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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직접행동Ⅰ
하워드 클락(HOWARD CLARK)쉐릴 크라운(SHERYL CROWN)안젤라 맥키(ANGELA McKEE)휴 맥퍼슨(HUGH MacPHERSON)
◆ 역자 주 : 이번 호부터 대략 1년에 걸쳐 소개할 번역글은 ‘평화뉴스(Peace News)'*와 ‘핵무장해제운동 출판(CND Publication)'**이 1984년 당시 영국의 핵무기, 핵전쟁 반대 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벌이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비폭력직접행동에 관해 소개한 팜플렛(Preparing for nonviolent direct action)이다. 이 팜플렛은 직접행동의 기초개념에서부터 어떻게 직접행동을 준비해갈지, 그리고 실제 영국에서 벌어졌던 직접행동의 사례들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영국의 핵잠수함 반대운동 ‘트라이던트 보습만들기(Trident plough shares)’나 죽음을 무릅쓰고 이스라엘 정부의 불도저를 막아서는 ‘국제연대운동(International Solidarity Movement, ISM)’의 활동 등 이미 해외의 많은 사례들이 소개되어 직접행동이란 말이 어느 정도 익숙한 것 같다. 하지만 우리에게 직접행동은 그 한 장의 멋진 사진으로만 기억될 뿐 직접행동의 의의와 그 철학에 관해서는 논의된 바가 없다. 그래서 2004 평화캠프에서 비폭력트레이닝을 받았던 캠프 참가자들은 하나의 비폭력직접행동, 캠페인이 준비되는 과정에서의 치열함, 치밀함에 놀랐던 경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단지 언론에 보이기 위한 한 장의 사진이 아니라 직접행동은 평등, 민주주의, 개인의 책임감과 동급의 언어이자 부조리한 사회현상은 민중의 힘으로만이 끊어낼 수 있다는 선언이다. 비록 오래전 팜플렛이기 하나 이번 번역글이 우리 스스로가 직접행동에 대해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사람들은 흔히 “비폭력직접행동(nonviolent direct action)”을 핵을 반대하는 “진정한 행동” 으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착각일 수 있다. 직접행동은 어떤 행동의 최정점 혹은 다양한 캠페인 방법들 중 으뜸이 아니다. 다른 많은 캠페인들과 마찬가지로 직접행동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목표는 제한되어 있다. 직접행동을 고려할 때는 현실적으로 이 행동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또 사용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 혹은 심지어 더욱 효과적인 다른 어떤 것이 있는지 두루 생각해봐야 한다. “비폭력직접행동”이란 말은 공군기지 봉쇄(blockade)를 위해 사람들이 길거리에 앉아있는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직접행동은 개인이나 혹은 그룹이 변화를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대신 스스로가 직접 행동하는 모든 활동을 말한다. 성당에서 원자력발전을 추진하자는 설교를 방해하는 것도 직접행동이다. 반면 교구의 주교에게 호소의 편지를 쓰는 것은 간접적인 행동이다. 어느 쪽이든지 그 이슈를 알려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방해 행위 혹은 봉쇄와 같은 물리적 개입은 직접행동의 한 형태이다. 이와 같은 행동은 파업, 보이콧, 캠페인 등을 통해 우리의 주장을 펼치는 것이자 협력을 거부하는 것이다. 또한 직접행동은 건설적일 수 있다. 어떤 핵에너지반대 그룹은 중앙 집중적인 에너지 공급에 대한 의존을 줄이기 위해서 직접행동의 하나로 가정용 절연설계를 전파하였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몸담고 있는 산업을 군사적인 것에서 사회적으로 유용한 생산으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공식화하였는데 이것 또한 건설적인 직접행동의 실천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직접행동은 현존하는 제도로 회피하든 혹은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든 혹은 특정 위협에 대해 저항하든지 간에, 더 낳은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스스로 관리하겠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힘에 기대는 대신 사람들은 직접행동을 실천하면서 그들 스스로의 힘을 찾으려 한다. 이것은 특정 농장에서 만든 상품에 대한 보이콧을 선언하는 것처럼 개인적인 책임을 실천하는 작은 규모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나 직장에서 비협력(non-co-operation)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면서 그러한 실천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다. 스스로 만들고 실천한 이러한 직접행동의 힘은 사람들로 하여금 직접행동을 실천할 수 있도록 또 다른 사람들을 조직할 수 있게 만든다. 핵관련 회사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게 저항행동 혹은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 연대행동을 제안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핵군축 캠페인은 직접행동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핵전쟁에 반대하는 직접행동위원회(Direct Action Committee Against Nuclear War)’는 ‘핵무장해제운동(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 CND)’이 만들어지기 전인 1957년 결성되었다. 런던에서부터 올더마스턴(Aldermaston)의 핵무기 공장까지 행진을 조직했을 뿐만 아니라 핵실험과 미국 미사일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직접행동을 실천하였다.
