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옥의 미
닭실마을로 널리 알려진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酉谷里)는 안동권씨들이 모여 사는 봉화의 대표적인 집성촌이다. 조선시대에는 내성현(奈城縣)에 속한 곳으로 본래 봉화(奉化) 지역에 해당되는 곳이지만 안동부(安東府)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마을에 안동권씨들이 모여 살게 된 것은 충재(沖齋) 권벌(權橃, 1478~1548) 이후라고 전한다. 권벌이 중종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때 파직을 당하여 물러나와 1521년부터 파평윤씨(坡平尹氏)의 터전이었던 이곳 내성(柰城) 유곡에 입향하여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닭실마을에는 권벌과 관련된 청암정(靑巖亭) 등의 유적이 여럿 남아 있다. 닭실마을이란 동네 이름은 이 마을의 지형에서 비롯된 것으로, 황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는 소위 금계포란(金鷄抱卵)의 형세로 이루어진 마을이 닭실마을이다. 『택리지』에 따르면 이곳 닭실마을은 경주의 양동마을, 안동의 앞내마을 및 하회마을과 더불어 3남의 4대 길지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닭실마을의 공간적 특성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옛길을 통해 마을로 들어가 보는 것이 좋다. 마을 진입로 옛길은 산사를 찾아가는 길처럼 개울과 산을 건너가는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마을 앞을 흐르는 내성천 계곡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오랜 시간 물에 깎여 다양한 모양으로 형태를 갖춘 바위들을 만날 수 있고, 맑은 계곡물 주변에 빽빽하게 들어찬 춘양목이라는 붉은 껍질의 소나무가 이루어내는 장관도 감상할 수 있다. 이 계곡 왼편 산기슭 바위에는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의 ‘청하동천(靑霞洞天)’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조금 더 오르면 충재의 큰아들인 권동보가 1535년에 지은 석천정사(石泉精舍)가 나타난다. 석천정사의 누마루에 걸터앉아 바위 뒤에 있는 석천의 약수를 마시면서 흘러가는 계곡물을 감상하노라면, 옛 사람들이 왜 거기서 시를 짓고 차를 마셨으며, 자연과 더불어 어떻게 정신을 가다듬었을지 짐작하게 된다. 이 석천정사에서 산을 뒤로 돌아들면 산 아래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고택들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닭실마을이다.
석천정사 앞 계곡을 따라 소나무 숲을 빠져나오면서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나타나는 마을의 전경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로, 마치 특별한 공간 속의 세계를 보는 듯 하다.
먼저 충재 권벌의 종택은 뒷산의 오른쪽 줄기인 마을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는데, 백설령의 암탉 꼬리 부분에 해당한다. 전면에 논이 있고 논길을 따라 좌우 세 칸의 문간채를 거느린 솟을대문이 서 있다. 이 가옥을 지은 권벌 선생은 선비로서의 강직함과 격조를 간직했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평소 『근사록』을 애독하였다고 하며, 을사사화 때는 홀로 문정왕후에게 나아가 당시의 삼대신(三大臣)인 윤임, 유간, 유인숙을 구하는 논지를 주장하다가 그 일로 평안도 삭주로 유배되어 별세하였다 한다. 이 집안은 근대에 들어와서도 독립운동을 돕다가 많은 어려움을 겪은 집안으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고택의 답사는 먼저 그 집안의 내력을 공부하고 정신적인 교훈을 얻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기 쉽다. 그런 이해와 교훈 위에서, 선조들의 정신과 철학이 건축적으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이 올바른 고택 답사의 길이다.
권벌 종가의 얼굴인 대문에서는 우선 풍수도참에 입각한 조형미가 느껴진다. 문인방과 문지방을 활처럼 휘어 낮에는 해가, 밤에는 달이 대문을 향해 들어오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 매우 흥미롭다. 특히 대문의 바탕쇠는 ‘만(卍)’자의 길상자와 ‘수복(壽福)’자가 좌우 문에 각각 투각되어 있는데, 문을 잠그면 수복이 표현되도록 한 장석의 배치 예술이다. 당시 대문의 장석은 아닐지라도 두석장이는 집 주인의 사상을 이해했을 것이기에 아이디어가 참 지혜롭다. 특히 문인방 위에도 벽사의 부적이나 살창 장식 없이 집안의 강직한 내력에 자신감을 얻은 도편수는 여백의 미로 웬만한 미의식의 소유자가 아니면 엄두도 못 낼 멋을 부렸다.
