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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중한담(茶中閑談)9- 본편
- 박현선생님과 함께 하는 이야기마당 아홉 번째
(2023년 12월 24일 14:00, 지유명차 청담점)
내가 보는 색이 원색일까
여기부터 시작 해보죠. 많은 학자들이 이렇게 얘기를 해요. 어떤 학자들은 증거가 없다 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그렇다 그러고 그러면서 제각각 인데, 사람과 개가 사물을 볼 때 보는 화면이 다르다는 거죠.
어떤 사람 말하기를 사람이 이렇게 천연색으로 사물을 보면, 일부 동물들은 천연색이 아니라 좀 더 작은 범위의 색감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는 거죠. 일부 동물들은 흑백으로 본다고들 얘기를 하는 거죠. 사실 살아있을 때 그 동물의 입장이 안 되어 보고, 그 동물을 해부를 해서 그 동물의 시신경 등을 가지고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은, 분명 다르기는 할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지금 눈앞에 보고 있는, 우리가 천연색이라고 보고 부르고 있는 이 색은 과연 인간이라는 범위를 넘어서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색깔일까? 어쩌면 인간에게 국한된 또 하나의 색감은 아닌가? 그런 거죠.
얘기를 예전으로 한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여기 젊은 분들은 이게 뭔 소리야 하시겠고, 연세가 있는 분들은 그런 게 있었나 하시겠지만, 옛날 컴퓨터가 우리 일상생활에 다가올 때 286이라는 게 있었죠. 386이라는 것도 있었고, 486XX라는 것도 있었고, 486DX라는 것도 있었죠. 386은 16비트의 정보를 16비트의 통로에 통과시킨다고 얘기했던 거죠.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486은 32비트의 정보를 32비트의 통로로 통과시킨다는 거였죠.
그런데 그 통로가 보내는 정보는 32비트인데 통로는 386처럼 16비트이면 XX라고 부르고, 32비트의 정보를 32비트의 통로에 보내면 DX라고 했던 그 기억이 납니다. “맞습니까? 선생님?” “네!” “선생님, 머리가 허여신 분께서 어떻게 아십니까?” “어쨌거나 그거 가지고 밥 먹었으니까 그러네요.” “선생님이 ISO 9000 검사관인 것을 잊어버렸네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속도를 결정할 때는 통로였다는 거죠. 빛이라는 것, 색감이라는 것과 관련해서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몸도 XX, DX 할 때처럼 하나의 통로라고 본다면, 그 통로를 통과하면서 통과되는 정보는 다 왜곡되지 않겠느냐는 거죠.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 색감이라는 것은 결국, 정말 이 세상의 인간과 개와 고양이와 그 모든 동식물을 통틀어서 보편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색감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몸을 거침으로써 나온 나름대로는 왜곡된 색이 아니겠냐는 거죠.
실제로 사람 내에서도 어떤 분들은 그 통로에 약간의 특이점이 생겨서 붉은색과 녹색을 분간 못하기도 하죠. 또 어떤 분들은 나이가 이렇게 많아지면서 녹색과 연두색을 구별 못하기도 하고. 그러듯이 우리의 몸이라는 통로를 통과하면서 보이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객관적이라고 믿고 있는 색의 실체가 아니겠는가. 그러면 과연 그 객관이라는 게 객관일 수 있을까를 생각 해보는 거죠. 이렇게 이제 생각을 해놓고 다시 한 번 얘기를 돌아가 보는 거죠.
교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신경 작용이 다 같을까
우리가 본다고 했을 때 결국은 내 몸을 통해서 나타나는 색감을 보는 거고 모습을 보는 건데. 과연 어떻게 해야 그러면은 어느 정도 그리고 그것도 그래요. 신경이 우리가 지난번에 그 말씀 드렸죠. 신경이 좌우로 이렇게 교차돼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교차된 게 아니라, 교차된 것처럼 붙어 있는 것뿐이다! 서로 교합하고 있는 것뿐이다!
신경이 교합이 되면서 그 교합되는 그 신경을 비롯한 하나의 시스템이, 마치 컴퓨터의 0과 1, 모스 부호의 긴 것과 짧은 것처럼 결합이 되면서, 하나의 정보를 만들어낸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앞에서 보고 있는 이 모습이, 그 신경 교합을 통해서 두뇌에서든 어디에서든 저장은 두뇌에서 되고 있고 작동은 두뇌에서 할지라도, 어떤 그 신경을 통해서 디지털화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저장돼 있다가 다시 나올 때는 다시 그것이 풀어지면서 아날로그적인 형태로 인식이 된다는 거죠.
그렇게 봤을 때 그것하고, 조금 전에 개개인마다 다 다르다는 거 하고, 또 한 가지는 컴퓨터 얘기를 아까 들었듯이 한 번 더 들어보면 누구는 16비트고 누구는 8비트이고 누구는 32비트일 수 있다는 거죠. 같은 동일한 시간 내에 과연 몇 개의 프레임으로 내가 사물을 보고 있을 것인가? 거기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가 날 수도 있다는 거죠.
우리는 그냥 보면서 지나가죠. 왜? 그게 너무 자연스러우니까. 그게 자연스럽다는 것, 엄밀하게 말하면 훈련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건 천천히 돌아가는 만화 영화를 보면 알아요. 1초에 4프레임밖에 안 돌아가요. 그러면 순간순간 멈춰 있는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되죠. 1초에 4프레임만 탁탁 탁탁 돌아가면 뭔가 어색하죠. 사람이 이렇게 움직인 것 같지 않고 딱딱 이러는 것 같죠.
그러면 더 정밀하게 16프레임, 32프레임을 넣으면 더 정밀하게 움직일 거 아니냐? 그렇지 않거든요. 정신 사납거든요. 색감이 겹쳐서 나타나요. 그래서 화면이 오히려 겹쳐서 두 겹으로 보일 수도 있거든요. 사람에게는 사람의 속도에 맞는, 아니 각 개체라고 하면 그 개체에 맞는 속도가 유지될 때 가장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사물이 보인다는 거죠.
실제로 1초에 한 프레임 가면 답답하죠. 1초에 두 프레임은 옛날에 만화 영화 똘이 장군 할 때나 로보트 태권브이 할 때나, 아톰 할 때나 지나가던 모습인 거죠. 예전에는 그것도 어느 정도 자연스러워겠지만, 지금 1초에 4프레임 틀어놓으면은 멈췄다, 갔다, 멈췄다, 딱딱 딱딱 슬라이드 갈아 끼우는 것처럼 갈아 끼우는 모습이 보이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렇지 않고 보는 이 모습도, 나의 몸이 갖고 있는 하나의 반영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니까 속도감, 속도감에 맞추어진 프레임 수 그리고 그 색감이라 불리는 것, 우리는 그걸 천연색이라고 부르죠.
그걸 가지고 우주를 보고 세계를 보고 다 보죠. 그리고 심지어 원색이라는 표현까지 쓰죠. 개의 원색과 사람의 원색이 과연 같을 것인가? 다를 거라는 거죠.
이렇게 왜곡이 돼 있는 하에서 우리가 그 색을 기억한다는 것은 기억 자체도 또 하나의 프레임이라고 본다면, 기억을 통해서 또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죠. 시각과 기억이 완벽하게 일체화돼 있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거죠.
파란색으로 봤는데 이게 정보를 통해서 디지털화될 때, 그 과정에 따라가지고 다시 끄집어낼 때는 파란색으로 기억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거죠. 여기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거죠. 또 한 가지는 우리가 사는 게 가끔은 답답한 순간도 지나가고 어떤 때는 참 즐거운 순간도 지나가고 그렇잖아요. 답답한 순간에 대다수의 이유가 뭘까요?
인과 사이에 존재하는 시차성
인과의 시차성 때문이죠. a가 일어났으면 a는 반드시 a’이라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그게 정의 아니겠습니까? 정의라는 것은 어떤 가치의 깃발의 이름이 아니라, a가 일어나면 반드시 b는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 인과의 법칙이 적용되는 게 정의 아닙니까? 인과의 법칙 이외에 어떤 정의라고 해도 사실은 시간 속에 흘러가는 하나의 모습일 텐데요.
