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일본 평화단체 '피스보트', 51번째 지구촌 일주 항해 시작
'평화의 배를 타고 세계 시민사회를 만난다!'
일본 평화단체 피스보트의 51번째 지구촌 일주 항해가 3일 시작됐다. 이날 오전 요코하마에서 출항한 토파즈호에 오른 피스보트 활동가와 각국의 시민운동가, 일반 참가자 등 1052명은 앞으로 105일 동안 아시아-아프리카-유럽-라틴아메리카-남태평양 항로를 따라 17개 국을 방문한 뒤 12월15일 요코하마항으로 돌아온다.
일본 도쿄에 본부를 둔 피스보트는 1983년 9월 초 역사교과서 왜곡 파문에 반발한 젊은 평화운동가들이 일제의 식민지배 현장을 2주 가량 둘러보는 항해에 나선 것을 계기로 닻을 올렸다. 이 단체 요시오카 다쓰야 공동대표는 “항해가 거듭될수록 아시아에 머물렀던 관심이 점차 전세계로 넓어졌다”며 “90년 11월 제10차 항해 때부터 세계일주 코스를 마련하면서 분쟁과 갈등은 물론 환경·인권·빈곤·여성 등 지구촌이 직면한 모든 문제로 외연을 넓히게 됐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피스보트를 거쳐간 이들은 모두 2만5천여명이며, 100여 국 시민운동가와 지식인 등이 항해에 동참했다.
이번 항해의 주제는 ‘지속 가능한 미래’다. 피스보트 쪽은 이번 항해에서 케냐의 그린벨트 운동과 아프리카 식량안보 문제, 쿠바의 유기농 혁명 등에 초점을 맞춘 ‘지구대학’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또 오는 10월5일 도착 예정인 이집트 포트 사이드에서 모로코 카사블랑카 사이의 뱃길 열흘 동안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주제로 선상 국제심포지엄을 연다.
다양한 연령층의 일반 참가자 893명과 피스보트 활동가, 각 지역별 초청 연사 등 18개 국에서 온 항해자들은 항해기간 중 피스보트에서 ‘바다에 떠 있는 평화공동체’를 형성한다. 최연소 항해자는 요시다 코우키(11·후쿠오카), 최고령자는 야마모토 히데(90·홋카이도)다.
<한겨레>는 이들과 함께 5대양 6대주를 돌며 세계 각지에서 평화운동을 펼치는 현지 시민운동가들의 활동상을 현지보고 형식으로 지면에 담아낼 예정이다. /한겨레 2005-09-05
[2005년] 윌리엄 렌퀴스트(William Hubbs Rehnquist) 미국 제16대 대법원장 사망
(October 1, 1924 – September 3, 2005)
윌리엄 렌퀴스트 미국 대법원장이 3일밤 버지니아주 교외 알링턴의 자택에서 지병인 갑상선암으로 타계했다고 대법원이 밝혔다. 향년 80세.
캐시 오버그 대법원 대변인은 3일밤 "지난해 10월부터 갑상선 암으로 투병해온 렌퀴스트 대법원장은 지난 며칠간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전까지 자신의 직무를 계속 수행했다"고 말했다.
지난 33년간 대법원에서 보수성향의 판결을 이끌어온 렌퀴스트 대법원장의 사망으로 대법원에서는 9명의 판사들중 샌드라 데이 오코너 판사의 은퇴로 공백이 생긴지 2개월여만에 두번째 공석이 생기게됐다. 중도 보수 성향의 샌드라 데이 오코너 판사는 지난 7월초 돌연 은퇴를 선언했으며 조지 부시 대통령은 오코너의 후임 판사에 존 로버츠 연방 고등법원 판사를 지명했다. 로버츠 지명자는 상원의 인준청문회를 앞두고 있다.
오버그 대변인은 렌퀴스트 대법원장의 자녀 3명이 그의 임종을 지켜봤다고 전했다.
렌퀴스트 대법원장은 지난 1971년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 배석판사로 임명됐고 1972년 1월7일 대법관이 됐다. 그는 1986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 대법원장이 됐다.
그는 재임당시 1999년 클린턴 대통령의 탄핵 재판을 주관했고 2000년 플로리다주 대선투표 재개표 논란에서 5-4로 조지 부시 대통령의 당선을 확정하는데 기여하는 등 미국 정치사회의 굵직한 역사적 현장을 주관했다.
렌퀴스트 대법원장은 지병 때문에 5개월간 대법원의 자리를 비운 뒤 3월에 다시 업무에 복귀했으며, 지난 6월27일 마지막 재판에서 텍사스주 의사당에 십계명 조형물을 전시하는 것이 합법이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그는 낙태와, 동성애, 총기 소유, 소수인종 우대조치, 사형제도 등에서 강경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 /한겨레 2005-09-05
[2002년] 법원, 이승복君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는 오보가 아닌 사실이라고 판결
← 1998년 9월 22일부터 5일간 부산역 광장에서열린 '한국언론 오보 50년' 전시회에서 한 노인이 시민연대가 대표적인 오보로 선정한 본사 이승복 어린이 관련기사를 보고 있다.
1968년 12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화전민촌에 침입한 무장공비들에게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다 참살당한 이승복군의 '용기있는 죽음'은 역사적 사실이며, 이를 특종 보도한 당시 조선일보의 기사는 '소설'이나 '작문'이 아니라 사실 보도였음이 2002년 9월3일 법원의 판결로 확인됐다.