대문의 방향을 살펴보면, 안산의 암탉 배 부분이 보이도록 대문을 위치하고 있는데, 이 또한 대문이나 집의 방향을 잡을 때 풍수지리적인 것도 고려한 듯하다. 특히 이 가옥의 대문은 문지방과 문인방을 활처럼 휜 부재를 사용하여 드나들기 편리하도록 만들었는데, 이러한 편리한 배려는 둘 중 하나 정도는 한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법이다. 문지방과 문인방을 사용한 예는 이 집의 특징인데, 누구든 위아래의 휜 부재를 통하여 달이나 해를 형상화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 상부의 여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틀을 만든 이유는 집안의 여유와 자신감, 그리고 주변과의 화복에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흥미로운 표현이다. 대문채는 좌우에 한 칸씩의 온돌방을 두고 곳간을 좌우에 배치하고 있다. 이 대문에 들어서면 매우 넓은 사랑마당이 나온다. 이 마당은 청암정이 있는 정자 앞까지 연결되어 충분한 대지를 확보하고 있다. 특히 뒷산의 모양을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의도로 산의 줄기를 따라 담장 없이 산이 곧 담장의 역할을 하도록 하고, 전면의 대문채 좌우로만 담장을 두고 있는 점도 특이한 모습이다.
이 가옥은 폐쇄적인 ‘ㅁ’자 형으로 가운데에 정침으로 드나드는 중문을 두고 전면 우측으로 사랑채, 좌측으로 안사랑이 꾸며져 있다. 사랑채는 비교적 잘 다듬은 장대석을 3벌대로 쌓고 그 위에 네모나게 성글도록 다듬은 주춧돌을 앉혀 놓았다. 그 위에는 전면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첨차를 둔 인방을 걸어 장식적이고 우아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보머리에는 툇보와 수직으로 자르고 내부는 보 아래의 보아지를 초각으로 꾸며 놓았다. 또한 툇보를 걸어 반 칸 확대한 툇마루를 두었는데 툇보는 천장의 서까래와 같이 경사면을 따라 외주 기둥에 걸터앉은 모습으로 세련된 도편수의 조형적인 기술이 잘 나타나고 있다.
사랑채는 잘 다듬은 장대석 위에 세워져 있는데, 전면의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워 격조 높은 사대부의 위상을 표시하고 있다.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으로 되어 있는데 중앙의 좌우를 반 칸씩 늘여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고 뒷칸에는 한 칸 반의 공간을 방이나 대청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지붕은 홑처마로 되어 있다. 건물에 비례해 둥근기둥은 비교적 두꺼운 편으로, 홑처마와 창방 위에 첨차가 꾸며지면서 전통적인 사대부집의 중후하고 고상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사랑 기둥머리의 구조는 안측에서 내려온 툇보가 활처럼 곡선을 이루고, 기둥 위에서 전면은 단절되고 내면은 초각을 하여 간결하면서도 아름답다.
