자신의 불완전을 정당화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체성사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고 하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불완전한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처럼 완전하게 된다는 말은 ‘완전한 사랑’이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완전하다는 의미를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라.’라고 풀이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똑같이 미워한다면 하느님나라에서 칭찬받을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완벽주의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그건 옳지 않은 것이지만 하느님의 모습대로 더 완전하게 사랑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주눅들 필요 없습니다.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봅니다. 우리도 완전한 사랑을 바라보며 그 사랑을 닮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태양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가 닮도록 원하시는 완전한 사랑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더"를 사는 삶
-김찬선신부-
예전 미국에 있을 때 방학을 이용하여 선교모금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름이 되면 많은 본당 신부들이 휴가를 떠나기 때문에 이때 주일 미사를 대신 드려주고 선교지를 돕기 위한 모금을 선교사들이나 저 같은 학생들이 하는 것입니다. 저도 그 해 미국 전역을 돌며 선교모금을 하였는데 유타 주 Salt Lake City를 갔습니다. 처음 가는 곳을 주소만 가지고 찾아가다 보니 네거리에서 그만 접촉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상대방에서 경찰을 불렀습니다. 제가 저의 과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랬더니 경찰이 상대방에게 하는 말이 “우리 신자가”하면서 잘 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유타 주는 몰몬 교도가 95%를 차지하는 주로서 교리가 엄격하게 지켜지는 매우 종교적인 지역입니다. 그래서 범죄도 적고 마약이나 술은 물론 자극적 음료도 팔지 않습니다. 경찰이 우리 신자가 잘 해야 되지 않냐고 말하고 그 말에 그 사람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 것을 보고 유타 주의 종교적인 분위기가 수긍이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 “더”를 요구합니다. 고린토 2서의 말씀은 마케도니아 교회를 예로 들면서 자선을 하는 데서 다른 데보다 “더” 뛰어나야 함을 얘기합니다. 주님께서는 세리나 이방인보다 “더”를 살아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세상 재물을 더 많이 차지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사랑의 은총을 “더” 많이 받았으므로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남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곧 믿음과 말과 지식과 온갖 열성에서 또 우리의 사랑을 받는 일에서도 뛰어나므로 이 은혜로운 일에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어느 은행에 수수한 옷차림을 한 중년 남자가 들어섰습니다. 그는 창구의 여직원에게 다가가 새로운 사업을 벌이려고 하는데 은행 측과 의논할 일이 있다며 담당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별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않는 수수한 옷차림의 중년 남자에게 여직원은 친절하지 못했지요. 더군다나 그 담당자가 자리를 비운 터라 단순히 기다리라고만 이야기했습니다.
한 시간이 흘러도 담당자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중년 남자는 여직원에게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은행 문을 나서려는 순간, 무엇인가가 기억났는지 다시 창구 여직원에게 돌아와서 말합니다.
“여기 주차권이 있는데 확인 도장을 좀 찍어주시겠습니까?”
이에 여직원은 매몰차게 거절합니다.
“선생님은 이곳에 와서 돈을 입금하거나 인출하신 일이 없으시잖아요. 안됐지만 주차 도장을 찍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곤 남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할 뿐이었습니다. 무안을 당한 남자는 굳은 표정으로 은행을 떠났지요.
다음 날 아침, 은행에 근사한 양복을 갖춰 입은 신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바로 어제 무안을 당했던 남자였지요. 그는 은행에 예금해 놓았던 수천만 달러를 모조리 인출해 다른 은행에 맡겼다고 합니다. 이 남자는 바로 IBM 회장이었던 존 에이커스라네요.
창구 여직원의 불친절로 그 은행은 초우량 고객을 놓치고 말았지요. 물론 여직원의 입장에서는 원칙대로 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원칙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오히려 원칙에 어긋난다 할지라도 상대방을 위한 배려와 사랑이 더 큰 것을 이룰 수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실천하기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렇게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지요. 어떻게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 세상의 원칙을 따르고 싶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
이 율법의 말씀이 바로 이 세상의 원칙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원칙을 뛰어넘는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이 바로 완전하신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라는 것이지요.
세상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원칙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원칙보다 주님의 원칙에 우선순위를 둡시다.
†♡†♡†♡†♡†♡†♡†♡†♡†♡†♡†♡†♡†♡†♡†♡†♡†♡†♡†♡†♡†♡†♡†
원수와 기도
-김선오 신부-
상식적으로는 원수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삶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보니 “왜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없지?” 하는 불평 또한 자주 하게 되는데 그런 고민에 빠져 있으면 세상은 무척 어둡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의 대화’입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왜 이런 시련을 저에게 주십니까? 혹은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여쭈어볼 때 그분께서는 언제나 답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첫 번째 방법 또한 ‘기도’입니다. ‘신앙의 힘’을 빌어서 우리는 원수를 내가 먼저 친구로 대하고 박해하는 사람에게 내가 먼저 호의적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랑과 원수는 상호적입니다. 사랑을 먼저 주면 사랑으로 돌아오고, 원수를 갚으면 또 다시 원수를 갚으러 돌아오는 법입니다. 누군가 먼저 원수의 고리를 끊는 것이 중요합니다.
†♡†♡†♡†♡†♡†♡†♡†♡†♡†♡†♡†♡†♡†♡†♡†♡†♡†♡†♡†♡†♡†♡†
신비로운 나라의 역설적 사랑
- 박혜원-
그리스 메테오라에서 산상 미사를 드린 적이 있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나의 삿된 욕망과 집착이 사라지길 바라며 하느님의 위엄과 영광만을 생각했다. 막 미사를 시작하려는데 스테파노 수도원에서 수녀님 두 분이 오셨다. 그리고 가이드에게 뭔가 이야기를 했는데, 뜻밖에도 ‘이곳에서 미사를 드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신성한 산, 메테오라에서는 그리스 정교식 미사만 허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 정교식이 아닌, 다른 형식의 마지막 산상 미사를 드린 셈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로서는 400여 년간 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데 수도사들의 역할이 컸던 호국 그리스 정교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왠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다수 인간 사회는 자기 집단에 대한 사랑은 고취시키면서 외부인한테는 폐쇄적이다. 적개심마저 드러낸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까운 사람이나 먼 사람이나 구별을 없애고 사랑하라고 하신다. 인간적 차원에서는 미워하는 사람에게조차 똑같은 해가 뜨고 비가 내린다는 사실이 용납될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일이고 하느님의 계획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이란 아무리 종교적으로 자신을 승화시키려 노력해도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는 유한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때론 내가 미워하는 사람조차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이율배반적 감정에 빠지게 하지만, 하늘나라는 우리를 초월하는, 참으로 신비롭고 아름다운 나라일 것이다. 또한 그 믿음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
사랑 단상(II)
-김찬선신부-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 그렇게 쩨쩨하게 굴거니?' ‘제가 무슨 쩨쩨한 짓을?’하고 여쭈면 ‘너는 그렇게 꼭 너에게 잘 해준 사람에게만 잘 해 줄거니? 그것은 셈이 밝은 세리들도 하고, 아니 세리들이나 하는 짓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거 다 그런 것 아닌가요?’하고 다시 여쭈면 ‘다 그런다고 내 제자가 될 너도 그럴래? 내가 아버지 닮아 완전한 것처럼 너도 아버지 닮아 완전해야지. 당장 완전하지는 못하더라도 도전은 해야지.’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완전한 것입니까?’하고 다시 여쭈면 ‘선하거나 악하거나 똑 같이 비와 햇빛을 내리시는 주님을 닮아 원수까지 사랑해야지. 원수까지 사랑하려는 도전을 해야지 나의 제자지.’하고 말씀하십니다.