서울지법은 조선일보의 당시 보도에 대해 1998년 '오보전시회'와 '미디어오늘' 등 일부 언론들이 "기자가 현장에도 가지 않고 작성한 소설"이라는 허위 사실을 유포, 조선일보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김주언 당시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과 김종배 당시 미디어오늘 기자에게 각각 징역 6월과 10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다만 법정 구속은 하지 않았다. 1999년 7월부터 3년여 동안 진행된 재판의 쟁점은 1968년 12월 9일 밤 이승복군이 무장공비들에게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했는지, 다음날 오전 조선일보 기자들이 사건 현장을 찾아가 취재했는지 등 두 가지였다. 재판부는 판결에서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군의 발언이 실재했으며 조선일보 기자가 현장에서 취재한 점이 인정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재판부는 "이승복군의 발언에 대한 진위는 유일한 현장 생존자인 승복군의 형 학관씨와 당시 마을 주민 등 관계인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진술하고 있어 이제는 더 이상 따질 수 없는 문제"라고 했으며 "당시 조선일보 기자가 현장에서 취재했다는 사실을 뒤집을 만한 반증이 없다"고 밝혔다. /조선
[2001년]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건의안 국회통과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건의안이 2001년 9월 3일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공조 아래 찬성 148표, 반대 119표로 국회에서 가결됐다. 이로써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3년7개월 간 유지돼 온 민주당과 자민련 간의 공조체제가 붕괴되고, 정계도 여소야대 체제로 재편되는 등 정치권에 일대 격변이 몰아쳤다.
자민련의 교섭단체 구성을 위해 민주당에서 이적했던 장재식, 송석찬, 배기선, 송영진 의원 등도 탈당하고 민주당에 복귀함으로써 자민련은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잃었다. 국무위원 해임 건의안이 가결된 것은 헌정사상 4번째였으며 1971년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 건의안 가결이후 30년만의 일이다.
임 장관의 퇴진으로 김대중 정부의 대북 햇볕정책도 ‘일선 총사령관’을 잃게 됐다. 김 대통령은 ‘햇볕정책’ 지속 방침을 거듭 밝혔지만, 외교안보수석, 통일부장관, 국가정보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햇볕정책을 총괄 지휘해온 임 장관을 잃은 손실이 적지 않았다. 김 대통령이 해임된 임 장관을 청와대 외교안보통일특보(장관급)로 다시 임명하자, 야당은 "국회와 국민에 대한 정면도전"이라며 반발했다.
한편 북한은 임 장관에 대한 해임 건의안이 상정되기 하루 전에 갑작스럽게 남북 당국간 대화를 재개하자고 제의, 표결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의혹을 샀다. /조선
[1998년] 태고종 종정 보성 스님 열반
불교 태고종 제15세 종정 보성 스님이 1998년 9월 3일 봉원사에서 열반했다. 세수 92세, 법랍 79세였다. 보성 스님(속명 정두석)은 한국불교의 대표적 학승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불교계에선 종단을 초월해 추앙 받은 인물이었다.
1906년 함경남도 이원 태생인 스님은 13세 나이에 출가, 1933년 강원도 건봉사에서 박한영 대종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보성스님은 출가 후 일제치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교가 하루 빨리 깨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 길로 스님은 동경 목일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동경 일본대학 종교과 전문부와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는 등 학승으로서의 길을 다졌다. 현해탄을 넘나들며 쌓은 스님의 학덕은 동국대학교, 육군사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등에서 교수직을 맡으며 후학들에게 돈후하게 전해졌다. 1961년부터는 동국대학의 총장을 역임 불교학 발전의 기초를 다지기도 했다. 동국대총장 역임후 1979년 종정에 취임, 승단 화합만이 꺼져가는 불법을 살리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1923년 건봉사에서 안거를 시작한 이래 20안거를 실천할 만큼 수도에도 적극적이었다. 치악산 보림사에서 주석해오던 스님은 며칠 전 열반을 예견한 듯 신촌 봉원사로 주석처를 옮겨, 종단 간부들과 제자들을 불러 다시 승단 화합과 불교발전을 당부하는 유훈을 남겼다.
열반에 임해서는
除盡法我是滅度(제진법아시멸도)
법과 나를 모두 다하니 이것이 멸도이니라
淸淨無餘涅槃心(청정무여열반심)
남김없이 청정함이 열반심이요
習氣煩惱永不生(습기번뇌영불생)
습기와 번뇌가 영원히 생겨나지 않으면
方渡生死大解苦(방도생사대해고)
바야흐로 생사대해고를 건넘이로다
라는 내용의 열반송을 남겼다. /조선
[1997년] 베트남기 프놈펜에서 추락, 한국인 21명 포함 탑승객 65명 사망
베트남 호치민 공항을 출발한 베트남 항공 815편 여객기가 1997년 9월 3일 오후2시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프놈펜 시내에서 약 10km 떨어진 포첸통 국제공항에 착륙하려다 실패한 뒤 2차 착륙을 시도하던 중 활주로 남쪽 1km 지점의 논바닥에 추락했다. 여객기는 추락과 함께 기체 대부분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한시간 동안 불길에 휩싸였고 꼬리부분만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사고 여객기는 80석 규모의 러시아제 투폴레프(TU) 134기로 탑승객은 한국인 21명을 포함한 승객 60명과 승무원 6명 등 66명이었으나 태국 어린이 한명을 제외한 65명이 모두 사망했다.
이번 사고는 여객기가 기상악화로 활주로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착륙 시도를 강행하다 사고가 난 것으로 밝혀졌고 추락지점이 논바닥이어서 거의 맨땅 같은 곳에 떨어지는 바람에 피해가 컸다. /조선
[1995년] 원로배우 석금성 여사 별세
본명 석정의(石丁義).
1907. 12. 3~1995. 9. 3 경기 광주.
무성영화와 흑백·컬러 영화시대 및 텔레비전 시대를 섭렵한 한국 영화계의 증인이었다.
