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주의 민요가수 슬림 더스티가 부르는 <월칭 마틸다>, 이 노래는 호주의 제2의 국가(國歌)라고 불리
울 정도로 호주인들의 애창곡 입니다.
뫼두열 친구들에게!
금번 일요일에는 가평의 연인산으로 간다고 하네요. 가평은 6,25때 중공군과 영연방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해서 관련 전투에 관해서 잠깐 살펴보려고 합니다. 산행을 하면서 이런 역사적 사실도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올립니다. 즐감들 바랍니다.
모두 일요일날 봐요.
* 가평지역 전투 전적비
[ 가평 전투 이야기 ]
* 당시 전투가 끝난 후의 가평
< 서울 재탈환을 위한 중공군 4차 공세 실패 >
1950년 10월 중공군의 참전 이후 이듬해인 1951년 1월 4일, 국군이 서울을 다시 적에게 내주고 평택에서 삼척까지 후퇴하여 대한민국이 큰 위기에 빠졌을 때, 중공군의 판단 착오로 반전의 기회가 생기면서 전선은 북으로 다시 밀어낼 수 있었습니다.
중공군은 한 번의 공세를 더 가하면 사기가 떨어진 아군을 금강선까지 밀어낼 수 있었지만 참전 후 3차례의 공세를 연이어 실시해서 너무 지쳤기 때문에 서울을 점령한 후 크게 주저앉은 상태였습니다.
아군의 소규모 정찰대가 그동안 국군이 낯선 전술을 구사해서 속수무책으로 당해온 중공군이 보급에 차질이 생겨서 공세를 일주일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것과 병력에서는 열세지만 화력으로 중공군을 충분히 격파시킬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해 낼 수 있었습니다.
* 가평 전투가 끝난 후 치하하는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
그리하여 국군은 작전을 짜서 순조롭게 실시하여 3월에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전선을 38도선까지 밀어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전선의 주도권 열세는 중공군이 잡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중공군이 곧바로 1951년 2월에 4차 공세를 개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중공군의 주공이 돌파를 시도하려한 지평리는 미군 2사단과 프랑스군의 고립방어로 완전히 차단당해 실패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지평리 전투입니다. 결국 지평리 전투로 중공군의 4차 공세는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은 서울 다시 점령하기 위해 바로 5차 공세를 준비하였습니다. 중공군의 주공이 파주로, 조공(助攻:주공세력을 도와 공격함, 또는 그런 공격)이 춘천으로 돌파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파주에는 영국군 29여단이, 춘천에는 영연방 27여단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은 5차 공세에 약 27만 명과 북한군 약 3만5천명으로 한강 북쪽에 배치된 유엔군 주력부대를 격멸시켜 노동절(May Day)에 맞추어 서울에 재입성하겠다는 목표로 세웠습니다.
< 중공군 5차 공세 시작 >
* 가평전투 지도
1951년 4월 22일, 어둠이 깔리자 공산군은 국군 및 연합군의 전 전선에 강력한 포격을 실시한 후 5차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포격이 멈추자 중공군 대군이 서부전선으로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각각 9개 사단로 구성된 중공군 19병단은 개성-문산 축선에서 국군 1사단과 영국군 29여단을, 3병단은 연천-동두천 축선에서 미군 3사단과 터키여단을 향하여 공세를 시작하면서 서울을 포위하려 하였습니다.
< 국군 6사단의 후퇴 및 위기 >
4월 22일, 중공군의 5차 공세가 시작되었을 때, 공산군 조공이 공격하기로 한 곳은 중부전선 춘천지역의 사창리였습니다. 이곳을 담당한 부대는 미군 9군단에 배속된 국군 6사단이었는데 중공군은 국군의 뒤를 파고들어 후방을 차단하였습니다.
중공군은 사창리를 돌파하여 중부전선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습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후퇴하게 된 국군 6사단은 큰 피해를 받고, 4월 25일에 가평일대에 집결하게 되었습니다. 국군 6사단은 부대원 반 정도만 남고 대부분의 중장비는 파손된 상태였습니다.
