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02
4월21일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Oc1RH91COQI (김용선 마티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는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여인들, 그리고 엠마오 길의 제자들에 이어,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도단에 직접 부활하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제자들 가운데 서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통상적인 관습에 따른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발현 등 일련의 사건 앞에서 크게 흔들리고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비는 인사는 가장 필요한 인사였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반가워하고 기뻐하기보다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끔찍한 기억으로 인해 보고 싶지 않은 당신 손과 발의 상처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난 아직도 채 아물지 않은 상처는 그분께서 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확증해주는 표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영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육신과 더불어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못 자국 난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신 다음,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제자들 앞에서 잡수시는 광경을 통해 당신의 완전한 부활을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한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이 어쩌면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간절한 인간적 동경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가 아닐까 생각도 했습니다.
초세기 교회 예수님의 부활하신 육체를 착시 차원으로 격하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드셨던 식사를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더 강력히 부활의 실재성을 가르치기 위해 예수님께서 나서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루카 복음 24장 41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건넨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손에 드시고 그 자리에서 맛있게 발라 드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특유한 존재 양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분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몸으로 된 육체를 그대로 간직한 채 발현하셨습니다. 목소리도 예전의 그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제 전과는 다른 존재 방식을 취하셨습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특별한 존재가 되신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에게는 더 이상 육신의 욕구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드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진실로 육신으로 부활하신 것을 보여 주시고자 물고기 한 토막을 드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당신께서 그들과 똑같은 살과 피로 이루어진 몸으로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고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드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1e81DwC8n4Q
++++++++++++++++++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는 네 단계>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들의 증언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 손과 발을 보여주시고 만져보라고 하시고 심지어 생선토막까지 먹어 보이시자 그들이 믿게 됩니다.
믿으면 일어나는 첫 번째 현상입니다. 바로 ‘기쁨’입니다. 성경에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라고 하듯 기쁨에 놀라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첫 번째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기쁨’입니다. 죽음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사실 완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성경의 이해’입니다. 여러분은 구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낼 수 있으신가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는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예수님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에 긴가민가하면서도 기뻐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4-45)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 매우 쉽습니다. 사실 모든 성경 내용이 그리스도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의 가장 처음에 나오는 ‘아담’은 누구의 모습일까요? 아담은 옆구리가 뚫려 하와를 창조하기 위해 갈비뼈를 봉헌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납니다. 당연히 당신 옆구리에서 물과 피로 교회를 창조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새 아담은 이제 새 하와인 교회를 당신 신부로 삼으십니다.
‘에사우’는 어떨까요? 야곱에게 당신의 의로움의 가죽옷을 입혀주고 자신은 죽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하지만 나중에 병사 400명을 이끌고 야곱을 맞으러 나옵니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에사우가 메시아의 모습으로 보일 수가 없습니다.
‘십계명 판’은 어떨까요? 우리 자아인 황금송아지를 없애기 위해 한 번은 깨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십계명 판은 우리가 지켜야 할 법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당신이 사랑의 모범이요 법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이어가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어쨌건 우리에게 예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 그 시각으로 구약을 보기 때문에 비로소 구약이 그리스도의 이야기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가 믿는 프레임 안에서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으면 성경해석이 완전히 바뀝니다.
그 다음 변화는 ‘소명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소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 24,47)
우리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나요? 예수 부활을 믿으면 우리가 선포하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어떻게 하는지 모를 수 없습니다. 만약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는 우리로서는 죄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을 그는 선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처럼 책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것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에게 전능한 힘 중에 하나만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겠느냐고 할 때, 책을 빨리 읽는 능력을 청하겠다고 했습니다.
