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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한(阿富汗-敖罕)의 조선(朝鮮) 백성(百姓)들과 멱리(冪䍦)[제2편]
2021년 07월 24일
○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시대(時代)에, 부녀자(婦女子)들이 얼굴(面)을 가리는 의상(衣裳)을 착용(着用)했다는 것은, 이미 수천(數千)년 전부터 행해져온 풍속(風俗)이다.
이는 자연환경(自然環境)과 밀접(密接)한 관계(關係)가 있다. 즉(卽) 사막지대(沙漠地帶)나 또는 그 인접(隣接)한 땅에서, 풍사(風沙)로부터 몸을 보호(保護)하기 위해 남녀노소(男女老小)를 불문(不問)하고, 천으로 머리로부터 얼굴을 가린 것이 그 시초(始初)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환경(自然環境)속의 풍속(風俗)이 토벌(討伐)군이나 정벌(征伐)에 의해, 또는 대상(隊商)등에 의해 전파(傳播)되었으며, 뒤에는 변천(變遷)되어, 귀부인(貴婦人)들의 얼굴과 신체(身體)를 감추기 위한 의상(衣裳)으로 바뀌었고, 특히 대식(大食)에서는 이런 풍속(風俗)을 율법(律法)에 명시(明示)하여 부녀자(婦女子)들의 얼굴과 신체(身體)를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도록 감추기 위한 것으로 변질(變質)되어 진 것이다.
따라서 ‘멱리(冪籬)-멱리(羃䍦)-흑멱리(黑冪籬)-몽수(蒙首)-너울(羅兀)’등으로 불리는 의상(衣裳)은, 본래(本來) 「서융(西戎)과 동이(東夷) 즉 구이(九夷)로부터 유래(由來)된 것이다.」 회교도(回敎徒)의 부녀자(婦女子)들이 착용(着用)하고 있는 “부르카[burka] 또는 히잡[Hijab]”등은 그 명칭(名稱)만 다를 뿐, 형태(形態)는 똑같다.
그렇다면 ‘동이(東夷) 즉 구이(九夷)’들 중에서, 한 종류(種類)의 이(夷)가 ‘서역(西域) 또는 서토(西土)’의 어디에 있었다는 말일까? 하는 의문(疑問)은 매우 객관적(客觀的)이고, 아주 합리적(合理的)인 질문(質問)이다.
[1] ‘아부한(阿富汗)·오한(敖罕)·아프가니스탄(Afghanistan)’과 ‘조선(朝鮮) 백성(百姓)’들!
※ 아프가니스탄과 주변국가들
‘아부한(阿富汗)=오한(敖罕)’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이라고 한다. 오늘날 이 땅은 “강대국(强大國)의 무덤(墓)”이라고 불리웠고, 이제 중국(中國)마저 그걸 뻔히 알면서도 무덤(墓)으로 기어들어 가려하고 있다.
오늘날의 국제정세(國際情勢)를 논(論)하고자 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는 이것으로 줄이기로 하고, 왜 갑자기 ‘아부한(阿富汗)·오한(敖罕)·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바로 이곳은 “3대 부족(部族)”으로 나라가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한 부족(部族)으로 조선인(朝鮮人)들이 있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본래 이곳 땅은, 불교(佛敎)가 대단히 성(盛)했던 곳이며, 근래(近來)까지도 많은 불교(佛敎) 유적(遺跡)들이 즐비하게 건재(健在)해 있었으나, 21세기 회교도(回敎徒) 텔레반(Taliban)에 의해 무자비(無慈悲)하게 파괴(破壞)되었다고 전해진다.
● 제1편에서, ‘멱리(羃籬 : 冪䍦)·흑멱리(黑羃籬)·몽수(蒙首)·너울(羅兀)’등에 대해서 고전(古典)의 기록(記錄)과 함께 그것이 융이(戎夷)【서융(西戎)과 동이(東夷:九夷)】로부터 유래(由來)된 것이라는 고증(考證)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은, 대부분(大部分) 설명(說明)하기를, “중국(中國) 당(唐) 때의 수복(首服)으로 페르시아(Persia)로부터 유래(由來)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명백(明白)한 역사왜곡(歷史歪曲)이요, 조작(造作)이다.
회교(回敎)가 탄생(誕生)하기 전부터 이미 부녀자(婦女子)들의 의상(衣裳)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페르시아(Persia) 또는 이슬람(Islam)로부터 유래(由來)되었다.”고 하는 말은, 오류(誤謬)다. 즉(卽) 조작(造作)이다.