* 파괴된 영국제 센츄리언 탱크
국군 6사단의 후퇴는 좌우에 배치되어 있던 아군 부대들의 후퇴로 이어져 전선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서부전선을 공격한 중공군의 주력이 글로스터 고지 전투(임진강 근처)에서 국군 1사단, 미군 3사단, 영국 29여단을 비롯한 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더 이상 남하를 하지 못하는 동안, 조공이었던 중공군 9병단이 전선 중앙에 커다란 구멍을 내어 버렸던 것입니다.
만일 중공군이 이 구멍을 통해서 경춘가도를 따라 계속 남하했다면 서울은 다시 공산군 손아귀에 다시 들어가면서 중공군의 5차 공세가 성공되어 공산군의 승리로 될 위기였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동원 된 부대가 바로 영연방 27여단이었습니다.
* 공세 중의 중공군
< 영연방 27여단의 참전 >
뉴질랜드, 캐나다, 호주 군이 영국군을 중심으로 편제된 영연방 27여단은 무려 5배가 넘는 중공군을 막아내야 했습니다. 후퇴하는 국군 6사단을 구원하기 위해 가평으로 향한 영연방 27여단은 국군을 추격하여 내려오던 중공군 20군과 1951년 4월 23일 가평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영연방 제27여단은 뉴질랜드 포병대대의 지원하에 호주군 대대와 캐나다군 대대, 영국군 미들섹스 대대 등 3개 대대 병력으로 3일동안의 방어전을 전개하여 자신들보다 무려 5배가 넘는 중공군을 막아냈습니다.
본진인 영국군과 호주 왕실 3대대는 가평의 죽둔리에서 부대원의 40퍼센트 이상이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경춘가도를 지켜냈습니다. 캐나다 프린세스 패트리샤 2대대는 가평 남단 667고지를 사수하여 후퇴하는 제6사단을 엄호하고 경춘간의 주보급로를 확보하는데 공헌하였습니다. 뉴질랜드 16포병연대는 막강한 포병화력 지원으로 중공군을 완전히 차단, 격멸시켰습니다.
* 포로가 된 중공군
이 전투로 중공군 제20군은 제1차 춘계공세 시에 북한강을 넘어서지 못하게 되었으며 국군과 유엔군은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 결과 >
자신들보다 5배나 많은 중공군을 필사적으로 막아낸 영연방 27여단의 가평전투의 승리와 임진강에서 중공군에 의해 패했지만 3일 동안 중공군을 막아낸 영연방 29여단의 글로스터 고지 전투로 중공군은 5차 공세는 완전히 좌절되었습니다.
가평은 한국전쟁 역사의 길에 남는 거대한 전투의 장으로 변했고 영연방 27여단은 세계 전쟁사에 길이 빛날 엄청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 카나다군
< 영연방 참전 국가들과 가평전투 >
* 호주군 전적비
캐나다에서는 가평전투를 승리하고 귀국하였을 때, 위니펙에 위치한 부대 주둔지인 위니펙을 'Kapyeong Barrack'이라는 닉네임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현지 교민들은 통상 '가평부대'라고 불렀습니다.
호주에서는 가평이란 단어를 희생과 영광이란 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4월에 '가평의 날(Gapyeong Day)'로 지정하여 현역 군인들의 큰 기념일로 자리잡고 전투에 참전한 왕립호주연대 3대대는 '가평3대대'라는 부대가 있을 만큼 유명합니다.
* 당시 왕립호주연대 3대대 1소대 장병들
가평전투 60주년인 2011년, 가평에서는 기념행사가 열려 당시 영연방 참전용사들과 이례적으로 당시 호주 줄리아 길라드 현직 총리가 참석하였습니다.
첫댓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우방의 참전. 치열했던 전사를 자세히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