한성부 출신으로, 무남독녀로 자란 석금성은 어릴 때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하고 기생이 되었다. 관객으로 극장에 갔다가 극작가 이서구에게 발탁되어 한국 최초의 연극단체였던 토월회의 창단 멤버로 입단하면서 배우로 데뷔하였다. 데뷔작은 1925년에 공연된 《추풍감별곡》이었는데, 석금성은 이 무대를 시작으로 당시의 유명한 여배우 복혜숙과 함께 연극무대를 주름잡았다.
여배우가 희소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곧 토월회의 간판급 배우로 성장하였으나, 데뷔하던 해 연말에 충청남도 서산군의 부호 이충진과 결혼하면서 은퇴하였다. 그러나 결혼 생활이 3년여만에 파탄을 맞아 다시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1937년 안석영 감독의 무성영화 <심청전>으로 영화계에 데뷔한 이후 2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1985년에는 77세의 나이로 <백구야 훨훨 날지 말라>(정진우 감독)에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심술궂은 계모, 시어머니, 기생어멈 등 개성이 강한 악역을 도맡아 하면서 개성파 연기자로 자리를 굳혔던 그녀는 죽기 전까지 텔레비전 드라마 <분례기>·<친애하는 기타 여러분>·<사랑의 향기> 등에 출연해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녀는 경성방송국 아나운서였던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과 재혼했는데 최승일이 동생 최승희를 뒷바라지하며 8·15해방 후에도 월남하지 않자, 1948년 4남매를 모두 아버지가 있는 북으로 보냈다. 죽기 얼마 전 그녀는 북한을 방문했던 재일동포를 통해 맏딸 로사는 북한의 유명한 시인이 되었으며, 막내아들 호섭은 최승희의 영향을 받아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말년에는 생활고를 겪으며 서울시 남영동 여관을 전전하다가 1991년 드라마 <분례기> 출연으로 알게된 아역배우 홍보경양의 부친 홍무씨의 집에서 지난 4년 동안 함께 살아왔다. 혈육과의 생이별을 고통스레 간직한 채 불우한 말년을 보냈던 여우(女優)의 유일한 낙은 하루 3갑씩 피워대던 담배였다. 대표작으로 <춘향전>·<단종애사>·<장화홍련전> 등이 있다.
[1978년] 요한 바오로 1세(Johannes Paulus I) 교황에 즉위
제263대 로마 교황. 이탈리아 포르노 디 카날레 출생. 본명은 알비노 루치아니. 1935년에 주교가 되었고, 1969년에 바오로 6세에 의하여 베네치아의 총대주교에, 4년 후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1978년 바오로 6세가 사망하자 8월 26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어 9월 3일에 취임하였으나, 9월 29일 심장발작으로 사망하였다.
[1977년] 왕정치 756홈런으로 세계신기록 수립
← 756호 홈런으로 세계신기록을 달성한 일본 왕정치 선수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리그 요미우리 자이언츠 대 야쿠르트 스왈로즈전이 벌어지고 있던 1977년 9월 3일 일본 도쿄 고라쿠엔구장. 요미우리 공격인 3회말 1사후 5만여 관중의 박수 속에 37세의 왕정치가 등장했다.
그는 볼카운트 2-3에서 야쿠르트 선발 스즈키의 제6구를 강타, 오른쪽 스탠드 중단에 꽂히는 라이너성 솔로홈런을 터뜨렸다. 시즌 40호이자 생애 통산 756호. 미국 행크 아론이 세운 홈런 세계기록 755호를 경신하는 순간이었다.
이날 도쿄의 모든 방송들은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왕정치의 특집방송을 보냈으며, 경기 후 그라운드에서 있은 기념식에서는 행크 아론의 축하 메시지가 녹음으로 방송됐다. 왕은 "기록은 깨지게 마련이다. 후배들이 이를 능가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1980년 은퇴할 때까지 친 통산 868호 홈런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1974년] 원신희, 아시안게임 역도 3관왕
1974년에 열린 제7회 테헤란 아시안게임은 중국과 북한이 처음 참가해 체제경쟁까지 가세하는 바람에 메달경쟁이 어느때보다 뜨거웠다.
한국은 대회개막 사흘이 지나도록 금메달 한 개가 없어 남북간 첫 스포츠경쟁에서 패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이 중압감을 일거에 날려보낸 선수가 역도의 원신희(元信喜)였다. 그는 선수생활을 시작한 이래 그때까지 13년간 한국신기록을 30여차례나 갈아치운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力士)였다.
9월3일, 라이트급에 출전한 원신희는 인상에서 130kg, 용상에서 165kg을 들어올리며 순식간에 2개의 금메달을 거머쥐더니 토탈점수에서도 295kg을 기록, 또 다시 금메달을 추가해 한국인으로서는 아시안게임 출전사상 첫 3관왕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의 쾌거는 금메달 한 개차로 북한을 제치고 종합 4위를 달성하는 기폭제가 됐다. /조선
[1971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베를린 협정 조인
미·영·불·소 4개국이 1971년 9월 3일 베를린에서 지난 23년간 유럽의 냉전을 마무리하고 협력과 화해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동서관계를 알리는 역사적인 베를린 협정에 조인했다. 서독주재 케네트 러쉬 미대사, 로저 재클링 영대사 및 장 사우바나르게스 불대사와 동독주재소련대사 표트르 아브라시모프는 이날 밤 8시57분 서베를린에 있는 전연합군관리위원회 건물회의실에서 프랑스대사 주재하에 제34차 4대국 대사회담을 열고 베를린 협정 본문서와 그 부속문서에 조인했다.