그런데 왜 인과 이외에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가? 아주 우악스럽게 이렇게 한번 볼까요? 어느 날 지구가 지나가는 혜성에 정통으로 얻어맞고 그것도 그 혜성이 거의 달만 해가지고 정통을 얻어맞고, 쪼개져 파편이 돼버렸어요. 한 명도 못 살아남죠. 그래서 몽땅 이제 멸망하게 됐어요. 지상에 살고 있는 동식물이 멸망하는 게 아니라 지구 자체가 멸망하게 됐어요.
그런데 그 인과는 언제 시작한 거죠? 몇 억 년일지도 모르죠. 지금 일어났지만 몇 억일지도 모르죠. 가장 급한 인과야 내가 옆에 있는 사람이 뺨을 탁 때렸더니 그 사람이 나를 탁 때리면 그거는 1초 만에 일어나는 인과인데요. 그런데 대개 인간은 시차가 걸린다는 거죠. 그 시차가 길어지면은 답답함이 유지되는 거죠.
예를 들어서 여기 지금 얼마 전에 시험 보신 학생도 있나 봅니다. 전체 성적이 6개밖에 안 틀렸답니다.
어쨌든 간에 그 인과의 과가 나오기 위해서는 적어도 1년 또는 좀 더 보태면 3년, 더 보태면 6년, 더 보태면 12년의 인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 인이 있고 나서 과가 오는 거죠.
그러니까 인과 사이에는 반드시 시차가 있죠. 그 시차 때문에 공연한 희망에 들뜨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온갖 감정들을 다 실어서 표출할 수밖에 없는 게 인과의 시차성 때문인 거죠.
그 인과의 시차성이 오면, 어느 순간에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이게 1년이면 과(果)가 와야 한다고 예측하는데,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그 과가 이루어지질 않는 거예요. 그랬을 경우에 그 인과율을 의심하기도 하고, 과연 그 일이 있었는가의 자체에 대해서 의심하기도 하고, 바라는 것의 그 결과가 올 것인가 하는 그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가 들 수도 있죠.
그렇게 그 시차성 때문에 달라지는데요. 그 시차성에 의해서 달라지는 것, 예를 들어서 우리가 아무런 것을 인지하지 않는 바람이라고 친다면, 거기에서 괴로워할 리도 없겠죠. 슬퍼할 일도 없겠고 쓸데없이 즐거워할 일도 없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은 프레임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게 우리 삶이고 우리 몸이라는 거죠. 그런데 그런 사람이 사물을 바라봐요. 소리를 들어요. 사물로 뭔가를 봐요. 그게 얼마만큼 정확하게 사람의 프레임을 전제로 한다 하더라도, 얼마만큼 정확하게 기억이 될까요?
인과의 오차를 줄이기 위한 방법
지금으로부터 28년 전에 저는 황당한 일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27년 전인가?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도 천진암이라는 데를 간 적이 없습니다. 어딘지 아시죠? 가보신 분도 있을 거고요. 중부고속도로 나가다 보면 있는 곳인데, 그런데 어느 분이 저를 천진암에서 만났다는 거예요. 누가 틀렸을까요? 제가 틀렸을까요? 그분이 틀렸을까요? 그런데 그분은 천진암에서 저랑 나눈 대화까지 기억하시거든요. 그때도 서선생님께 제가 황당하다고 그랬죠. 그리고 저는 그분을 모르는데 그분은 또 저를 알아요.
뭐가 잘못된 걸까요? 저는 제가 100% 정확했다고 하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 안 믿습니다. 아무튼 그런 일도 있어요.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런 오차가 생겨나요. 그 오차를 최대로 줄여서 두려움 없이 듣고, 딴 생각 없이 보고, 하는 방법으로 옛날 분들이 제기했던 것이 다가가서 보지 말라는 거예요. 보는 것은 다가오게 해서 보라는 거예요. 듣는 것도 들으려고 귀 기울이지 말라는 거예요. 귀를 향해서 들어오게 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까 옛 분들이 상대적으로 어떤 느낌을 주느냐면 저분은 기억력이 좋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요. 그리고 대개는 그렇죠.
예를 들어서 옛날 조선시대 때 책을 보면, 책이 세로로 쓰여 있잖아요. 세로로 쓰여 있는데 흔들면서 봐요. 리듬을 타면서 흔들면서 보는데, 그러면 더 잘 안 보여야 되잖아요. 가로로 되어 있는 들 흔들면 잘 보이겠습니까? 막 흔드는데 말이죠.
그런데 잘 보거든요. 물론 지금보다 글자의 크기가 컸죠. 왜냐하면 조명이 지금처럼 받침이 안 되니까 클 수밖에 없었고, 또 활자의 크기도 지금처럼 작게 할 수가 없었는데요. 재미있는 것은 활자의 크기가 지금과 거의 차이가 없던 시절, 60년대나 50년대에도 흔들면서 잘만 봤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볼 수 있었을까? 이분들은 볼 때 달리 본 거예요. 우리 눈은 여기 이렇게 육체적인 두 눈이 있잖아요. 그럼 눈 위에 있는 이마 가운데 자리를 잡는다 치고요. 그리고 양 어깨의 중심을 잡고, 위에 있는 (니환궁의) 자리를 연결하여 삼각형을 그어서 그 안으로 들여다보고 있어요. 삼각형 안으로 당겨서 보고 있어요. 자기가 눈이 막 빠질 듯이 찾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삼각형 안으로 빨아들이듯이 보고 있어요.
그 차이점이 뭐냐? 그때 여러분이 몸에 따른 하나의 프레임이라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는 차이점이 뭐냐? 끌어당겨서 볼 때, 그 사물에서 조금 더 평소보다 빛이 더 있다는 걸 알아요. 빛을 더 느껴요. 그런데 내가 다가가려고 해서 눈이 다가가서 보는 순간, 빛이 한 겹 빠졌다는 것을 알아요. 여러분 바로 지금 해보셔도 알아요.
삼각형으로 놓고 내가 저 사물을 빨아들인다고 할 때는 사물이 조금 더 밝아 보여요. 그런데 내가 그 사물로 다가간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두 눈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면, 즉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撤)하듯이 보고 있으면, 그냥 빛이 한 겹 사라져요. 이렇게 여러 조명이 밝은 데서는 덜 차이가 날지 몰라도 해보시면 반드시 차이가 나요. 그것도 혼자서 좀 조용하게 피가 덜 끓을 때 해보면 상당한 차이가 나요. 몸에 따라서 빛을 인식하는 정도가 이렇게 다르구나 하는 걸 알 수가 있어요.
여러분! 밝은 것을 더 잘 기억할까요? 어두운 것을 더 잘 기억할까요? 하면 답이 없어요. 더구나 뚜렷한 것을 더 잘 기억할까 희미한 것을 더 잘 기억할까 하면은 뚜렷한 것을 더 잘 기억해요. 선명하지 못한 것보다는 선명한 것을 더 잘 기억해요. 그러니까 이미 이 아날로그는 디지털을 만들 정도의 충분한 양이 들어온 거예요.
컴퓨터 0 1 0 1 한다면, 0 1 1 1 0 1 1 이렇게 한다면, 그 정보량이 다섯 줄밖에 안 된다면, 상대적으로 이렇게 (삼각형 시선으로) 찍어서 보면은 그 정보량이 10개가 된다는 거죠. 그러면 그 10개는 다시 튀어나올 때 조금 더 왜곡이 적게 튀어나올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천진암에서 저를 만난 분보다는 제가 더 정확하다고 생각해요.
듣는 감각도 마찬가지
듣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듣는 것은 그냥 이렇게 귀 기울이고만 있으면 의심과 두려움이 한도 끝도 없이 몰려와요. 그 어떤 소리로 왜곡될지도 몰라요. 들으면서 어떤 거는 웅성웅성하고 있는데, 어느 단어 하나가 슬쩍 지나가면 저게 내 욕하는 소리인가 싶기도 하고, 저게 무슨 어디 저기 어디 괴물이 도사리고 있는 어디 구석이 있나 싶기도 하고, 방 안에 귀신이 있나 싶기도 하고 별의별 잡생각이 다 나는 거죠.
왜? 확실하게 그 소리를 통해서 디지털화될 수 있는 정보량이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귀는 반대로 아래와 역삼각형을 그려서 들어요. 그러면 소리가 뚜렷해지고 소리를 들으면서 두려움이 사라지고, 소리를 들으면서 의심이 사라져요. 그러니까 귀에 역삼각형을 그려서 그렇게 들으면은 훨씬 잘 들려요.
