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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영산 구계리 석조여래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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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정말 덥다. 영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리자마자 숨이 턱턱 막힌다. 이내 목덜미에서 땀방울이 서너 개 솟아나는가 싶더니 이마와 온몸에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손수건이 축축하게 젖는다. 손수건을 쥐어짜자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마치 물에 금방 헹군 것처럼.
산길 곳곳에 피어난 개망초꽃도 이대로는 더워서 도저히 못 살겠다는 듯이 잎사귀를 추욱 늘어뜨리고 있다. 다랑이밭 여기저기 파랗게 매달린 고추도 이제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이리저리 몸을 마구 뒤채다가 어느새 파란 몸뚱아리에 따가운 땡볕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다.
창녕군 영산면 구계리에 있다는 석조여래좌상을 찾아가는 길. 그 길은 아주 멀었다. 아니, 아주 먼 것이 아니라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날씨가 너무 무더워 길이 엿가락처럼 늘어져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오죽했으면 구계 저수지의 초록빛 물을 튕기는 윤슬조차도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처럼 보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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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계리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초라한 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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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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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된 구계리 석조여래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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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그래. 아까 영산 석빙고를 지나 산길 입구에서 바라본 팻말에는 분명 '구계리 석조여래좌상→1km'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땡볕이 내리꽂히는 산길을 아무리 걸어도 구계리 석조여래좌상의 그림자조차도 얼씬거리지 않는다. 어림 짐작에는 분명 1km를 훨씬 더 걸어온 것만 같은데.
오늘따라 하늘도, 석조여래좌상도 너무 야속하기만 하다. 어찌 이 자그마한 산길에 한 점 그늘조차 드리우지 않은지. 내가 찾아오는 것이 그리 탐탁치 않다는 것인가. 아니면 구계리 석조여래좌상의 유난히 큰 코를 보고 혹여 내가 코불상이라고 여기저기 소문이라도 낼까 봐 아예 경계를 하는 것인가.
그때 저만치 무지개처럼 화려하게 피어난 자귀나무꽃 한 개가 툭 떨어진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하긴 사람의 목숨도 그러하지 않던가. 굳이 전쟁과 질병이 아니더라도 일정한 때가 되면 사람의 목숨도 저 자귀나무꽃처럼 툭 끊어져 버리지 않던가. "꽃은 피어서 곧 지고 사람은 나면 이윽고 죽는다"는 불경의 한 구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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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평 남짓한 공간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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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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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심 깊은 누군가 다녀가는 듯 불상 주변이 깨끗히 치워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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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된 구계리 석조여래좌상은 영축산 입구에서 구계 저수지를 지나 한동안 산 정상을 향해 터덜터덜 걷다보면 산 중턱에 있는 구릉 언덕 위에 둥지를 틀고 있다. 언뜻 보면 서낭당처럼 보여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이곳으로 들어가는 길 또한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왜냐하면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진 초라한 와가 옆에 민가인지 공공시설물인지 잘 모르는 이층 집이 떡 버티고 서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어디에도 길이 없다. 그 이층 집 오른쪽 옆에 수북히 자란 풀숲을 헤집고 길을 만들면서 가야 한다.
그렇게 풀숲을 헤집고 들어서면 나즈막한 흙담 안에 한 평 남짓한 와가가 한 채 있다. 그 와가 안에 코주부처럼 큰 코를 내밀고 앉아 있는 것이 구계리 석조여래좌상이다. 밖으로 잠긴 문고리를 풀고 비좁은 와가 안으로 들어서면 석불 양 쪽에 플라스틱 연꽃이 몇 송이 놓여 있다. 불심 깊은 어느 보살이 간혹 다녀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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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불상은 고려시대 만들어진 석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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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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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멸이 너무 심해 눈과 입 등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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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화강암으로 만든 구계리 석조여래좌상은 고려시대 석불로 높이 140㎝, 폭 70㎝이다. 이 석좌불은 적조사(寂照寺)란 가람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며, 국내 대부분 석불과는 다르게 불상과 광배가 큼직한 하나의 돌에 새겨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불상은 큼직한 몸에 사각형의 큰 얼굴 선이 갸름하고, 정수리에 솟아난 육계 또한 삿갓처럼 높이 솟아나 있다. 하지만 워낙 마멸이 심해 눈과 입을 제대로 구별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두 귀는 눈썹에서 목덜미까지 처질 정도로 길고, 양 어깨는 아래로 축 처져 있으며 가부좌를 틀고 있는 무릎 폭도 좁은 편이다.
큼지막한 돌덩이에 돋을새김을 한 석불의 윗몸은 특별한 조각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석불 뒤에 있는 타원형의 커다란 광배 또한 그저 밋밋하나 거신광(擧身光)을 띠고 있다. 어깨에서 허리로 흘러내린 법의 또한 마멸이 심하여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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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난히 뭉텅한 코가 특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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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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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믿으면 두려움이 없어지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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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꺾어 어깨 높이까지 올리고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하게 펴서 손바닥이 밖으로 향하는 모습의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무외인이란 불교에서 여래나 보살이 취하는 수인 중 하나로 곧 나를 믿으면 이 세상의 모든 두려움이 저절로 없어진다는 그런 뜻이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얼굴에 비해 지나치게 뭉퉁한 코가 특징이다. 그래. 어쩌면 이 석불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낙네들에게 태몽을 꾸게 하는 상징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코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기관, 즉 생명의 상징이 아닌가. 그래서 뭉퉁한 코 아래 보일락말락하게 작은 입이 살짝 웃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