가장 오래된 기록(記錄)이라는 “산해경(山海經)”은, 하(夏)나라 우왕(禹王) 또는 백익(伯益)이 저자(著者)라고 말한다. 혹자(或者)들은 이 기록(記錄) 속에 있는 내용(內容)이 오늘날의 기준(基準)으로 말하면서 “전설(傳說) 또는 판타지(fantasy) 또는 신화(神話) 같은 이야기로 평가절하(平價切下)하는 자(者)들이 있다. 이건 무지(無知)와 무식(無識)의 결과(結果)다.” 그 기록(記錄) 속에는 비유적(比喩的)인 표현(表現)과 당시(當時)의 철학(哲學)과 사상(思想)이 그대로 깃들여있는 것이다. 이걸 간파(看破)하지 못하는 현대인(現代人)들의 무식(無識)의 소치(所致)이다.
‘산해경(山海經)’의 기록(記錄)속에서도 ‘폐면(蔽面)’이란 말이 있다. 즉 ‘얼굴을 가린다.’는 뜻이다. 4, 5천년(千年) 전(前)에도 얼굴을 가리고 다닌 부족(部族)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제1편에서 설명(說明)한 것처럼 멱리(羃籬-冪䍦), 흑멱리(黑羃籬), 몽수(蒙首), 너울(羅兀)등의 원조(元祖)는, 융이(戎夷)【서호(西胡)와 동이(東夷)】라고 고전(古典)을 고증(考證), 설명(說明)하였다.
21세기(世紀) 우리나라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는 어떻게 설명(說明)을 하고 있을까?
➊ 「문화원형 백과사전 : 이는 본래 서역 부녀자의 쓰개였던 것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이라고 하였고,
➋ 「한국민속대백과사전 : 얼굴을 가리는 폐면(蔽面) 관습은 고대 서아시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서역(西域)과 당(唐)나라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멱리(羃䍦)와 유모(帷帽)가 유행하였고, 이것이 통일신라에까지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몽수(蒙首) : 고려(高麗)시대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쓰던 쓰개. 몽수(蒙首)는, 오호(五胡)의 서역 부녀자들의 두식(頭飾)으로 중국 수나라·당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왜 이런 폐쇄적(閉鎖的)인, 단편적(斷片的)인 역사해설(歷史解說)을 하고 있는 걸까? 이는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논리(論理) 때문일 것으로 판단(判斷)된다.
중국(中國)의 왕조(王朝)라고 가르치고 있는 수당(隋唐)이나 그 이전(以前)의 오호(五胡)시대(時代) 또는 그 이전(以前)의 여러 왕조(王朝)들의 역사서(歷史書)에서는 그 시원(始原)이 “융이(戎夷)【서호(西胡)와 동이(東夷)】로부터 나온 것이다.”라고 기록(記錄)해놓고 있는데, 이는 구당서(舊唐書)등 많은 고전(古典) 기록(記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전(古典) 역사서(歷史書)에서는 『융이(戎夷)【서호(西胡)와 동이(東夷)】의 영향(影響)을 받아, 제(齊)·수(隋)나라·당(唐)나라로 이어졌다.』고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한민국(大韓民國) 학계(學界)에서는, 수당(隋唐)의 영향(影響)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첫째는,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으로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해 놓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무지(無知)한 사대사상(事大思想) 때문이다.
자신(自身)들 선조(先祖)들의 풍속(風俗)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한 역사인식(歷史認識)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반도왕조(半島王朝)로 만들어 놓고 과거(過去)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을 하니, 따라서 그 해설(解說)도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되어 버린 것이다.
▶ 동이(東夷)는 즉(卽) 구이(九夷)다. 동방(東方)에 구이(九夷)가 있다는 말은, 곧 토민(土民)이었다는 것이고,
▶ 동방(東方)이란 곧 서방(西方)과 동방(東方)을 가르는 곳으로부터 동(東)쪽의 땅 모두를 말하는 것이고,
▶ 서방(西方)이란 또 동방(東方)과 서방(西方)을 가르는 곳으로부터 서(西)쪽의 땅 모두를 말하는 것이다.
동방(東方)과 서방(西方)을 가르는(基準) 곳이 “곤륜산(崑崙山)=총령(葱嶺)”이었다고 하였다. 【그곳이 오늘날의 ‘파미르(Pamir)’ 또는 ‘엘브루스산’ 또는 ‘지중해(地中海)’이든 결과(結果)는 똑같다.】
즉(卽) 『멱리(羃籬-冪䍦), 흑멱리(黑羃籬), 몽수(蒙首), 너울(羅兀)』등의 시원(始原)은, 동이(東夷) 즉 “구이(九夷)와 서호(西胡)”들이었다는 것이다.