혹은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사람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같은 옷, 같은 신발만 신고 다닙니다. 생각의 에너지를 옷 고르는 데 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내 생각을 사로잡는 세상 것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세상 집착을 끊어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면 누구처럼 될까요? 그리스도처럼 됩니다. 그리스도는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죄에서 벗어나는지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아버지 뜻에 순종하여 목숨을 봉헌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회개란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위해 죽으려고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열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랑으로 죽으면 영원히 부활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죽어야 산다는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아직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 부활에 대한 확신은 ‘그분으로부터 힘을 받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물 것을 제자들에게 권고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힘, 곧 성령을 받을 준비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9)
마지막으로 부활을 믿는 사람은 하늘에서 오는 힘을 어디서 받는지 압니다. 만약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면 어머니가 주시는 밥을 먹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면 양식을 어디서 먹을 수 있을까요? 자녀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로서는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해 성령께서 오십니다.
유튜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밥상: 엄마의 밥’에서는 엄마들이 직접 호주에서 공부하는 자녀들을 위해 몰래 집밥을 해 주는 내용의 동영상입니다. 자녀들은 엄마의 밥을 먹고 눈물을 흘리며 힘겨운 유학 생활의 힘을 얻습니다. 엄마는 자녀가 있는 곳에 갑니다. 그리스도의 자녀들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나라 열쇠를 주시며 베드로 위에 세우신 하나인 교회는 가톨릭교회입니다. 가톨릭교회에 머물 줄 알면 어쩌면 그것 자체로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성령께서 어디로 오시는지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JTBC Voyage, ‘엄마의 손맛 재현에 감동한 스타들 모음’이란 유튜브 동영상이 있습니다. 쯔이와 바다, 그리고 박철민 씨가 셰프들이 재현한 어머니의 음식을 먹으며 눈물을 흘리는 내용입니다. 그냥 음식이지만 지금은 함께 계시지 않는 어머니의 음식만으로 큰 힘을 얻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를 위해 힘을 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지금 살아계십니다. 그러면 그분은 자녀들이 모인 곳에 당신 음식을 내어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께서 성사로 내려오시는 가톨릭교회에 머물 줄 아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을 믿는 증거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살아갈 성령의 에너지를 얻을 줄 안다면 그 성령은 분명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시는 것이기에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장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산 사람만이 힘을 줄 수 있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엠마오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체험한 제자들이 자신들의 체험을 다른 제자들에게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아직도 스승을 잃은 실의와 좌절에 잠겨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을 나누시고 구운 생선을 잡수시면서 당신의 부활을 증명해 주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장면인가? 베드로와 요한은 부활을 믿고 있었다. 이미 무덤을 보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너무나 놀라서 유령을 보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39절) 하셨다. 제자들은 즉시 그분을 만져 보았고, 잡아 보고 그분 숨결을 느끼고 확신했다.그들은 그래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고 죽음을 이긴 사람들이 되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잡수시고 마시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말해주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사도 10,41b).어떤 개인의 환상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한 부활은 상상조차 못하고 실의와 의문에 차 있던,그리고 부활하셨다는 소식도 믿지 않고 두려움에 차있던 제자들에게 실재의 모습으로 다가오신 것이다.
