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시선은 나에게 지옥이다 - 사르트르와 마네
올랭피아의 시선은 왜 부담스러울까?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그림 〈비너스의 탄생〉과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의 그림 〈올랭피아〉는 여성의 누드라는 공통점이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둘 다 여성의 누드화임에도 불구하고 보티첼리의 그림이 많은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고 찬사를 받은 반면, 마네의 그림은 전문가들이나 일반인들 모두에게 많은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보티첼리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은 비너스 여신인 반면 〈올랭피아〉에 등장하는 여인은 천한 매춘부였기 때문이다. 물론 마네는 이러한 반응을 예상치 못했다. 여인의 누드에 고귀하다거나 천하다는 등급이 매겨질 줄이야 당연히 몰랐을 테니까. 마네의 그림은 누드에 대한 음탕한 시선을 여신이라는 고상함으로 정당화하려는 관행에 대한 도발적인 반항이었던 셈이다.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The Birth of Venus, 1485
마네, 〈올랭피아〉 Olympia, 1863
두 그림 모두 여성의 누드화이지만 〈올랭피아〉는 사람들의 질타를 받았다. 그것은 〈올랭피아〉에 그려진 여인이 매춘부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올랭피아〉가 작품을 감상하려는 관람객의 자유를 빼앗고 관램객이 오히려 감시당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갈망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구속과 억압의 상태에 빠져든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네의 그림이 관람객의 신경을 거스르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마네의 매춘부의 시선을 보면 알 수 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얼핏 정면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다소 쑥스러운 듯 정면을 피해서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다. 이렇게 여성, 특히 옷을 벗은 여성이 정면을 응시하지 않고 관람객의 시선을 피하는 것은 화가들에게 내려오는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여기서 관람객은 남성적인 시선을 대변하기 마련이다. 이에 반해서 마네의 그림은 옷을 벗은 여인이 대담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아무리 그림이라 하더라도 관람객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 대담한 여인의 시선에 순간적으로 움칫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림 속 여성이 정면을 응시할 경우 관람객은 곧 자신이 그녀의 벗은 몸을 보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들키고 만다. 그림의 여인이 관람객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곧 관람객이 그 시선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람객은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통적인 관행대로라면 벗은 여인이 관람객을 바라보지 않음으로써 마치 사물을 보는 것처럼 어떤 시선으로부터도 감시받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마네의 〈올랭피아〉는 관람객이 음탕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순간 오히려 관람객 자신이 그러한 음탕한 의도를 들킨 것처럼 감시당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감추고 싶은 모습이 드러나는 것처럼 수치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마네의 그림은 이렇게 수치심을 유발시키다 보니 불순한 작품일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의 일관된 관심은 근본적으로 자유롭고자 하는 인간과 그러한 자유를 억압하는 현실의 간극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유를 갈망한다. 그러한 자유는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을 때 가능하다. 그러나 마치 〈올랭피아〉를 자유롭게 감상하려는 관람객이 은밀한 자유를 누리려는 순간 오히려 매서운 감시와 구속을 느끼듯이, 우리는 자유를 갈망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구속과 억압의 상태에 빠져들고 만다. 사르트르의 일관된 관심은 이러한 자유와 억압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에 관한 것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올랭피아의 시선은 왜 부담스러울까?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