불완전할 때 우리는 우리는 조건에 의해 사랑합니다. 훌륭하면 더 사랑하고 잘 해주면 더 사랑하고 예쁘면 더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러다 거지같은 작자를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내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남긴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완전한 사랑은 조건을 초월합니다. 그가 어떠하건 그가 나에게 어떠했건 무조건 사랑하는 것이지요. 자기 사랑의 원리와 자기 사랑의 원의에 따라 사랑하는 것이지요. 사랑은 본래 그런 것입니다. 조건에 따라 사랑하면 그것은 셈이 밝은 세리나 하는 것입니다.
†♡†♡†♡†♡†♡†♡†♡†♡†♡†♡†♡†♡†♡†♡†♡†♡†♡†♡†♡†♡†♡†♡†
자신의 자아를 능가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자세 -윤용선 신부-
우리는 오늘 ‘참된 행복의 선언’으로 시작한 마태오 복음 5장의 마지막 부분을 듣게 됩니다. 산상설교의 내용으로 꾸며진 5장의 말씀은 오늘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 교훈이 극도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말씀을 들으며 우리는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악인과 의롭지 못한 이들에게는 해를 비추지 마시고 비도 내리지 마셔야 공평한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이미 우리들을 이용해 덕 볼 것 다 본 사람들 아닙니까?’ 이렇게 불평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치밀어 오르는 울화와 분노로 내 마음조차 가누지 못하는데 그들을 사랑하라고 하시다니...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멈추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사랑의 실천을 계속 명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도 아니고, 내가 아는 사람만도 아니고,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처럼, 갇히지 않는, 막히지 않는 사랑을, 그러한 완전한 사랑을 나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우리 주변에서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성격이 고상하고 정직한 사람은 원수에게도 인간적인 이해심을 가지면서 부드럽게 관용을 베풀고 신사답게 불화를 씻을 줄도 아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은 도량이 매우 큰 자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되기도 실상 대단히 힘이 들텐데, 오늘의 복음말씀은 더욱 철저하고 무제한적인 마음의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상의 것, 즉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참으로 사랑하는 마음과 자세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 외의 것은 ‘이방인들도’ 행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분이 요구하시는 사랑은 감상적인 감동 같은 사랑이 아니라 진지한 박애정신에서 비롯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지극한 사랑을 먼저 자신의 지상 삶과 죽음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받는 극심한 반대를 받으셨고 갖은 수단과 온갖 잔인한 파괴 방법을 다 이용하는 적의와 증오에 찬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원수들을 용서해 주시기 위한 기도를 하셨을 뿐 아니라 구원의 행위를 통해 원수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악이 사랑에 의해 선으로 승화된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증오의 힘을 위대한 사랑의 힘으로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스승께서는 우리에게 모범을 먼저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사랑은 자신의 ‘자아’를 능가하는 사랑입니다. 인간의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하느님 안에서 볼 때만 얻을 수 있는 바로 그 사랑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옳고 그름이 일방적인 편견을 떠나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투쟁의 대상이 되던 중대한 사물들이 이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의 정신은 나 인간의 정신과는 격차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나의 정신이 하느님의 정신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신 안에서 우리가 자라고, 옹색함을 벗어나 광활함으로 나아가며, 비루함에서 위대함으로, 이기심에서 사랑으로 나아갈 때, 바로 나의 원수를 내가 사랑하는 일 또한 실현될 것입니다..............◆
†♡†♡†♡†♡†♡†♡†♡†♡†♡†♡†♡†♡†♡†♡†♡†♡†♡†♡†♡†♡†♡†♡†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김웅태 신부-
우리는 성질이 까다롭고 마음이 편하지 못한 이는 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찾고, 부르는 하느님의 마음은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누구나 대할 수 있습니다.오늘 복음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예수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사랑" 하면 : 상대가 누구냐?를 생각하게 되는데, 1) 부모 자녀간의 사랑을 생각할 수도 있겠고, 2) 남녀간의 사랑도 3) 혈연 관계를 떠나 서로가 친한 사이에 온후하고 부드러운 애정이 깃든 사랑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4) 그러나 오늘 복음이 가르키는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가페적 사랑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가페적 사랑이란? : 자신의 희생이 깃든,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비심이 깃든, 착한 마음의 사랑이라고 간단히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활하다 보면 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고 마음이 끌리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정에서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내게 상처를 준 원수를 사랑하자면, 정의 문제를 넘어서 의지에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히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인 사랑은 하느님 말씀 때문에 착한 마음을 가지고자 결의, 결단을 해야 하는 것이기에 자기 희생이 동반됩니다. 이러한 사랑은 자연적인 감정을 가지고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원수를, 미워하는 사람을 대하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러한 사랑을 통해서만이 사람인 우리가 하느님을 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심으로써, 모든 이를 당신의 자녀로 대하시며,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우리 중에 누구라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우리가 닮아야 하는 것에 우리 믿음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 : 26의 말씀대로 : ..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사람인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같은 아가페적 사랑을 가지고 원수까지도 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지적인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 함으로서만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를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용서하시며 나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 앞에서 어떤 사람을 계속 미워하면서 기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나를 마음 아프게 한 사람에 대한 미움을 확실하게 없애는 방법은 미운 그 사람을 위해서 진정한 기도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멘.
†♡†♡†♡†♡†♡†♡†♡†♡†♡†♡†♡†♡†♡†♡†♡†♡†♡†♡†♡†♡†♡†♡†
-정황래신부-
아이들이 넓은 성당 마당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데, 가끔은 티격태격 싸우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게 됩니다. 아이들에게 물어봅니다. ‘야들아, 너거 와 싸우노?’ 그러면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다들 씩씩대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가만있는데 자가 먼저 그랬다 아잉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제에 이어 오늘도 계속해서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모든 범죄들은 자연스러운 창조 질서와 관계들을 깨뜨리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분명히 죄로 인해서 하느님의 창조 질서는 깨어지고,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모든 관계들은 불완전하게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주간 화요일 대부분의 분들이 ‘대한민국’이라고 하나된 목소리로 응원을 하며 함께 즐기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분명히 많은 분들이 기분 좋게 모여서 술자리도 더불어 가지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두가 기분 좋게 건배를 하다가 그만 유리컵이 부딪쳐서 깨져 버렸다고 합시다. 이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분명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깨진 유리를 빨리 치우고 그 기분을 계속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깨진 유리를 치울 생각은 않고, ‘니가 잘못해서 깼니, 원래 깨져 있었니, 주인아줌마가 컵을 잘못 갖다 줬니,’하며 계속해서 따지기만 한다면, 분명 누군가가 더 화가 나서 유리컵을 하나 더 깨뜨리게 될 것이고, 그것을 누가 지나가다가 밟기라도 하면 다치게 될 것이고, 이러한 악순환이 그 기분을 완전히 망쳐버리기 될 것입니다.