저도 나이가 들어서 집에서 tv를 틀 때 볼륨을 예전에 10이었다면 지금 15를 틉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들으면 누가 주변에서 욕하면 못 들어야 되는데 저 문 밖에서 욕해도 잘 들어요. 왜냐하면 역삼각형으로 듣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들으면 훨씬 선명하게 들리죠. 나이가 든 사람이 잘 못 듣는 것은 청력이 떨어졌다고 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귀에 듣는 주파수가 엉망이 됐으니 그래요. 귀에서 듣는 주파수가 엉키는 영역이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주파수가 붙어 딱딱 떨어져서 이렇게 음이 들리는 게 아니라 뭉개져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리도 뭉개져 들리고 그러는 거죠. 그게 안 뭉개지면, 청력이 신체적으로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청력이 한창인 젊은 사람보다 잘 들어요. 그리고 이 간격이 분명히 선명해져요. 그렇게 듣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노래는 음치로 부를지라도 듣는 귀에서만은 유명인이 돼요.
아무튼 이제 그렇게 해서 듣는 것을 예전에 유대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쳤던 모양이에요. 랍비들에게. 그렇게 해서 삼각형으로 보고, 삼각형으로 듣는 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그게 유대의 별입니다. 그게 이스라엘의 별이에요. 뭐 그렇겠죠. 그죠? 그렇게 되겠죠. 아무튼 이제 높낮이야 그 별처럼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겠지만요. 이 두 자리는 사람의 몸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이기도 하죠.
인과의 시차 문제와 풍과 치매의 관계
아까 그 얘기를 드렸는데, 사람 몸에서도 인과가 생겼을 때 그 인과의 시차를 못 견디게 되면, 못 견뎌서 힘들고 병이 드는 범위가 있어요. 물론 괜찮은 범위도 있어요. 그 범위를 벗어나면 신체적으로 반드시 특징이 드러나요.
여러분이 옆에 있는 사람 귀만 봐도 알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2개의 겹, 요즘 사람들은 그거를 뭐 0과 1로 표현할지, 뭘로 표현할지 몰라도, 옛날 사람들은 결합이 되어야만 정보화되고 그 결합된 것이 해체되면서 다시 아날로그로 전환되는 그 두 가지 축을 음과 양이라고 불렀던 거죠. 지금은 다른 형태로 장단이라 부르든지, 0과 1이라 부르든지, 뭐로 부르든지 간에, 플러스 마이너스라 부르든 상관이 없는데요.
그 (결합과 해체의) 작용이 잘 안 되면, 지난번에 신체적 작용을 말씀 드렸죠. 허리에 굳음이 오고 노화가 시작됩니다. 노화가 시작되면 두 가지 방향으로 간다고 그랬습니다. 하나는 반드시 풍이 온다. 군대 가시면 이렇게 (팔과 다리가 같은 방향으로 나가며) 걷는 분들 간혹 나오죠.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안 걷죠. 왜냐하면 오른쪽과 왼쪽이 교차될 정도로 교합이 돼 있기 때문이죠. 교합이 돼 있기 때문인데, 그 교합이 무너지면은 오른쪽이 아프면 왼쪽이 아파요. 교차돼서 아픈 것이 아니라 교차되는 느낌이 사라져요. 물론 오른쪽이 아프다고 해서 왼쪽 다리가 아프라는 법은 없어요. 교차돼 있는 상황에서는 꼭 그렇진 않아요. 단, 왼쪽도 오른쪽이 아파도 왼쪽도 느낀다는 거예요. 오히려 반대쪽을 더 섬세하게 느낄 뿐이에요. 양쪽이 다 느껴요. 어느 쪽이 아파도 다리는 다 느껴요. 다리 한쪽이 아파도 팔은 양쪽이 다 느껴요.
그런데 못 느끼는 순간이 오면 뭐죠? 발병이 됐든 안 됐든 풍이라는 거예요. 발병이 되면 풍이지만 발병이 안 돼도 그 상황은 2년 내에 풍을 가지고 온다는 거예요. 다른 한쪽에 영향을 못 줄 때 반드시 풍이 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풍이 오면 다행이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풍과 함께 디지털화가 잘 안 돼요. 디지털화가 잘 안 되고 기억이 잘 안 돼요. 그러면 귀에서 기별이 와요. 여러분 귓바퀴는 2개가 있죠. 바깥 바퀴가 있고 안 바퀴가 있죠. (디지털화가 잘 안되면) 안 바퀴의 5분의 3지점에 가로로 주름이 와요. 그러니까 귀의 바깥 바퀴가 있고, 안 바퀴가 있죠. 바깥 바퀴 그 다음 안쪽에 두 번째 바퀴가 다 있습니다. 사람과 원숭이의 차이점인데 대부분은 다 있습니다. 99%는 다 있습니다.
안쪽 바퀴의 높이로 보면 5분의 3 지점에 이상하게 가로로 찌직 선이 와 있어요. 그러면 나는 이미 뭔가 증상이 있다! 내가 잘 못 느끼고 있을 뿐이지만 나는 이미 쇠몰하고 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건 뭐라 그랬죠? 신경이 좌우로 가서 풍이 되는 게 다행인데, 더 심하면 조합이 안 되면 어떻게 되죠? 아날로그가 디지털로 전환이 안 되는 거,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치매죠. 이건 치매죠. 치매가 오면은 바깥 바퀴의 4분의 3지점에, 높이의 4분의 3 지점을 만져보면 오목한 부분이 있어요. 따라가다 보면 쏙 들어간 데가 있어요. 거기에 바로 주름이 와요. 신체적으로 그건 아주 객관적이에요.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요. 그런데 그 얘기를 제가 드리려는 건 아니고요.
사람이 자율신경, 비자율신경 이런 얘기하잖아요. 사실은 순수한 능력에 자율신경은 없어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맡겨놨기 때문이죠. 무릎 신경이 자동 반응하는가 자율 반응하는가 하는가 보려고, 나무막대로 통 치면 톡 튀어나오죠. 참으면 안 나와요. 버티고 있으면 안 나와요. 버티고 그냥 힘주고 있는데 나오겠어요? 그건 뭐죠? 자율신경을 통제했다는 거죠.
모든 자율신경도 사실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있어요. 단 그러고 못 사는 거죠. 숨도 통제할 수 있어요. 안 쉬고 싶으면 안 쉬는 거고, 쉬고 싶으면 쉬는 거고, 참고 싶으면 참는 거죠. 길게 쉬고 싶으면 길게 쉬는데 평상시에는 자율에 맡겨 놓죠.
그러나 자율에 맡겨져서 자율화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영구히 자율인 건 아니에요. 영구히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자기 몸 속에 있다면 그건 자기 몸이 아니에요. 자기 몸에 자기가 모르는 기계가 들어와 있는 거죠. 그렇지는 않아요.
아무튼 이제 그런 몸을 갖고 살아가는 거죠. 그렇게 살다 보니까 이 프레임에 무리가 올 때가 있죠.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이제 무리가 오는 건데, 그 무리가 어떻게 오느냐는 잠깐 물음표로 두고요. 딴 얘기로 가겠습니다.
삶의 뿌리인 흙
여러분들 우리가 먹는 게 다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먹는 건 기본적으로 흙이라는 거죠. 흙을 직접 못 먹겠으니까, 사물 생태계라든가 또는 생태계의 진화라고 하는 영역은 엄밀하게 말하면 흙을 운송할 수 있는 수단의 발전이에요.
식물은 흙을 어떤 뿌리라든가 이런 방식으로 빼먹는 거죠. 그런데 동물은 그 식물을 통해서 또 흙을 먹어요. 어떤 동물은 그걸 빼먹은 동물을 통해서 흙을 먹어요. 그러니까 간접적으로 먹는 거죠. 그 간접적으로 먹는 걸 가지고 원래대로 좀 더 진화시키거나 퇴화시켜서 먹는 방법을 의학에서는 법제라고 하는 거예요. 한의학에서 법제라고 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필요한 흙을 먹을 수 없을 때, 필요한 흙을 먹을 수 있는 방식으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생태계의 일부를 조금 더 움직여서 변형된 형태로 먹는 거죠. 우리 음식이라는 게 흙을 먹을 수 있는 인간적으로 채택된 방법인 거죠. 엄밀하게 봐서 요리라는 것은 흙을 먹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예요.
