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교관이 남긴 유산
-소진 수필문학상 제정을 축하하며
수필가 정임표
1974년, 파릇했던 청년 시절의 나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서울 뚝섬에 있던 공무원 교육원의 문을 들어섰습니다. 대한민국의 공직자로서 첫발을 내딛던 그 6개월간의 신규 교육 시절, 지금은 이름조차 잊힌 어느 교관이 첫 시간에 들려준 이야기는 5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내 삶과 여러 단체 모임의 공적인 일을 맡을 때에 흔들리지 않는 기본 뿌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날 교관님은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조선의 대유학자 율곡 이이 선생이 조정에 출사하게 된 제자들을 맞이했을 때의 일화입니다. 과거에 급제하여 의욕이 하늘을 찌르던 제자들이 "스승님, 앞으로 조정의 일을 보면서 평생 명심해야 할 말씀을 내려주십시오"라고 청하자, 율곡 선생은 지그시 눈을 감고 "평생 명심할 것은, 쓸데없는 일을 새로이 만들어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알지 못하고 살았지만 70이 넘은 세월까지 늘 나를 따라 다니고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보여주기식 쇼나 전시성 행정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조정에 출사한 고위 공직자들이나 정치인들이 전부 자기 이름 석 자를 남기기 위한 '전시적 업적 달성'에만 매몰되어 가는 현실을 목격할 때마다, 내 마음은 늘 1974년 뚝섬의 그 강의실로 돌아갑니다. 이 가르침은 비단 공직 사회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공익 단체의 리더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자리에 앉아 아무일도 하지 않고 있으면 노는 것처럼 보일까 봐, 무언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억지로라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증. 하지만 공적 자리에 앉은 리더의 그 부질없는 '열심' 때문에 정작 현장의 백성들과 국민들은 괴로워집니다.
그 후 공부를 더 하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교관이 들려준 율곡 선생의 가르침은 실학사상의 문을 연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 수록된 몽골 제국의 위대한 재상, 야율초재(耶律楚材)의 '야율격언(耶律格言)'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흥일리불여제일해(興一利不如除一害)요, 생일사불여생일사(生 一 事不如省一事)“
하나의 이익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의 해로움을 제거하는 것만 못하고, 하나의 일을 만들어내는 것은 하나의 일을 줄이는 것보다 못합니다. (더 쉽게 말해 100원 더 벌려고 하지 말고 10원 절약하는 게 이익이 더 크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몽골군이 금나라의 수도(카이펑)를 함락했을 때, 유목민이었던 몽골 장수들은 "농경지는 쓸모없으니 사람들을 다 죽이고 땅을 갈아엎어 말 목초지로 만들자"고 했습니다. 이때 야율초재는 오고타이 칸을 설득합니다.
"이 사람들을 살려두고 농사를 짓게 해 세금을 거두면 매년 엄청난 비단과 은, 곡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 죽이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결국 그의 설득 덕분에 50만 명이 넘는 무고한 농민들이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야율초재는 무력과 칼로만 다스리던 거친 몽골 제국에 세금 제도, 법률, 과거 시험(인재 등용) 등 문명화된 행정 체계를 도입하여 '원나라'라는 대제국이 유지될 수 있는 뼈대를 만든 분입니다. 야율초재는 "칼로 천하를 정복할 수는 있어도, 칼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는 것을 실천으로 보여준 인물입니다. 그가 거친 몽골 황제들을 다독이며 행정의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 던졌던 "일을 줄이는 것이 낫다"는 경구(실학사상)가 시대를 넘어 조선의 율곡 이이에게로, 성호 이익에게로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필자에게로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무언가를 자꾸 '더하는' 화려한 리더들만 가득한 오늘날, 나는 50년 전 뚝섬에서 들었던 그 묵직한 가르침을 지표 삼아, 글을 쓰는 지금도 내 이런 생각을 담아내어 후세에 전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허명을 쫓아다니지 말고 실용과 실학을 해야 합니다. 권력을 잡았다고 과욕을 부리는 자기 과시적인 인간들이 사이비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하늘의 권세를 마구 휘두르고 싶은 것이지요. 그래서 대구수필가협회 사업은 ➀ 문학기행 ➁ 인문학 세미나 ➂ 회원 연간집 편찬 ➃ 연말 총회 딱 4가지만 하도록 회칙으로 규정화 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기부자의 이름을 딴 수필문학상의 길을 열어, 오직 길이 남을 인생관과 가치관을 담은 문장으로서 인류 정신사 발전에 기여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 말을 후배 수필가님들은 절대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거액을 희사해 주신 소진 선생의 큰 뜻을 후학들이 잘 이어나가시길 바랍니다.(2026. 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