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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광성 문학의 고향은 어디일까?
그의 정서의 뿌리는 잃어버린 유년의 꿈의 세계와 어려서 여윈 어머니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누나의 손을 잡고 월남한 실향민이다. 그런데 월남 후의 생활상이 그의 작품 어디에도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왜일까? 유미주의자인 그에게 고단했던 삶의 모습은 차마 언급하기 싫었을까?
그가 살았던 삶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 <달팽이>이다. 여기에서는 작가가 글의 마지막에 달팽이는 바로 작가 자신임을을고백하고 있다.
새처럼 비상하려는 달팽이, 가늘고 긴 목에서 벌레 소리 같은 어떤 슬픈 소리가 나올 것 같지만, 끝내 아무 소리도 내지르지 못하는 달팽이. <달팽이>에서 그 달팽이는 바로 작가였던 것이다.
"여름도 다 끝나려는 어느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달팽이의 이상한 몸짓을 보았다. 억새풀의 제일 높은 곳에 한 방울의 이슬처럼 위태롭게 맺혀 있었다. 목은 길게 솟아올랐고, 조그만 입은 약간 벌어졌으며, 꽃의 수술 같은 두 개의 눈은 긴장되어 있었다.
마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의 어떤 가수처럼, 나뭇가지를 떠나려는 순간의 새의 자세처럼 보였다. 아무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 투명한 달빛이 조그마한 몸을 비추고 있었다.
밀폐된 유리벽의 저편에서 키가 작은 한 남자가 울고 있는 것을 나는 보고 있었다."
ㅡ달팽이 중에서
작가는 달팽이를 보면서 "집이라도 한 칸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집도 찬찬히 뜯어보면 허술하기 이를데 없다. 시늉만 해도 바스라질 것 같은 투명한 껍데기일 뿐이다. 그 집은 그의 고향이 바다였다는 증거이다. "먼 조상들 중 호기심 많은 한 마리가 어느 날 처음 뭍으로 올라왔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달팽이는 실향민의 후예다. 그가 그러했듯이.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육지에서 사는 달팽이의 목과 눈은 물달팽이의 그것보다 훤씬 가늘고 길다. 슬픔도 내림이라, 수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조상들의 슬픔으로부터 그들은 자유로울 수가 없는 모양이다. 실향민의 후예, 달팽이는 늘 외로움을 탄다. 어디 좋은 친구 하나 없을까?"
ㅡ <달팽이> 중에서
나는 손광성의 수필을 읽으면 슬퍼진다. 모든 글쟁이의 초기 작품은 자기 고백이다. 과거의 응어리를 고백함으로써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여 자기 구원을 얻거나 최소한 자기 치료를 한다. 그러나 그는 차마 자기의 과거를 고백하지 못했다. 문학마저도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 그의 자존심이 거절한 것이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누나를 따라 떠나온 자존심 강한 소년이 겪었을 온갖 간난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었을까. 그가 입을 열어 과거를 말한다면 마음 속에 곰삭이며 어눌러왔던 한이 울음이 되어 통어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차마 말하지 못하리라.
"달팽이는 뼈도 없다." "달팽이는 이빨도 없다."
그도 그렇게 살았으리라.
"발달한 것은 감수성뿐"
민감하기로는 미모사보다 더하다. 사소한 자극에도 몸을 움츠리고 이마를 스치는 바람에도 고개를 숙인다. 비겁해서가 아니다. 예민해서요, 수줍어서이다. 동물이라기보다 식물에 가깝다. (중략) 달팽이는 언제나 긴 목을 치켜들고 길을 떠난다. 현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어떤 비밀의 문이라도 찾고 있는 것일까. 방황하는 영혼, 고독한 산책자.
ㅡ 달팽이 중에서
그는 고독한 산책자로 낯선 세상을 살았다.
다만 가시며 그루터기며 사금파리 같은 현실, 맨살로 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현실이 그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육체의 고통이 때로는 영혼의 해방을 가져온다고 믿는 어느 고행승과도 같은 그런 표정으로 그저 묵묵히 몸을 움직일 뿐이다.