실제로 어떤 동물들은 식물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흙을 섭취하면서 그걸로 모자라서 직접 흙을 먹어야 되기도 해요 그래서 흙을 갈아서 먹어요. 그리고 흙을 갈아서 먹을 때, 어떤 동물도 흙을 직접적으로 갈아서 먹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는 흙이 있어요. 그게 소금이에요.
소금은 직접적인 흙이죠. 소금은 뭔가 흙이 뭉쳐진 덩어리인 거죠. 흙 중에서 일부 성분들이 화학 기호로 하면, 쉽게 NaCl 이렇게 할 수 있겠지만, NaCl만 있는 소금이 어디 있어요? NaCl만 있으면 간수는 왜 빼는데요. 그러니까 NaCl만 있는 소금은 자연계는 없죠. 그거는 울진 같은 데서 증발을 시켜서 소금을 얻더라도 여전히 Cl과 Na 외의 사물들이 존재하죠. 왜냐하면 끓여 갖고 날릴 수 있는 것에 한도가 있으니까.
아무튼 어떤 흙은 직접 섭취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런데 우리가 소금이라고 그러니까 흙이라고 생각 안 하는 거죠. 그래서 모든 동물과 식물들이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흙을 이제 섭취를 하죠.
그런데 흙을 섭취하는 데 그 진화의 단계, 생태계의 단계가 여러 단계를 거치면 거칠수록 그 거쳐진 단계에 해당되는 신체적 기능을 가진다는 거죠. 그 흙을 섭취하는 단계가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복잡한 신체적 기능을 가진다는 거죠. 그것이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단순한 신체적 기능을 가진다는 거죠.
식물들은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돼요. 식물들의 뿌리라는 건 우리가 생각해서 동물과 비교하자면 입이잖아요. 잎을 땅에 박고 있는 거죠. 잎을 땅에 박고 있으니 쉽게 움직일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식물이 안 걸어 다니는 이유는 식물이 다리를 땅에 허공에 두고 있기 때문이죠. 주둥이를 땅에 박고 있으니 주둥이로 걸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우리가 얼핏 생각할 때는 뿌리가 마치 다리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죠.
삶의 뿌리라는 게, 근본(根本)이라 할 때 본(本)이라 게 결국은 흙 빨아당기는 데잖아요. 인간의 근본은 농사라 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입으로 들어가는 거, 입이 本인 거죠. 그래서 밥이 하늘이라는 얘기도 이유는 그게 본인 거죠. 흙을 밥이라는 형태로 먹는 거죠. 그리고 육식이라는 형태로도 먹는 거고요. 그게 이제 다양 형태로 발전되지만, 그러다 보니까 그 다양한 형태의 담겨 있는 여러 기능들이 중첩적으로 인간 몸에 쌓일 수밖에 없죠. 그래서 인간이라는 DNA가 만들어지는 거겠죠. 그래서 인간이 그렇게 이제 살아오는데요.
차를 지유(地乳)라 한 이유
차를 예를 들어보면, 차는 뭐죠? 나무의 잎사귀잖아요. 잎사귀는 체관과 수관이 있지만, 흙이 결국 들어가서 흙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조화잖아요. 그 조화 안에는 흙이 있겠죠. 흙 아닌 것도 있겠죠. 그걸 끄집어내서 다시 흙으로 돌린 거죠. 흙으로 돌리는 기술을 제차법이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흙으로 돌려놓고 그 흙물을 빼 마시는 거죠. 그래서 가장 맛있는 차의 맛은 사실상 흙 맛이에요.
흙 맛 이전에 애매한 건 나무뿌리 맛이 나요. 실제로 그런 식물을 일정한 방법으로 일정한 시간 경과를 시키면, 처음에 경과가 덜 됐을 때는 여전히 그렇게 흙으로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흙 맛보다는 기타 맛이 더 많이 나요. 잎 맛 풀 맛이 더 많이 나요.
그러나 조금 더 무언가가 흙으로 돌아간 느낌이 있으면 나무의 줄기 맛이 나요. 좀 더 돌아가는 느낌이 있으면 나무에 기둥 맛이 나요. 그냥 나무 맛이 나요. 더 조금 더 돌아가면 뿌리 맛이 나요. 나중에 뿌리 맛이 날 때 그걸 뭐라 그러죠? 보통 보이차의 경우에는 약향이 난다는 거죠. 약향이 나요. 우리 약재가 다 대부분 뿌리잖아요. 나무 뿌리잖아요. 뿌리가 많잖아요. 그래서 뿌리 맛은 약향이 난다고 그랬죠.
그 다음에 가장 깊은 데로 가게 되면은 이제 흙향이 난다, 토향이 난다고 표현하고 흙향과 가장 비슷한 오래된 어떤 식물을 달이면 나는 향이 있어요. 삼 달인 향이죠. 인삼 말고 뭐 산삼이죠. 어린 산삼에 달여서는 그 향이 안 나고요.
삼 달인 향이 흙 맛에 가깝죠. 그러니까 흙으로 원래 돌아가는 거죠. 그래서 이름조차도 저는 차를 결국은 땅 젓이라고 부른 거예요. 그러니까 기타 차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은 근본은 아니에요.
흙으로 들어와서 흙으로서 역할을 하고 흙으로서 나가야
아무튼 그렇게 돌아가는데, 그 돌아가는 영역에서 쭉 이렇게 흙이 내 몸으로 들어와서 타고 다시 다 쓰이고 찌꺼기가 돼서 나가야겠죠. 그것이 피가 됐든, 체액이 됐든, 음식이 됐든 들어와서 흙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나가야 되는데, 흙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나가지 못할 만큼의 상황을 만들어버리면 1차 병이 생기겠죠.
흙으로서 역할을 다 했어요. 들어와서 그것이 체액이 됐든 뭐가 됐든 간에 심지어 생각이 됐든 간에 흙으로서 역할을 다 했어요. 그런데 찌꺼기로 머물러 있어요. 그러면 이제 몸이 무너지기 시작하죠.
예를 들어 보죠. 어떤 음식물이 흙이라고 치면 들어와서 흙을 남기고 사라져야, 찌꺼기가 사라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흙이 되지를 않아요. 흙으로 전환시킬 수가 없어요. 흙으로 전환시키고 찌꺼기가 안 나가는 게 병이라면, 아예 흙으로 전환시켜주지를 못해요. 그래도 병이 생기죠. 흙을 먹고 살아야 되니까. 먹을 흙이 없는 그런 음식을 먹었다면, 그건 헛 먹은 거죠.
음식을 먹었는데 헛 먹은 거죠. 흔히 식중독은 뭐죠? 식중독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음식을 먹었는데 그 음식이 흙 노릇을 못하게 생긴 거예요. 그냥 이 음식은 포기하는 게 식중독이죠. 이 음식은 그냥 바로 내보내 하는 거죠. 얘는 더 이상 흙이 될 수 없는, 이미 뭔가 부패라든가 등등의 구조가 돼버렸단 거죠. 다양한 이유에 의해서 흙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이 내 몸에서는 없다고 몸이 판단해버린 거죠. 그러면 그냥 통과!
그런데 흙으로 역할을 다 했는데 이놈이 안 나가고 있는 거예요. 버티고 있는 거예요. 적체가 된 거죠. 찌꺼기의 적체도 병이죠. 애초에 역할을 못하는 음식도 병이죠. 그런데 어떨 때 못하느냐? 제대로 못 보고 있을 때, 제대로 못 들을 때 그래요.
발음의 정도와 감각의 관계
제대로 못 들을수록, 제가 그랬죠. 못 들으면 인간이 발음을 뭘 못한다 그랬죠? ‘ㅅ, ㅂ, ㅎ’의 계통의 발음이 안 된다 그랬죠. ‘ㅅ, ㅂ, ㅎ’ 계통의 발음이 잘 안 되면 ‘ㅈ, ㅊ, ㅍ’이 다 거기 속하죠. 변음, 경음, 연음 다 속하죠. 안 되면 귀가 멀어진다고 그랬죠. 특징은 뭐라고 그랬죠? 오늘 복습도 약간 있습니다.
