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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윤복희의 간증
빗 속 뒤집혀진 차 안으로 찾아 온 주님
스스로 딴따라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윤복희 권사.
고속도로의 사고
1976년 2월 28일 새벽 전주에서 공연을 끝내고 대구로 가는 길에 나는 하나님의 빛을 체험했다.
그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나는 인기와 모든 것을 쾌조의 속도로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짜릿한 흥분과 박수 속에 살고 있었다. 나는 무엇이 죄인지도 몰랐고 또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나대로 충분히 행복했다.
그런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셨다. 차는 비가 내리는 고속도로를 거침없이 달렸다.
규정 속도를 훨씬 넘은 속도로 차가 달리는 순간 내 차는 뒤집어지고 말았다.
샤프트가 부러지고 차는 공중제비 돌듯 두 바퀴나 돌면서 반대편 차선으로 날아가 뒤집힌 채 내리 꽂혔다.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였다. 그렇게 뒤집은 차를 향해 트럭이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다가왔다.
트럭은 내 차와 충돌했다. 모든 것이 선명했다.
이 때 나는 빗줄기 내리는 어두운 하늘에서 빛을 보았다. 섬광 같이 날이 선 빛이었다. 빛이 나를 뚫고 들어왔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을 것이라는 속삭임 같은 느낌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갑작스런 현기증을 느꼈다. 마치 싱싱한 피를 마신 것 같이 피 냄새가 목구멍으로 스몄다.
쏴아 하게 스미는 하얀 안개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고는 대구에서 김천 못 미친 곳에서 일어났다. 하나님이 그렇게 내게 들어오셨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고 차량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다들 난리가 났다. 나는 문을 열고 내렸다.
그리고 젖은 아스팔트 위에 무릎을 꿇었다.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압도되어 있었다.
'그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을 했다. 손을 모으고 하늘을 향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기도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만 해도 기도가 무엇인지를 잘 몰랐다.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나중에 알았다.
순찰차가 왔다, 뒤를 이어 구급차도 오고 크레인을 단 정비차도 도착했다. 뒤집어진 차의 바퀴는 헛돌고 있었다.
넋을 잃고 무릎을 끊고 있는 나를 보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기적이다!" 사람들이 박수를 쳐댔다.
공연과 상관없는 박수를 처음 받아보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사고 난 차를 뒤로 하고 공연 스케줄을 때문에 순찰차를 탔다. 뜻 없이 내리는 눈물은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오후 공연이었는데 대구에는 11시쯤에 도착했다.
차 사고로 얼굴에 약간의 타박상을 입었다. 그래서 거즈로 이마의 상처를 가렸다.
하지만 도저히 호텔 방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시내로 나가 무작정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대구 시내를 쏘다녔다.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유명인사가 된 뒤로 거리를 한 번도 그렇게 당당하게 활보하면서 사람들을 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바라보지 못했던 이웃들의 얼굴들이 보였다.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랑스러운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너무 기뻐 아무나 붙들고 손을 잡았다. 사람들이 처음으로 사랑스러워 보였다.
저녁 공연이 시작될 때 나는 젖은 몸으로 무대에 올랐다.
비가 오는데도 극장 안은 입추의 여지없이 공연을 보려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공연이 시작하려는데 이상하게 천둥이 몇 번 치더니 전기불이 나갔다. 갑작스런 정전, 급하게 횃불이 켜졌다.
나는 원래 쇼의 첫 머리에 '캄캄한 이 거리 누굴 찾아 여기 왔나'라는 노래를 부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노래를 부르기가 싫었다. 전기가 나간 탓에 밴드들도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캄캄한 무대의 횃불 아래서 나는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마이크 힘을 빌리지 않고 그야말로 생짜 노래를 시작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영어로 된 가스펠이었다.
반주도 없이 조명도 없이, 청중으로 가득한 대구 극장에서 노래를 불렀다. 모여든 관객들은 열광을 했다.
누군가는 내 노래를 따라서 같이 불렀다.
공연이 끝난 뒤 호텔 방에서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저 사고 직후의 일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고속도로에서 생긴 일들이 또렷이 다시 재생되었다.
내 마음속에서는 그 고속도로에서 나를 붙든 것은 주님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가 나를 어루만졌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만큼 죄악 덩어리인 나를 찾으시기에 급했다는 생각도 했다.
위기의 순간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불렀다고 믿음이 생겼다.
다음날 혼자서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혼자하는 생소한 여행이었다.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왜 저 사람들을 몰랐을까? 왜 나는 '나'밖에 몰랐을까? 또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기차를 타고 자리에 앉자마자 내 인생이 필름처럼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너무 생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죄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을 죄라고 깨닫게 됐다. 나는 여러 번 임신하고, 공연을 핑계로 낙태했다.
한 남자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던 것도 간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기차 안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엉엉 울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성령님이) 곽규석 아저씨(나중에 목사님이 되셨고, 지금은 천국에 계신다)에게 전화를 걸라고 부추겼다.