이렇게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신 것은 당신 안에서 죽음을 이기셨고 육체의 부패를 떨쳐 버렸음을 증명하신 것이다. 당신의 부활하신 몸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몸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게 하시고자 하셨다. 이렇게 하시려고 그분은 문 닫힌 방에 들어가셔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으셨다. 그리고 이 행적을 통하여 당신 안에 신성과 인성이 나뉘지 않고 결합되어 있으신 분임을 우리가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심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의 수난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말씀을 깨닫게 해주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44절)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46절)고 말씀하셨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즉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산 증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47절)하는 사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48절)
바로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이 바로 사도로 선택된 이들이 하여야 하는 것이며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신비를 알고 체험하는 우리들이 증인으로서 전해야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이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같이 체험하고 전하여 왔는가를 생각해 보자. 이제 매 순간에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면서 그 체험을 이웃에 전할 수 있는, 나눌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주님께 청하자.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루카 24,36-43)
이 이야기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분, 틀림없이 바로 그분이셨다. 우리는 분명히 그분을 만났다.” 라는 사도들의 증언입니다. <사무엘기 상권을 보면, 죽은 사무엘의 혼백을 사울 왕이 불러내서 자신의 앞일을 물어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1사무 28장) 그 이야기처럼 사도들이 예수님의 혼백을 만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사실 오늘날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 입장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그 모습 그대로 부활하셔서 나타나셨다는 것과 자기들이 유령을 본 것도 아니고, 환시를 체험한 것도 아니고, 영적인 존재를 만난 것도 아니라고 증언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라는 말은, 사도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긴 했는데 예수님의 유령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해서 무서워했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무서워한 것이 아니라 유령을 무서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유령이 나타나는 것처럼 갑자기 나타나셨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사도들은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습니다.(요한 20,19)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문을 열고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유령처럼 갑자기 사도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런 식으로 갑자기 나타나셨을까? 그 이유는 모릅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라는 말씀은, 손과 발에 남아 있는 상처를 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생긴 상처들을 그대로 지닌 채 부활하셨고, 그 상처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과 부활하신 분이 같은 분이라는 표시가 됩니다. “나를 만져 보아라.”라는 말씀은,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확인해 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 앞에서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잡수신 것은, 유령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 있는 분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상처들을 보고, 손과 발을 만져 보고, 예수님께서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님 부활의 증거가 될까? 아닙니다. 또 그들이 유령을 본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만났다는 증거가 될까? 아닙니다. 그것은 ‘증언’이지 ‘증거’가 아닙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사도들의 ‘증언’ 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증언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물증’은 없습니다. 사도들의 증언을 믿거나 안 믿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각 개인의 선택과 결단에 달린 일로 남아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사도들의 증언을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그들의 ‘삶과 죽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목숨을 바쳐서 자신들의 신앙과 증언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신앙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순교’를 통해서 증명되고 전해진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4-48)
여기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들은, 아마도 부활과 승천 사이의 사십 일 동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요약해서 기록한 말씀들일 것입니다.(사도 1,3)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라는 말씀은, ‘인류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계획은 차질 없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라는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비로소 사도들이 모든 것을 깨닫고 이해하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 말은, 부활 전에는 사도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말씀들과 일들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들과 일들은 ‘부활 신앙’을 통해서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예수님의 부활을 먼저 믿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의한 일이었다는 가르침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선포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의 용서와 구원을 받는다고 선포하여라.”라는 명령입니다. 선포 대상은 ‘모든 민족들’, 즉 ‘모든 사람’입니다. 아무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구원받기를 원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모두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복음 선포의 출발점이 예루살렘일까? 예루살렘은 구약시대 때부터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도시입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 되어라.”라는 명령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들과 일들,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도들의 주 임무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일입니다.(사도 1,22)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일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언하는 일이고,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모든 신앙인의 임무이기도 합니다.)