뭔가 음식을 먹을 때 물을 흘릴까 두려워하는 느낌, 숟가락으로 물을 떠 넣긴 넣었는데 말끔하게 안 들어갈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을 가질 때. 30이든 40이든 50이든 그때는 이미 ‘ㅅ, ㅂ, ㅎ’이 안 되고 있다! 그래서 ‘ㅅ, ㅂ, ㅎ’ 훈련을 많이 해놓은 아나운서들이 오래 살고 귀도 안 어두워진다! 그런데 그렇게 훈련을 하면은 귀도 밝아질까요? 안 밝아질까요? 밝아져요. ‘ㅅ, ㅂ, ㅎ’ 의 발음이 ‘ㅈ’, ‘ㅊ’ 다 포함되고요. ‘ㅍ’ 포함되고요. ‘ㅉ’도 포함되겠죠.
그런 발음들이 복원이 돼서 제대로 발음이 되고 동시에 입을 다물어줄 수 있는 훈련, 발성 훈련이죠. 되면은 어둡던 귀도 돌아와요. 완벽하게는 안 돌아오지만 상당히 돌아와요. 마치 그런 거죠. 어느 날 아파가지고 수술을 하고 중요한 수술을 하고 몸이 많이 안 좋아서 누워 있어요. 그때는 잘 안 들립니다. 황황하고 소리가 웅웅 울리고 잘 안 들려요. 그러나 건강이 회복되면 들리죠. 그리고 환자들이 수술하고 병상에 오래 누워 있으면, 바로 ‘ㅅ, ㅂ, ㅎ’ 발음부터 무너져요. 그 순간 그만큼 안 들려요.
일시적이지만 그래도 회복되면 들리죠. 노화도 일정하게는 되돌릴 수 있다는 거죠. 근본적으로는 안 되죠. 근본적으로는 에너지가 필요하니까 안 되죠. 그 다음에 뭐라 그랬죠? ‘ㅁ, ㄴ, ㄷ’ 계통의 그 된소리와 센 소리까지 포함해서 그게 안 되면 눈이 어두워진 거겠죠.
행간을 보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그러니까 우리 현대사회 여기도 보면 절반이 안경을 끼고 있잖아요. 우리가 그렇게 훈련을 못한 거예요. 볼 때 죽어라 들여다 봤어야만 되고, 이렇게 나에게 당겨서 본 것이 아니라, 내가 들여다봤어야 되었죠. 실제로 서양에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옛날 사람도 그랬지만, 안광지배철(眼光紙背撤)하라고! 그런 식으로 공부를 하면 눈 다 버리죠. 안광, 즉 눈의 빛이 종이의 뒤를 뚫기는 왜 뚫어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안광이 종이의 뒤를 뚫기 시작하면 행간을 읽을 수 있다고 표현하는데, 행간을 읽는다는 것은 선입견을 읽는 것이고 편견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행간은 읽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어떤 글을 읽을 때도 여러분, 행간을 읽으려고 하지 마세요. 행간을 읽는 것은 매우 나쁜 습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가르치죠. 행간을 읽을 줄 모르면 제대로 글을 못 읽는 것이다고. 행간을 전혀 안 읽어도 똑바로 읽고 나면은 행간이 아니라 전체에 담겨 있던 내용물들이 우르르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시험 구조, 그런 과정 속에서 ‘행간을 읽을 줄 알아야지’라고 가르쳤던 선생님들은 뭐냐? 시골에 똑똑한 척하는 선생님 급이라는 거예요. 예전에 그런 말이 있어요. 맹자 삼천 번을 읽었더니 무릎에서 저절로 탁 소리가 나더라. 왜 그랬을까요? 행간을 안 읽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행간은 읽는 게 아니라 저절로 들어와야 되는 거예요. 내가 행간으로 다가가려고 하는 순간, 그 행간에 숨어 있던 모든 이야기는 나를 물들이고 마는 염색제가 된다는 거죠. 그냥 그 행간에 담겨 있던 이야기들이 내가 노력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들어오게끔 하라는 거예요. 받아들일 뿐 내가 받아들이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거예요.
내가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순간 내 신체 기관의 함몰이 이루어지고 과부화가 이루어진다는 거죠. 과부화는 그 과부화된 몸에 의해서 또다시 내 몸에 변화가 오고 나는 또 다른 선입견을 향해서 갈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들어오게 하라’, ‘내가 다가가지 말고 들어오게 하라’ 하는 점 하고요.
텍스트가 텍스트가 되는 이유
그 다음에 듣는 것도 그래요. 어느 순간이 되면은 들려와요. 들려오는데 들으려고 애를 쓰잖아요. 들으려고 애를 써가지고, 그러니까 옆방에서 밥 먹는데 내 욕했다 해서 들어 가지고 ‘저 새끼 왜 내 욕하냐’ 그러고 막 이렇게 하는 거, 다 들으려고 애를 써서 그래요. 물론 가만 있어도 들렸겠죠.
세상사 들으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들려와요. 들려오면은 들려오는 것은 내가 받아들이고 그래도 편견이 생기고, 뭐가 생기겠지만 덜 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 몸에 부하가 안 걸려요. 내 몸에 부하가 안 걸려야 지속성이 보장이 돼요. 지속성이 없으면은 인과를 견딜 힘이 없어져요. 인과를 견디는 힘은 내 몸 자체에서 일정한 리듬이 유지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생을 한 길을 간다는 건 그래서 중요할 수도 있어요.
아무튼 인과를 견디는 것이 의심이 많아지고 들으면서 회의가 많아지고 두려움이 많아지면 그 인과를 견딜 힘은 굉장히 약해지죠. 그래서 인과를 견딜 힘이라는 것은 억지로 들으려고 하지 말고 억지로 보려고 하지 말자는 거예요. 책으로 치면 행간을 보려고 하지 말고, 거기 쓴 사람이 뭔가 담아놓은 게 있다면 어느 순간 다가오겠죠. 어떤 분들은 독서 습관들이 이미 그렇게 들어있어요. 처음부터 행간을 읽으려고 해요. 행간을 읽으려고 하는 순간 그 원저자와는 너무나도 멀어질 수 있어요.
왜 노자의 도덕경이 이상하게 긴지 아십니까? 왜 김용옥 씨는 김용옥 씨대로 읽고, 다른 분은 다르게 읽는지 아십니까? 행간을 자꾸 들여다보려고 그래서 그래요. 노자는 행간 없이 썼는데 읽는 사람이 행간을 자꾸 만드는 거예요. 없는 행간을 만들어 들여다보는 거예요. 왜 노자의 도덕경이 경전이냐? 왜 후대 사람들이, 일정 정도의 사람들이 그걸 텍스트라고까지 불렀느냐. 아무리 읽어봐도 거기에 행간이 없었기 때문에, 읽으면서 그 행간이 있다면은 저절로 들어오는 것이지, 내 나름대로 파면서 해석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게 해석하면, 기독교도 그렇게 해석하면 사이비가 될 수 있고 이단이 될 수 있어요. 불교도 마찬가지고요.
모든 텍스트라고 하는 것은 행간을 읽으려고 하지 말고, 행간이 있다면 스스로 다가오게 하라. 읽는 그 텍스트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라. 내가 행간을 읽으려고 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읽는 순간 내 몸부터 무너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랍비들이 가르칠 때, 제일 먼저 ‘읽으려고 하지 마라.’ ‘읽혀지게 하라!’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죠. ‘사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라.’ 뭐 어려운 얘기지만은 비슷한 이야기일 수 있죠. ‘텍스트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라.’
친구의 이야기도 들으면서 처음에 속뜻이 무엇인지 짐작하고 들으려고 그래요. 그러면 친구가 안 만들어져요. 듣는 그 순간부터, 내가 그렇게 듣는 순간부터 그 친구는 친구가 아니라 거래자로 바뀌고 있는 거예요. 거래하는 관계로 바뀌고 있는 거예요. 그냥 들어보는 거예요. 나중에 듣다 보면 진짜 말하려고 하는 게 이거구나 하고 더 다가올 때가 있죠. 그러면 ‘이 얘기하고 싶은 거니?’ ‘응!’ 그러면 친구예요.
그런데 ‘속뜻이 뭐지?’ ‘속뜻이 뭐지?’ 그러면 거래를 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거래 관계가 많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귐 관계가 적은 이유도 그래서 그래요. 사람 말에서도 글과 마찬가지로 듣는 것에서도 행간을 들으려고 그래요. 행간을 들으려고 그러면 불안하고 떨려요. 행간을 들으려고 하면 오래 못 버텨요. 빨리 쓰러지고 빨리 병 나요. 자기가 병 들어요.