어제 이 시간을 통해서 ‘용서’라는 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얼굴을 헤아리다’, 또는 ‘얼굴을 밝게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누가 먼저 용서를 하지 않으면, 그 깨진 유리로 인해 일그러진 그 얼굴을 펴기 위해 먼저 노력하지 않는다면 한 번의 죄로 인해서 그 죄의 악순환이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분 좋게 함께 하기 위해서 모인 그 시간의 의미가 이 깨진 유리로 인해 순식간에 싹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처음부터 누구든지 깨진 유리를 먼저 치우고 다른 컵을 가져와서 함께하는 시간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면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불완전한 우리들에게 ‘용서’를 통해 ‘완전하게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용서’만이 죄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용서’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보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평화 방송 청취자 여러분, 깨진 컵, 우리가 먼저 치웠으면 좋겠습니다. 함께하는 이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예수님의 사랑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이 활짝 펴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우리는 불완전하기에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번 해 봅시다. 완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의 거룩한 몸으로 우리를 완전함으로 이끌어 주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도 우리 모두가 함께 마음 모아 받아 모신 예수님의 거룩한 몸은 우리 모두를 하느님의 완전함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저희 성당 옆에는 가톨릭대학교 종교미술학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학교가 내년 6월에 송도신도시로 이전을 한다고 해서, 이 학교 건물을 간석4동 성당에서 매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매입을 위해서 모든 신자들이 신립 및 봉헌 그리고 물건 판매 등으로 노력하고 있지요. 아무튼 열심한 본당 신자들 덕분에 그렇게 많이 걱정하지 않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 액수가 크기 때문에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군요.
이제 날씨가 더워져서 지난주부터는 구역분과에서 미사 후 냉커피를 판다고 홍보를 잘 좀 해달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저는 미사 후 공지사항 시간에 이렇게 말했지요.
“여러분, 제가 커피 무지 많이 좋아하는 것 아시죠? 그런데 구역분과에서 우리 성당 부지 마련을 위해서 냉커피를 1,000원씩 판다고 합니다. 따라서 저 역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 여러분이 저 커피 사주시는 데로 다 마실 테니 많이만 사주십시오.”
말실수했습니다. 정말로 많은 교우들이 커피를 사가지고 저한테 오는데요. 처음에 몇 잔은 마시겠는데, 5잔이 넘어가니까(냉커피니 양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속도 쓰리고 배도 부르고 해서 도저히 입 안으로 들어가지를 않더군요. 결국 교우 몰래 신학생들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건네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커피입니다. 그래서 하루에 커피를 10잔 이상을 마시는데요. 아무리 좋아한다고 한들 한꺼번에 5잔 이상을 마시는 것은 쉽지 않더군요. 즉,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 한들 과하면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해도 몸에 전혀 이상이 없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입니다.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는, 그래서 완전하신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사랑의 실천. 이것은 아무리 과한들 전혀 이상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주저할 때가 많지요.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욕심은 과할 정도로 가지려고 하면서, 반면에 아무리 과해도 상관없다고 하는 사랑에 대해서는 적당함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남들만큼’만을 주장하면서, ‘나는 그래도 많이 실천하는 것’이라면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곤 하지요. 이렇게 안일하고 이기적인 우리들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말씀을 안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랑은 아무리 실천을 해도 과하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한 완전한 사랑만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빠다킹신부
원수 사랑
-박영봉 신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원수’(로마 5,10)였던 때에도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처럼 우리의 원수들까지도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복음의 법은 율법의 계명들을 완성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너그러우신 하느님처럼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덕에 앞섭니다. 모든 덕의 실행은 사랑에서 활력을 얻고 사랑으로 고취됩니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콜로 3,14)이고, 모든 덕의 바탕이며, 덕들을 연결하고 질서를 지어줍니다. 애덕은 그리스도인들이 닦아야 할 덕의 근원이며 귀결입니다.? 애덕은 우리의 인간적 사랑의 능력을 확고하게 하고 정화합니다. 애덕은 인간적 사랑의 능력을 하느님 사랑의 초자연적 완전함으로 들어 올립니다.
원수 사랑이란?
-곽용승 신부-
1992년 세간을 놀라게 했던 여의도 차량질주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자신을 냉대한 사회에 복수하고 싶었다.”고 말했던 김용제씨는 그해 8월 여의도 광장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던 어린아이들을 향해 훔친 차량으로 살인질주사건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22세였던 그는 시력이 나빠 어렵게 취직을 했지만 한 달도 안 돼 번번이 쫓겨나곤 했습니다. 형제와 친구들한테 따돌림을 당하자 사회에 복수한 다음 자살할 마음으로 살인질주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사건의 선고공판이 열린 법정에서 재판부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재판은 십 분 만에 끝났습니다. 그때 방청석에는 재판 과정을 지켜본 서윤범 로사리아씨가 있었습니다. 로사리아씨는 이 사건으로 생명을 잃은 윤신재 군의 할머니입니다. 할머니는 담당 검사를 찾아가 피고인 김용제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수갑과 포승으로 양손이 묶인 피고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진땀과 눈물을 쏟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죄송해요.’를 반복했습니다. 신재의 할머니는 손수건을 꺼내 땀과 눈물로 뒤범벅이 된 그의 얼굴을 닦아주고 두 손을 꼭 잡고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할머니는 손자를 숨지게 한 살인범이지만 ‘용서한다.’며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는 할머니의 용서를 통해 신앙을 갖게 되고 요셉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며느리가 자식을 잃은 고통으로 병을 얻었고 결국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 정정하던 할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족이 연이어 세상을 뜨자 할머니는 요셉을 용서할 수 없었고 하느님이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손자 하나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부족해 연이어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 요셉이라고 생각하자 원망과 미움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답니다. 결국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으면서 2년 만에 다시 그 형제를 찾아가 용서를 해주었답니다. 더 나아가 할머니는 그 형제를 양자로 삼았습니다. 많은 가족을 잃고 얻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할머니는 노력했지만 결국 그 형제는 1997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할머니는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었고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그 아들을 위해 기도하겠노라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로사리아 할머니의 삶이, 진정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 세상에서 구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독서> : 순수한 마음과 사랑으로 희사한 마케도니아 교우들 -경규봉 신부- 바울로가 마케도니아 교회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으로 기쁨에 넘쳤고,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하여 많은 희사를 했다. 그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어려움 속에서도 다른 이들을 위하여 희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어려움 속에서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희사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이다. 그들은 동정심이나 인간적인 생각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희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희사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것도 필요한 경우에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마케도니아 교우들의 신앙을 보고 사도들은 디도를 고린토 교우들에게 파견했다. 마케도니아 교회들이 기쁜 마음으로 희사함으로써 주님께 봉헌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것처럼 고린토 교우들도 기쁜 마음으로 희사함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받도록 파견한 것이다.