1960년대 초반, 핵전쟁에 반대하는 직접행동위원회는 런던과 공군기지 주변의 대규모 연좌시위 등을 계기로 ‘백인위원회(Committee of 100)’로 전환되었는데 이는 보다 규모가 큰 조직이었다. 핵무장해제운동의 국가주의적 리더쉽(당시 핵무장 해제운동은 직접행동을 반대했다)과 백인위원회의 논쟁이 무엇이었지 간에 많은 핵무장해제운동 활동가들은 당시 전통적인 캠페인과 시민불복종 시위 혹은 “공공연한 비밀”로 회자되던 직접행동 두 가지 모두에 관계했다. 핵무장해제운동이 활동을 재개한 이래로 사람들은 다시 직접행동에 호소하였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몇몇 평화캠프(peace camp)와 브리젠드(Bridgend) 벙커 봉쇄(역자 주 : 브리젠드 벙커 봉쇄에 대해서도 앞으로 소개가 됩니다)였다. 그 봉쇄는 성공적으로 정부 계획을 방해했다. 민방위(civil defence)를 일시적으로 혼란시키는 것에서부터 핵폐기물의 위험성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까지, 또 크루즈(Cruise)와 트라이던트(Trident)에 반대하는 행동까지 더욱 많은 사람들이 직접행동들의 범위에 대해 고민하였고 핵무장해제운동은 그린햄(Greenham)과 북부 헤이포드(Heyford)의 미공군기지의 봉쇄를 후원하였다. 당시엔 크루즈와 트라이던트 도급자들에 대한 비협력 캠페인도 진행되었다.
직접행동에는 수많은 접근법이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 직접행동은 표 찍는 기계에서 벗어나 책임감을 획득하는 것이자 그들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직접행동을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 보기도 한다. 이 팜플렛의 저자들인 우리는 전통적인 수단들이 모두 쉽게 소진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며 직접행동은 다른 행동들의 대용수단이 아니라 힘의 특별한 원천으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직접행동은 다른 형태의 행동에 의지, 호소하고 그러한 행동들에 기초하지 결코 다른 방법들을 불필요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몇몇 사람들은 직접행동을 실천하는 것에 어떤 심리적 압박을 느껴왔던 것처럼 보인다. 처음 콘월(Cornwall)지역의 럭져리안(Luxulyan)에서 원자력 부지를 점거(역자 주 : 이 점거에 대해서도 앞으로 소개가 됩니다)했을 때 그 점거를 시작했던 사람들은 그 이전까지 한 번도 이러한 행동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비록 반핵 캠페인 경험은 없지만 자신의 총역량을 던져 헌신하려는 이들에 의해 몇몇 평화캠프는 준비되었다. 이렇게 준비된 직접행동은 캠페인에 새로운 중요성을 불어넣을 수 있고 그 헌신성에 감동할 수도 있다. 이러한 감동은 사람들에게 쉽게 전파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장기간의 캠페인 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는 이러한 한결같은 희생에 기댈 수 없다.