이 협정의 주요골자는 서방측이 독립된 서베를린에 방해 없이 왕래할 수 있는 보장을 받고 서베를린 시민들이 베를린장벽을 통과하여 동베를린과 동독을 방문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한편 서베를린과 서독간의 정치적 유대관계를 인정받는데 있었다. 반면, 소련은 서베를린시가 서독연방의 일부가 되는 것을 막고 서독인들이 서베를린시에서 벌이는 정치적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한편 서베를린에 소련영사관을 개설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됐다. /조선
[1969년] 호지명 베트남 초대 대통령 사망
← 베트남민주공화국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주석으로 취임했던 호치민.
초대 베트남 민주공화국 대통령 호지명이 1969년 9월 3일 재임 중 심장병으로 타계했다. 1890년 중부 베트남의 게친주에서 태어난 호지명은 21세 때인 1911년, 견습요리사로서 식민지 종주국인 프랑스 땅을 처음 밟았다. 프랑스 공산당의 창립 당원으로 프랑스에서 식민지 해방운동을 시작한 그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유 회의에 참석, `베트남 인민의 8개 항목 요구`를 제출한 일화로 유명하다.
1921년 프랑스 식민지인민연맹을 결성하고 1924년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 참석, 동방부 상임위원이 되었으며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립했다. 1941년 베트남에 잠입, 베트민(월맹-베트남 독립동맹회)을 결성했고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의 종전과 동시에 총봉기를 지도하여 구엔왕조로부터 정권을 탈취,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주석으로 취임했다.
정약용의 삶에서 감동받아 그의 기일을 손수 챙기기도 한 호지명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베트남인들은 지금도 그를 가리켜 `호 아저씨`라 칭할 정도로 그를 친근하게 느끼고 있다./조선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구 설립
1952년 9월 3일 중국 지린 성[吉林省] 동남부에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설립되었다. 연변지역은 조선시대말부터 조선족이 개척해 정착한 곳으로, 일제시대에는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8월 20일 소련군과 동북항일연군은 간도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중국공산당은 간도 임시정부를 해산시키고 '연변행정독찰 전원공사'를 설치했다. 이후 이 지역은 1948년 3월 '연변전구'로, 1952년 9월 '연변조선족자치구'로 바뀌었다. 1955년 12월 연변조선족자치구는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승격되어 중국 내 유일한 조선족자치주가 되었다.
[1941년] 연극배우 추송웅(秋松雄) 출생
← 추송웅
1945∼1985. 경상남도 고성 출신.
1959년 부산공업고등학교 건축과를 거쳐 1963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하였다.
1963년 극단 민중극장(民衆劇場) 창립동인으로 창립공연인 마르소 작 김정옥(金正鈺) 연출의 〈달걀〉에 출연하여 연극계에 데뷔하였다.
1965년 극단 가교(架橋) 창립동인, 1966년 극단 광장(廣場) 창립동인, 1967년 극단 자유극장(自由劇場) 입단, 1979년 극단 현대극장(現代劇場) 입단, 1980년 4월 살롱 ‘떼아뜨르 추(秋)’ 개관, 1982년 5월 극단 ‘떼아뜨르 추’ 창단, 1983년 8월 ‘떼아뜨르 추’ 3·1로극장(三一路劇場) 개관 등의 활동하였다.
그는 성격배우로서 독특한 희극적 연기술을 개발하여 소극풍(笑劇風)의 추송웅스타일을 확립시켰는데, 이것은 그가 주로 프랑스풍의 희극들인 〈따라지의 향연〉(1966)·〈아가씨 길들이기〉(1971)·〈프로랑스는 어디에〉(1971)·〈세빌리아의 이발사〉(1972)·〈위선자 따르튜프〉 등에 출연하면서 구축되었으며, 〈우리집 식구는 아무도 못말려〉(1977)에서 크게 인기를 얻었다.
이와같은 그의 개성적인 연기와 성격창조에 힘입어 1977년 3·1로창고극장에서 공연한 모노드리마 〈빨간 피터의 고백〉은 최대의 화제작이 되었고, 일본공연의 기회를 얻기까지 하였다.
이 작품은 그의 또 하나의 모노드라마 〈우리들의 광대〉(1978)와 더불어 그를 그의 시대의 유니크한 배우로 부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생소하였던 모노드라마의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그밖에 그의 주요 출현작품은 〈뜻대로 하세요〉(1964)·〈토끼와 포수〉(1965)·〈한꺼번에 두 주인을〉(1967)·〈타이피스트와 대머리 여가수〉(1969)·〈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1970)·〈보이체크〉(1975)·〈빠담 빠담 빠담〉(1977)·〈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1979)·〈올리버 트위스트〉(1983)·〈파랑새〉(1985) 등이다.
두 차례의 동아연극상(東亞演劇賞) 최우수남자주연상(1971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1973년 세빌리아의 이발사)을 수상하였으며, 1979년 〈빨간 피터의 고백〉으로 한국연극영화상 최우수남자연극연기상을 받았다.
[1941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독가스 처형 시작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제11블록 지하실에서 소련군 포로 600명과 유태인 250명이 독가스에 의해 처형됐다. 이것은 아우슈비츠에서 행해진 최초의 독가스 처형으로 이후의 유태인 대량학살에 대비한 실험적인 성격을 갖는다.
