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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30년 만의 우주쇼, 금성 ‘미니 일식’
우리나라에서 130년 만에 금성이 태양을 지나가는 우주쇼가 펼쳐진다. 한국천문
연구원은 3일 “오는8일 오후2시12분부터 금성이 태양 앞면을 가로질러 통과한다”고 밝혔다. 달이 태양을 가려 태양의 일부가 검게 변하는 일식과 같은 원리이지만, 금성
의 크기가 워낙 작아 작은 점이 태양 표면을 지나가는 ‘미니 일식’이 될 전망이다.
천문연 김봉균 박사는 “금성의 겉보기 크기는 태양의 약 32분의 1로, 플로피 디스켓 속의 필름과 같이 태양빛을 차단할 수 있는 필터를 이용하면 태양에 작은 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망원경에 직접 눈을 대고 보면 실명(失明)
할 수도 있어 주의해야 한다.
금성의 미니 일식은 태양과 금성,
지구가 일직선이 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금성은 584일마다 태양과 지구 사이에 위치하지만, 실제로 미니 일식은 약 243
년에 4번 정도 일어나는 희귀한 현상이다.
김 박사는 “이는 금성의 궤도면이
지구의 궤도면과 약 3.4도 정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874년 12월 9일 이후 130년 만에 처음 일어나는 현상이다.
➡️2015년통 대통령·굽타 박사 ‘선학평화상’ 첫 수상자로
➡️2015년이윤자 주부교실 중앙회 명예회장 별세
➡️2009년 북한 중앙재판소, 북한 국경
넘어 체포된 미국인 여기자 2명 징역 12년 선고.
➡️2009년 선천성 시각장애 피아니스트 쓰지 노부유키(20), 미국 텍사스주의 포트워스에서폐막한반클라이번국제콩쿠르에서공동우승
👉🏿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일본의 스무 살 피아니스트 쓰지 노부유키(20)가 2009년 6월 8일(한국 시각) 미국 텍사스주의 포트워스에서 폐막한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에서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1962년 시작돼 올해 13회를 맞은 이 콩쿠르는 4년마다 열리며 미국 최고의 피아노 경연대회로 꼽힌다. 시각 장애 연주자가 이 콩쿠르 본선에 진출한 것은 1973년 주디스 워커(Walker)가 마지막이었지만 그는 당시 2차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2009년가봉의 오마르 봉고 대통령 사망
➡️2006년 이슬람 테러지도자 알 자르카위가 미군 공습으로 사망하다.
➡️2004년 130년 만의 우주쇼, 금성 ‘미니 일식
➡️2003년고대 이집트 ‘미(美)의 화신’ 네페르티티 왕비 미라 발견
👉🏿 네페르티티 흉상에 한쪽 눙동자가 없는 이유?
네페르티티(Nefertiti· 기원전 약 1370~1330)는 이집트 제18왕조의 열 번째 왕으로 재위했던 아케나톤의 왕비다. 투탕카멘의 양어머니이자 장모였던 그녀는 아케나톤 사후에 파라오로 즉위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의 권력자였다.
'미인이 왔다'는 뜻의 이름에 걸맞게 고대 이집트 최고의 미녀로 손꼽히는 네페르티티의 명성은 20세기 초에 발굴된 이 흉상<사진>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황갈색 피부, 탄탄한 윤곽의 긴 목, 날렵한 턱선과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녀는 단순히 겉모습의 미모에 그치지 않고 지위에 어울리는 고상함과 카리스마를 겸비한 강인한 여인의 면모를 보여준다.
완벽한 미인인 그녀의 상(像)에는 특이하게도 왼쪽 눈동자가 없다. 조각가인 투트모세가 일부러 비워두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왕과 왕비는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았다.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육체가 죽더라도 영혼, 즉 '카'는 신들의 세계로 되돌아갈 뿐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따라서 무덤에 부장품으로 매장되는 상들은 오늘날처럼 박물관에 진열하고 감상하는 미술품이 아니라 영원불멸한 '카'가 깃들어 있는 신성한 존재였던 것이다.