ㅡ 달팽이 중에서
그는 이 세상을 바스라질 것 같은 집 한 채를 등에 지고 맨살로 밀며 살아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를 지탱했던 것은 유년기의 아름다운 추억이다. 추억은 긴 세월 동안 탈색되어 현실감을 상실한 채 아름다운 세계로만 존재하게 된다.
우리가 살던 마을 앞에는 큰 제재소가 하나 있었다. 그곳에는 소나무와 전나무와 이깔나무와 그리고 자작나무 같은 아람드리 원목들이 넓은 공터에 늘 산더미처럼 쌓여 있곤 했는데, 그 거목들 만큼이나 우람한 어깨와 완강한 팔뚝을 가진 인부들이 이마에 땀을 번득이면서 사철 목재를 운반하고 있었다.
'헹야, 헹야'
'헤야라 헹야!'
'헹야, 헹야'
'헹야라 헹야!'
졸음을 몰고 오던 저 단조로운 반복음들.
인부들의 살갗에서 풍겨오던 저 건강한 땀 냄새. 그리고 술 취한 사람의 얼굴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태양의 열띤 숨결.
무엇이고 다 잘라버릴 듯한 기세로 흰 강철 이빨을 번쩍이던 회전톱의 위협적인 웅얼거림.
그러다가 원목을 들이대면 깊은 잠에서 기분 좋게 깨어나듯, 거인의 하품 소리와도 같이, '쏴아아아' 하고 후답지근한 여름 공기를 잘게 가르며 울려 퍼지던 상쾌한 마찰음. 그리고 나무의 마지막 남은 부분이 둘로 갈라질 때, '팡'하고 터지던 저 경쾌한 파열음.
ㅡ <냄새의 향수>중에서
" 인부들의 살갗에서 풍겨오던저 간강한 땀 냄새"는 실제로 그가 맡았던 땀 냄새가 아니다.
소년은 인부들이 쌓아놓은 원목더미 위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인부들이 무거운 원목을 나르며 걸음을 맞추기 위해서 소리냈던 "헹야 헹야"의 반복음은 소년에게 졸음을 몰고 왔다.
소년은 그 소리가 처자식을 굶겨 죽이지 않으려는 삶의 신음소리임을 아직은 알지 못한다.
이제 세월이란 탈취제에 의해서 냄새는 없어져버리고 소리로만 남았다. 반복음들, 땀 냄새, 숨결, 웅얼거림, 마찰음, 파열음. 여섯 문장이 이 소리의 명사들로 종결되었다. 이것은 이 작가가 얼마나 언어의 숨결에 민감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문장은 호흡이다.'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또 한 가지는,
이 작가는 자기가 의도한 이미지가 완성될 때까지 주도면밀하게 묘사를 밀고 나간다는 것이다. 제재소를 구경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시각적인 것들이 나무를 켜면서 나오는 굉음들 때문에 묻혀버린다는 것을, 언어로 제재소를 그릴 때는 시각적으로 그려서는 안되고 청각적으로 그리는 것이 정답인 것이다. 그는 지금도 가끔은 꿈속에 나타나 그리움으로 목메게 하는 유년의 기억들을 소리로 재현시겨 놓았다. 이것은 단순한 소리의 열거가 아니라 그가 부른 한 맺힌 망향가였던 것이다.
눈이 많이 오는 나의 고향에서는 아람드리 원목을 실은 기차가 가파른 함경선 철로 위를 오르지 못해서 밤새 올라갔다가는 미끄러지고 다시 올라갔다가는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런 날 밤은 언제나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는데, 꿈 속에서도 기차는 올라갔다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고, 미끌어지고...
그러나 아침에 깨어서 나가보면 기차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ㅡ<아름다운 소리들>중에서
그리고 그 소리는 조금 철이 들었을 때 미지의 세상을 향해 떠나라는 재촉의 소리로 들렸다.
"떠나라! 떠나라! 외쳐대던 저 증기기관차의 기적 소리. 목이 감긴 그 소리가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가."
