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편지 98신]‘평생 AS(서비스)’가 쉬운 일이 아니거늘…
‘효자아들’을 둔 건축업의 최형에게.
우리집 리모델링업자로 만난 지 딱 2년 전 요맘때군요.
최형은 그때 “평생 AS(서비스)을 해드리겠다”는 호언을 했지요.
4개월여 모든 공사가 끝난 후에는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며 잘 지내자며 의기가 투합한 우리 사이.
어제처럼 더운 날, 우리집 현관 자동키를 고쳐주겠다며 전주에서 달려온 성의가 엄청 고마웠다오.
운전 중에 들은 빅뉴스이자 굿뉴스에 싱글벙글하는 최형에게 나도 마음에서 우러나 여러 번 축하를 해주었지요.
코스모스졸업을 앞둔 아들이 농협農協 정규직에 취직이 확정됐다는 아들의 전화,
얼마나 기뻤을지 십분 짐작이 갑니다. 나도 똑같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라오.
불현듯 그때 일이 생각납디다.
2013년 11월 셋째주, 큰 모임에 참석차 퇴근 후 급하게 가고 있는데,
“아빠, 은행에 최종 합격했다”는 큰아들의 전화.
얼마나 좋았던지, 약속을 취소하고 집 인근에서 만나 아구찜을 놓고 아들과 소주를 각 1병했던 기억.
2월에 졸업하고 취업재수를 하는 아들은 명문대를 나오고도 자소서自紹書를 몇 장 썼네 어쩌네하면서도
뮤지컬연극에 주인공으로 출연한다길레,
제대로 말도을 못하고 속이 탔던 건 나보다 애엄마가 몇 배 더했을 거요.
마음이 터억허니 놓이자 친구들의 축하를 받고 싶어 아들의 취직턱을 세게 냈던 기억.
그것도 벌써 8년 전입니다그려.
그래서 최형에게 감축드린다며 “한턱 쏘라”하자 “두 턱인들 못쏘겠냐”고 했지요.
덕분에 센서가 고장난 열쇠수리비 3만원도 받지 않는다며 생색을 냈지요,
어쨌거나 정말 좋은 일이오. 코로나시국, 갈 곳 잃은 젊은이들의 취업은 전쟁이나 마찬가지라던데,
평생직장으로 탄탄한 공기업에 당당히 합격했으니, 아들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뿌듯한 마음이 들겠소.
그동안 한 달 용돈을 60만원씩 주었는데,
아들이 앞으론 엄마 아빠에게 한 달에 30만원씩 드리겠다고 전화로 약속도 했다면서요.
생각도 기특한 착한 아들, 효자아들입니다. 거듭 감축드리오.
오죽하면 이 꼭두새벽, 최형과 최형의 아들이 생각났겠소.
올해가 환갑이지요. 60 넘어서부터 무슨 일들이 술술 풀리는 기분이라고 했지요.
2년 전, 30대 중반의 사위를 데리고 우리집에 처음 왔을 때,
장인과 사위가 함께 이 ‘궂은 일’을 한다는 게 낯설고 신기했다오.
그런 사위가 마음 먹었던 노가다를 그만두고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을 하더니,
올해는 떡두꺼비같은 손자까지 안겨주었다지요.
의상디자인을 전공한 둘째딸도 옷가게를 접고 취직을 했으니, 복이 덩굴째 굴러들어온 게 아니고 무엇이겠소.
하여 “이제 힘든 일 고만 하고 진안 고향에서 벼농사나 쬐깨 지으며 편하게 살 생각이나 하라”고 했지요.
앞으로 큰돈 들어갈 일도 없으니 몸 보살피는 게 최고라는 나의 충고에 그저 웃기만 했지만,
왜 그런 생각이 없을 것이오.
최형, 기억나지요?
우리집 일을 시작하던 2년 전 7월말, 엄청 더워서 소금을 먹어가며 작업을 했지요.
한옥 지붕만 남기고 다 털어 안방과 마루를 거실로 만들고, 거실과 주방 천장에 가짜써가래를 만들고
상량을 새로 올리며,
아아-, 그해 여름은 잔인하게 더웠지요.
평생 일 한번 안해본 나도 삽질 꽤나 했지요.
오죽했으면 두 손에 ‘방아쇠증후군’이 걸려 수술까지 했을 것이오.