성공적인 캠페인은 광범위한 계획과 다양한 차원의 실천을 통해 이룰 수 있다. 보통 직접행동은 캠페인에 통합되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한편으로 이러한 행동을 통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되는가, 일시적 감정을 무작정 따라가는 것보다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고려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행동을 조직하기 위해 어떠한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 긴급 상황까지 기다리기보다 오히려 직접행동의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보통 위험성이 별로 없는 소규모 행동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것을 시작으로 점점 확산시켜나가며 또한 우리 스스로가 직접행동을 실천할 준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상징적 행동종종 직접행동의 힘은 그 상징성 및 관련이슈에 관한 비판 능력에 있다. 수천 개의 비회수용 병을 반환받는 과정에서 ‘지구의 벗(Friends of the Earth)’의 재치 있는 행동은 어떤 점에서 사소한 불편을 초래했으나 쓰고 버리는 심리의 상징, 방탕의 이미지처럼 서있는 빈병더미는 스위페스(Schweppes)사(역자 주 : 카드버리 스위페스(Cadbury Schweppes)사는 1781년 세워진 대표적 영국기업으로 음료와 제과 회사이다)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때때로 직접행동 프로젝트는 여러 가지 사회 그룹으로부터 온 수많은 사람들의 중심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핵실험 구역에 배를 띄우는 프로젝트는 1957년 첫 시도되었는데, 이 프로젝트로 나라 전체는 엎질러진 물에 대한 죄의식 속에 빠졌다. 1982년 5월, 프랑스 해군이 ‘태평양 피스메이커(Pacific Peacemaker)’호와 격돌하고 구금했을 때, 그 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수변노동자연합시드니지부(Sydney Branch of the Waterside Workers Federation)’는 항구의 프랑스 컨테이너 선적선에 대한 공사금지령을 내리고 태평양 피스메이커호가 항해하는 것을 돕기 위한 기금을 기부하는 것으로 프랑스에 복수했다.
많은 사람들이 빈집점거(squatting)이라는 직접행동을 통해 스스로 주거를 마련하는 등 직접행동은 상황을 변화시키고자 할 때 그 자체로 효과적일 수 있다. 또한 설득력 있는 상징성은 실제 문제로서 빈집점거의 권리를 확립하는데 도움을 준다. 빈집점거운동은 1960년대 후반 지역 의회에 창피를 주고 지방행정관들의 괴롭힘과 퇴거명령으로부터 자신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 하였다.
군사/핵시설은 어느 날 갑자기 중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안된 행동들을 결정함에 있어서 “단지 상징적일 뿐”이라는 평가는 불필요하다. 오히려 그 행동의 상징성의 힘이라는 관점에서 가능한 효과를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권위주의를 낳게 하는 직접행동 문제들을 살피고 그 행동이 우리의 장기적인 목표에 부합하는지, 뿐만 아니라 어떻게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 행동의 목적을 명확히 하는 것은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며, 또 그것은 참가자들에게 장기적인 캠페인에서 하나의 행동이 가지는 의미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을 돕는다.
시민불복종빈집점거나 파업처럼 직접행동은 종종 합법적이다. 이와는 다르게 시민불복종은 그 문제에 관해 얼마나 강한 억압을 느끼는지 보여주거나 혹은 특정 법에 대한 모욕을 선언하는 것으로 고의로 법을 조롱한다. 법 개정을 위해 고의로 법을 무시하거나 직접행동을 통해 법을 어기는 것처럼 종종 행동은 직접행동과 시민불복종 모두가 된다.
시민불복종을 실천하고 그 결과로 고생하는 것을 통해 시위대들은 종종 지배층과 제3자(TV 시청자, 신문독자 등) 모두의 본성에 호소하려 한다. 고생을 자처하는 그들의 의지는 동정심을 살수도 있고 중립적인 사람들이 왜 그들은 그러한 희생을 감수할까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갖도록 촉진할 수도 있다.
동시에 시민불복종은 저항의 한 형태이자 “정상성(normality)”이라는 틀을 깨뜨리는 것이며 심지어 국가가 어떤 정책을 통해 “명령”하려 한다면 국가권력에 위협을 가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시민불복종을 통해 시위대는 그러한 해악을 중단할 것을 표명할 수 있고 시위대로부터 핵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단속과 형사상의 방법들을 거부할 것을 표명할 수 있다. 때때로 이러한 태도는 사람들이 구속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또한 이것으로 인해 직접행동에 대한 “값싼 홍보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민불복종에 대한 이러한 접근법은 몇 가지 문제를 야기 시키는데 첫째, 경찰에 시위대를 체포 하는가 마는가, 법원이 시위대를 감옥에 보내는가 마는가, 그리고 언론이 “뉴스”로 간주하는가 마는가에 직접행동의 효과가 달려있을 수밖에 없다. 둘째, 시민불복종이 주류언론에서 기사의 가치를 잃게 되었을 때 기사는 줄어들게 되며 이것에 의해 효과가 좌지우지된다.
물론 때때로 이러한 행동은 강력한 저항의 메시지를 전달 수도 있다. 우려지점들을 언급하는 것은 이러한 시민불복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불법적인 행동을 고려함에 있어 너무 쉽게 접근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불법적이던 아니던 어떠한 시위에서도 시위대는 그들이 처하게 될 위험성들을 알고 있어야 하며 체포되는 사람들을 위한 지원 시스템이 미리 조직되어 있어야 한다.