(아름다운 소리들)
아이는 수많은 넘어짐 끝에 걸음마를 배우고 뛸 수 있다. 우리의 정신 또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한다. 한 세계를 깨고 또 다른 세계로의 성장은 독수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아픔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성장의 신비는 이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이별이 자발적 동력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물 밖의 세계가 약육강식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의ㅈ현장인데도 기꺼이 우물 밖으로 나와서는 전투에 휩쓸려 찢기고 깨지고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이다. 그 우물 안의 아늑함을그리워하면서.
그가 여덟 살에 처음 보았던 바다는 그의 문학의 영원한 고항이다.
여덟 살의 사내아이였던 내 앞에 전개되어 있던 나의 최초의 바다는 몹시 성이 나 있었고, 발정기에 든 암말처럼 번들거리며 나를 향해 돌진해오고, 또 오고...그러다가는 호소라도 하듯
내 발 아래 허연 거품을 쏟고는 다시 물러가고...그리고 헛되이 거품만 남기고 아득히 수평선이 되어 돌아서 갔다.
지금도 바다는 나의 유일한 자연이고 결코 정복될 줄 모르는 나의 영원한 여성이지만, 여덟 살에 받은 감동과 경이는 이제 기억 속에서나 가능할 뿐이다.
그후의 모든 바다는 유년기 바다의 복사판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찝찔한 해초의 냄새와 함께 바다는 언제나 내가 돌아가야할 고향으로 거기 그렇게 지금도 누워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ㅡ <냄새의 향수>중에서
일곱 살 때 내가 본 최초의 바다는 하나의 경이였다. 스물이 되었을 때 바다는 어느새 늘 함께 하고 싶은 갈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이제 노년의 고갯마루에서 지금 나는 다시 나의 바다를 본다. 바다는 그의 젊음으로 내 나이를 지우고 그의 커다란 눈물 속에 나의 작은 눈물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침내 바다는 그의 품안에 나의 존재마저 말없이 보듬는다.
ㅡ<바다>중에서
손광성의 내면을 알기 위해서는 그가 "돌아가야 할 고향"이라고 말했던 바다의 정체를 밝혀내야 한다. 바다는 그가 내면 깊숙이 숨겨놓은, 지금까지 침묵하도록 강요당해온 그의 무의식의 세계다.
여덟 살 때 그가 처음 본 바다는 하나의 경이였다. 그것은 잔잔하고 평온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어머니 같은 바다가 아니었다. "몹시 성이 나 있는 포효하는 바다"였다. 그렇다면 그런 바다의 이미지는 마땅히 남성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맹랑한 소년에게 바다는 '발정한 암말'이었다. 내가 맹랑한 소년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초점화(focalization)를 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쓴 말이다.
구조주의자의 눈으로 보면 '발정한 암말', '호소라도 하듯' 등의 서술은 소년의 시선이 아닌 성숙한 3자의 시선인 것이다.
"발정기에 든 암말처럼 번들거리며 나를 향해 돌진해오고", "호소라도 하듯 내 발 아래 허연 거품을 쏟고"
"결코 정복될 줄 모르는 나의 영원한 여성"
"늘 함께 하고 싶은 갈망의 대상"
이런 육감적이고 패기에 찬 남성적인 문장이 손광성의 부드럽고 화려한 유미주의적인 문장 속에 숨어 있을 줄이야.
나는 고등학생 때 미당의 환갑 기념 강연을 들은 일이 있다. 그의 시 <동천> 을 읽으며 유미주의 극단을 본 것 같은 충격을 받았던 나는 과연 그가 어떻게 생겼나 보고 싶었다. 그의 시처럼 등치는 작고 선이 가는 가냘픈 여자처럼 생겼을까? 그러나 그가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무대에 나타났을 때, 그 걸음걸이의 당당함이라니.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그의 미 세계가 과연 "그답다"라고 그를 인정했었다. 그의 여성적 유미의 세계는 타고난 천성의 자연발로가 아니라, 판소리꾼이 오랜 수련 끝에 득음하듯 그렇게 얻어낸 미 세계라는 것이다.