[2] 오늘날의 인도(印度) 땅에 옛 ‘천축국(天竺國)’이 있었을까? 조선사(朝鮮史)에서는 천축국(天竺國)이 서토(西土)에 있었으니, 바로 ‘총령(葱嶺)=곤륜산(崑崙山)의 서(西)쪽에 있었다.’고 하였다.
이런 기록(記錄)에 따라, 오늘날의 인도(印度) 대륙(大陸)의 북방지대(北方地帶)인 ‘북(北)인도(印度)’ 땅은 누구의 터전이었을까?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땅이다.』
즉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Taklimakan 沙漠】의 서(西)쪽∼서장(西藏)의 최 서(西)쪽∼파키스탄(Pakistan) 북부(北部)∼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카불(Kabul)∼뉴델리(New Delh) 북방지대(北方地帶)로 이어지는 인도대륙(印度大陸)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아부한(阿富汗)이 있었다.”고 하였다.
즉 ‘아부한(阿富汗)=오한(敖罕)’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이다. 「이곳에는 큰 종족(種族)=부족(部族)으로 세 개의 부족(部族)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조선족(朝鮮族)이었다.」고 하였다.
놀랍지 않은가?
오늘날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인 역사통설(歷史通說)로 보면, 불가능(不可能)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러한 땅에 어떻게 조선인(朝鮮人)들이 살고 있을까? 이러한 것들이 바로 “조선사(朝鮮史) 이야기”다.
즉(卽), 海國圖志 / 卷022 / 北印度各國 : 《瀛環誌略曰:阿富汗,波斯東境.明時裂波斯數城,自立為國.前此固統於波斯,別無名號也. : 영환지략(瀛環誌略)에서 이르기를 : 아부한(阿富汗)은, 파사(波斯) 동쪽 지경이다. 명(明)나라 때 파사(波斯)의 몇 성(城)이 무너졌는데, 자립하여 나라가 되었다. 전(前)에 이 나라는 파사(波斯)에 늘 통치를 받아서, 이름이 없었다. 世多傳其兼並溫都斯坦,今考溫都斯坦,乃五印度總名. : 대대로 전해지기를 그 나라를 온도사탄(溫都斯坦)이 겸병(兼倂)하였는데, 지금 상고해 보면 온도사탄(溫都斯坦)은, 다섯 인도(印度)의 총칭(總稱)이다. 又聞見錄雲,敖罕之人,種類不一,有與內地回子相似者,有與安集延相似者,有與土爾扈特相似者,有毛發拳曲,與峨羅斯相似者. : 또 문견록(聞見錄)에서 전하기를 : 오한(敖罕)인은, 한 종류가 아니다. 내지(內地)의 회자(回者)와 서로 같은 자가 있고, 안집연(安集延)과 서로 같은 자가 있고, 토이호특(土爾扈特)과 같은 자가 있는데, 손과 팔다리에도 털이 있고, 아라사(峨羅斯)와 서로 같은 자도 있다. 又一種人亦回子衣帽,須繞頰如蝟,而赤染以茜,其人多力善用木矛,西域人多畏之. :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회자(回者)의 의모(衣帽)를 하고, 수염이 뺨을 두르고 있어 고슴도치와 같다. 꼭두서니(풀)로 붉은색으로 물들이는데, 그 사람들은 힘이 세고 나무로 만든 창을 적절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서역(西域)인들이 다 두려워한다. 又一種人圓領大袖,衣冠類漢唐,貌清奇似朝鮮,人或謂是後漢之遺種雲. :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옷깃은 둥글고 소매는 넓고 크며, 의관(衣冠)은 한당(漢唐)과 같은 부류이고, 얼굴(貌)이 맑고 선명하고 뛰어난 것이 조선(朝鮮)인과 같다. 사람들은 혹 후한(後漢)【한(漢)의 후예(後裔)】의 유종(遺種)인가하였다. 又雲敖罕西域之大國,亦西域之亂邦 : 또 전하기를, 오한(敖罕)은 서역(西域)의 대국(大國)인데, 또한 서역(西域)의 어지럽고 질서가 문란한 나라(亂邦)이다. 》라고 하였다.