시민불복종에 대한 또 다른 접근법은 간디로 상징되는 것으로 그러한 행동은 시민정신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 즉 불복종을 실천 하는 사람들은 좋은 시민(good citizen)으로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불법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 법을 따르는 것이 보다 범죄적일 때가 있다. 1982년 히로시마의 날 웨딩턴(Waddington) 영국공군(RAF) 기지에서 체포되었던 여성들 중 한 명인 주디스(Judith)는 수년 동안 법정 진술에서 수많은 시민불복종의 의견에 대해 표명했다. “우리는 불타고 있는 집에서 아이를 구출하기 위해 문을 부쉈습니다. 우리는 법적으로 부술 수 있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경찰이 그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우리를 법정에 세운다면 당신은 부정의한 법에 대해 소름끼치는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것은 상상 속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더욱 심각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불에 타 죽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없지만 우리는 지구 전체가 불에 타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비폭력 직접행동 Ⅱ
하워드 클락(HOWARD CLARK)쉐릴 크라운(SHERYL CROWN)안젤라 맥키(ANGELA McKEE)휴 맥퍼슨(HUGH MacPHERSON)비폭력 행동
직접행동은 폭력적 행동과 심지어 무장투쟁까지 포괄할 수 있는 다양한 범위의 행동과 행동 방법이다. 우리는 비폭력직접행동이 운동의 상징적 힘을 강화할 수 있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참가를 촉진하고, 비폭력을 통한 소통방법이 폭력보다 바람직하다는 믿음으로 비폭력직접행동을 옹호한다. 이는 반대자들과 중립적인 제3자 모두에게서 보다 낳은 반응을 이끌어낸다.
비폭력은 타인에 대한 불살생(non-injury)의 최소한의 수단을 의미한다. 직접행동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종종 타인의 안전에는 위험을 주지 않으면서 본인들 스스로 물리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빠지고 싶다는 의향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최소한의 원칙을 넘어 사람들은 비폭력에 대해 종종 모순 되는 가정을 가지고 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이 명확하지 않고 합의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비참해질 수도 있다. 그것을 단지 그럴 것이라고 추측하고 마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면 그 행동은 “비폭력행동”이며 특정한 정신 혹은 동의된 질서 하에서 수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비폭력은 인류애와 변화에 대한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는 반대자에 대한 태도를 의미한다. 보통 이러한 태도는 반대자와 그들의 사회적 역할 사이를 구분하려 노력하며 이것의 기반위에서 공통지반에 의거해 소통하려 노력한다. 핵 기지를 지키는 경찰, 가족과 친구의 운명에 관계없이 민방위(civil defence)계획에 찬성하는 의회의 최고의장 등 때때로 이것은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인정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보통 최대한 의사소통을 위해 노력하지만, 침묵시위 혹은 누군가를 멀리하기로 하는 의식적이고 정식적인 결정처럼 간혹 대화중단은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때때로 이러한 중단은 주요하다. 만약 시위도중 경찰이 도청을 하려 한다면 시위대는 합의를 통해 결정을 내리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위대를 분열시키기 위해 뭔가가 시도되고 있다면 때때로 그러한 방법은 대화하지 않기 위해 필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은 말고 “책임자”와의 대화를 하려는 것에 의해. 혹은 대규모의 대표단을 요구했으나 만약 담당자들이 한두 명하고만 얘기하려 할 때, 혹은 협상을 하기 전에 몇 가지 양보를 요구했을 때.
비폭력행동에서 시위대는 종종 반대자나 혹은 반대적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 호의를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1978년 11월, 토네스(Torness) 원자력본부에서 근무 중인 경찰이 차에 치여 부상을 입었을 때, 그 경찰은 시위대로부터 회복을 기원하는 카드, 꽃, 과일들을 수도 없이 많이 받았다. 이것은 지역 경찰들에게 토네스 동맹(Torness Alliance)1)과 관계된 미래의 업무에 실질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스스로의 분노를 억제한다는 의미라면 때때로 호의를 보이려고 하는 스스로의 자세가 더 많이 필요하다.