서너 달 동안 같이 흘렸던 ‘그 때의 그 땀’을 어찌 잊을 것이오.
물론 나보다 몇 배 더 흘렸겠지만,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이야 같겠지요.
철물점하는 친구의 사위의 소개로 처음 만났을 때 최형의 성실함을 엿볼 수 있어,
다른 업체나 업자의 견적을 받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냥 “잘 해주시오”하며 계약을 했지요.
친구들은 그렇게 하면 안된다했지만,
지금껏 후회하지 않은 까닭은 형의 심성心性이 고왔기 때문이요.
물론 돈을 버는 일이므로 이문을 남겼겠지요.
하지만, 형이 집주인이라도 되는 듯,
내가 생각지 못한 디테일한 부분들을 챙기고 지적해주는 성실함이 고마웠기 때문이요.
또한 휴대폰에 저장해놓은 부인의 이름이 ‘꽃사슴’이어서 웃었던 게 생각납니다.
우리 나이에 아내에게 꽃사슴이라며 애교를 떠는 남자가 흔치 않을 것이오.
이런 사람이면 견적서에 '큰 거짓말'은 하지 않을 것같고
터무니없는 바가지는 씌우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흐흐.
아무튼, 최형이 본격 리모델링한 본채와 사랑채 사진을 여러 컷 찍어 블로그에도 ‘경력’으로 올려놓았다지요.
작년에는 대학 동아리 멤버 대여섯 명을 데려와 형이 수리한 집이라며 구경을 시켜주는데,
내가 다 기분이 좋더이다.
하여, 그 후에도 종종 안부전화도 하고, 인근 공사현장을 가다가 들르는 등
끊어질 듯하면 이어진 우리 사이.
고향집을 수리했다기에 화장지뭉치를 사들고 가기도 했지요.
또 한 명의 ‘사회社會친구’라 하겠지요.
이 글에 첨부하는 사진은, 얼마 전 방송국 제작진이 호남지역을 돌면서 집이 예쁘다며 불쑥 들러 찍은 것이라오.
‘전원일기’같은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10여일 동안 집을 빌려줄 곳을 물색 중이라서.
“삼시세끼같은 프로이냐”고 물었더니, “맞다”면서 확정되면 집 대여료를 제법 준다는데, 은근히 기대가 됩디다.
이쁜 집이라면서 승용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고 내부를 볼 수 있냐는 사람들이 그동안 서너 번 있었다오.
최형의 애씀 덕분이기도 할 것이니, 이 아니 기분좋은 일이오.
이제 곧 몹쓸 놈의 역병이 없던 일처럼 지나가면, 외손자의 돌잔치나 아들의 결혼식에 초대도 하겠지요?
‘꽃사슴 제수弟嫂’와 전주에서 진안까지 주말농사도 지으며 알콩달콩 잘 살겠지요.
제수의 '결혼조건’이 무척 인상적이었지요.
‘큰 아들이어야 되고 부모가 다 계신 총각이면 된다’고 했다지요.
지방대 나온 별 볼 일 없는 최형이 마침 그 조건에 딱 맞은 행운아였다지요.
시아버지께 며느리로서 얼마나 잘 했으면, 얼마나 예뻤으면,
돌아가시면서 금쪽같은 산 7000평을 아들이 아닌 며느리 명의로 증여를 해줬을까요?
신문에도 나올 만한 일이라 하겠슴다.
아들인 최형이 무척 서운했을 법도 하던데. 좋았나요? 어땠나요?
홀시어머니도 친딸처럼 잘 모신다면서요.
장가 한번 제대로 잘 간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평생 ‘꽃사슴’ ‘꽃사슴’ 노래를 부르며 사는 것이겠지요. 그것도 좋은 일.
조만간 아들 취직턱 낸다며 전주로 올라오라는 전화 기다립니다. 흐흐.
항상 여여如如하기를 빌며 줄입니다.
7월 13일
당신이 잘 고쳐준 ‘이쁜 집’에서 신새벽 씁니다
첫댓글 평생 AS? 제목이 참 멋지다.
우천의 독서룸이 품격이 있다고 필링이 왔는데, 전원일기 같은 멋도 더해주다니,금상첨화일세.
울 코리아도 냉천부락 최가네 처럼, 행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