=====================
[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외출할 때면 꼭 지니고 다니는 것들이 있습니다. 스마트폰, 지갑, 손수건입니다. 스마트폰은 외부와의 연락을 위해서 가지고 다닙니다. 지갑은 계산을 할 때 열게 됩니다. 깨끗하게 빨아서 접어놓은 손수건은 제 몸에서 나오는 이물질을 받아주는 고마운 친구입니다. 일교차가 심한 날에 산보를 하면 콧물이 자주 나오기 때문에 손수건은 꼭 필요합니다. 손수건을 다 쓰고 빨래바구니에 넣으면서 한 번도 고맙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운동하면서 구겨지고, 지저분해진 손수건을 보니 문득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땀과 눈물 그리고 콧물까지 아무런 불평 없이 받아주는 손수건이었습니다. 베로니카는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드렸습니다. 베로니카의 따뜻한 마음이 있어서 예수님 고난의 길에 조금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성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교회의 전승은 베로니카의 용기와 따뜻한 마음을 기억하였고, 십자가의 길 6처에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처 난 손과 발을 보여주셨습니다. 유령은 육체가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면서 유령이 아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아 죽겠지만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죽었지만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증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놀라운 표징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던 나약한 베드로였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당당하게 선포하는 용기 있는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회개’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성찰하는 것이지만, 진정한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행동이 변했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에서 희망과 열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할 일 가운데 ‘상처를 치유하고 믿는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가장 필요합니다. ‘교회는 전투가 끝난 뒤의 야전병원’이 되어야 합니다. 심각하게 다친 사람에게 콜레스테롤이 높은가 혈당치가 어떤가 물어보는 일은 쓸모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가 입은 상처를 치유하고 나서 나머지 것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깨끗하게 빨아 곱게 접혀진 손수건은 내 몸의 오물을 받아준 증인은 될 수 없습니다. 비록 구겨지고, 지저분할지라도 내 몸의 오물을 받아준 손수건이 자신의 역할을 다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옷에 진흙이 묻을지라도,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묻을지라도 교회는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영성이란 정상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활의 삶은 죽은 후에 얻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은 현실의 삶에서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받아들여 부활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이동훈 프란치스코 신부님]
<평화>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신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의혹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혹 때문에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골방 속에 꼭꼭 숨어서 지냈다. 마음의 평화가 사라졌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곳에서는 마음의 평화가 있을 수 없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삶은 현세에 집착하게 한다. 현실의 물질에서 위안을 얻으려 하지만 마음의 평화는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자신이 죽지 않으려고 남을 해치고, 남의 것을 빼앗는다. 빼앗은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높은 담을 쳐놓고 경보기며 보안 시스템을 해보지만 마음의 평화가 생기지 않는다. 평화(平和)란 쌀(禾)을 나누어 먹되(口) 공평(平)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적 장애인(정신지체 장애인)들과 함께 살면서 배우는 것이 참 많다. 이들에게는 담이 없다. 누구를 보더라도 똑같이 대한다.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돈이 많든 적든, 남녀노소, 동물과 식물을 가리지 않고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넨다.
사람들은 불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지능이 떨어져 자기 것도 챙기지 못하고, 상처 받을 줄도 모르고 마냥 마음을 열어주는 그들이 왠지 불안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장애인들의 마음이 더 평화롭다. 받을 것을 계산하지 않고 그저 주기 때문이다. 누구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고, 자기 것을 고집하지 않으며 모두를 평등하게 대해 주는 데 평화가 있음을 함께 사는 가족이 삶으로 가르쳐 준다.
=====================
[의정부교구 강동진 알로이시오 신부님]
“성경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증인>
예수께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대해 증인이 되는 것은 어떤 영적인 체험을 필요로 합니다.
육체적으로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은 훗날에 있을 것으로 약속되었기에 우리로서는 지금 당장 체험할 수 없겠지만, 죄와 악습에 물든 자기 자신이 죽고 사랑으로 충만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영적인 죽음과 부활은 지금이라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탐욕스러움을 복음적 가난을 실천함으로써 정화시키고, 교만함과 지배욕을 겸손과 순종의 덕으로 다스리며, 육체적 욕망을 정결의 덕으로 이기는 극기의 삶을 통해 우리는 악습에 찌든 자신에 대해 죽고 갖가지 덕성을 갖춘 아름다운 인격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성적 부활을 체험하고 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따라서 그에 대한 확고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화하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설사 그것이 죽을 만큼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무장한 채 용감하게 자신을 버리는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나에게 부활은 어떤 방식으로 체험됩니까?
=====================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부활 예수님과 지상 예수님의 동일성>
오늘 전례에서는 루카복음이 전하는 예수 부활 사화(24장)의 내용 중 세 번째 단락이 봉독된다. 24장 마지막에 기록된 예수 승천 부분(50-53절)을 뺀다면, 부활에 관한 기록은 이 단락으로 끝난다.
따라서 루카복음이 전하고 있는 예수 부활에 관한 기록은 '빈 무덤확인'(1-12), '엠마오 제자들의 부활체험'(13-35), 그리고 오늘 복음이 구체적으로 전하는 '제자들 앞에서의 부활 예수 발현'(36-49)이 전부다.