투트모세의 작업실에서 발견된 이 상은 그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습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당연히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 눈동자를 찍어 얼굴이 완성되는 순간, 이 상은 더 이상 '물건'이 아니라 범접할 수 없는 '신'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치 손을 대면 온기와 호흡이 느껴질 듯 생생한 이 상에 '화룡점정(畵龍點睛)'했더라면, 네페르티티는 그 자리에서 하늘로 날아올라 신들의 세계로 되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이 미라는 발굴 당시 심하게 훼손된 상태여서 ‘젊은 여인’이라 불리며 별 관심을 끌지 못했고, 1907년
이집트 박물관의 한 방에 방치되기 전 딱 한번 사진으로 촬영된 바 있다. 플레처 교수는 이 미라의 사진이
독일 베를린의 달렘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네페르티티의 흉상과 닮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연구를
시작했다. 아크나톤 통치시 수도였던 아마르나에서 1914년 발견된 네페르티티의 석회석 채색 흉상은 긴
목과 올라 붙은 광대뼈, 가냘픈 코를 가진 미인의 모습을 실증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 카이로 유물관리 위원회 사무총장 자히 하와스는 ‘젊은 여인’ 미이라가 골반이 작은 점,
30세 전후로 사망했다는 네페르티티에 비해 미라는 18세~30세 사이에 사망했다는 점을 들어 네페르티티와
전혀 상관없는 고대 남성의 미라라고 반박했다.
네페르티티는 고대 이집트 제18왕조의 왕 아케나톤(재위 BC 1379~1362)의 두 번째 부인으로
클레오파트라, 아낙수나문과 더불어 고대 이집트 3대 미녀 중 한 명이다. ‘미인이 왔다’는 뜻의 네페르티티
왕비는 이집트 귀족 출신으로 다신교를 버리고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숭배한 파라오 아크나톤의
부인이 됐다. 당시 아톤의 제례를 주관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름인 네페르티티의 의미는 고대 이집트어로 "미녀가 왔다" 인데, 그녀의 미모가 출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든 그녀는 아크나톤의 왕비로서 지내다가 아크나톤 통치기간 말년에 그의 총애를 잃어
궁에서 쫓겨났다고 하고, 이후 아크나톤이 사망하면서 아크나톤의 어린 아들인 투탕카멘이 파라오가 되자
다시 궁으로 돌아와서 2년 정도 태후의 위치로 국정을 돌보았다가 BC 1330년경에 사망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그녀는 고대 이집트 최고의 미녀로 불리는데, 그런 평가를 받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그녀를 묘사한 걸작
흉상 덕분이다. 1912년 12월 6일 독일의 이집트 학자 루트비히 보르하르트는 이집트 사막 도시
아켈타톤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흉상을 발견했다. 보르하르트 박사는 흉상을 독일로 밀반출했고 흉상은
1923년 독일 베를린 알테즈 박물관에 전시돼 아름다운 외모로 이집트 예술품 중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 받았다.
그러나 최근 그녀의 무덤이 발견됐다고 하는 이론이 제기됐다고 미국 CNN 방송이 2015년 8월 11일
보도했다. CNN에 따르면 애리조나 대학의 영국 고고학자인 니콜라스 리브스는 이집트 투탕카멘 왕의
무덤에 네페르티티의 관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투탕카멘 왕은 네페르티티 왕비의
조카이며, 기원전 1334년에 네페르티티 왕비의 남편인 아크나톤 왕이 사망하고, 그를 대신하여 약 2년
간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여러 가지 유전적 질환으로 면역체계가 약했던 투탕카멘은 다리 골절상을
입은 상태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1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투탕카멘 왕의 무덤은 1922년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에 의해 거의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됐다.
리브스는 지난 2014년 공개된 투탕카멘 왕 무덤의 고해상도 이미지를 보고 무덤 속에 다른 공간으로
이어지는 벽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리브스는 투탕카멘 왕의 무덤 속 벽에 다른 공간으로 이어지게끔
하는 조그마한 구멍 2개를 발견했다고 덧붙였다.
