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 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精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눈 / 신경림
내 몸이 이 세상에 머물기를 끝내는 날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 나갈 테다
나를 가두고 있던 내 몸으로부터
어둡고 갑갑한 감옥으로부터
나무에 붙어 잎이 되고
가지에 매달려 꽃이 되었다가
땅속으로 스며 물이 되고 공중에 솟아 바람이 될 테다
새가 되어 큰곰자리 전갈자리까지 날아올랐다가
허공에서 하얗게 은가루로 흩날릴 테다
나는 서러워하지 않을 테다 이 세상에서 내가 꾼 꿈이
지상에 한낱 눈물 자국으로 남는다 해도
이윽고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
그때 가서 다 잊었다 해도



레미 드 구르몽 / ‘눈’
시몬, 눈은 네 목처럼 희다.
시몬, 눈은 네 무릎처럼 희다.
시몬, 네 손은 눈처럼 차다.
시몬, 네 가슴은 눈처럼 차다.
눈은 불의 키스에 녹지만
네 가슴은 이별의 키스에만 녹는다.
눈은 소나무 가지 위에서 슬프지만
네 이마는 밤색 머리카락 아래서 슬프다.
시몬, 네 동생 눈은 정원에 잠들어 있다.
시몬, 그대는 나의 눈 또한 내 사랑이다.
설야(雪夜)
김광균/시인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여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의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기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찬란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눈 속에 핀 꽃(雪花)
내 삶의 흔적들 모두 지워져
순전한 나 자신 만날때
나 홀로 기준이 되리라
나마져 사라지는지, 남게되는지
사랑은 늘 영원치 아니하여
희미한 그림자만 남긴채로
꿈인듯 생신듯 다가서봐도
불현듯 내 가슴만 꼬집는구나
과거는 또 다른 미래
추억은 동굴속 횃불이 되리
어느 먼 훗날 다시 만나게되면
다정도 병인양 하여,,
사랑의 본성자리 생명의 정원에서
생명의 꽃 피우기로 하자
알프스 눈속에 고고히 핀 설화(雪花)
응답하라 에델바이스 !
이 겨울에 그대 홀로 이른 봄빛
성긴 가지 끝에 달빛 걸치고
건듯 바람에 조용히 향기 뿌린다
아름다운 그대, 눈 속에 핀 꽃
靑薔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