그리고 그 병이 듦과 동시에 자신의 영혼이 병들어요. 영혼이라는 건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다고 저는 말씀 드렸어요. 영혼이 없다고 말하는 분을 저는 절대 설득 안 해요. 그분에겐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밥을 주지 않는 영혼은 굶어 죽죠.
영혼은 엄밀하게 말하면 이 두 개의 교합 관계에서 일어나는 자신만의 에너지예요. 자신만의 구조고 자신만의 빛이죠. 그래서 아까 말씀 드렸죠. 하다못해 눈으로라도 삼각형 그려서 보면은 더 밝아 보인다! 그 밝아 보이는 게, 어떤 인상주의 화가는 초기 인상주의 화가는 빛이 곧 색채라고도 했죠. 빛이 곧 색이라고 그러는데 빛은 빛이에요. 색채는 빛이 아니에요. 빛은 색채일 수 있죠.
그런데 어느 순간에는 내가 인간이어서 갖춰져 있는, 그 색감의 세계보다는 조금 더 빛의 느낌으로 사물을 보게 되고, 그렇게 사람을 보게 되는 순간이 올 수 있습니다. 그때 어른이 돼요. 그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자기의 어떤 의미로 해석되든 간에 영혼의 눈이 열려가고 있다는 거예요. 빛이 열려가고 있다는 이야기에요. 빛이 아니라 어느 순간 되면은 점점 어둡게 느껴지게 되죠. 나중에 흙 안에 담겼던 빛은 안 보이고 어느 순간 흙만 보이게 되는 거죠. 지금은 우리는 흙을 본다는 게 흙에 담긴 빛까지 같이 보는 거죠. 모든 사물이 흙이라면 거기에 담긴 빛까지 같이 보는데 어느 순간에는 빛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순간이 올 수도 있고 빛보다는 흙을 더 많이 보는 순간이 올 수 있다는 거예요.
머리 써가지고 열심히 스포츠, 두뇌 스포츠를 하고 지식을 쌓잖아요. 그 지식을 갖고는 빛을 잃어갈 수밖에 없어요. 반대로 그렇게 보는 습관을 통해서, 듣는 습관을 통해서 조금 더 빛의 울림과 빛의 명도를 더 가까이 하게 되는 분들은 몸도 그만큼 편해져요. 그리고 몸이 편해진다는 것은, 몸이 진짜 편해지는 것도 있겠지만 마음이 편해져요. 누가 쥐어 패든 말든, 내가 안 때리면 됐죠. 아마 그랬기에 간디가 있었을 거예요. 그랬기에 과거의 성자들이 있었을 거예요. 슈바이처를 팼다고 마주 팼을까요? 슈바이처는 제가 잘 몰라서 그렇지만요.
인과를 기다리는 힘
아무튼 제가 오늘은 이런저런 얘기를 좀 돌려서 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삼각형의 감각 구도를) 하고 나서도 빛이 더 밝은 느낌으로 처음에 안 되면 억지로 가지세요. 그러면 진짜로 어느 순간 더 밝은 것이 다가올 거예요. 처음에 노력하라는 얘기예요. 왜? 너무 오랫동안 그렇게 안 본 습관을 갖고 있어요.
핸드폰을 보고 있어도요. 앞에 보고 있는 핸드폰에 있는 화면을 이렇게 당겨보고 있잖아요. 한참 봐도 눈이 안 아파요. 그런데 앞에 나무를 보고 있어도 퍼런 나무를 보고 있으면 눈 좋아진다고 그랬잖아요. 퍼런 나무도 눈이 열심히 다가가서 보면 눈 나빠져요. 내가 보는 자세, 사물이 나에게 오기 전에 내가 억지로 사물을 찾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그 얘기를 감각적으로 옛날의 도가에서 얘기합니다. 그것이 속된 해석으로 되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본다는 입장에서, 내가 억지로 본다는 입장에서 찾아오는 놈치고 착한 놈 없더라! 착한 놈은 안 찾아오더라! 내가 찾아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선자는 불래하고(善者不來) 내자는 불선하더라(來者不善)! 무협지에 툭 하면 나오는 말이죠.
사실은 자기가 찾아간 거예요. 그럴 경우에 내 눈앞에 다가오는 것 중에서 나에게 필요하고 또 내 삶에서 꼭 있어야 되는 것들은 드물어요. 다가와 주기를 기다리는 그 힘, 그것이 인과를 기다리는 힘이에요. 인과를 기다리는 힘이 약해지면 세상엔 불의(不義) 밖에 없어요. 불의라는 것은 인과성이 무너졌다는 얘기에요.
제가 세대 얘기를 한번 한 적이 있잖아요. 지지난 시간에도요. 옛날 30년에서 이어서 30년이 한 세대면은 어느 순간부터 사회가 빨라지면서 20년이 되더라, 10년을 공유하더라는 거예요. 세대의 기간을 어느 순간 세대가 10년 만에 세대가 교체되더라, 그러면 이것은 20년이 공유되고 있더라는 거예요. 요즘은 29년이 공유되고 있는 연세가 가장 많은 부분도 29년을 공유하고 있는 거예요.
그 공유를 못하면은 도태되는 거죠. 꼭 그렇다고 해서 공유된다는 법은 없지만 저절로 공유가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공유가 되는 과정 속에서도 정의가 있다면은, 그것은 맞으면 아프고 때리면 미안하고 안 미안할 수도 있겠다! 요즘은 때리고 안 미안한 사람이 너무 많더라고요. 할 얘기는 아닌데 우리 대통령부터 때려놓고 안 미안한 거 같던데요. 아니, 때린 줄도 모를 수도 있죠.
아무튼 웃을 게 못 되는 게 집에서도요. 가족들을 막 때립니다. 입으로, 말로 때린 줄도 몰라요. 저도 지금 막 때리고 있잖아요. 저는 지금 때리는 줄 알고 때리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상대에게 뭘 하면서도 안 일어날 거라고 하는 어떤 이상한 역의 믿음이 생길 수 있어요. 제대로 안 보고 제대로 안 들으면요.
인과에 대해 믿는 경우와 믿지 않는 경우
제대로 안 보고 제대로 안 들으면 어느 순간 인과를 믿지 않아요. 그러면 인과를 믿지 않는 사람이 못할 일이 없어요. 머든 하지 못할 일을 저지르는 것은 그 인과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요. 남의 것을 훔치면 어떻게 되고, 남의 생명을 빼앗으면 자기가 어떻게 되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벌을 받고 안 받고는 별다른 사회적 문제이고, 그것과 상관 없이도 역시 인과는 이루어져요. 인과는 여러 차원에서 동시에 진행되죠.
내가 사회적인 동물로서 살아가는 이상 사회적으로도 이루어질 것이고, 내가 개인으로 살아가는 이상 개인의 차원에서 이루어질 것이고, 하나의 생물로 살아가는 이상 생물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겠죠. 그것 또한 시차가 다르죠. 내 개인의 차원에서라면은 오늘 밥을 먹었으면 조금 이따 20분 후에 배가 불러야 되고, 20분 후에 배가 불렀으면 5시간 후에는 다시 배가 고파야 되죠. 인과죠.
그런데 사회적으로는 밥을 먹었는데 5시간을 고사하고 5년 동안 배가 안 부를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사회적으로 엄청 사회 간접자산을 투입했어요. 이 사회가 배가 불러야 하는데 5년 만에 배가 안 불러올 수 있어요. 그런데 어떤 경우는 투입을 조금밖에 안 했는데 바로 배가 빵빵 하게 불러올 수 있어요. 뻥튀기를 먹인 거죠. 그걸 잘하는 사람을 뭐라 그러죠? 정치꾼이라고 그럽니다. 뻥튀기를 조금 먹였는데 바로 배부르게 만들어주는 거는요.
각각의 사회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인간으로서의 개인이든 가족이든 어떤 집체든 간에, 이루어지는 인과는 시차가 다 다르다는 거예요. 그 다양한 시차를 바람처럼 구름처럼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지, 그 억지로 내 마음대로 인과를 이루려고 하잖아요. 내 마음대로 그 인과를 조절하려고 하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먼저 당해요. 자기의 생명이 먼저 타격을 받아요. 내가 없어져요. 나도 그 인과 속에 지나가는 하나의 알갱이에 불과할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그 알갱이에 불과한 자가 인과를 통제하려고 한다는 거죠. 인과를 기다리고 인과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안에서 자기가 가장 피동체가 되면서, 그 피동체가 되는 순간 가장 완벽한 자주체가 된다는 거죠. 피동과 능동, 수동과 능동도 다르지 않아요. 어찌 보면 가장 능동적인 것이 가장 피동적인 걸림돌이 되는 방법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사는 게 피곤해지죠.