고린토 교우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믿음을 갖게 되었고(1고린 12,9; 13,2.13), 언변이나 지식이 풍부했으며(1고린 1,5), 사도들을 지극히 사랑했다(7,7). 그러나 그들에게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은 형제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이었다.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서 비롯된다. 그
러므로 바울로가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희사하도록 요청한 것은 그들에게 짐을 지워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총을 더 풍성하게 받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바울로는 교우들에게 유익한 일이라면 명령할 수 있는 사도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지만(10,8; 13,10), 결코 명령하지 않고 호소하였다. 이는 그들이 자발적인 사랑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며, 자발적으로 희사한 헌금만이 하느님 앞에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셨지만(필립 2,6), 비천한 인간이 되시어 희생적인 삶을 사시며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 부요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인간의 가난한 모습을 취하신 것이며, 그럼으로써 우리를 부요하게 만드셨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은총을 주신 것은 은총을 받은 사람도 그분을 본받도록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은 고린토 교우들은 마땅히 부요함을 포기하고,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희사에 동참해야만 한다.
마케도니아 교우들은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전 재산을 헌금궤에 봉헌한 것처럼(루가 21,2)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자원하여 많은 희사를 했다. 이는 참으로 놀랍도록 헌신적인 사랑의 행위이다. 희사와 자선은 이처럼 순수한 마음과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보시기 때문에 자발적이고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희사해야 한다. 마음 없이 봉헌하는 희사는 위선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희사를 즐겨 받지 않으신다.
또한 가난하다고 하여 희사와 봉헌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누구보다 더 잘 알 수 있다. 때문에 가난할수록 형제애로 굳게 뭉쳐 서로 도와야 한다. 다른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동참하며, 그들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 그것이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신앙이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순수해져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마음이 되도록 기도하자. 가난하고 고통당할수록 더욱 더 마음속에 사랑이 가득하기를 기도하자. 그럼으로써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이들과 형제애를 나누고, 그들을 위해 희사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자. 순수한 마음과 사랑으로 봉헌함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는 신앙인이 되자............◆
-김귀웅 신부-
독일 나치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라벤스부룩이라는 수용소의 벽에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답니다.
“오 주님, 선한 의지의 사람들만 기억하지 마시고 악한 의지의 사람들도 기억하소서.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가했던 고통의 일체를 잊지는 마옵소서. 대신 이러한 고통 때문에 우리가 맺은 열매들, 우리의 교제, 서로에 대한 충성, 겸손, 용기, 관대함을 기억하소서. 이러한 고난으로부터 성장한 마음의 위대함을 기억하소서. 핍박자들이 주님 앞에 심판 받게 될 때, 우리가 맺은 이러한 모든 열매로 그들을 용서하소서.”
중노동에 배고픔을 참아내야 했고, 그런 가운데서도 바로 옆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죽음의 공포에서도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던 그 사람은 우리와 다른 특별한 사람이었을까요? 이름도 남기지 않은 그 사람이 박해자들에 대해 “우리가 맺은 모든 열매로 그들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할 때 그는 이미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마음의 평화를 누렸을 것입니다.
-이상화 신부-
전에 신학생 때 공부를 하는데 이런 의문이 든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 공부를 잘하고, 완전히 이해한 사람일까’ 그래서 제가 존경하는 분께 물어봤지요. ‘어떤 사람이 그런 사람이죠?’ 전 그 물음을 던지면서 속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아마 다방면으로 책을 읽고 이해한 사람일 거야’ 뭐 이런 생각을 했는데 그분이 그러더군요. ‘진짜 공부를 잘하고 진짜 자신이 공부한 것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자신이 지금 무엇은 알고 있고, 무엇은 확실히 모르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야’ 처음에 그 대답을 듣고 좀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렇지만 조금 생각해 보니 그 답이 정답이었습니다. 정말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또 무엇은 확실히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뭘 모르는 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질문을 하고 배우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 막연하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완전한 사람이 돼야지, 원수도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그렇지만 그건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한때고 시간이 지나면 난 또 그 원수를 미워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 입니다. 상처받은 나만 생각하고 ‘사랑해야지, 사랑해야지’ 그런다고 사랑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정말 알아야 하는 것은 사랑해야할 그 원수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상황에서 나를 미워하는지,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나를 괴롭히는지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걸 전혀 모르고 있다면 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 완전히 원수에 대해서 알아보고 내가 원수에 대해서 과연 무엇은 알고 무엇은 모르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는 것이 완전한 사람이 되는 방법입니다. 주님 뜻대로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다시 한번 노력해 봅시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양승국신부-
주일 점심을 먹고 아이들과 등산을 갔습니다. 날씨도 더운데, 등산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등산이냐는 아이들을 겨우겨우 꼬셔서 부지런히 올라갔습니다.
부지런히 능선까지 올랐습니다. 바위에 걸터앉아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산들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준비해간 시원한 음료수를 돌리니 아이들도 마음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애들아, 올라오길 잘했지?”라는 제 물음에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다음 주에도 또 와요!”라고 외쳤습니다.
같이 간 아이들 중에 산을 유난히 잘 타는 아이가 있길래, “아빠하고 등산 많이 다녔구나?” 그랬더니, 솔직한 아이는 전말을 털어놓더군요.
학교 다닐 때 좀 놀았는데, 그래서 학교에서 유명했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사고 칠 때마다 특별한 벌을 주셨답니다. 그런데 그 벌은 다름 아닌 주말에 담임선생님과 함께 등산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일치기로도 다녀오고, 1박2일로도 다녀오고, 선생님과 꽤 많은 산을 다녔다고 실토했습니다.
사고뭉치 아이에게 벌로 회초리를 들거나, 생활기록부에 체크하거나, 청소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등산을 데리고 다니면서 자연을 접하게 하신 선생님, 아이의 마음을 잡아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시는 선생님, 참으로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아들을 내치기보다는 사랑으로 감싸 안으시는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이 손에 잡힐 듯 했습니다.
언젠가 존경하는 주교님께서 집전하시는 미사에 함께 했었는데, 강론 중에 주교님께서는 이런 자신의 체험담을 나누어주셨습니다.
