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의 꿈 外 4편
김인숙
세상에서 가장 느린 풍향계를 달고
나는 나를 운반한다
내일의 바람은 아직 내 것이 아니므로
후생後生에게 맡기고
꽁무니에 따라 붙는 오늘의 바람을
폐부 깊이 들이마시고
나는 나를 끌고 평생을 간다
온몸에 뒤집어쓴 이 알이 부화할 때까지
기꺼이 나락을 헤매다
나는 새가 될 거야
붉은 날개를 가진 새가 될 거야
종일 타오르는 불꽃,
불타는 노을이 될 거야
그러니 한낮의 뙤약볕을 나에게 퍼부어 주렴
내 부리와 더듬이가 말라비틀어지도록
내 심장이 타들어가도록
온몸이 날개가 될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느린 풍향계를 달고
나는 나를 운반한다
현생現生에 부는 바람만이
오직 내 편이다
—月刊『현대시』2015년 1월호
연어 캔
연어 캔을 딸 땐
그 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 한 일생을 깨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해요
연어를 놓아주세요
소파에서 빈둥거리지 말고
세찬 물살로 연어를 돌려보내 주세요
연어의 뱃속엔 역류하는 세계가 들어 있어요
그것은 아름다운 파문,
연어는 자초自招하는 물고기예요
예정된 그 죽음의 행로를 잘라야 해요
강은 포기를 모르죠
강을 포기하는 것은 연어가 아닌 우리들이니까요
흐르거나, 솟구치거나 한
연어의 꿈
폭포수를 거슬러 오르던
힘찬 꼬리가 달린 우리들의 꿈 말이에요
연어 캔을 딸 땐
한 생애가 이룩한 파문이 쏟아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해요
—月刊『현대시학』2015년 5월호
빗방울 탁본
공중에서 떨어진 빗소리를 풀면
몇 겹 무게의 층이 들어있을 것 같다
물방울들과 물줄기들은 움푹한 흔적이다
그러므로 웅덩이나 저수貯水들은
지표면에 숨어있는 공중들이다
공중은 어느 곳에 있어도 공중,
허우적거리다 갑자기 떨어지는 사람을 본적이 있다
그 후로 목에서 허우적거리는 악몽을 건져낸 적이 많다
빗금을 그으며 지붕에 내리꽂는 금속성에 담요를 뒤집어쓰면
축축한 구름의 징조徵兆가 몰려들곤 했었다
머릿속에서 헝클어지는 빗줄기들,
할딱이는 숨의 겹을 빠져나오는 버릇은
되풀이되는 악천후의 一氣와도 같다
빗소리의 파장을 수혈 받은 적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벽을 뚫고 직선과 사선의 중심을 똑똑 떨어트린 날이 있었을 것이다
아득하게 뭉쳐져서 날아다니는 공중이 내 핏속에 있다
빗방울에 뭉개진 몇 마디 기록의 말들이 새겨져 있는 기억을
탁본으로 떠보면
집요하게 심장을 때리는 빗소리 속에
목을 조르는 손 하나가 들어있다
— 웹진『시인광장』2015년 5월호(통호 제75호)
와이너리
미치는 맛과 숙성된 맛은
같은 입안이다.
층층이 눌린 포도마다 해풍이 넘친다.
말씨름처럼 들끓고 있는
시간의 역류
으깨진 맛들이 향기로 합쳐지는 저장고는
얼굴을 넘어가는
붉은 노을의 시간이다.
갇혀있던 시간의 시음試飮
코르크마개가 들어있는 나무들이
회오리를 풀면서 열리고 있다.
기울어진 숙성을 부추기는 만찬
지붕만 기웃거리던 볕이 꼬리를 거두어가고
한 가문의 지하에선
둥근 항아리들이 끓고 있다.
어둠의 중심은
한 알의 포도껍질 속에 들어있다.
와이너리의 아침 일과는
콧속의 점막과 대뇌 사이를 청소하는 것
혀와 입술을 닦는 것
검은 색깔의 밤을 맛보는 것
한낮의 볕이 부채 살을 펼치는
어둠을 품평品評하고 있다.
—季刊『시와세계』2015년 가을호
마그마
당신이라는 나라에 가기 위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체온이 끓어오르고 있어요
이렇게 온몸에 불을 붙여 상승하다 보면
언젠간 재만 남게 되겠지만
뭐, 어때요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접근하는 방식인 걸요
범접하기엔 차마 먼 빙벽처럼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 꼭 그만큼의 거리에서
당신은 굳게 닫혀 있군요
평생을 치받아도 동요하지 않는 당신을
지축地軸이라 불러도 될까요
고독이라 불러도 될까요
입구도 없고
출구도 없는 천공穿孔 속의 당신
당신이라는 나라에 닿기 위해
나 오래전부터 화려한 분신을 꿈꾸었지요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불을 품고 살았지요
틈을 보여주세요
화려한 분출을 보여드릴게요
—月刊『유심』2014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