오늘 복음이 루카가 전하는 마지막 부활기록이라면, 이 복음을 통해서 루카가 심중에 두고 있는 의도가 성취되어야 할 것이다. 그 의도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확고한 믿음이다.
루카는 안식일 다음날, 예수님의 부활 당일에, 즉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채 넘어가기 전에, 예수 부활 사건과 부활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확고한 믿음을 목적으로 부활사화를 기록하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예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예수께서 죽으셨지만, 더 이상 죽은 이들 가운데 있지 않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다는 믿음을 의미한다. 부활예수에 대한 믿음은 죽음 직전 지상에서의 예수와 죽음 직후 부활한 예수의 동일성에 대한 믿음이다.
하루 만에 이 엄청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 무리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생각할 거리가 이미 주어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
① 새벽녘에 여인들이(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마리아) 들이닥쳐 열 한 제자들과 그 동료들에게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고, 시체가 없어졌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여인들은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이 갈릴래아에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 보라.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죄인들의 손에 넘어 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6-7절) 라는 천사의 메시지도 전해 주었다. 물론 사도들은 여인들의 이야기가 부질없는 헛소리라 생각하고 믿지 않았다.
② 베드로는 달랐다. 단숨에 무덤으로 뛰어간 베드로는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돌아와서 다른 동료들에게 "주님께서 확실히 다시 살아나셔서 나에게(시몬) 나타나셨다"(34절)라고 말한 것이 분명하다.
③ 엠마오의 제자들이 귀경하여 자신들의 부활체험을 들려준다.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제자들은 적어도 이런 세 가지 일로 인해 머리가 복잡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그리고 어디까지 믿어야 할 것인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제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나타나 그들 가운데 서시며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36절)
예수께서 우선 제자들에게 평화를 기원하신다. 그 동안 잘 있었느냐는 안부이기도 하겠지만, 이 평화는 복잡한 머릿속의 안녕을 기원하는 말씀이다.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여 의심을(38절) 버리고 믿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아울러 단편적인 성서의 지식들을 가지고 복잡해 하지 말고 성서의 모든 기록들을 예수님 자신을 향하여 해석함으로써 실마리를 풀라는 것이다.
루카복음사가는 자신의 특유한 문체와 문체의 세심함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한다. 예수님의 공생활 기록에서도 하느님 아버지를 자비와 용서와 사랑의 문체로 표현하였듯이 여기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심한 문체로 부각시키고 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아직 아버지께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알리기 위해 모든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신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거의 반나절을 함께 걸어가시기도 하셨고, 오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발의 상처를 만져볼 수 있도록 내어 보여주신다. 뼈와 살이 있으니 유령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까지 잡수셨다.
오늘 복음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우리는 몇 가지 신학적 지식을 얻는다. 그것은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① 예수님의 부활은 영적으로만 부활이 아니라 영과 육신의 부활이다.
②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분이시다. 즉, 지상 예수와 부활 예수는 동일한 분이시다.
③ 성서의 모든 기록(이미 기록된 구약성서, 앞으로 기록될 신약성서)을 해석하는 기준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다.
④ 예루살렘에서의 구체적인 십자가사건은 세상을 향한 보편적 구원사건이 될 것이다.
⑤ 여기에 증인인 사도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물론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할 것이다)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주간 첫날,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4)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다가 되돌아온 두 제자들도 그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며 당신의 평화를 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마치 바다를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루카 24,38-39)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증명하시기 위해, 손발의 상처를 보여주시며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당신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우리는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왔건만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목이 뻣뻣하여 믿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의 삶에서 벌어지는 기적들을, 특히 성체성사를 매일 만지고 먹으면서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보고 만져보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수시면서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살아계심을 증명해 보여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제자들과 여전히 친교를 이루고 함께 사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이처럼, 보여주고, 만지게 하고, 함께 먹으며 친교를 나누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제자들은 차차 눈이 열려갑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진정 필요한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은 기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오는 까닭입니다. 마침내, “성경말씀”을 들려주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마태 24,45)
이는 부활신앙이 기적을 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여는 열쇠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부활의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그 지고한 사랑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뼈에 새겨지고 제 위장 속에 부어진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제 마른 뼈가 살아나고, 제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5)
주님!