당신이 교장으로 사목하고 계실 때, 한 유명한 ‘땡땡이 전문가’ ‘사고뭉치’ 아이가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답니다. 그 아이의 담임선생님은 날이면 날마다 괴로웠습니다. 그 아이로 인해 뚝뚝 떨어지는 학급 출석률, 시험만 봤다 하면 그 아이로 인해 늘 꼴찌였으니, 또 그 아이로 인해 다른 아이들이 받을 악영향이 만만치 않으니 담임선생님이 받은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담임선생님은 당시 교장이셨던 주교님께 아이를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거나 퇴학시켰으면 하는 건의를 조심스럽게 내비쳤습니다.
차마 길 잃고 방황하는 어린 양을 외면할 수 없으셨던 주교님께서는 그 아이를 위해서 무던히 애를 쓰셨답니다. 아이를 데리고 이 산, 저 산 등산을 다니시면서 아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하셨답니다. 어떻게 해서든 아이의 마음을 한번 잡아보려고 각고의 노력을 다하셨답니다.
그런 노력의 결실이 당장 나타나지는 않았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문제아였던 그 아이는 끝까지 내치지 않으시고 어떻게 해서든 다시 인간 만들어보려고 애를 쓰셨던 주교님의 노력에 힘입어 이제는 제 갈 길을 잘 걸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꼴통인 아이, 남들이 다 제쳐놓은 아이, 일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아이, 반평균 점수를 사정없이 깎아먹는 아이도 소중한 당신의 양떼로 여기시고 끝까지 노력하신 주교님의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러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참 사랑은 남들이 다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랑입니다. 이만큼 노력했으면 됐겠지, 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조금 더 노력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예쁜 아이, 말 잘 듣는 아이, 순종적인 아이, 제 갈 길을 제대로 잘 걸어가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도 쉽습니다. 그런 아이들과 잘 지내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입니다. 내가 사랑한 만큼 응분의 답례도, 보상도 충분히 받습니다. 보람도 느낍니다. 마음도 뿌듯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 세리들도 그만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참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남들이 다 포기한 아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지독한 아이, 잘 씻지도 않는 아이, 반항기로 똘똘 뭉친 아이, 적개심으로 가득 찬 아이, 이런 아이들이야말로 주님께서 보내주신 선물로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간 살아오면서 얼마나 상처받고, 따돌림 당하고, 내팽개쳐졌으면 저럴까, 하는 연민의 마음으로 더욱 따뜻하게 감싸 안는 그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완전한 사람, 참 그리스도인의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매일 실천하는 부모와 교육자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지상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가장 값진 보물을 매일 쌓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다시 한 번 더 높은 곳(완전함)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마음에 간직하고, 또 다시 길 떠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아가페적 사랑으로 원수를 대하자. -심원택 신부-
어제는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적극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셨는지요? 오늘은 어제 복음의 연장선에서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대하여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은연중에 그 사랑과 연관된 어떤 대상을 함께 생각하기 마련일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을 생각할 수도 있고, 남녀 간의 사랑도, 서로 친한 사람들 간에 오가는 사랑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대상이 나에게 상처를 준 원수라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미 거기에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오간데 없고 치미는 분노와 함께 원수에 대한 악한 감정만이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옛말에 “아버지의 원수는 더불어 함께 하늘을 이지 않고, 형제의 원수는 병기를 돌이키지 않고, 친구의 원수는 나라를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원수 뿐 아니라 아버지와 형제와 친구의 원수를 만나거든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사회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가치관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관을 거슬러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사실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관에 거슬러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 경우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특히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침묵하거나 화제를 바꾸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소신을 서슴지 않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으로 그친 것뿐 아니라, 몸소 당신을 십자가형에 처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고 또 사랑하심으로써 당신이 하신 말씀에 힘이 실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맘이 끌리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정에 이끌리는 행위이지만, 내게 상처를 준 원수를 사랑하자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히 일어나는 감정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정의 문제를 넘어선 의지의 문제이며, 자기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실천코자 하는 결의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은 신적 사랑으로서 ‘아가페적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우리에게 인간적 사랑을 넘어선 신적 사랑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또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러한 사랑을 통해서만이 사람인 우리가 하느님을 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 같이 비를 내려 주심으로써 모든 이를 당신의 자녀로 대하시며, 우리 중 누구라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하느님을 닮아야 하는 것에 우리가 믿는 그 믿음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사람인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 곧 아가페적 사랑을 가지고 원수까지도 대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닮아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그리고 넘치는 사랑을 보여주시는 하느님을 우리가 사랑한다면 그분을 닮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기도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그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먼저 그를 위해서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미움을 확실하게 없애는 방법은 미운 그 사람을 위해서 진정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내 마음 가득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자리 잡고 있다면, 진정한 마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해 보십시오. 어느새 그에 대한 미움보다는 ‘연민’의 감정이 일게 될 것이며, 점차적으로 그 연민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어짐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하는 사랑은 단순히 정에 이끌리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서 기인함을 잊지 마시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사람은 사랑도 받지만 아픔과 상처도 받습니다. 그 반대도
-기정만신부-
우리가 서로 어우러져 기쁘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러나 늘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사람은 하루를 살며 사랑도 받지만 아픔과 상처도 받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지요. 이런 아픔과 상처에 대한 반응이 미움과 분노입니다. 우리가 힘들어하고 힘없어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바로 다른 사람이 준 상처에 대해 미움과 분노로 표현하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상처를 받는 것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 역시 사랑으로 창조한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픔과 상처 그리고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와 사람이 다른 점이 있다면 그에 대한 반응입니다. 아버지는 보복과 벌이 아닌 더 큰 사랑으로 배은망덕한 우리를 받아들여 주시고 안아주십니다. 외아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이 바로 그 받아들임의 극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상처와 아픔에 대해 인간적인 반응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상처와 아픔에 대해 미움과 분노가 아닌 그 상처와 아픔을 아버지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처와 아픔을 준 사람을 하느님 사랑에 봉헌하는 것입니다. 미움과 분노는 상대방뿐 아니라 특별히 자신에게 또 하나의 멍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은 서로에게 생긴 멍자국을 씻어내는 것이며 세례성사의 갱신입니다.