이유는 잘 몰랐다. '아침에 걸지 뭐' 그렇게 생각하고 잠을 청했다. 그분은 내게 처음으로 성경책을 선물하신 분이다.
아침에 벨이 울렸다. 곽규석 아저씨라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나야." 역시 곽규석 아저씨였다.
"서대문 노라노 예식장 건너편에 아시아 연합신학대학교가 있거든, 응, 한 시에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한 시에 나오라는 전화를 받았지만 더 기다릴 수 없었다. 참을 수가 없어 그냥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갔다.
한 시 약속이었는데 내가 도착한 시간은 열한 시였다. 그냥 털썩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뜰에는 목수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마당에 있는 나무 쪼가리에 끈을 묶어 십자가를 만들었다.
그리고 목에 찼다. 약속 시간에 곽규석 씨가 젊은 청년이랑 왔다. 그분은 하용조 전도사였다.
대중 문화를 구원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연예인 성경공부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고 했다.
"잘 왔어."
"기다렸어요."
일행은 조그마한 예배실이 있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빛이 환하게 드는 방이었다.
하 전도사는 내게 성경책을 주면서 사도행전을 읽으라고 했다. 그냥 읽는데 눈물이 났다.
어떻게 하나님은 2천년 전에 나 같은 것을 위해 이런 글을 써놓으셨는가? 나를 위한 이야기가 거기에 쓰여 있었다.
마구 울었다. 평생 처음으로 내 입으로 부르는 찬송가가 울려 퍼졌다.
비로소 뜨거운 무언가가 내 속에서 꿈틀거리면서 나를 일깨웠다. 놀라운 일을 알게 되었다.
신학교를 갓 졸업한 하 전도사는 연예인 성경공부를 준비하면서 생면부지의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쳐버린 윤복희
6살부터 시작한 무대가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고 말하는 윤복희 권사.
고속도로 사고가 있었던 뒤로 한 주간 동안 내 삶이 통째로 바뀌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3월 첫 한 주간은 나에게 숨 막히는 시간으로 회오리쳤다.
해와 달과 온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암흑과 궁창과 죄와 어둠으로 찬 나를 다시 빚은 위대한 창조의 한 주간이 된 것임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훨씬 뒤였다.
그 때부터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내 삶이 얼마나 엉망이었던가를 돌이켜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내 삶의 중심이 바뀌어 버렸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내가 경험한 놀라운 빛의 경험을 증거했다. 내 말에 모든 사람들이 어리둥절했다.
윤항기 오빠는 '복희가 돌았다'며 윽박질렀다. 신문 기자들까지 모아 놓고 내가 미쳤다며 살리자고 야단이었다.
1976년 3월 21일자 일간 신문들은 '윤복희 정신 착란의 내막'이란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윤 씨가 이상한 나무 십자가를 만든다며, 그 십자가를 증거물로 사진을 찍어 게재했다.
내 몸속에서 울리는 새로운 노래들이 마치 경건한 종소리처럼 내 속에서 출렁인다는 말을,
집 근처에는 교회당이 없어서 종소리가 들릴 턱이 없는데 환청을 듣는다는 식으로 쓰여 있었다.
수많은 팬들이 신문사로 전화를 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윤항기 오빠도 '복희가 지금 정상이 아니다'고 인터뷰에 응했다.
오빠는 울먹이면서 연예인 윤복희로서가 아니라 자연인 윤복희는 지금 정신병원에 수용되어서 보호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호소의 글을 신문에 게재토록 했다.
사람들이 나를 두고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할 만했다.
딴따라 인생
나는 여섯 살 때부터 무대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정부의 정책과 반대되는 공연을 하다가 결국 방해공작으로 빚쟁이로 전락했다. 그리고 손대기 시작한 마약으로 인해 결국 죽음의 길을 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유랑극단을 따라나섰다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마약을 끊기 위해 수용소에 가셨을 때 무대를 찾았었다.
운명적인 이끌림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출연료를 받아 아버지에게 금성 캐러멜을 한갑 사드리고 싶어서였다.
아버지는 수용소에 들어가면서 잘 아는 분에게 항기 오빠와 나를 맡겼다.
우리는 날마다 끼니를 잇지 못하며 살아야 했다.
예배당을 나간 것도 밀가루로 구운 과자를 받아먹기 위해서였다.
주일학교에서 주린 배를 움켜 잡고 할렐루야를 찬송했다.
큰 목소리로 찬송을 부르는 아이에게는 밀가루로 만든 과자를 나눠주었다.
밀가루를 구워 만든 과자는 코끼리나 붕어 모양을 하고 있다.
아주 토실토실 잘생긴 코끼리나 붕어 모양이었다.
어떤 날은 교회에서 그 밀가루로 사탕을 나눠 주었다. 사탕을 받기 위해서는 정말 본격적으로 노래를 했다.
목구멍에서 창자가 쏟아지도록 소리를 질렀다. 영오니 영오니(영원히) 주를 찬송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아편 중독자들이 금단 현상이 오면 가장 먹고 싶어 하는 것이 사탕이었기 때문이다.