1941년 9월 3일 독가스 처형에 앞서 9월 1일, 나치스 당국은 6세이상의 유태인에 대해 이른바 '다비드의 별'을 달지 않고는 공공장소로 나가는 것을 금하는 경찰령을 발포했다. 독가스 처형은 밀실 징벌구금실에서 행해졌다. 처형은 통상 1회에 약 2000명씩을 대상으로 했다. /조선
[1939년] 호주-이집트, 대(對)독일 선전포고 [1939년] 영·프, 獨에 선전포고…2차대전 발발
히틀러가 군비확장에 힘을 쏟을 때 영국과 프랑스는 내심 불안했지만 애써 외면했다. 오스트리아를 합병(1938년 3월)할 때는 모르쇠였고 체코의 일부 지역을 점령(1938년9월)할 때는 전쟁회피를 위해 오히려 거들기까지 했다. 다른 한편 히틀러는 외교적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39년 여름까지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거나 친선서약을 맺어 혹시모를 배후의 위험을 제거했다. 무엇보다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8월23일)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때 독ㆍ소 양국은 폴란드를 양분한다는 비밀의정서까지 체결해 1개월 후에는 폴란드를 반토막내며 서로의 이익을 챙겼다.
1939년 9월1일, 마침내 히틀러의 야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전격전(電擊戰ㆍblitzkrieg)으로 폴란드를 침공한 것이다. 미국은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했고 영국ㆍ프랑스도 쉽게 전쟁에 뛰어들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9월3일, 영국과 프랑스는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유럽은 21년 만에 다시 죽음과 파멸의 구렁텅이로 내몰렸다. 개전초기 영국은 독일의 군항을 폭격하고 프랑스는 서부국경의 요새를 공격했지만 더이상의 적극적인 참전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전투다운 전투없이 소강상태가 계속되자 한때는 ‘가짜 전쟁’이라고도 불렸지만 수년내 1700만명이 전사하고 2500만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20세기판 살육대전으로 발전했다. /조선
[1928년] 플레밍(Fleming, Sir Alexander), 페니실린 발견
1928년 9월 영국 런던대학 세인트 매리 실험실. 유행성 독감을 연구하던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 박사는 세균 배양 접시에서 특이한 곰팡이를 발견했다.
다른 박테리아를 다 죽인 채 혼자 남은 이 푸른 곰팡이균은 이후 페니실리움 노타툼으로 명명됐다. "수 천가지 곰팡이와 세균 중 푸른 곰팡이를 찾아낸 것은 복권에 당첨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플레밍 박사는 회고했다.
탁월한 항생제인 페니실린은 1940년 치료용 주사제로 만들어져 제2차 세계대전 중 수십만 군인들의 목숨을 건졌다. 플레밍 박사는 페니실린 농축과 정제에 성공한 옥스퍼드 대학의 피오리, 체인 두사람과 함께 인류의 질병치료에 공헌한 업적으로 1945년 노벨의학상을 받았다.
페니실린 등 현대 의약학의 발전으로 세균이나 바이러스 감염증은 상당 지역에서 잊혀진 질병이 되어가고 있다. 20세기 중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독감, 기관지염, 급성폐렴 등 일단 걸리면 사형선고나 다름없던 호흡기 감염증은 대폭 줄어들었다. 금세기 초 50세에 불과했던 인류의 평균 수명이 최근 80세 안팎까지 높아진 것도 페니실린을 필두로 한 항생제와 각종 예방백신 개발의 기여가 컸다. /조선
[1923년] 박열, 일왕 암살음모로 피검
← 일본인 부인과 함께 일본왕 살해를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박열. 박씨 부부가 한복 혼례복 차림으로 재판정에 섰다.
1923년 9월 3일 박열이 일왕을 암살하려다 사전에 발견돼 체포됐다. 박열은 경북 문경출신으로 1919년 일본에 건너가 무정부주의운동에 뛰어들었고 1921년 사회주의 비밀결사 흑도회를 조직했다.
1922년 비밀결사 불령사를 조직하고, 1923년 일본인 애인이자 동지인 가네코와 함께 일왕 히로히토 암살을 실행하려다 체포되어 1926년 3월 사형선고를 받은 후 같은해 4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가네코는 그해 7월 옥중에서 자살했고, 박열은 1945년 해방과 함께 22년 2개월만에 석방되어 조선건설동맹을 조직하고 재일거류민단 단장이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때 귀국, 1950년 6.25전쟁때 납북되어 1974년 북한에서 사망했다. 저서로는 '신조선혁명론'이 있다. /조선
1923년 9월 3일 밤 도쿄에서 체포된 한 부부가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었다. 아나키스트 박열(朴烈)과 그의 일본인 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가 히로히토 왕세자와 고관들을 폭살하려 했다는 대역(大逆)사건이 발표되었다. 1911년 아나키스트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가 부인 간노 스가코(管野須賀子)와 함께 사형당한 이유도 대역사건이었다. 1926년 3월 25일의 결심공판에서 이들은 예상대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26년 3월 26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는 박열이 미소를 지으며 “몸뚱이는 마음대로 죽여라. 그러나 나의 마음이야 어찌할 수 있겠느냐”라고, 그리고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죽는 것이 가장 만족이며, 모든 것이 죄악이요 허위요 가식”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 사건은 처음부터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대거 학살된 데 따른 시선을 돌리기 위해 조작되었다는 비판이 일었고 결국 4월 5일 둘은 무기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가네코는 석 달 후에 형무소에서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되는데, 타살이란 의혹이 들끓었다. 게다가 감쪽같이 빼돌려졌던 가네코의 시신은 “유골을 이념의 선전 재료로 이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박열의 형인 박정식에 의해 그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 안장되었다.
22년의 감옥생활을 이기고 일제 패망 후에 석방된 박열은 재일본조선거류민단(민단·民團)을 만들어 단장으로 취임했다. 1947년 장의숙(張義淑)과 재혼한 그는 가네코의 기일(忌日)이면 “당신도 함께 기도해줘. 참 불쌍한 사람이었어”라고 말했다. 박열은 6·25 전쟁의 와중에 납북되는데, ‘가네코 후미코―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제국의 아나키스트’의 저자 야마다 쇼지는 “반공주의자였던 그가 자진해서 북한으로 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연행되었을 것이다”라고 썼다.