리브스는 투탕카멘 왕의 무덤의 본래 주인은 네페르티티 왕비라고 주장한다. 그는 투탕카멘 왕의 무덤
속에 숨겨진 공간 안에 네페르티티 왕비의 관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리브스에 따르면 네페르티티왕비가 사망하고 무덤에 묻힐 당시 이집트인들은 투탕카멘 왕이 똑같은 무덤에 묻힐 것이라 생각지도않았다. 그러나 투탕카멘 왕이 예상보다 너무 일찍 사망한 나머지 그의 무덤을 만들 시간이 없었고
네페르티티 왕비 무덤에 같이 묻었다는 것이다. 이는 투탕카멘 왕의 무덤이 다른 이집트 왕들의 무덤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이유를 설명해 주기도 한다.
➡️2001년 한기총 재단법인 아가페(기독교교도소) 법인창립 이사회를 개최하다. (팔레스호텔)
➡️2001년 히타미 압승으로 이란 대통령에 재선.
➡️2001년일본의 30대 정신병 환자, 초등학교서 난동을 부려 학생 8명 사망
👉🏿 2001년 6월 8일 일본 오사카의 한 초등학교에 약물을 먹고 환각상태에 빠진 30대 남성 1명이 침입, 흉기를 닥치는 대로 휘둘러 학생 8명이 숨지고 15명(교사 3명 포함)이 중·경상을 입는 엽기적 사건이 발생했다.
➡️2000년 미국 만화가 제프 맥넬리 사망.
➡️2000년불교 조계종 원로회의장 탄성 스님 입적
➡️1997년시인 박재삼씨 별세
👉🏿 `20세기 한국의 마지막 서정시인`이라 해도 결코 지나친 찬사가 아닐 서정의 시인이었던 시인 박재삼씨가 근 30년의 투병생활 끝에 1997년 6월 8일 새벽, 향년 64세로 별세했다.
193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시인은 4살부터 스무살 무렵까지 삼천포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광주리 이고 멍게장사를 하고 아버지는 지게 지고 노동했다. 고려대 국문과 중퇴 후 신문 등에 바둑관전평을 쓰는 일 말고는 평생을 다른 직업 갖는 일 없이 살았던 이 자유인에게 대신 가혹한 가난과 병마가 덮친 것은 35세였다. 고혈압으로 처음 쓰러진 후 그는 임종시까지 만성 신부전증과 심근경색, 창으로 투병해왔다.
➡️1994년구총독부건물 해체결정
➡️1990년이츠하크 샤미르가 주도하는 리쿠드당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우익연정 구성
➡️1990년제14회 월드컵 이탈리아서 개막
➡️1989년소련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 작품, 15년 만에 소련에서 해금
➡️1986년쿠르트 발트하임 오스트리아 대통령에 당선
➡️1985년헝가리에서 최초의 복수입후보제에 의한 의회선거
➡️1984년일본 법원, 지문날인 거부한 한국인과 미국인에 유죄판결
➡️1982년이스라엘군 베이루트이남 전해안 장악
➡️1981년이스라엘기, 이라크 원전 폭파
➡️1979년이란 전은행을 국유화
➡️1976년한국 신무용이 형성되는데 많은 영향을 준 무용가 조택원 사망
➡️1972년베트남 소녀 킴 푹 양, 미군 네이팜탄에 전신 3도 화상
👉🏿 1972년 6월 8일 베트남전 당시 네이팜탄에 의해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은 채 알몸으로 달아나던 9세 소녀 킴 푹 양(가운데)의 울부짖는 모습.
1972년 6월 8일, 미군 전투기가 베트남 사이공 근교 트랑 방 마을에 네이팜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쓰러졌고 마을은 불바다가 됐다. 그때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은 채 알몸으로 울부짖으며 달아나던 벌거숭이의 한 소녀가 카메라 앵글에 포착됐다. 사진은 전 세계에 전송돼 전쟁의 공포와 고통을 절절히 전했다. 소녀의 이름은 판 티 킴 푹이었고 당시 9세였다. 네이팜탄에 등과 목덜미, 왼팔을 부상당한 소녀는 사이공 인근 코레이 병원으로 후송돼 17번에 걸친 피부이식수술 끝에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날 미군이 네이팜탄을 무차별 투하한 배경은 이랬다. 전날 밤 12시경 베트공 `해방전선` 병사들이 트랑 방 마을을 급습, 점거하자 베트남 정부군과 베트공 사이에 마을 쟁탈전이 벌어졌다. 정부군은 중화기로 마을을 포격했고 베트공도 완강하게 저항했다. 전투가 길어지자 오후 4시 정부군의 레반투 여단장이 마을을 폭격하기로 결정하자 미군은 함상 공격기 스카이 레이더기를 동원했다. 폭격은 시작됐고 마을은 불타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후 베트남 당국은 소녀가 공포에 질려 걸었던 고난의 길을 `식민지 보유국`인 미국을 상대로 싸운 영웅적 행위로 추켜세우며 소녀를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로 유학을 보냈다.