자기다운 모습을 유지하면
목요일에 전주를 안 내려갔습니다. 전주를 안 내려가니까 집에서 어느 시간에 tv를 틀고 싱어게인3를 봤어요. 토요일인가 금요일날 재방송으로 봤어요. 보신 분이 혹시 있나요? 마지막 조에 4명이 나왔는데 우리 서초 점장님 조금 닮은 여성 분은 노래 부르는 게 어떤 느낌이냐 하면, 너울이에요. 제가 몇 번 봤을 때 바다가 있다면, 물이 있다면 너울처럼 부르는 분이었어요.
그 다음 두 번째 부르는 젊은 친구는 바닷물로 친다면 파도였어요.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할 정도의 유쾌하게, 노래 부르는 느낌의 스타일이 몸을 시원하게 적셔줄 정도의 파도의 느낌이었어요. 그 다음에 세 번째 온 젊은 고등학생 같은, 꼭 배우 같은 느낌을 주는 그 아가씨는 노래 부르는 느낌이 물로 치면 물안개 같은 느낌이었어요. 마지막에 한 50대 중반쯤이나 초반일까 모르겠어요. 연세가 좀 있는 분이던데 그분은 물로 비교한다면 눈을 마주쳐서 그 물을 튕겨내면서 자기를 토해내고 있는 방파제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자기가 자기를 아는 사람이 넘어가더라고요. 너울인 사람이 꽃을 피우려고, 물 안개를 피우려고 그랬어요. 떨어진 거죠. 그 다음에 물 안개를 피우는 사람이 너울을 해보려고 그랬어요. 떨어졌어요. 파도는 파도대로 놀았어요. 방파제나 방파제대로 놀았어요. 그 둘이 올라가더라고요.
듣는 사람들은 같더라는 거예요. 심사위원들 중에서 어떤 심사위원은 자기가 억지로 들으려고 해 듣고 있어요. 어떤 심사위원은 그냥 듣고 있고 그런데 억지로 들으려고 해서 듣는 심사위원은 늘 편파를 내려요. 시청자가 봐도 저 친구 이상한데 저 친구가 심사위원 해도 되나? 억지로 들으려고 듣고 있거든요. 그러면 무리수를 두게 되죠.
아무튼 자기다운 모습을 유지 못하면, 뭐 딴 얘기하려고 했지마는 오래 버티기 힘들어요. 오래 버텨야, 적어도 일정한 인과를 버티는 힘이 생겨야 빛을 봐요. 빛이라는 것은 어떤 기술에 의해서 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요가를 한다고, 국선도를 한다고, 단학선원을 다닌다고 뭐 이상한 수련 한다고 볼 수 있는 게 빛이 아니에요. 빛은 각각의 차원의 다양한 인과관계를 시차를 두고 인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 힘과 경험이 쌓이면 빛은 저절로 보여요.
제가 말하는 빛은 추상이 아니에요. 사람의 모습에서 얼굴을 뵈면 얼굴은 이렇게 갸름하시고 눈은 이렇게 봉긋하시고 그렇지만요. 이전에는 어떤 느낌이냐면, 사람이 어떤 느낌이겠다 이런 느낌은 오잖아요. 그 느낌을 넘어서서 그 사람에게서 빛을 봐요. 그리고 다른 사물에게서 빛을 봐요. 스쳐 지나갔던 어떤 들짐승에게서 내가 로드킬을 할 수도 있었던 그 짐승에게서 빛을 봐요. 실제로 보여요. 환하게. 그 노루의 고기 너머로 빛이 함께 보여요.
빛이고 색은 아니라는 거예요. 색이라는 것은 사람이라는 이 프레임에 의해서 왜곡된 굳어진 하나의 빛이라는 거예요. 그 왜곡됐고 굳어졌던 것이 풀리고 왜곡이 일정 정도 바로 서면서 실제로 빛이 느껴지고 느껴지다 못해 보여요. 그래서 저 사람에게서는 저런 빛이 나는구나! 저 얼굴에서는 저 빛이 나는구나!
그래서 그 빛을 보다 보면은 내일 죽을 사람, 오래 사는 사람들을 금방 알게 돼요. 그리고 굳이 옛날 의사들 같은 경우는 쳐다보고 문진을 해요. 소리 들어보고도 병을 알아요. 그리고 얼굴을 보고도 병을 알아요. 굳이 맥 안 짚어도 알아요. 저는 돌팔이이기 때문에 맥을 안 짚는 것이지, 오해하시면 안 되고요.
인과를 바라보는 최소한의 시간으로 1년
아무튼 조금 기다릴 수 있는 인과를 바라보는 힘, 그 인과를 바라보는 힘이 최소 얼마가 필요할까? 최소가 1년이 필요해요. 1년 정도 사이에 이루어지는 인과에 대해서도 인과를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은 그 다음에는 다른 인과는 생기게 돼 있어요.
1년이라는 게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 인간이 2차원 동물이라고 그랬잖아요. 유사 3차원이라고. 자기는 2차원이라고 그러는데 가만 위에서 보면 이불 밑에서 꼼지락거리는 3차원이라고. 3차원인줄 착각하고 사는 3차원이지. 2차원이라고. 우리 인간은 2차원이에요. 우리는 2차원의 공간이 없는데 공간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크게 보면 다 대기라는 이불 밑에 깔려가지고 꼼지락 꼼지락하고 있는데, 잠깐 꼼지락 꼼지락하는 순간적인 몸놀림에 불과해요. 그냥 지구 껍데기예요. 지구의 이불에 불과해요. 이불 위에 이렇게 가끔 이렇게 이런 니트 입으면 보푸라기가 나죠. 그 보푸라기예요. 그게 3차원입니까? 쑥 누르면 없는데? 원래 2차원인 종이를 자꾸 문질러 놨더니 보푸라기가 난 거예요. 그 보푸라기가 인생이에요.
그런데 그 인생이 진짜 빛을 받으면 차원이라는 것은 3차원, 4차원 이런 게 없어요. 빛을 보는 순간 차원은 사라지는 거예요. 빛을 보는 순간 차원은 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 빛은, 적어도 1년은 인과를 기다리는 힘이 있어야 봐요. 다른 어떤 기술, 영통을 시켜준다, 신통을 시켜준다, 천안통을 시켜준다 해봐야 다 소용없는 소리고요. 그건 전부 다 정치꾼들 하는 얘기와 똑같은 겁니다. 공부하는 세계에도 정치꾼은 많습니다.
있는 걸 있다 하고 없는 건 없다 하는 게 정치인데, 지금은 있는 걸 있다 하고 없는 걸 없다 하면은 운동이라고 그러죠. 있는 걸 없다 하고 없는 걸 더 있다 그러면 이놈은 이제 정치라고 하거든요. 이상한 세상이 됐어요.
아무튼 1년이라는 그 기한, 여러분들이 혹시 인과를 바라보면서 살 수 있는 마음으로 한번 살아보신다면, 그 1년 후에는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과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을 거예요. 단 이제 그럼 어떻게 인과를 바라볼 것인가?
인과를 바라볼 수 있는 힘이 필요하고 인과를 바라볼 수 있는 눈과 귀는 필요하죠. 그 눈과 귀에 나름대로는 밥 먹을 때 요령이 있듯이 요령은 있어요. 그러나 스스로 빛을 보는 것은 그 요령 이후 쌓여진 인과의 세월이죠.
오늘 사실은 얘기 별거 안 드렸습니다. 다음 번에는 같은 몸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보면서 보지 않고 볼 수 있는가, 듣지 않고 들을 수 있는가! 이스라엘의 별은 과연 어떻게 작동하는가! 현실적으로 한번 말씀을 한번 드려보겠습니다. 오늘 얘기는 짧게 하겠습니다.(본편)
# 문답편 (문답편 정리가 끝나지 않아, 일부만 올립니다. 양해 구합니다)
질문: 제가 보이차를 오랫동안 먹지는 않았는데요. 먹고 나서 11월에 조금 많이 힘들었었어요. 그러고 나서 괜찮아 몸이 많이 건강해졌다라는 걸 느끼는데, 보이차를 그전에 아프고 나기 전에는 먹고 나도 생각이 깊어지거나 이러지 않고 잠도 굉장히 숙면을 취하고 이랬는데요.