1974년 평양에서 77세로 사망한 박열이 광복 61년을 맞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인데, 부부를 함께 기념하는 것이 맞다. 1926년 8월 9일자 조선일보는 “그녀의 애인이자 동지였던 박열의 향토인 조선에 묻힌다면 그 영혼은 오히려 만족하지 않을까”라고 썼지만, 그 영혼을 위로하는 한국인은 드물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1905년] 미국 물리학자 앤더슨(Anderson, Carl David) 출생
← Anderson(1937)
1905. 9. 3 미국 뉴욕 시~1991. 1. 11 캘리포니아 산마리노.
최초의 반입자로 알려진 양전자(陽電子)의 발견으로 1936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빅터 프랜시스 헤스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30년 패서디나의 캘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줄곧 그곳에서 활동했으며, 1976년 명예교수가 되었다. 1927년 이후로 계속 X선 광전자(고에너지 광자와의 상호작용으로 원자로부터 방출된 전자)를 연구하다가 1930년부터 자기안개상자를 이용해 감마선과 우주선(宇宙線)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932년 우주선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던 중 양전자를 발견했고, 1년 뒤에는 감마선을 조사(照射)하여 양전자를 생성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1936년에는 전자보다 207배 무거운 기본입자인 뮤온의 발견에도 참여했다.
[1899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의사, 바이러스 학자 버닛 [Burnet, Sir Frank Macfarlane] 출생
1899. 9. 3 오스트레일리아 트라랄건~1985. 8. 31 멜버른.
1960년 피터 메더워 경과 함께 이식된 장기에 대한 후천성 면역 내성을 발견하여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버닛은 1923년에 멜버른대학교에서 의사자격을 받았고, 런던의 리스터 예방의학연구소에서 연구강사로 일했다. 1928년에 왕립 멜버른 병원의 월터·엘리자홀 연구소에서 부소장을 지냈으며, 나중에 이 연구소의 소장직과 함께 멜버른의과대학의 실험의학부교수를 역임했다. 1951년에 기사작위를 받았다.
버닛은 인간의 장기이식에 대한 기여뿐만 아니라 세균에 기생하는 바이러스(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하여 세균을 판별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리고 지금은 실험실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는, 살아 있는 닭의 배(胚)에서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감염경로를 규명하고 점액종(粘液腫), 머레이계곡열(Murray Valley fever:지금은 오스트레일리안아보뇌염으로 알려져 있음), Q열과 같은 병에 대한 많은 연구를 했다. 그는 Q열의 원인균이 되는 리케차 부르네티(Rickettsia burneti/Coxiella burneti)를 분리해냈다. 그의 저술에는 〈인간과 바이러스 Viruses and Man〉(1953)·〈동물 바이러스학의 원리 Principles of Animal Virology〉(1955)·〈후천면역에서의 클론 선택설 The Clonal Selection Theory of Acquired Immunity〉(1959)·〈면역학적인 연구 Immunological Surveillance〉(1970)·〈크레도와 코멘트:과학자의 회고 Credo and Comment:A Scientist Reflects〉(1979) 등이 있다.
[1894년]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교육자 니부어 [Niebuhr, Richard Helmut] 출생
1894. 9. 3 미국 미주리 라이트시티~1962. 7. 5 매사추세츠 그린필드.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교육자, 신학적 윤리학과 미국 교회사 분야의 권위자.
신학적 실존주의의 주요주창자였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의 동생으로 엘름허스트대학(일리노이), 에덴 신학교(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학교, 예일 신학교, 예일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예일대학교 최초로 종교분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1924). 1916년 복음주의 개혁교회 목사로 임명된 그는 에덴 신학교에서 가르쳤으며(1919~22, 1927~31), 엘름허스트대학 학장으로도 일했다(1924~27). 1931년 예일신학교에서 신학과 기독교 윤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해 죽을 때까지 이 신학교에서 일했다.
카를 바르트, 죄렌 키에르케고르, 에른스트 트뢸취 등의 영향을 받은 니부어는, 교회의 가르침은 오늘날의 문화 속에서 의미를 갖는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신앙에 대한 역사비평을 진작시켰다. 그는 신학적 실존주의의 터 위에서 유일신 신앙의 절대적인 틀 안에 있는 계시와 가치들을 관계론적인 방법으로 해석했다. 그는 종교의 믿음과 세속문화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으며, 교회는 그들이 존재하는 사회상황을 설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1954~56년 북아메리카 개신교 신학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를 지휘했는데, 그 연구 결과 〈교회의 목적과 그 사역 The Purpose of the Church and its Ministry〉(1954)을 펴냈다. 다른 주요저서들로는 〈교파주의의 사회적 원천 The Social Sources of Denominationalism〉(1929)·〈미국에서의 하느님 나라 The Kingdom of God in America〉(1937)·〈계시의 의미 The Meaning of Revelation〉(1941)·〈급진적 유일신론과 서구문화 Radical Monotheism and Western Culture〉(1960)·〈책임적 자아 The Responsible Self〉(1963) 등이 있다.
그의 생애와 사역을 다룬 책들도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는 제임스 W. 파울러의 〈그 나라를 보기 위해서:H. 리처드 니부어의 신학적 조망 To See the Kingdom:The Theological Vision of H. Richard Niebuhr〉(1974)과 로니 클리버의 〈H. 리처드 니부어 H. Richard Niebuhr〉(1978)가 있다.