제 마음 속 깊은 곳을 여시어,
침묵의 언어로 새겨진 당신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깨달은 바를 제 삶으로 인쇄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의 말씀을 기록하는 잉크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선과 질서, 당신의 뜻과 지혜,
형언할 수 없는 당신의 신비들을 온몸에 새기며 살아가는
당신의 복음서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부활이 온다>
루카 24,35-48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부활이 온다>
십자가 안에
부활이 온다
십자가 품은
부활이 온다
십자가 기린
부활이 온다
십자가 이룬
부활이 온다
십자가 너머
부활이 온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부활을 선포하는 증인>
사람들로부터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당황스럽지만 개인의 생각을 전제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직자의 얘기이기 때문에 사적인 얘기로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모르면 모른다고 답하고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지금 당장은 기대를 채워줄 수 없지만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섣불리 아는 척하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고, 무덤에 묻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유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면서 “보아라,” “만져 보아라.” 고 하셨습니다. 혹 눈으로 환상을 본 것 같으면 직접 만져서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제야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믿지 못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드시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음식을 잡수신 것을 보면 부활한 몸이 실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은 예전의 몸이 아닙니다. 나타나셨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나시고 하는 것을 보면 모든 한계로부터 자유로우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오고 가시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눈을 열어 주셔야 그분을 알아볼 수가 있는 법입니다.
주님을 알아 뵈려면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아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만 크게 되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되고 맙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던 제자들, 결국 유령으로 보는 제자들에게 여전히 사랑을 주셨습니다. 옛날의 허물을 들추어낼 수 있을 정도로 속이 좁은 분도 아니셨고, 그저 믿음을 키워주지 못한 것이 안쓰러울 뿐이었습니다. 사랑은 셈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저놈은 나를 배신한 놈인데, 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데…손해를 끼친 저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하며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아픔들이 나를 지배한다면, 예수님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고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그분 안에서 큰 품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학생에 머무르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하는 증인, 순교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돌아와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겪은 일들을 전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십니다. 슬픔과 절망, 좌절과 두려움의 심연 속에 빠져 있던 제자들은 여전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 손과 발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자국들을 만져 보게 하십니다.
이어서 구운 물고기를 잡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령도, 영혼의 환영도 아니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십니다. 부활하신 당신의 몸은 누구나 직접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그분께서는 몸소 음식까지 잡수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함께 걸으시며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을 주셨던 것처럼, 이제 다른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십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이로써 제자들은 스승님께서 구약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이심을 깨닫습니다. 덧붙여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을 통하여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
생각과 말과 행위로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24,48)
<증인의 삶!>
오늘 복음(루카24,35-48)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의 인사도 하시고, 그들 앞에서 식사도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에 증인이다."(루카24,46-48)
오늘 독서(사도3,11-26)는 베드로가 솔로몬 주랑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설교입니다. 베드로는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를 받은 불구자를 두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로 그분의 이름이 지금 보고 또 아는 이 사람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셨습니다."(사도3,15-16)
'증인의 삶!'
'증인의 삶'은 '부활의 삶'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죽음을 이기고, 죽음과 같은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고 '부활하는 것',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나의 죄가 지워지게 하는 것, 그래서 다시 생기를 찾는 것'입니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 그래서 다시 시작하는 삶'입니다.
'증인의 삶인 부활의 삶'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나를 위해서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 없이는 결코 '나의 참부활'은 없습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8~90년대, 동네에는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1,000원 또는 2,000원의 대여료를 내고서 테이프를 빌려 집에서 편하게 영화를 봤습니다. 그러나 2,000년 초반에 들어서면서,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이 하나둘씩 사라졌습니다. 대신 화질이 좋은 DVD로 넘어가고 있었지요.
