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글은 블로그`누루하치에서 퍼날라온 글들입니다
누루하치는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일본에 유린당하자
조선에
"부모의 나라를 침략한 쥐같은 왜구를 죽이겠다" 는
요지를 담아 3만명 병력의 퍄병을 제의하며
그가 東夷族의 후예로서 조선족과 형제임을 떳떳하게 밝혔다
하지만 이미 지나족과 한 패거리가 된 조선은 이를 거부하고
반대로 명과 함께 후금을 핍박하기에 이른다
그 뒤에도 계속 누루하치는
조선에 함께 연합하여 명을 칠 것을 요청해 왔지만
조선의 대답은 항상 오랑캐와 손을 잡을 수 없다는 말 뿐이었다
결국 조선의 이런 썩어빠진 사대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후금은 군사적 수단을 취하였고
그것이 두 번의 조선공격으로 이어졌다(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결국 조선은
홍타이시(皇太極청나라 2대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가 되었다
스스로 小中華가 되어 兄弟族을 핍박한 벌을 받은 것이다
본래 청태조`누루하치가 청나라와 조선은 형제로 보고
서로가 예우(禮遇)로써 대하고자 하였으나
조선의 조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7세기 당시 중국대륙에는 기울어져 가는 명나라와 날로 부강해지는
후금(후에 국호를청나라로)이 서로 중국대륙을 놓고 한창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를 섬겼던 조선은 후금을 적대시하여
후금으로 부터 첫번째 침략을 받게된다.
1627년의 이 첫번째 침략이 바로 정묘호란으로서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약속을 하고 양국관계는 다시 회복이 된다.
하지만 이후에도 조선은 겉으로는 후금과 형제지국을 지키는 것으로 보였
지만 실상 명나라를 따르며 명나라를 지원하였습니다.
1632년 드디어 후금은 만주 전역을 차지하고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공격하
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관계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戰馬 : 전투에 쓰일 말) 3,000필과
군사 3만명등을 요구하였습니다.
1636년 2월에는 후금의 사신 용골대·마부태 등이조선을 찾아와
조선의 신사(臣事: 신하의 도리)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계속 후금에 대해 강경한 자세로 대합니다.
이에 홍타이시가 대로하여 쳐들어와
한강 상류 삼전도에 주필(駐蹕 :임금이 잠시 머무름)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선 국왕 인조를 삼전도로 나오게 하여
홍타이시에게 신하를 뜻하는 푸른색 관복을 입고
머리를 땅바닥에 9번을 찧는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치러도록 했다
삼전도비는 그것을 증언하는 역사적 산물이자 기념비다.
삼전도비(三田渡碑) :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번지(당시 경기도 삼전도)에 있는
청나라의 전승비이며 송덕비(頌德碑)이다.
병자호란 때 승리한 청나라 태종이 자신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요
구하여 1639년(인조 17년)에 세워졌다.
몽고문·만주문·한문의 3종 문자로 같은 내용을 담은 것은 이 비뿐이다.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도 부른다.
이후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처음, 누루하치와 그의 후손들은 형제족의 나라인 조선과 함께
지나족을 정복하여 함께 나라를 세우고 경영하기를 염원하였어나
삼전도에서 항복한 이후에도 조선이 面從腹背하며
명나라에 대한 事大主義 정신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이를 단념하고 만몽일체(滿蒙一體)주의로 방향을 틀어버린다
여진과 몽골은 그 거주지역이 다르기는 하였지만
중원지역 바깥에 있다는점에서 명에게 서로 다를 바 없는 외이(外夷)였다.
과거 정치세력들간의 결혼은 그 자체가 정치적인 행위였으며
건국 직후의, 後金 역시 다르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여진의 귀족들과 몽골 유력부(部)들간의 통혼을 적극 권장한다
몽골과의 통혼정책에 있어 누르하치는 솔선수범하여
자신의 가문과 몽골 왕공들과의 혼인을 추진하였다.
예를 들어
1608년에 코르친부는 건주여진의 공격을 맞아 건주의 병력이 강력함을 알
고 싸우기 보다는 사신을 보내 통혼의사를 누르하치에게 타진하였고 누르
하치는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1612년, 누르하치는 코르친부 밍간 바이러[貝勒, 부장(部長)이라는
뜻]의 딸을 맞아들인다.
밍간은 보르지긴[博爾濟吉特]씨로서 몽골의 왕족이었고 몽골 왕족 중에서
는 건주와 혼인을 맺은첫 번째가 되었다.
3년후 1615년에 누르하치는 역시 보르지긴씨인 쿠르친콩구르 바이러의 딸
을 맞아들였다.
누르하치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주요 아들들에게도 몽골 왕족과 귀족들
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게 하였다.
후일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청의 태종(太宗)이 되는 홍타이지[皇太極,
1592~1643] 역시 세 아내 역시 모두 보르지긴 가문의 몽골왕족이었다.
그 중 두번째 부인이 순치 말기와 강희 초기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가 된다.
누르하치의 둘째 아들인 예친왕(禮親王) 다이산[代善, 1583~1648] 역시
결혼한 뒤였지만 보르지긴 출신의 부인을 얻는다.
제 14자인 예친왕(睿親王)이자 이후 순치제의 황부섭정왕(皇父攝政
王)이 되는 도르곤[多爾袞, 1612~1650]의 부인 열 명중 다섯명이 몽골인이
었다.
누르하치의 15자 왕자인 예친왕(豫親王) 도도[多鐸, 1614~1649]의
정부인 역시 몽골인이었다.
이처럼 몽골인들은 후금의 건국기부터 귀족이자 왕비족으로
청 황가(皇家)의 주요 세력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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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허생전' 에 보면 그 經世之才(남산골 센님)는 이렇게 말한다
"삼전도의 굴욕을 설욕하기 위한 북벌의 大戰略에는
큰 3가지 방략이 있는데
그 첫째가 조선의 왕가와 모든 귀족 과 양반들이
청나라의 황가와 귀족, 공경대부들과 통혼을 하여
완전히 淸`家族化 해야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가"
<> 누루하치와 만주족 1백만명은 1억 인구의 지나족을 굴복시키고
中原全土 와 티베트, 몽고, 만주, 대만, 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세우게 된다
<>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경계선은
만주족의 淸나라가 확장해 놓은 영토경계선 그대로 인 것이다
<> 지나온 史를 주욱 훑어보면
지나족들은 저렇게 큰 영토를 지배해 본 적이 없으며
다스릴 능력도 없었다
첫댓글 남한산성을 자주 가보게 되는데
최명길 주화파의 주장과 척화파의 주장을 봄ㄴ
작금의 [여야당의 ] 당론 분쟁을 보는 듯합니다.
남한 산성으로 피신도망 가서 몇달도 안되어
혹한과 식량부족으로
항전도 못하고
삼전도에가서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아 찧고
개처럼 수모를 당했으나....
조정대신들은 정신을 못차렸었지요 아마....
남한산성에서는 적의 포위 속에 있으면서 화(和)·전(戰) 양론이 팽팽이 맞서다가 주화론이 우세해 인조의 出城 ㅡㅡㅡㅡ 허나 和親派 나 斥邪派 나 - 이들이 논쟁하고 주장했던 것은 모두 ‘爲民의 길’ 과 ‘爲國의 길’ㅡㅡㅡ작금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與野간의 다툼과는 차원을 달리한 ---- 준엄했던 조선朝廷의 기상과 절개
아쉬움과 탄성이 나오네요. 또한 지식의 변경을 확장하는 즐거움도 더하여~~~.
만주를 놓친것은 탄식 이상입니다~~~. 조선 왕조는 지탱했을지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