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사람들을 향한 비밀
숨 이병창
성서에서 가장 중요하고 비중 있는 단어가 있다면 ‘말씀’일 것이다. 말씀이라는 단어만이 하느님과 동격을 이룬다. 말씀은 모든 존재계의 생명을 이루는 근본원리이다. 하느님은 말씀으로 모든 만물 이루고 지으셨다. 말씀은 창조의 도구였다. 인간과 이 세계와 다양한 모든 체계의 세상은 최초원인의 빛, 곧 그리스어의 로고스에 해당되는 말씀에서 시작되었다.
최초원인의 빛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빛이다. 물질의 차원이든 영적인 차원이든 일체의 모든 근원이 우주적 말씀(그리스도)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창조의 근원인 말씀으로부터 알파와 오메가가 나왔다. 그 말씀은 모든 존재계를 관통하는 빛의 파동으로 지금도 울려 퍼지고 있다. 요한은 말씀과 하나이며 또한 말씀 그 자체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도 말씀과 하나임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창조의 근원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존재이며 근원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알파와 오메가는 창조주의 섭리 안에 있음을 전해 주고 있다. (요한 1:1-5)
최초 아담의 코에 불어넣어진 숨은 지금도 내 코에 들어오고 있고 그 은혜로 내 심장이 뛰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내 존재의 알파와 오메가가 무엇인지 모른 채 지구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길을 잃어 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창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다. 나 자신의 세계와 나 존재의 밖의 세상을 위해서 창조주와 함께 일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지구 학교에서 아버지의 일을 거드는 성숙한 아들로 성장해야할 책임이 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한 비밀은 온갖 시련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연단되고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지고 완전하게 되는 데 있는 것이지 지상에서 영원히 살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슬기로운 이들, 하느님 편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은 이 비밀을 깨닫게 된다. (단 12: 10)
자신의 알파와 오메가가 무엇인지 모를 때 인간은 지구에 보내어진 자기 존재의 목적과 사명을 알 길이 없다. 인간의 방황과 자학이 여기에서 발생하게 된다. 거룩한 형상으로서의 나(I AM)를 모르고 물질 몸을 나로 알기 때문에 자신을 향한 하늘의 디자인(Logos)을 망각하게 된다. 말씀의 빛이 차단되고 저급한 자아의 썩어질 의식이 지배하게 됨으로 극단적인 자기 비하, 자기 부정, 자기 학대의 고통 속으로 자신을 내몰게 된다. 이런 상태는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원수가 되는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다. 죄란 자신을 관용하지 않고 자신을 저주하는 상태를 말한다. 에니어그램이 말하는 성격유형이란 이렇게 자기 자신 안에 갇힌 사람들의 유형이다.
아담이후 인류가 길을 잃은 것은 하느님의 목적과 상반되게 자신과 남을 습관적으로 해치는 저주의 멍에를 짊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무엇이 자신을 망치게 하는 줄도 모른 채 잘못된 길로 달려가고 있다. 하느님은 세상을 저주하기 위해서 아들을 보낸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그를 보내셨다 (요한 3:17) 그 구원은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정치적 모순과 종교적 율법주의와 광신주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영역에 미치고 있다. 구원의 시작은 존재의 첫 자리로 돌아가는 경험이다. 예를 들어 회심하기 전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그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였지만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었다. 율법과 교리 속에 그의 의식은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돌부리를 걷어차는 미련한 짓을 믿음의 열심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을 멀게 하고 정화시키는 하늘의 빛을 만나면서 그의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기 자신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구원이 그에게 임한 것이다. 회심의 빛을 만나면서 그는 말씀의 근원으로 들어설 수 있게 된 것이다.(행 26:12 이하)
우리가 바울을 통해서 깨닫는 것은 그가 사울이었던 시절조차 바울이 되기 위하여 내적으로 준비하는 시기였다는 점이다. 그의 전 생애는 사울의 껍질을 벗고 바울의 옷을 입기 위한 치열한 학습의 과정이었다. 그는 치열한 배움의 자세와 훈련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면의 새로운 차원의 배움에 있어서도 낯설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알 껍질을 깨고나와 치열한 복음의 최전선에서 불꽃 같은 인생을 산 것 역시 바울 이전의 삶 역시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인생을 산 사람이었음을 나타낸다. 바울은 우리에게 어제의 사울이 아니라 오늘의 바울로 인생을 살아야 함을 증거 해 준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 미래는 지금 나에게 찾아오고 있다. 인간은 현재 안에서 내일을 만들어내고 어제를 변형시킬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신념의 믿음에서 통찰의 믿음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어제 사울이었기 때문에 오늘도 사울로 살아야할 이유는 없다. 주변의 눈치 보기와 입력된 신념 때문에 바울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피한다면 내 삶의 기회는 허무하게 낭비되고야 말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선택이다. 가장 결정적이고 값진 선택을 하는 순간 나의 구원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영원한 지금 안에서 성취된다.
우리는 인생의 길을 걷다가 넘어지고 깨어진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완전을 향하여 한걸음씩 걸어가고 있다. 우리가 하나의 실수를 하고 넘어진다 해도 우리는 그 일을 통해서 얻는바가 있고 교훈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아버지의 뜻 안에서 나의 영혼이 정금 같이 빛나게 하는 역할을 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