신앙생활의 두 기둥인 기도와 미사 -이봉하수사-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동물의 왕국’ 프로그램을 즐겨봅니다. 대초원에서 사는 동물들을 다룬 내용은 그 자체로서 재미있기도 하지만 우리와 또 다른 동물들의 세계를 통해서 지구는 결코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동물들의 세계를 잠시 들여다보면, 그들 안에도 낮은 단계의 공동체가 있고 사랑도 슬픔도 있는가 하면 ‘왕따’도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나 동물들은 사람만이 가지는 고차원적인 감정과 지각이 없기에 창조 이래 사람의 지배를 받고 있지요. 만약 유전자의 변형으로 네 발로 기는 동물에게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감정, 지각, 언어 등이 주어진다면 동물과 사람 간에 서로 우위와 지배를 위해 싸우며 지구촌은 그야말로 대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다행히도 하느님께서는 아직까지 사람 외에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사람과 같은 은총을 주시지 않으셨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한 사람이나 원수를 두고 ‘금수보다 못하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엔 사실 금수보다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만 있을 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조건은 간단합니다. 일상 안에서 회개하는 사람, 용서하는 사람, 자신뿐 아니라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해 불리움을 받은 것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김지영 신부-
◆프랑스 시인 알프레드 뮈세는 ‘5월의 밤’이라는 시로 유명하다. 이 아름다운 시 속에는 어미새 펠리칸이 등장한다. 어미새 펠리칸은 갓 낳은 굶주린 새끼새들을 해변에 놓아두고 먹이를 구하러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오랜 여행에도 어미새는 단 한줌의 먹이도 구하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만다. 여행에 지친 어미새 펠리칸이 저녁 안개 속에서 갈대 숲으로 돌아올 때 굶주린 새끼떼들은 어미새에게 몰려간다. 그러자 어미새는 목을 흔들면서 늘어진 날개 속으로 새끼들을 포옹한다. 다음 순간 어미새는 해변에 누운 채 자신의 심장을 새끼들의 먹이로 내놓는다. 어미새의 심장과 내장이 새끼들의 입으로 사라지기도 전에 어미새는 숨을 거두고 만다. 자신의 심장과 생명을 내주면서까지 또 하나의 생명을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모든 이에게 아낌없이, 남김없이 내주신 한없는 사랑. 그래서 성 토마스는 ‘성체찬미’에서 ‘주 예수, 사랑 깊은 펠리칸이여’라고 기도했는지 모른다. 원수까지도 받아들이는 사랑,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도 포용하는 사랑의 위대함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나에게 원수는 누구이며, 이방인은 누구인가?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나날인데 어리석게도 이웃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일에 내 힘을 전부 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자.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들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양승국신부-
<오늘 내 사랑이 비록 작고 초라할지라도>
오늘 저희 수도원에서는 한 평생 겸손했던 한 평수사님의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오현교 타대오 수사님, 형제들에게 위문편지나 축일 축하 편지를 쓰실 때면 늘 오소인(小人)이라고 즐겨 쓰시던 분, 형제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베풀면서도, 자신을 위한 식탁에는 멸치 한가지로 족했던 분, 한국 살레시오회 초창기 멤버셨기에 어쩔 수 없이 평생토록 수도원 내 굳은 일만 도맡아 해 오셨던 정녕 겸손했던 분이셨지요.
새까만 후배들이 줄줄이 버티고 있음에도 언제나 가장 먼저 공동체 경당에 도착하셔서 이것 저 것 미사 도구며 준비물을 챙기시던 분, 자그마한 체구의 수사님께서 등치가 산만한 후배들의 고민을 자상하게 들어주시고, 일일이 등을 두드려주시던 수사님은 진정 저희 한국 살레시오회의 거목이셨습니다.
한 평생에 걸친 과로와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었던지 5년 전 위암이 발병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일을 해오셨으면서, 그만하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수도회를 위해 할 일이 많이 남았다’면서 수사님은 열심히 투병생활에 임하셨습니다.
항암제 기운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호전되면 어떻게 해서든 수도회에 도움이 되어보겠다고 이런 일, 저런 일에 뛰어드시던 수사님은 정말 저희 후배들의 귀감이셨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 드러눕기도 앉아있기도 힘겨워서 어정쩡한 자세로 허리를 수그리고 계시던 수사님, 그 와중에도 미사나 기도를 꼭꼭 챙기시던 수사님, 그 고통 속에서도 수도회의 일치를 위해 눈물로 호소하시던 수사님이셨습니다.
어젯밤 그런 수사님의 영정 앞에 백여 명의 저희 후배들이 모였습니다. 한 목소리로 연도를 드렸습니다.
연도를 드리고 있는데, 수사님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빙긋이 웃으시던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툭툭 등을 두드려주시던 손길도 느껴졌습니다.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목소리로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어이, 양 신부, 잘 되고 있어? 별 일 없고? 몸은 괜찮냐? 쉬어가며 천천히 해!”
저희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특히 수사님과 함께 동고동락하셨던 분들, 수녀님...많은 분들이 마치 사랑하는 삼촌이라도 여읜 듯 슬픔을 감추지 못하셨습니다.
수사님께서는 온화한 성품과 친화력, 들을 줄 아는 ‘큰 귀’를 바탕으로 공동체나 사업체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의견이 분분할 때, 불화의 조짐이 보일 때, 그로 인해 공동체 일치가 흐트러질 기미가 보이면 백방으로 뛰어다니시면서 중재를 서시곤 하셨지요. 부드러움, 편안함, 상대방에 대한 배려 등으로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떠나신 수사님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보통 사람’들의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들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통념적인 사랑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간 사랑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겠지요.
예쁜 아이들, 귀여워해주는 것은 누구나 가능한 일입니다.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고, 성적 좋은 아이들,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내게 인사 잘 하는 사람, 내 비유를 잘 맞춰주는 사람, 내게 뭔가 하나라도 챙겨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환대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그런 사랑을 뛰어넘어서야만 합니다. 갈 때 까지 간 아이들, 반평균 점수 다 깎아먹는 아이들, 마구잡이로 대드는 아이들조차도 품에 안아줄 줄 아는 사랑입니다. ‘행동 하나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왠지 밉상인 사람, 그저 보기만 봐도 껄끄러운 사람조차도 그러려니 하고 함께 걸어가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우리 사랑에 대한 기대치가 아주 높은 분이십니다. 우리를 향한 욕심이 많으신 분입니다. 우리 사랑이 계속 성장해서 언젠가 당신이 지니셨던 그 큰 사랑 가까이 따라오도록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지닌 사랑이 한없이 작고 초라하고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꾸준히 키워나가길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큰 사랑, 완전한 사람은 힘들지라도, 좀 더 큰 사랑, 좀 더 나은 인간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길 바랍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강영구신부-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대에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제 편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적대적(敵對的) 공생관계(共生關係)’에 있으면 원수를 사랑하게 됩니다. 원수가 있어야 비로소 적개심으로 가득 찬 나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대적 공생관계는 썩 좋지 않은 방법입니다. 지옥을 만들고 공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원수니 벗이니 하는 구별자체를 없애는 것입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 눈에 원수니 벗이니, 악한 사람이니 선한 사람이니, 옳은 사람이니 옳지 않은 사람 따위의 구별이 있을까요? 원수와 벗,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옳은 사람과 옳지 못한 사람 따위의 구별은 옹졸한 인간들이 편 가르기 하려고 만들어 놓은 구별입니다. 편을 갈라야 자신들의 권력욕과 탐욕을 충족시킬 수 있고 이득을 챙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느님의 눈에는 모든 존재가 당신의 사랑과 용서, 축복을 받아야 할 사랑스러운 자녀일 뿐입니다. 당신 가슴에서 미움과 증오, 적개심을 버리십시오. 사랑과 자비와 용서만 남겨 놓으십시오. 당신의 머리에서 원수니 적이니 하는 말 자체를 지워버리십시오. 모든 사람이 사랑스러운 형제자매가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용서하는 일은 죽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오늘이 사랑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이기양 신부-
복 음 : 마태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 남기신 말씀 중에 대표적인 말씀이 오늘 말씀이지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5,44)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이 말씀이 예수님의 대표적인 말씀인 이유는 단지 말씀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삶 자체가 그 말씀의 실천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신자 비신자나 할 것 없이 기억하고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지요.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5,43)하시면서 큰 계명을 주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5,44-45) 신자들은 비신자들과는 삶이 달라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이어서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5,46-47)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또 자기와 친한 사람과는 인사를 하며 지냅니다. 우리가 여기에 머무른다면 신자로서 비신자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여기에 머무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을 좋아하고 또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나 친하지 않은 사람과는 인사조차 건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삶이라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해당되는 것이지요. 세리나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달라야 합니다. 