친한 선배가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비디오 대여점을 열었습니다. 공무원 생활로는 돈 벌기 힘들다면서 90년대 말에 대여점을 연 것입니다. 초반에는 잘 되었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결국 이 사업을 접게 되었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들처럼 사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변화를 추구해야 하지만, 남따라 하는 것은 진정한 변화가 아닙니다.
넷플릭스를 알 것입니다. 미국 콘텐츠 플랫폼 및 제작사로 스트리밍 엔터테인먼트 기업입니다. 이 기업의 시작은 DVD 대여 사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업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계속 변화와 혁신을 시도했기에, 현재 전 세계 2억 명 이상의 회원을 보유한 기업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남 따라 하는 변화보다, 자기 본연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느님도 우리 고유의 변화를 원하시지, 남 따라 하는 변화를 원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를 다르게 만드신 것이겠지요.
예수님 부활 소식이 계속 들려왔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증언,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증언, 이제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말과 함께 나타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무섭고 두려워 유령 보는 줄로 생각했다는 증언으로 볼 때, 제자들이 얼마나 불안정한 심리상태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배반한 전력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믿고 따르겠다고 약속했으면서도, 십자가의 죽음 이후 뿔뿔이 흩어졌고 지금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잘못했다는 부끄러움에, 살아계신 예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겠지요.
이런 제자에게 당신의 오상을 보여주십니다. 육신상의 부활임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라고 물으시지요. 이 역시 육신의 부활을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영혼은 세상의 음식을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확실한 부활의 표징을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제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당신을 믿고 따를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믿음으로 세상에 구원을 위한 주님의 일을 계속하는 변화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도 이 변화를 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주님의 일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부활 증인의 삶>
- 회개, 평화, 기쁨 -
계속되는 파스카 축제에 맞춰 봄철에 만개한 파스카의 봄꽃들에 연초록 아름다운 초목들입니다. 일년중 가장 많은 꽃들이 연이어 피어나고 새들도 참 많습니다. 파스카의 기쁨, 신록의 기쁨 가득한 평화로운 분위기의 요즘 봄날입니다. 저절로 나오는 오늘 화답송 시편 후렴입니다.
“주님, 저희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크시옵니까!”
참으로 부활시기 전례에 맞는 참으로 역동적인 생명과 빛으로 가득한 계절입니다. 유난히 샛노란 색깔의 봄꽃들이 많습니다. 여지없이 때되니 수도원 곳곳에 피어나기 시작한 샛노란 애기똥풀꽃들, 예전 써놨던 검정 고무신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볼품없는
검정 고무신
애기똥풀꽃밭에
다녀 오더니
꽃신이 되었다
하늘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수놓은
꽃신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별 떠오른
하늘이 되었다”-1998.5.7.
살아 계신 주님 부활을 체험할 때, 볼품없는 검정고무신같은 존재도 꽃신이, 하늘이 되어,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24년전부터 해마다 폈다지는 샛노란 애기똥풀꽃들은 그대로 인데, 그동안 세상 떠난 사랑하는 형제들이나 친지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참으로 선물로 주어진 귀한 인생, 하루하루 새롭게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파스카의 평화, 파스카의 기쁨을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현재에서 영원을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파스카 축제의 주님 부활 시기의 매일 미사 말씀이 참으로 역동적이고 신바람 가득합니다. 어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는 예수님의 제자들 무리와 합류하여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화를 나누는 중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입니다. 유령이나 귀신이 아닌 생전 그대로의 부활하신 예수님의 출현이요 제자들의 마음 역시 놀라움과 더불어 기쁨 가득한 모습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과 동시에 이뤄지는 저절로의 회개요, 더불어 참 좋은 선물이 평화와 기쁨입니다.
예전 수차례 인용했던 일화가 생각납니다. 한 수도형제가 어느 수도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다 갖췄는데 하나 빠진 것이 있더라는 것이며 뭔가 물었을 때, “기쁨!”이란 답변이었습니다. 공동체든 개인이든 모든 것 다 갖췄어도 ‘기쁨’이, ‘평화’가, ‘희망’이 빠졌다면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최고의 명약 역시 부활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평화와 기쁨, 희망입니다.