[1875년] 오스트리아의 자동차 공학자 포르셰(Ferdinand Porsche) 출생
← The Lohner-Porsche Mixte Hybrid
1875. 9. 3 오스트리아 마퍼스도르프~1959. 1. 30 독일 슈투트가르트.
유명한 폭스바겐을 설계했다. 포르셰는 1916년 아우스트로-다임러사의 총이사가 되었으며, 1923년 슈투트가르트의 다임러사로 자리를 옮겨갔다. 1931년 그곳을 그만두고 회사를 설립하여 스포츠 카와 경주용 자동차를 설계했다. 그는 히틀러의 '국민차'에 대한 계획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1934년 아들인 페리와 폭스바겐을 최초로 설계했다. 프랑스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중 포르셰 부자가 타이거 탱크와 같은 군용 차량을 설계했다는 이유로 전쟁 후 그를 투옥시켰다. 1950년 포르셰 스포츠 카가 등장했다.
[1868년] 일본, 강호(江戶 에도)를 동경(東京)으로 개칭
도쿄는 옛 무사시국[武藏國:國은 고대 일본의 행정구획]의 일부였으며,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중기인 1457년에 무장(武將) 오타 도칸[太田道灌]이 에도성[江戶城]을 구축함으로써 도쿄의 전신(前身)으로서 에도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159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에도에 입성하고, 뒤이어 1603년 에도막부[江戶幕府]를 개설함으로써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그뒤 260여 년 간에 걸쳐 일본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 번영하면서 대도시가 되었다.
메이지유신과 더불어 1868년에 도쿄로 개칭하고, 이듬해에 교토[京都]에서 천도하자 명실상부한 일본의 수도가 되었다. 1871년에 도쿄부[東京府]가 설치되고, 1878년·1880년에 이즈제도, 오가사와라제도가 편입되었으며, 다시 1893년에 3다마지구, 즉 니시타마[西多摩]·미나미타마[南多摩]·기타타마[北多摩]의 3개 군(郡)이 가나가와현[神奈川縣]으로부터 이관되어 현재의 경역을 가지게 되는 한편, 1888년에 시제(市制)가 시행되어 도쿄부 안에 15개 구(區)로 구성되는 도쿄시[東京市]가 설치되었다.
300년 막부정치의 종말
고대 일본의 행정 구획중의 하나였던 지금의 도쿄지방은 교토에 본거지를 둔 무로마치시대 중기인 1457년 무장(武將) 오타 도칸(太田道灌)이 에도성(江戶城)을 구축함으로써 대도시로서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후 오랜 전국시대를 거쳐 159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천하통일을 이루고 에도에 입성하여 가마쿠라(鎌倉)시대에서부터 이룩되기 시작한 봉건사회체제를 확립하고 1603년 에도막부(江戶幕府)를 개설함으로써 이후 260여 년간 막부정치의 중심지로서 자리 잡으며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19세기에 이르러 1854년 미, 일 화친조약을 시발점으로 일어난 막부정권과 반대세력간의 대립은 1866년 결국 막부의 패배로 이어졌으며 300여 년간의 막부정치를 끝내는 메이지유신이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1868년 에도를 도쿄로 개칭하고 이듬해 교토(京都)에서 천도하여 명실상부한 일본의 수도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56년] 설리번 Louis (Henry) Sullivan 출생
← 설리번, Frank A. Werner가 1919년에 그린 유화(부분)
1856년 9월 3일 태어남 / 1924년 4월 14일 죽음
설리번은 근대건축의 정신적 선구자로 평가받는 미국의 건축가이다. 초기 마천루 건축미학의 기초를 다졌으며, 1879~95년 당크마르 애들러와 동업하면서 유명한 건물들을 설계했다. 설리번과 애들러는 14년을 함께 일하면서 100여 개의 건물을 만들어냈는데, 애들러의 사업가적인 수완과 기술력은 설리번의 건축가로서의 재능을 한층 더 빛나게 해주었다. 당시에 만든 건물들 가운데 대다수가 미국 건축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는 풍부한 장식미를 건축 속에 끌어들여 시카고에 있는 오디토리움 빌딩(1866~89), 버펄로에 있는 개런티 빌딩(지금의 프루덴셜 빌딩, 1894~95),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웨인라이트 빌딩(1890~91) 등을 설계했다. 그는 건축 설계뿐만 아니라 저술가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그는 주관적이고 은유적인 내용으로 건축의 방향을 제시했으며, 한편으로는 기계적인 예술이론이 지닌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저서에 <개념의 자서전 Autobiography of an Idea>(1924)·<자서전 Autobiography>·<능력 있는 사람의 철학에 따른 건축장식 시스템 A System of Architectural Ornament According with a Philosophy of Man's Powers>(1924) 등이 있다. 사후인 1946년 미국건축가협회(AIA)는 그에게 금메달을 수여했다.
[1783년] 미·영 파리 평화조약 체결
1783년 9월 3일 미국독립전쟁의 결과로 미국과 영국 사이에 파리 평화조약이 조인되었다. 1763년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낸 영국은 식민지 주민들을 억압하는 갖가지 정책을 시행했다. 이에 식민지 주민들은 대륙회의를 구성해 영국의 조치에 대항했다.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식민지 주둔군을 늘리자 1775년 봄 전투가 벌어졌다. 대륙회의는 군대를 모집하고 조지 워싱턴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776년 7월 4일에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새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연합헌장을 제정했다. 내전 형식으로 시작된 전쟁은 1778년에 프랑스, 1779년에 스페인, 1780년에 네덜란드까지 식민지측에 가담함으로써 국제전으로 번졌다. 1781년 10월 19일 영국은 버지니아의 요크타운 전투를 끝으로 항복했으며, 그 결과 1782년 미·영 예비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예비조약은 이듬해 9월 3일 조인된 파리 평화조약에 포함되었다. 파리 평화조약으로 같은 해 11월 북아메리카의 13개 주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으며, 미국의 국경은 서쪽으로 미시시피 강까지 확대되었다.