특히 사랑에 있어서는 대상을 구분하지 말고 모두를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는 말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올바른 율법 해석에 힘입어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할 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의롭게 되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무관하게 살아왔다면 어렵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수정해야 합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이 말씀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실천하라고 주신 말씀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두 사람이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행 중에 문제가 생겨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뺨을 때렸다.? 그들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친구는 그곳에서 목욕을 하기로 했습니다. 뺨을 맞았던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 늪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때 뺨을 때렸던 친구가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늪에서 빠져 나왔을 때 이번에는 돌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그를 때렸고 또한 구해 준 친구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에다가 적었는데, 왜 너를 구해 준 후에는 돌에다가 적었지?? 친구는 대답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괴롭혔을 때 우리는 모래에 그 사실을 적어야 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해. 그래야 바람이 불어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지요. 미움은 모래에 새겨서 용서의 바람으로 빨리 지우고 은혜는 돌에 새겨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거꾸로 할 때가 많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은혜는 물에 새겨 금방 잊어버리고, 마음에서 버려야 할 원수는 돌에 새겨 두고두고 기억하는 것이지요. 다치고 힘겨워지는 사람은 미움을 새겨 놓는 사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지요. 프란시스 베인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복수할 때 인간은 그 원수와 같은 수준이 된다. 그러나 용서할 때 그는 그 원수보다 위에 서 있다.? 더 큰 사람은 보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용서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불러오며 결국 악순환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고 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실천의 삶이 우리 신자들의 삶이어야 하며, 그럴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완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와 좀 다른 사람도 기꺼이 인사하고 받아들이며 친교를 맺고 미움은 용서의 바람으로 빨리 지우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모습이지요.
오늘 하루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유광수 신부-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하면, 너희가 남보다 잘 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장차 나는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가? 내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 누구나 다 한번뿐인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인생의 목표가 있을 것이다. 정치인은 대통령이 되는 것일 것이요, 운동 선수는 세계 챔피온이 되는 것이요, 기업인은 세계 일류가 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수도생활을 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면서 많은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다. 도대체 수도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사제생활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러나 얼른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해답은 수도생활과 사제 생활을 한참 한 후에야 찾을 수 있었다.
그럼 그 해답이 무엇일까? 그 해답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내 삶의 목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나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내 삶의 목표요, 수도생활과 사제 생활의 목표이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을 "완덕(完德)"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완덕으로 나아가는 길", "완덕의 생활"이라는 책이 있었다. 그러나 제 2차 바티칸 공의의회 이후부터는 "완덕"이라는 말 대신에 "聖德"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왜 그랬는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하늘의 아버지를 닮으라는 말이다.
왜 아버지를 닮아야 하는가? 하늘의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아버지란 어떤 분이신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스스로 거룩하게 행동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야 한다."(레위 11,44-45)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거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즉 인간은 하느님을 닮게 창조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원형이신 하느님의 모습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거룩해야 한다.
둘째는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자녀는 아버지를 닮는 법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자녀인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그래서 성 바오로도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음탕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데살 전 4, 3. 7)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완덕"이라는 말 대신에 성덕(聖德)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 "성화 되는 길"이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목표는 또 모든 신앙인의 목표는 聖人이 되는 것이다. 나라 대통령도 아니요, 재벌가도 아닌 성인이 되는 것, 그것이 나의 인생의 목표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표이다.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를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부르시는 것이다.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따라서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의 성소(聖召)이다. 이를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성화 성소의 보편성"이라고 한다. 조금 더 이 부분에 대해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인용하겠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은 여러분이 거룩하게 되는 그것입니다." 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교회 안에서 성직계에 속하는 사람이나 성직계의 사목을 받는 사람이나 모두 다 성화(聖化)의 성소를 받는 것이다. 교회의 이 거룩함은 성령이 신도들 안에서 맺어주시는 은총의 열매로써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이며 또 나타나야 할 것이다.
모든 완덕의 천상 스승이시며 모범이신 주 예수께서 친히 거룩한 생활의 원천이시요, 완성자로서 신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제자들에게 생활의 성화를 요구하시며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시듯이 완전한 사람들이 되십시오."(마태 5, 48)하시었다....
따라서 신분과 계급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크리스챤들이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완성과 사랑의 완덕을 실현하도록 불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한 일이며, 이 성덕은 현세 사회에 있어서도 보다 인간다운 생활 양식의 촉진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완덕에 도달하기 위하여 신자들은 그리스도께 받은 힘을 다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의 모습을 닮아 모든 일에 있어서 성부의 뜻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에 대한 봉사에 헌신해야 하겠다. 이렇게 하느님 백성의 성덕은 교회사에 있어서 많은 성인 성녀들의 생활이 빛나는 증거를 보여 준 것처럼 풍부한 결실을 맺을 것이다. (계시 헌장 5장 39.40항 참조)
성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내가 성인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 또한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신다.(요한1,4,16)"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신다. 그러므로 가장 필요한 첫째 은혜는 사랑이며 이 사랑으로써 우리는 만유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랑이 영혼 안에서 좋은 씨같이 자라서 결실하기 위해서는 각 신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기꺼이 듣고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하느님의 듯을 행동으로 채워 드릴 것이며, 성사들, 특히 성체성사와 거룩한 전례 행위에 자주 참여할 것이며, 기도와 자아 포기와 행동으로서의 형제적 봉사와 모든 덕행 실천에 항구할 것이다.
완덕의 끈이며 율법의 완성인 사랑은 모든 성화 수단을 지배하고 힘있게 하며 목적을 달성케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특징지어진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생명을 바치심으로써 당신 사랑을 드러내셨으므로, 주님과 형제들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있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고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성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가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나도 아버지를 닮아 성인이 되어야 한다. 성인이 되려면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 완전한 사랑은 거룩함이다. -박상대 신부 -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 대당명제를 가르친다. 오늘의 기본명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는 것이며,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반명제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것이다. 이로써 여섯 가지 대당명제가 모두 선포되었다.