간디는 비폭력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위해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라는 운동을 주창했다. 글자 그대로 이것의 의미는 “진리의 장악”이다. 그리고 마틴 루터 킹은 이것을 “진리의 힘” 혹은 “영혼의 힘”이라 해석했고 이러한 비무장 진리를 부정의와 압제의 무장한 힘과 경쟁시켰다. 이러한 태도는 때때로 본질적인 원칙으로서 완전무결한 정직함과 솔직함이 비폭력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은 때때로 약간의 속임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안다. 예를 들어 관계자들이 원하지 않는 어떤 곳에 카메라나 유인물을 몰래 가지고 들어가는 등 어떤 종류의 기습시위냐에 따라 종종 이런 비밀주의는 필요하다.
비폭력의 관례는 종종 재산상의 손실을 가져오기도 한다. 재산손실이라는 이러한 결과는 평화적인 시위와 전쟁국가의 파괴주의 간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라는 물음을 낳게 되며 심지어 평화시위에 대한 폭력을 유발하고 차츰 이러한 분위기를 상승시킨다. 그러나 물론 어떻게 끝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사보타주나 펜스를 파괴하는 행위 자체는 본질적으로 폭력적이지 않다. 실제로 1981년 미국에서 핵 기지에 침입해 미사일의 원뿔형기수(nose cone)를 해머로 부숴버렸던 ‘플로우쉐어스 8(Plowshares Eight)’2) 멤버들은 스스로 이미 폭력을 조장하고 악용되어왔던 것들을 자연으로 되돌리는 것이라 간주했다.
만약 비폭력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도와 생각이 다르다면 그것을 실천하는 동기와 수준을 고려해야 한다. 몇몇 사람들은 비폭력은 단순히 전술적인 실천(tactical commitment)이란 생각을 하고 있으며 실용주의적인 동기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은 비폭력행동이 목적을 달성하는데 일정정도 이바지하는 측면이 있으나 나중에는 이를 버리게 될 것이라 주장한다. 평화주의자들은 비폭력이 도덕적 실천(moral commitment)이라 생각한다. 몇몇 사람들은 비폭력을 정치적이고 개인적인 행동 모두에 적용되는 기본원칙(guiding principle)이라 보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간디와 최근 영국에서 평화뉴스(Peace News) 그룹을 중심으로 한 “비폭력 혁명론자들(nonviolent revolutionaries)”과 관련이 있다.
이 팸플릿의 저자인 우리들은 핵 반대 투쟁에서 비폭력의 전략적 실천(strategic commitment)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것은 각자의 개인적인 신념이 무엇이건 간에 ‘이 캠페인에서 우리는 비폭력이라는 수단을 고수할 것이다’라는 원칙에 동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비폭력행동은 일부 사람들이 경찰과 싸우는 것과 같은 행동을 “높은 수위의 투쟁형태”로서 사고하는 것에 대한 근거를 명확하게 하고 있지 않다.
폭력적인 행동은 거의 기계적으로 의견들을 분산시키며 분쟁을 양분화 시킨다. 이에 반하여 비폭력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려고 노력한다. 폭력적인 전술은 대체로 젊은 사람들, 남성들처럼 신체적인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비폭력은 모든 공동체, 그리고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의 언어일 수 있다.
비폭력 전략은 사람들이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개인적인 책임감을 획득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그들 스스로의 삶의 방법을 인식하는 것이 전쟁기계, 그것에 도전하려 하는 것,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돌아보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비폭력의 정신을 퍼뜨리는 것이다.
비폭력적인 질서를 지속하는 것에서 회의 결의, 조직의 지시, 내부 규율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이것이 이 팸플릿에서 우리가 개인적 책임을 강조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이것은 또한 사람들이 함께 행동하는 방법을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강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는 작은 그룹을 조직하고 행동하는 것과 비위계적인 작은 그룹들의 연합을 통해 사람들은 아이디어와 기술들을 더 잘 공유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대부분의 시위에서 사람들은 종종 삼삼오오 모인 속에서 고립감을 느끼거나, 그저 매우 혼잡한 익명의 군중 속의 일부로 느낀다. 이러한 군중들은 쉽게 그리고 종종 교묘하게 폭력적 상황에 직면하게 되거나 이러한 상황을 야기 시키기도 한다. 작은 그룹들 속에서 사람들은 큰 규모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다 잘 대비할 수 있다. 중앙집중을 강제하는 규율보다 작은 그룹의 자기 규정적 결속력이 공포를 조장하는 시도에 대해 보다 저항력이 있다.