안채로 드나드는 문은 안대문과 안사랑 옆으로 난 협문, 그리고 사당으로 연결되는 문이 구성되어 있다. 특히 안채에 가려면 사랑 앞을 지나가는데, 사랑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안채를 엿보지 못하도록 안채 안대문 앞에 쪽담을 세우는 경상도 지방의 일반적인 구조 대신 이 가옥은 사랑채를 청암정이 있는 서쪽으로 두어 별도로 남자들의 공간을 처리하고 있다. 또한 바깥대문에서 안대문으로 다니는 방향을 약간 비켜 세워서 쪽담 없이도 안채를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차단하는 배치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안채는 경상도 지방에서 흔히 보이는 폐쇄된 ‘ㅁ’자형으로, 조선시대 전기 양식에서 볼 수 있는 커다란 판석 위에 납작한 갑석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강직한 느낌을 준다. 안채의 구성은 두 칸의 대청에 우측으로 두 칸의 안방을 두고 대청의 왼쪽으로는 건넌방을 두고 있다. 부엌은 안방의 날개채 쪽에 꾸며져 있는데, 전체적인 느낌은 화려하지 않지만 짜임새 있는 분위기를 준다. 안마당 조그만 화단에 심은 호박은 넉넉한 크기의 장독들과 어울려 종가집의 운치를 더해주고, 삶의 숨소리가 느껴져 아름답기만 하다. 안대청의 봉화 춘양목은 붉은 빛을 더하여 서까래 사이로 보이는 하얀 양회를 바른 우물천장과 어울려 한옥의 멋을 더해준다. 홑처마 지붕의 안채는 둥근 대들보가 네모난 기둥과 만나고 기둥머리를 받치는 보아지는 대들보와 같은 길이에서 직절하고 안쪽으로도 사절되게 짧게 받치는 모습이다. 장식적이지는 않지만 앞뒤를 다르게 함으로써 변화를 주어 고졸한 느낌을 준다.
고택의 사랑마당 끝에 별도의 담장에 있는 건물이 권벌이 시문을 즐기던 정자인 청암정(靑巖亭)이다.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을 결합한 모습으로 전면 여섯 칸 크기의 대청과 두 칸의 온돌방을 두고 온돌방 주위로는 계자각을 꾸민 난간이 둘러 있다. 두 칸 크기의 온돌방은 대청쪽으로 불발기 분합문을 만들어 대청 천장 위에 등자쇠로 걸어 놓게 되어 있으며, 서쪽으로는 판벽에 불발기창을 두어 따뜻한 날에 이 문들을 활짝 열어젖히면 주위의 노송과 단풍나무, 느티나무, 향나무 등 고목들과 정자 건너로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지척으로 느껴진다. 정자의 천장가구에는 퇴계 이황 선생의 백담(栢潭) 구봉령과 번암(樊庵) 채제공의 글이 있으며, 관원(灌園) 박계현 등 당대 명현들의 글이 편액으로 걸려 있다. 그 중에서도 남명(南冥) 조식이 쓴 것으로 전하는 청암정 현판과 미수 허목이 쓴 ‘청암수석(靑巖水石)’ 편액의 시원스럽고 품격 있는 필치는 청암정의 위상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청암정은 아름다운 호수 속에 떠 있는 정자다. 그런 느낌이 들도록 건물을 크고 넓적한 거북 모양의 자연석 위에 올려 세웠다. 거북 바위 주변으로는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주변에는 향나무, 왕버드나무, 소나무가 우거져 정자의 운치를 한껏 살리고 있다.
청암정 앞에 충재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건물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 크기의 건물로, 두 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고 한 칸은 마루로 되어있다. 충재 선생이 평소 거처하던 방이다. 충재에서 정자를 올려다보거나, 정자 마루에서 아래쪽 충재고택을 보면, 자연을 슬기롭게 이용하고 그 안에 한옥이라는 살림집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산천의 아름다움을 이용하는 옛 사람들의 빼어난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장수를 의미하는 거북 모양의 특이한 바위 위에 정자를 얹혀 거북이가 살도록 물을 넣어주는 연지를 만들고, 자연을 벗삼아 정신수양과 학업을 하기 위한 공간을 배치한 안목이 흥미롭다.
지금도 청암정 뒤쪽에는 종손과 차기 종손이 조상님들이 전해주신 유품들을 보관하고자 만든 유물전시관이 있어 가문의 명예를 보존하고자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게 된다. 또한 훌륭한 조상을 갖은 존경심과 소명의식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한옥의 미, 서정호, 2010.7.15, 경인문화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NHN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북마크 되었습니다.
네이버me 북마크함 가기
서버 접속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잠시 후 다시 시도해 주십시오.
북마크 서비스 점검 중으로,
현재 북마크 읽기만 가능하오니
이용에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_feed_info_가 마음에 드셨다면
네이버me에서 편하게 받아보세요.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 + V) 해주세요.
체크박스를 선택하여 미투데이에 글을
동시에 등록할 수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닭실마을과 청암정(靑巖亭) (한옥의 미, 2010.7.15, 경인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