킴 푹은 1994년 남편과 두 자녀와 함께 캐나다로 망명했고 1999년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네이팜탄 화염을 피해 알몸으로 달아나던 킴 푹 양의 사진을 찍은 당시 AP통신의 사진기자 닉 우트는 `전쟁의 공포`라는 제목으로 197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971년미국 스탠퍼드대서 중성자보다 작은 새입자 파르촌 발견
➡️1971년칠레, 국가비상사태 선포(아옌데 대통령)
➡️1969년닉슨-티우 대통령 미드웨이회담 개회
➡️1969년영화배우 로버트 테일러 사망
➡️1967년제7대 국회의원선거, 부정선거 논란
👉🏿 1967년 6월 8일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부정선거 시비가 제기된 가운데 민주공화당이 3선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 의석을 확보했다. 총의석 175석(전국구 44석 포함) 가운데 민주공화당 129석(전국구 27석) 신민당 45석(전국구 17석) 대중당이 1석을 차지했다. 무더기표, 대리투표 등의 문제가 제기된 이날 총선거 결과를 3선 개헌의 전조라고 판단한 제1야당인 신민당은 6.8총선거를 부정선거로 단정하고 등원을
거부한 채 전면 재선거를 주장했다.
7월 3일 국회가 개원되었으나 신민당은 부정선거 전면 무효화 투쟁위원회를 구성해 원외투쟁을 계속했고 이에 동조하는 학생들도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며, 이에 정부는 30개 대학, 148개 고교에 대한 휴교조치로 맞섰다. 교착상태에 빠진 시국의 수습을 위해 여야가 전권회담을 개최, 선거관리위원회 위원개선과 선거법-정당법 개정, 부정조사특위법 제정 등에 합의하고, 신민당은 국회개원 142일 만인 11월 29일에 등원했다.
➡️1965년성업공사 발족
➡️1964년공수단 장교 8명 동아일보사 난입
➡️1962년제네바서 미국 소련이 우주의 평화적 공동연구 합의
➡️1958년제6회 월드컵 스웨덴서 개막
➡️1956년이기붕 국회의장 피선, 조경규-황성수 부의장 피선
➡️1953년한국전쟁 포로문제에 관한 협정 타결
➡️1952년휴전회담 가조인
1949년영국 조지오엘의 소설 1984` 출판
👉🏿ㆍ권력자의 정보왜곡·통제 상황 경고
1949년 오늘,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유명한 장편소설 <1984년>이 런던의 출판사 세커 앤드 와버그에서 발간됐다.
출간 당시 미래의 세계를 담은 소설은 극단적 전체주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나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 모습을 차용한 가상의 3개국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가 그 무대다. 독재자이자 정치적 상징으로 그려지는 ‘빅 브러더’가 텔레스크린 등 갖가지 정보화 도구들을 통해 국민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사회를 통제한다.
소설은 디스토피아의 전형을 보여주며, 정보기술이 권력자의 지배도구로 이용될 때의 참혹한 상황을 경고한다. 각 부문에 큰 영향을 끼친 책은 제목을 둘러싸고도 화제를 모았다. 원래 제목은 ‘유럽의 마지막 인간’이었으나 출판사가 마케팅 차원에서 제목 변경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목은 오웰이 원고를 탈고한 1948년에서 뒤 두자릿수를 바꿨다거나, 1884년 영국에서 설립된 페이비언사회주의협회의 창립 100주년을 기념했다거나, 첫째 부인의 시에서 따왔다거나, 아예 아무런 뜻이 없이 그저 미래를 나타내는 기호라는 주장 등이다.