비폭력직접행동 트레이닝
사람들에게 “비폭력 트레이닝”에 대해 얘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것이다. 이것은 캠페인이나 행동을 계획하고 비폭력직접행동을 스스로 준비하는 그룹의 능력을 강화하는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적으로 수대에 걸쳐 사람들은 별다른 트레이닝 없이 성공적으로 비폭력직접행동을 실천해왔다. 비폭력행동에 트레이닝이 필요 없다는 것에는 의문점이 없었다. 그러나 트레이닝은 굉장히 다양할 수 있다. 행동을 결정할 때 어떤 “트레이닝”은 아마도 그리고 명백하게 지금까지의 틀에 박힌 방법들보다 재치 있는 대안을 조성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훈련들은 그 행동의 유용성을 평가하는데 도움을 주며 그것을 실행에 옮길 명석한 계획을 만드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 어떤 행동을 준비할 때 만약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준비가 덜 되어 있다면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주목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비폭력직접행동은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보다 확신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공통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그룹들에 의해 실행되었을 때 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이것이 트레이닝을 하는 목적의 일부분이다. 만약 설명한 방법 중의 일부가 별로라고 생각된다면 최소한 같은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다른 방법들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종종 트레이닝은 미국식 은어로 나쁜 쪽으로 신비화되거나 귀에 거슬리게 표현되어 왔다. 우리는 이것을 의식적으로 피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비폭력 트레이닝에 대한 최초의 토론은 1930년대 인도의 간디주의자들(Gandhians)과 영국의 평화주의자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강조할 것은 자기교육(self-education)과 정신적인 준비성이다. 1950년대와 60년대 초반 미국의 시민권 운동은 직면할 어떤 상황들을 예상하는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그들이 직면한 폭력과 공격에 성공적으로 대처했거나 최소한 그러한 영향을 잘 극복할 수 있었다. 당시 영국 핵무장 해제운동의 직접행동파는 우리가 현재 트레이닝이라고 부르는 방법을 조직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운동을 하면서 배우는 것에 관한 광범위한 토론과 요약들은 트레이닝과 같은 목적을 담당하였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과 최근의 핵 반대 운동은 교사훈련, 여성해방운동, 집단상담 등에서 방법을 빌려와 트레이닝을 발달시켰다. 트레이닝은 뉴햄프셔(New Hampshire) 시브룩(Seabrook) 핵발전소 점거와, 캘리포니아 디아블로계곡(Diablo Canyon)의 핵발전소 봉쇄(blockade)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영국에서는 몇몇 평화캠프와 핵 발전 반대 운동에서 트레이닝이 직접행동의 중요한 임무를 담당해왔다.
*평화뉴스(Peace News) :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ar Resisters' International, WRI)에서 3달에 한 번 발행하는 평화잡지
**핵무장해제운동(CND) : 2차 세계대전이후 각 국이 앞 다투어 핵무기를 보유하려던 시기, 영국 내 핵무기보유를 반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
1) 옮긴이 : 영국 반핵그룹들의 협력체. 당시 토네스는 영국 유일의 녹지대 원전이 위치해 있었다.2) 옮긴이 : 뉴욕에서 온 작가이자 시인, 예수회 신부인 다니엘 베리건(Daniel Berrigan), 볼티모어 요나의 집(Jonah House)의 공동설립자이며 신부인 필립 베리건(Philip Berrigan), 뉴헤븐의 평화공동체서약(Covenant Peace Community) 회원인 딘 해머(Dean Hammer), 뉴욕에서 온 전 대학교수이자 뮤지션인 엘머 마스(Elmer Maas), 선교사이자 노동수사인 칼 카밧(Carl Kabat), 뉴욕에서 온 선생님이자 성심수녀회 수녀인 앤 몽고메리(Anne Montgomery), 피츠버그의 토마스 머튼 센터(Thomas Merton Center)의 설립자이자 수녀원장인 몰리 러쉬(Molly Rush), 전 해군이자 법률가인 존 슈차트(Schuchardt)로 구성된 액션그룹. 이들은 요나의 집 수녀님, 신부님들과 함께 제너럴 일렉스릭(General Electric)사의 핵미사일 기지에 침입해 2개의 원뿔형기수를 부수고 자료들에 붉은 물감을 쏟아 붓고 평화를 위한 기도를 했다. 그들은 10가지가 넘는 죄목으로 체포되었으며 5년에서 10년 형이 선고되었고 23개월 반을 복역하고 1990년 가석방되었다.
첫댓글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