이를 다시금 정리하자면, 예수께서는 "더 옳게" 사는 방법을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제시하셨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된 것이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이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록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 빠져 율법의 참된 정신을 곡해하긴 했지만 세부적인 규정에 이르는 모든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는 점은 인정하셨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느님나라에 들기는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 요구되고, "더 옳게" 산다는 것은 율법의 세부규정을 더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밝혀주신 것이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선포된 6개의 대당명제는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보복하라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기본명제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전반부는 구약의 율법조문이지만(레위 19,18), "원수를 미워하라"는 후반부는 구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계명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오히려 원수에 대한 사랑을 높이 평가한 부분은 있다. 그것은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되려 살려주는 대목에서 사울이 "원수를 만나서 고스란히 돌려보낼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데도 네가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을 해 주었으니 야훼께서 너에게 상을 주시기를 바란다"(1사무 24,20)라고 말한 곳이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명제에 대하여 성서학자들은 반명제를 위해서 사해(死海) 근처에 모여 살았던 꿈란 공동체의 규범 중에서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고, 어둠의 아들들을 미워할지니, 그들은 자신의 죄과(罪過)대로 하느님의 보복을 받을 것이다"는 대목을 마태오가 빌어와 가필(加筆)한 것으로 추정한다.
오늘 예수님의 요구는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웃과 원수의 구별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가 내 이웃이며, 누가 내 원수인가?"라는 물음에 머물러 있다면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새로운 의(義)를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의 새로운 의로움에 따르면, 우리가 내 이웃이 아닌 사람들을 원수로 규정하고 내 이웃만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랑하는 이웃끼리 인사하고 잘 지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세리들과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따라서 거기엔 어떠한 상(償)도 더 나음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내 이웃이나 원수에게 똑같이 대해주시기 때문이다.(45절) 세상 사람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模像)을 따라 빚어졌기 때문이다.(창세 1,26) 어떤 원수라도 그가 사랑을 받는다면 그는 원수가 아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는 어떤 원수도 없다.
이로써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대당명제의 깊은 의도와 의중이 모두 드러났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는 것 안에 있다. 완전(完全)하다는 것은 "온전할 뿐만 아니라 전체적이다"는 것이며,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하시지만 인간은 그렇지가 못하다. 우리는 늘 혼란스럽고 갈라지며 그 마음 또한 조석(朝夕)으로 변한다. 굳은 결심으로 시작한 하루가 그 마감시간에는 깨지고 흩어진 마음을 주워 모아야 하는 아픔으로 반복된다. 속으로는 한결같은 마음을 먹지만 마주 대하는 상대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우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하느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을 배우고 익히도록 요구된다. 하느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은 그분이 인간에 대한 어떤 차별도 없이 수행하시는 사랑에서 드러난다. 하느님 사랑의 방법에 있다는 말이다. 이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곧 완전하게 되는 길이다.
오늘은 적어도 왜 하느님께서 선인(善人)에게 바로 상(償)을 주지 않으시고, 악인(惡人)에게 바로 벌(罰)을 내리지 않으시냐고 말하지 말자. 그래서 하느님은 오늘도 침묵(沈默)만 하고 계신다고 말하지 말자. 그것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똑같이 비를 주시는 하느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에서 우러나는 창조적이고 거룩한 사랑인 것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말씀중심)> : † 하늘에 계신 아버지†
산상수훈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주님께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산상수훈은 주님이 우리가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바로 하느님이 아버지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1.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 “천부”가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이 집중적으로 사용된 성서의 다른 본문은 없습니다. 산상수훈 전체에서 18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5장에서 세 번(16,45,48절) 그리고 6장은 무려 13번(1,4,6,6 8,9,13,14,15,18,18,26,32절) 그리고 7장에는 두 번(26,32절)이 나옵니다.
반면에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5장에서 5번(8,9,34,35,45), 6장에서 3번(8,24,30절)만 나올 뿐입니다. 더욱이 6,8의 하느님은 “너희 아버지”라고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일상적인 대인관계에서 호칭은 관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나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에 대하여 관계에 따라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을 아무한테나 사용할 수 없으며 아무에게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허용할 사람도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빠”라고 부를 때 그 관계는 사랑과 신뢰이듯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도 그렇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님은 특히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습니까? 이것은 큰 복입니다. 이렇게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느님과 어떤 관계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올바른 자식이 되어 그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습니까? 가출 또는 미아가 되어 아버지 품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돌아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자연스레 “아버지”로 불려질 수 있기를..........
2. 누가 아들다운 사람입니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진정 아들다운 삶일까요?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이 내용을 매우 중요하게 그리고 비중있게 다루셨습니다. 5,9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5,43-45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6,14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위 3개의 성귀에서 보듯이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전제는 5,9의 평화와 5,43-45의 사랑과 6,14의 용서입니다. 이런 기본전제에서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 분은 이 평화와 사랑 그리고 용서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복음에는 세리와 이방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아들과 대립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자기에게 문안하는 사람에게만 문안하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도 즉, 세리와 이방인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라면 원수라고 사랑해야하고 박해하는 자까지도 그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아들이 될 수 있는 속성(품성)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합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이런 품성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분명히 우리 삶에 하느님을 닮은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48절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다시말하면 하느님 아버지를 완전히 닮은 아들다운 모습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3. 아들이 받는 특권은 무엇입니까?
첫째, 마태 6,9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에서 보듯이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둘째, 마태 7,7-11입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에서 보듯이 아들과 아버지를 비유로 사용하시면서 우리가 구하는 것이야말로 아들 됨의 특권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며 좋은 것으로 채우십니다. 기도는 자녀 된 사람들의 가장 큰 특권입니다. 자녀이기에 아버지에게 때로는 무리한 요구도 합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구할 특권이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기도에 대해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시어 말씀을 주시고 계심에 주목하십시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의미는 이 땅의 아버지와의 차별화입니다. 땅의 아버지, 즉 육신의 아버지가 안 계셔 외로운 사람에게도 하늘의 아버지는 계시며 땅의 아버지가 무능력하여 모든 것을 만족하게 못해주더라도 하늘의 아버지는 모든 것을 책임지실 수 있습니다. 군대 보내면 옆에 있을 수 없고 출가시킨 후 아무리 사랑하는 아버지도 옆에 늘 붙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아버지는 그 자녀 되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모든 것에 전능하신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마태 6,8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본받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또 6,32에서는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복음의 묵상마무리는 기도로 하겠습니다.
이 땅에 아버지 된 분들, 아버지 될 분들이여, 우리 자녀들이 아버지를 생각할 때 좋은 느낌이 들게 합시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에 우리 자녀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든든하고 기뿐 좋은 느낌을 심어주므로 우리 자녀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큰복인지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이런 좋은 관계로 살아가게 하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삶이 되도록 허락해 주시고, 하늘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며 아버지의 아들된 특권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자 되게 하소서.(아멘).......◆
[두올묵상팀] |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