【영환지략(瀛環誌略)은, 청(淸)의 서계여(徐繼畬)가 1,849년[도광(道光)29년]에 전(全) 10권으로 편찬(編纂)되었다고 전해진다.】 :
여기서 ‘아부한(阿富汗)=오한(敖罕)’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지방이라고 한다. 이 땅에 조선인(朝鮮人)들이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문견록(聞見錄)」에서 전하기를 : 오한(敖罕)은, 넓은 땅에 세 종류(種類) 종족(種族)들이 살고 있었는데,
➊ 한 종류(種類)는 : 내지(內地)의 회자(回者)와 서로 같은 자가 있고, 안집연(安集延)과 서로 같은 자(者)가 있고, 토이호특(土爾扈特)과 같은 자가 있는데, 손과 팔다리에도 털이 있고, 아라사(峨羅斯)와 서로 같은 자(者)들도 있었고,
➋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회자(回者)의 의모(衣帽)를 하고, 수염이 뺨을 두르고 있어 고슴도치와 같다. 꼭두서니(풀)로 붉은색으로 물들이는데, 그 사람들은 힘이 세고 나무로 만든 창을 적절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서역(西域)인들이 다 두려워하는 자(者)들이 있었으며,
➌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옷깃은 둥글고 소매는 넓고 크며, 의관(衣冠)은 한당(漢唐)과 같은 부류이고, 얼굴(貌)이 맑고 선명하고 뛰어난 것이 조선(朝鮮)과 같았는데, 사람들은 혹 본시 후한(後漢)【한(漢)의 후예(後裔)】의 유종(遺種)인가 하였다는 무리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위에서 예를 든 종족(種族) 또는 부족(部族)을 보면 : 전형적(典型的)인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인종(人種)과 색목인(色目人)들이다. 그런데 유독 한 종류(種類)는 얼굴이 맑고, 선명(鮮明)하여 뛰어난 것이 조선인(朝鮮人)과 같다고 하였는데,
의관(衣冠)은 한당(漢唐)과 유사(類似)하고, 그곳 사람들은 혹(或) 후한(後漢)인(人)의 유종(遺種)이 아닐까 생각하였다는 뜻이다.
이를 쉽게 풀어 보면 ;
➊ “한당(漢唐)과 조선(朝鮮)은 같다”는 뜻이고,
➋ “조선인(朝鮮人)은 본시 얼굴(面)이 맑고 선명(鮮明)하며, 뛰어났다”는 것이고,
➌ “한인【漢人 : 後漢 : 한(漢)의 후예(後裔)】과 조선인(朝鮮人)은 같은 종족(種族)이었다.”는 뜻이 된다.
더불어 당(唐)의 재상(宰相)이었던 “두우(杜佑)”가 수십(數十)년을 통해 편찬(編纂)하였다는 대작(大作) “통전(通典)”에서도,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고창(高昌) 땅에 「고창국(高昌國)인들이 고려(高麗)인과 같다.」고 하였는데, 당시의 고창국(高昌國)은 최소(最小) 수천(數千), 수만(數萬)의 백성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땅에서, ‘멱리(羃籬)·멱리(冪䍦)·몽수(蒙首)’ 즉(卽) ‘흑멱리(黑羃籬)·너울(羅兀)’이 의상(衣裳)으로 착용(着用)되었다면, 그 후대(後代)인들의 기록(記錄)에서는 마땅히 “융이(戎夷)들로부터 유래(由來)한다.”고 했을 것이며, 이는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말하는 것이다.
● 오늘날이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및 서남아세아(西南亞世亞) 땅은, 옛 조선(朝鮮)이 터전(疆土)이었다는 증거(證據)다.
「오한(敖罕)=아부한(阿富汗)」은, 서역(西域)의 대국(大國)이었다고 하였다. 더불어 이 땅에 3개의 종족(種族)들이 나라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조선족(朝鮮族)이었다.”는 사실(事實)이다.
이 나라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이다. 물론(勿論) 그 땅은, 근세기(近世期) 열강(列强)들의 땅뺏기 경쟁(競爭)에 휘말려 국경선(國境線)은 강제(强制)로 만들어지고, 옛 땅은, 남의 나라 영토(領土)가 되어버렸다.
◎ 이 나라【오한(敖罕)=아부한(阿富汗)】를 이루고 있던 얼굴(貌)이 맑고, 선명(鮮明)하고 뛰어난 조선족(朝鮮族)은, 지금 어디에서 망국(亡國)의 설움을 달래고 있을까?
2021년 07월 24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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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땅에 조선족이 큰 부족을 이루고, 또 다른 두 부족과 큰 나라를 이루고 있었다는 기록은, 그 이전의 대진(大秦), 지중해 동쪽이 아세아 및 휴도국등과 염달국과 유연 등과 매치되는 이야기로,
비단산출과도 연관되는 이야기다. 이건 역사적 사실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고증할 수 있는 조선사 얘기다.
앞으로 더 많은 서토 땅의 조선과 관계되는 고전발굴을 위해 노력해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