그 11월의 계기를 지나고 나서부터 잠도 잘 못 자고요. 오히려. 하나의 생각이 들면 계속 빠져들고 그리고 예전에는 진짜 아침마다 일어나면 머리가 너무 아파 갖고 일어나자마자 제가 커피 한 잔씩을 매일 먹었어야 됐었어요.
그런데 최근 들어서 또다시 예전처럼,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부터 아픈 거예요. 그래서 지금 이제 일어나서 보이차를 마시긴 하는데 예전이나, 그러니까 먹기 몇 개월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거는 없거든요. 저는. 그냥 선생님들이 하라는 대로 하고는 있는데요. 변한 거는 없는데 제 몸에서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거가 또 기다리면 넘어가는 건지 아니면은?
선생님:
원인이 있는 거죠. 사람이 뱃속에 차가운 것이 있으면 염증이 깊어지고 모이고, 뱃속에 미지근한 것이 있으면 염증이 그냥 유지되고, 그냥 뜨거운 게 들어가면 염증이 퍼져요. 그러니까 따듯한 음식을 먹으면 깊이 있는 것이 올라와서 퍼져요.
그런데 퍼질 때 그게 금방 사라지지 않아요. 그러면서 사람들이 차가운 음료를 먹으면 사람들은 염증을 못 느껴요.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알로에 같은 걸 먹으면 더 편하게 느껴요. (알로에는 성질이)굉장히 차갑거든요. 그런데 깊이 들어갈 때는 못 느껴요. 나중에 탈 날 때는 이제 한꺼번에 확 오죠. 그 이전까지는 오히려 얼굴도 더 광이 나고 더 좋아 보여요. 나중에 깊어진 다음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죠. 따뜻한 음식 뭐든지 물이든 따뜻한 게 들어가잖아요. 깊은 것은 밖으로 나와서 그것이 퍼져요. 퍼지면은 안에 있을 때는 안 나타났던 것이 넓게 거품이 발생해요.
예를 들어서 먹은 것이 있든 없든 간에 그걸 감싸고 있던 막은 어차피 형성돼 있죠. 그 막이 넓게 형성돼 있는 안에서 약간의 거품이 안에 또 있는 거죠. 그럴 때 아침에 가스 찬 것 같아요. 연탄가스 마신 것 같아요. 그럴 때는 찬물 마시면 바로 좋아져요. 차가운 물을 마시면. 그런데 장기적으로는 병이 나죠. 장기적으로 하면 안 되는 거죠. 그럴 때는 미지근한 물을 마시는 게 좋아요.
질문: 차는 안 마시고요?
일단은 미지근한 물 한 잔 마시고요. 미지근한 물을 어떻게 마시냐면요, 밑에 뜨거운 물을 반 부어요. 그 위에 차가운 물을 부어요. 마실 양의 반으로 뜨거운 물을 밑에 넣고 차가운 물을 위에 놓으면, 대류가 나게 하는, 그 대류가 일어나는 에너지를 마시면 몸에서 이렇게 연탄 가스 빠지듯이 빠지고 좀 상쾌해져요. 그러고 난 다음에 차를 마시고 밥을 드시고 하는 게 좋아요.
연탄 가스가 뭔지 잊어버릴 것 같으면 연탄구이 집에 가보시면 돼요. (웃음) 그렇게 해서 아침에 그 백비탕, 뜨거운 물에 차가운 물 넣으면 이렇게 섞일 거 아니겠습니까? 대류가 일어나잖아요. 대류가 일어난다는 자체가 에너지예요.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이 만나는 힘. 그래서 그것을 마시면 속에서 일단 머리가 금새 시원해지고 깔끔해져요. 그 다음에 드시고 싶은 거 드시고 마시고 싶은 거 마시면 되죠.
질문: 그럼 제가 지금 이 겪는 이 과정이 보이차를 처음부터 먹고 이렇게 가는 길의 하나인가요?
선생님: 그게 특히 주무실 때 습기가 안 맞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요. 매일 그럴 수도 있는데 특히 지나치게 건조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습도가 높거나, 아니면 공기 대류가 일어나고 있는 데 주무시거나 그럴 경우에 더 해요.
그래서 공기가 알맞은 습도를 유지하면서 잘 움직이지 않고 있는 공간에 주무시면 그러지 않아요. 그런데 공기가 막 움직이고 있다던가, 어떤 집에서 공기 정화기 켜놓고 주무시는 집에서 많이 그래요. 공기 정화기는 주무실 때 꺼야 돼요. 저는 켜놓고 자요. (웃음)
질문: 아시면서 왜 했어요? 저는 몰라서 그런 건데. (웃음)
그래도 먼지는 싫어서요. 아무튼 공기 정화기는 주무실 때는 꺼놓고 주무셔야 되고요. 그리고 예를 들어서 가습기가 있다 하더라도, 가습기보다는 수건 짜서 널어놓는 게 훨씬 좋아요. 그래서 공기가 주무시는 공간에서 최대한 이동 없이 알맞은 습기를 유지해 주고 있는 것이, 주무셨을 때 배 속의 상태를 편안하게 만들어요. 가습기를 돌렸다든가 공기 정화기를 돌렸다든가 아니면 어디선가 집 안에서 공기가 돌고 있다든가, 그러면은 띵 해져요. 그리고 수분이 넘칠 때거나 아니면 수분이 모자라서 너무 건조할 때도 그러기 쉬워요.
질문: 제가 요즘에는 땀을 많이 안 흘렸는데 잘 때는 정말 젖을 정도로 잠 잘 때는 땀을 많이 흘리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선생님: 그거는 좋은 것일 수 있어요. 필요해서 흘릴 수 있어요. 흘리는 걸 마다할 필요는 없어요. 흘릴 때 그냥 흘리는 거를 세탁 한 가지만 더 하면 되는데요. 그래서 일단은 백비탕이 약이 되실 거예요.
질문: 앞의 선생님하고 조금 다르긴 한데 눈썹으로 약간 찬 기운 같은 게 느껴지는데 그때도 백비탕이 좋은가요?
좋아요. 사실은 완전히 따뜻한 물보다, 갑자기 일어났을 때는 찬물보다도 그렇게 찬물과 뜨거운 물이 섞여 있는 물이 좋아요. 섞을 때는 뜨거운 물이 밑으로 가야만 잘 섞여요. 차가운 물 밑에 놓고 위에 뜨거운 물 넣으면 잘 안 섞여요.
특히 운전을 해서 어디 휴게소를 가거나 이럴 때 시간이 없고 급하잖아요. 급하지 않아도 급하거든요. 본인은 느긋하게 한다고 해도 급하거든 거기서 식사까지 했다 싶을 때는 반드시 휴게소 물이라도, 따뜻한 물 밑에 반, 위에 찬물 받아서 그리고 헹구고 가시는 게 좋아요.
질문: 비행기 탈 때도 마찬가지인가요?
선생님: 비행기에서 절대적으로 좋아요. 그렇지 않으면은 비행기에 주는 음식이 아무리 연구를 많이 해줘도 소화가 될 수가 없어요. 엄청나게 연구해서 나오는 음식들이고 그 연구와 그 음식을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비행기에 타는 음식들도 단가가 다 2만 원 이상 들어가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거 뭐 2~3천 원밖에 안 돼 보이는데 싶지만, 이게 다 2~3만 원 이상 들어가는 음식들이에요. 비행기에 탄 사람들의 부풀어지는 속에서 무리를 안 일으키게 해주기 위해서.
그래도 비행기 타고 나면 체하는 경우가 또는 준(準) 체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안 드시는 게 제일 좋고요. 한 끼 먹어야 되는 상황이면 안 드시는 게 제일 좋고요. 두 끼 드셔야 되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먼저 물을 그렇게 드시고 먼저 밥이 올 때쯤 되면 냄새 나잖아요. 물부터 달라고 해서 드시고 밥 드시는 게 좋고 밥 드시고 나서도 그렇게 하시는 게 좋아요. 비행기 타고도 가장 안전하게 타는 방법은 물 많이 먹고 화장실 자주 가는, 소변 보러 자주 가는 게 가장 좋은 거예요.(문답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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