[1695년] 이탈리아 태생의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 로카텔리(Pietro Locatelli) 출생
1695. 9. 3 베네치아 베르가모~1764. 3. 30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장인적 기교 자체로 미의 경지를 보여준 위대한 바이올린 연주자로 바이올린의 연주기교를 넓혔다.
바이올린 연주자 겸 작곡가 아르칸젤로 코렐리의 제자였고, 연주여행을 하다가 1721년경 암스테르담에 정착하여 정기적으로 공개연주회를 가졌다. 동시에 2개의 현을 연주하는 이중현 주법의 기교로 특별히 찬사를 받았고, 종종 특별한 효과를 얻기 위해 특별한 조율을 하기도 했다. 뛰어난 기교에 중점을 두는 점에서 파가니니를 예견케 하는 그의 연습곡과 카프리치오의 화려한 악절들은 이따금 기술적 효과를 위해 음악의 내용을 경시하기도 했다. 소나타와 협주곡 등을 통해 그는 우아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선율도 연주할 수 있는 무게있는 음악가임을 보여주었다.
[1658년] 영국 정치가 크롬웰 사망
← 올리버 크롬웰
세계 열강으로서 영국의 입지를 확립시킨 정치가 올리버 크롬웰이 1658년 9월 3일 사망했다. 1642년 국왕 찰스 1세와 의회 사이의 무력 항쟁인 영국내란이 시작되자 의회 진영의 유력한 장군으로 찰스 1세에 맞섰다. 1648년 국왕이 스코틀랜드와 밀약을 맺어 제2차 내전이 일어나자, 국왕군을 무찌르고 스튜어트 왕가를 전복시키는 데 기여했다.
1653-1658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포괄한 공화국의 호국경을 지내며, 왕의 지위는 아니었지만 그에 준하는 권력을 누렸다. 죽어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고 장례도 국장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3년도 채 지나지 않아, 찰스 2세의 즉위로 왕정이 복고되면서 그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시신은 죄수들이 처형되던 타이번에 내걸렸다.
당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엇갈리고 있다. 어떤 이는 크롬웰을 원칙과 자유의 옹호자며 종교적 관용의 투사로 보는 반면, 어떤 이는 고집스런 독재자와 살인자로 평가한다. 대체적인 평가에 있어서 독재자로서의 그의 성격은 매우 제한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오히려 내란 후 정치적 안정을 회복시키고 입헌주의 정부체제의 발전과 종교적 관용에 공헌한 애국적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다.
[1568년] 이탈리아의 마드리갈 코미디 작곡가 반키에리 [Banchieri, Adriano] 출생
1568. 9. 3 교황령 볼로냐~1634 볼로냐.
마드리갈 코미디는 오페라가 생기기 전인 16세기말부터 17세기초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합창모음곡으로, 마드리갈풍의 다성 양식을 사용했고 연주자와 듣는 이는 합창곡에서 곡의 줄거리와 행동을 상상할 수 있었고, 일반 대사가 섞여 있었다. 대부분의 생애를 볼로냐 근처 보스코의 산미켈레 수도원에서 활동했고, 1620년에 수도원장이 되었다. 반키에리는 오라치오 베키 다음가는 마드리갈 코미디 작곡가였으며 그의〈Ⅱfestino nella sera del giovedi grasso avanti cena〉(1608, 1937년 영어판 〈The Animals Improvise Counterpoint〉 출판)에는 흥미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밖에
2004년 원로 서양화가 홍종명씨 별세
2002년 탈북자 15명, 베이징 내 독일 학교 및 외교관 숙소에 진입해 망명 요청
2000년 이형택 선수, US오픈테니스 16강에 올라
1998년 5대그룹, 8개업종 구조조정안에 최종합의
1996년 박재홍 선수,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30(홈런)-30(도루)' 달성
1993년 WBA 주니어플라이급 세계챔피언 유명우, 현역에서 은퇴
1988년 북한 및 공산권자료 공개
1980년 이집트, 이스라엘 평화협상 재개 합의
1978년 신현확 보사부장관 한국각료로서 첫 소련 입국, WHO회의 참석
1976년 미국 바이킹2호 화성에 연착륙
1971년 카타르,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7년 월남 대통령선거에서 웬반티우 당선
1963년 자민당 창당 (위원장 김준연, 송요찬, 김재춘 등 참여)
1959년 서울 당인리 화력발전소 발전 개시
1954년 중공군, 금문-마조도에 포격
1952년 미국 B29 폭격기 편대 청진(淸津)발전소 폭격
1952년 뇌염으로 학교, 극장 등 폐쇄v
1949년 엘살바도르 한국을 정식 승인
1948년 미군정, 경찰권 이양
1947년 한국방송 호출부호 ‘HL’로 할당
1947년 보선(普選)법 공포
1943년 연합군, 이탈리아에 상륙
1943년 이탈리아, 항복문서 조인(8일 연합국 발표)
1940년 미국, 영국 방위협정 조인
1914년 한말의 개화사상가 유길준 사망
1896년 호구조사규칙 반포
1883년 러시아 작가 투르게네프 사망
1877년 프랑스 제3공화국의 창시자이자 초대 대통령인 티에르 사망
1859년 프랑스 정치가 장 조레스 출생
1832년 현대신문의 효시「The Sun」미국에서 창간
1783년 영국, 파리조약으로 미국 독립을 승인
931년 일본의 59대 천황(887-897) 우다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