밀가루 과자는 내가 먹고 사탕을 타서는 아버지께 갖다 드려야 했다.
걸어서 마약 환자 수용소 가는 길에 하도 먹고 싶어서 한번은 사탕 한 알을 쪼개서
작은 쪽은 내가 먹고 큰 쪽은 아버지께 갖다 드린 적도 있다.
그러나 내가 돈과 이름을 함께 얻게 되었을 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세상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 두 분은 돌아가셨다. 돈도 밀가루 과자도 금성 캐러멜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악착스럽게 돈을 모으지 않은 것도 그 이유였다. 돈이 미웠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돈이 싫었다.
찾아 오셔서 내 인생이 되신 하나님
2006년 4월 26~28일 사흘간 총 3회에 걸쳐 서울 반포동 센트럴시티 밀레니엄 홀에서
`AGAIN…`(가제)이란 이름으로 단독 콘서트를 갖는 윤복희 권사 포스터
내 멋대로 산 딴따라 인생의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여러 번 찾아 오셨다.
교회에도 계셨고, 아버지의 산소에도 계셨다. 곽규석 아저씨가 주셨던 성경책에도 계셨다.
월남전의 참혹한 전쟁터의 위문 공연 가운데도 하나님은 내게 신호를 보내셨다.
내 광야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구원의 메시지'를 보내셨던 그 하나님이 어느 날 빙산이 내려앉듯이 쿵 하니 그렇게 내 삶의 길 앞에 우뚝 서셨다. 그 분은 거부할 수가 없는 내 전부이셨다.
윤복희 무대 50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하나님은 나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 많은 이들을 구원하셨다.
한 번은 몸이 너무 아파서 머리가 빠지는 병에 걸렸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런데 MBC 방송국에서 국제가요제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고 승낙을 했다.
그렇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어떻게 할지 몰라 병상에서 기도를 했다.
가사를 만들면서 하나님 너무 외롭고 힘들다고 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만약 외로울 때면, 서러우면 내가 네 눈물이 되어 주마"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것을 그대로 가사로 만들어 노래를 했다. 그 곡이 바로 '여러분'이라는 노래이다.
내가 호흡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누구보다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90년도에 피터팬 무대에서 공연하다가 군함대가 부서진 일이 있었다.
배에서 무대 바닥으로 뛰어내렸다가 척추 두 개가 다쳤다. 너무나 아팠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돈, 명예에 몰두했다면 나를 데려가 주시고 아버지를 위해 노력했다고 보이시면,
나사로도 살리신 하나님께서 들어간 뼈를 하나 빼는 데 뭐가 힘드세요. 고쳐주세요."
나는 4년 동안 오른쪽 손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주로 왼손을 사용했다.
그런데 그날 사고로 주저앉아 있다가 목이 너무 말라 오른손으로 주전자를 잡았다.
순간 나는 놀랐다. 그러는 사이에 내 몸 오른쪽 안에서 신경이 살아나는 일이 일어났다.
몸 안이 밤송이가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몸 안에 신경이 가렵기 시작하자 어쩔 줄 몰랐다.
손이 닿는 피부라면 긁기라도 하는데 살 속 신경들이 요동을 치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내 몸이 깨끗이 나았다.
여성으로서, 공인으로서 크리스천으로서 매니저 없이 일을 해 나간 것은 굉장히 힘들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부족한 내 형편을 아시고 선교와 공연을 할 때 모든 것을 챙겨 주신다.
어느 날은 공연 준비를 하기 위해 물건을 챙기다 보면 옷핀도 챙길 때가 있다.
나중에 보면 다 이유가 있다. 공연을 하다 보면 치마 뒷단이 뜯어져 있을 때가 있다.
그래서 옷핀으로 뜯어진 곳을 이어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하나님은 참으로 세밀하시다.
내가 힘들 때 안고 가 주시고 짜증부릴 때 업고 가 주신다. 하나님은 내 호흡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시고 내 따뜻한 이불이시고 배고플 때 채워주시는 음식이시고 목마를 때 물이 되어 주신다. 나는 막달라 마리아보다 더 한 여자였다.
그런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네게 있어 소망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다.
많이 일해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 열심히 일해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
그것에 대한 기다림과 조바심으로 내 삶은 오늘도 벅차 오른다.
(윤복희 권사 2006.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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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가 만약 괴로울때면 내가 위로해줄께
네가 만약 서러울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때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여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여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2.
네가 만약 외로울때면 내가 친구가 될께
네가 만약 기쁠때면 내가 웃음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때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여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여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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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러분 가사를보며 혼자 노래를 부릅니다,,,눈물이 올라오며 목이 떨립니다,,나도 참 외로운데...부모도 형제도 멀리하며 사는데... 아,,하나님이 아시는구나,,,하나님이 내 형제구나,,,목사님이 내손을잡고 신년기도를 해주시며"외롭게하지말아달라'고 주님께 기도해주셧었는데...
귀한 간증 감사합니다. 여러분 노래 들으면 눈물이 절로 나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