나는 손광성의 바다를 보고 그의 남성상을 확인했고, 그의ㅈ미 세계가 과연 "그답다"라고 또 한번 인정하고 말았다.그의 유미주의는 타고난 여성상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강한 남성상을 산화시켜 피워낸 불꽃이었던 것이다.
손광성 문학의 또 다른 고향은 어머니이다.
그의 형수와 누나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그런데 그의 여인들은 모두 그를 떠났다. 어머니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이승의 사람이 아니고 <나의 어머니>, 누나는 시집을 가고<누나의 붓꽃>, <돌절구>에서는 6.25때 헤어졌던 셋째 형수의 이야기가 나온다. 형수와는 조국의 분단으로 영영 이별을 했다. 딸들은 시집을 가고, 평생 네 번의 사랑을 했지만 그 여인들도 사랑 고백 한 번 해볼 기회도 주지 않고 떠났다.
갑산으로 가신다고 떠난 형님은 석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폭격은 날로 심해지고, 울는 피난길을 떠나야 했다. 형수님은 친정으로, 나는 아버님이 계신 둘째 형님 댁으로 가고 잏었다. 빨갛게 익어가는 사과밭을 지나면 갈림길이 나온다. 우리는 거기서 헤어져야 하는 것이다. 나는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정자나무가 나오고 그 정자나무만 지나면 내 모습이 보이지 앓으리라. 뒤통수에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내가 막 정자나무 뒤로 사라지려는 순간 멀리서 형수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되련님, 몸 조심하셔요...아버님 말씀도 잘 듣구요..."
나는 돌아다보지 않았다. 저녁 해를 등지고 계시리라.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았다. 울고 계실까.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ㅡ <돌절구>중에서
슬픔의 미학. 나는 이별을 이렇게 가슴 아프게 표현한 글을 보지 못했다. 슬픔을 억제함으로써 절실한 슬픔을 자아내었다.생략의 효과를 그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 같다.
<발자국 소리>에서 작가는 2층의 자기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 골목 어귀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둘째 딸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대문 빗장을 열어 주려고 계단을 내려간다. 그러나 현관에 도달하기 전에 걸음을 멈추고 만다. 대문 앞에서 멈춰야 할 발자국 소리는 대문을 스쳐 지나가버린 것이다. 아, 딸은 시집을 갔다. 그는 층계에 주저앉고 만다.
나는 이제 손광성의 문학 얘기를 끝내려 한다. 그는 분명 수필의 한 봉으리의 정상에 선 사람이다. '수필은 고백의 문학이다'라는 정의는 그에게만은 맞지 않다. 그는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한 마디도 고백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훌륭한 수필을 썼다. 그것은 그의 수필이 서사를 거부한 서정의 세계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그는 피천득의 제자다.
그는 구술의 언어로 글을 쓰지 않는다. 그는 묘사의 언어로 글을 그렸고, 그 묘사는 이미지를 창출했다. 그 이미지는 그의 삶의 배경이 되고 더 나아가 삶에 대한 그의 독특한 해석이 된다.그리고 그것을 삶에 빗대어 해석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정확한 묘사가 구축한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으로 끝나지 않고 문학의 진리에 접근한다.ㅇ어쩌면 그만큼 생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문학에 땀 냄새나는 인생이 없다는 것은 커다란 약점일 수도 있다. 그가 어머니에게 들었던 한 도사의 이야기가 있다.
제자들이 말을 듣지 않자 도사는 산수화 한 폭을 그린 다음 그 그림을 엎어버리자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도사는 산수화 그림 속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예감했을 때, 어머니가 그 그림 속으로 들어가버릴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리얼한 삶의 모습이 빠진 문학은 산수화의 그림이 될 수도 있다.
손광성 문학은 한 루트를 올라가 히말라야의 한 정상에 찬란한 깃발을 꽂았다. 나는 지금 정상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자랑스럽게 쳐다보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스스로를 자위하고 독려하고 있다. 히말라야에는 8,000 m가 넘는 정상이 14좌나 있다구. 정복해야 할 산이 아직도 13좌나 남아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