<1984년>은 독재권력에 의해 인간성이 얼마만큼 파괴되고, 권력자의 정보 왜곡과 통제가 얼마나 정교한지 등을 잘 보여준다. 또 정보기술 발달에 대한 맹신을 경고하면서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읽히고 있다. 이에 따라 <1984년>은 달력상 한 해가 아니라 ‘늘 현재’라는 분석이 많다.
➡️1948년일본, 독도 영유권 운운 파문
➡️1941년영국 프랑스 연합군 시리아와 레바논 진격
➡️1937년국제포경신협정 조인
➡️1935년파리에서 최초의 자동차 박람회 개막
➡️1932년한국-중국 연합토일군. 일본나남부대를 전멸
➡️1925년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설치
➡️1921년인도네시아의 정치가 수하르토 출생
➡️1913년베를린에 `독일스타디움` 개설
➡️1906년일본, 남만주 철도주식회사 설립 칙령 공시
➡️1901년러시아군 만주철군 개시
➡️1845년 미국의 제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 사망
👉🏿전쟁영웅으로 칭송받아 온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1845년 6월 8일 사망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왁스호에서 출생해 변호사 생활을 거쳐 1798년 테네시주 최고재판소 판사로 활동했다. 182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J.애덤스에게 패하여 낙선했으나, 1828년 재도전해 당선됐다.
서부 출신 최초의 대통령으로 재임 중 구습을 타파하는 청신한 정책을 취해 서부의 농민, 동부와 북부의 노동자, 남부의 농업경영자 등으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1832년 재선됐다. 그는 직선적이고 야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관세문제나 미합중국은행 재인가 문제 등에서는 강경한 태도를 취했지만, 여론을 중시하는 대중 중심의 정치를 펴 인기가 높았다.
또한 선거권의 확대, 대통령 선거제도의 개선, 전국당대회제의 채택, 교육의 보급 등으로 일반 대중의 정치참여 기회를 증대시킨 대통령으로 평가받았다. 그가 확립한 새로운 개념의 민주주의는 ‘잭슨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20세기 초반까지 국민들에게 영향력을 미쳤다.
➡️ 1814년 영국 작가 리드 출생
➡️ 1810년 독일 작곡가 슈만 출생
➡️ 1809년 미국의 혁명이론가 토머스 페인 사망
➡️ 1720년 숙종 사망
➡️ 1689년 송시열 사망
➡️ 1456년 사육신 처형
➡️ 632년 이슬람교 창시자 마호메트 사망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632년 6월 8일 메디나에서 사망했다. 부친이 일찍 죽어 조부와 숙부 밑에서 자랐다. 청년시절 대상을 따라 시리아 등지를 왕래하며 만난 유력한 상인의 미망인인 하디자와 결혼, 3남 4녀를 낳았다.
40세가 되던 610년 경, 세속적인 생활을 중단하고 메카 교외의 히라산에 있는 한 동굴에서 명상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처음으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알라신의 계시를 받았다. 그 내용은 `코란` 제9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계속 알라의 계시를 받게 되자 그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할 것을 결심, 부인 하디자를 최초의 신도로 받아들였다. 신도는 점차 증가했으나, 이제까지의 다신교를 부정하고 유일신 알라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다는 그의 주장이 당시 메카 지배층의 이익과 배치되어 613년경부터는 집권세력으로부터 견제와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615년에는 신도 일부가 박해를 피해 아비시니아로 피신, 그곳에서 그리스도교도에게 환영을 받았으나 마호메트 자신은 전부터 정해 둔 메디나로의 이주를 준비했다. 마침내 622년 9월 24일 신도 70여명과 함께 메카를 탈출, 메디나로 이주했다. 이를 헤지라(聖遷)라고 하며 이 해가 이슬람력의 기원이 된다.
당시 메디나의 내분을 틈타 마호메트는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해 사태를 수습하고, 메카에 대항할 수 있는 군대를 양성했다. 메카세력과의 오랜 전쟁 끝에 마침내 630년 10월 메카를 점령한 마호메트는 이후 아라비아 반도 전역의 각 부족을 속속 이슬람교로 개종해 교단을 완성해 나갔다. 그 후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어, 632년 6월 8일 애처 아이샤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https://youtu.be/4K4MJKMGhl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