이어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신 다음 당신 부활의 증인들로, 복음 선포의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입니다. 우리가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서 신바람 가득한, 역동적인 평화의 사람, 기쁨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그대로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이 되어, 선물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놀라운 기적들입니다.
“벽이 변하여 문이 됩니다!”
“폭풍이 변하여 미풍이 됩니다!”
“짐이 변하여 선물이 됩니다!”
바로 주님 부활의 증인인 우리를 통해 주님을 만날 때 일어나는 기적들입니다. 이의 전형적 모범이 제1독서 사도행전의 솔로몬 주랑에서 성령 충만하여 열화와 같은 설교를 하는 베드로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과 하나된 주님 부활의 증인, 베드로 사도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박진감 넘치게 와닿는 설교입니다. 예전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아닙니다.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베드로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살렸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라 합니다. 새삼 믿음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의 참 좋은 선물이자 불구자를 살린 최고의 명약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어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베드로입니다. 복음의 주님의 명령에 따라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선포하는 베드로입니다. 설교의 중요 구절을 정리합니다.
“이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도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어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도록 하셨습니다.”
참 은혜로운 말씀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설교의 핵심 주제는 회개입니다. 예나 이제나 무지의 인간은 변함없는 현실입니다. 우리를 눈멀게 하는 무지의 양상은 얼마나 다양한지요! 탐욕, 분노, 질투, 어리석음, 이념이나 종교에 중독된 광신등 끝이 없습니다. 극우, 극좌 모두 무지에 눈먼 광신적 모습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으로서 참된 회개가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습니다. 참된 회개를 통해 정주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역할을 다하며 제대로 온전한 삶을 사는 이들이 참으로 그리운 시절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주님의 참 좋은 은총의 선물이 마음의 순수, 겸손, 지혜, 자비입니다.
어제 써놓은 '지혜의 눈'이란 글을 나눕니다.
“눈 있어도, 눈없는 사람이 너무 많다
‘지혜의 눈’
거의가 제정신이 아닌 맹목의, 광신의 사람들이다
세상 공부와는 전혀 무관하다
그래서 악도 죄도 병도 많은 세상이다
그러니 끊임없는 한결같은
하느님 공부가 말씀공부와 회개가 참으로 절실하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찾고 사랑하여라
주님은 ’지혜의 눈’이시다”
인간 존재의 고질적 현실인 무지의 악, 무지의 병, 무지의 죄에 대한 근원적 처방은 회개를 통한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 하나뿐이요,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의 무지의 병을 치유하시어 당신 부활의 증인으로, 평화의 사람, 기쁨의 사람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아멘.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wOwZP3XG4s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루카 24, 39)
찬란하고
눈부신
새 날의
시작이다.
눈부실수록
더 잘보이는
십자가이다.
당신의
상처를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상처를 나누는
살아 있는
부활의 기쁨이다.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다.
상처를 품은
십자가를
지나야
부활이 있다.
상처가
상처를
치유하듯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십자가의
손과 발이
우리 마음을
울린다.
상처가 깊을수록
사랑도 깊다.
살아있는
사랑과 평화의
길에는
살아있는
상처와 함께
길이 된다.
십자가가
사라지면
부활도
사라진다.
십자가의 상처가
새 세상을
만들었다.
부활하신
십자가의
상처에서
삶을 배운다.
보다듬고
어루만지는
참사랑이다.
십자가가
사랑을 이루는
살과 뼈이다.
갇혀있는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주시는
예수님의
손과 발이다.
십자가의 상처가
부활의 징표이다.
십자가 없이
만들지 못하는
용서와 사랑의
복음이다.
상처가
상처를
품어주는
예수님의
부활이다.
살과 뼈를
이어주는
십자가의
핏줄이
선명하다.
상처가 열리면
부활이 된다.
우리는
이 기쁨의
증인이며
목격자들이다.
손과 발의
상처에서
되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
그 부활을
진실로 믿는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