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공산당이란 무엇인가
5천 년간 중화민족은 황하와 장강(長江)이 육성한 대지에서 생활하면서 수십 개 조대(朝代)를 이어왔고 찬란한 문명을 창조했다. 그 기간 중에 희로애락, 흥망성쇠, 파란만장, 그리고 심금(心琴)을 울리는 감동이 있었다.
1840년은 역사학계가 인정하는 중국 근대사의 시작인 동시에 중국이 중세에서 현대로 가는 기점이기도 하다. 그때부터 시작해 중국 문명은 대략 4차례의 큰 도전을 거쳤다. 앞의 세 차례 도전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1860년 영불(英佛) 연합군의 베이징 공격, 1894년 중일(中日)전쟁, 1906년 중국 동북지방에서 발생한 러일전쟁으로 형성된 도전이었다. 한편 중국은 이런 도전에 대해 서양문화를 끌어들이고(양무운동) 제도를 개량했으며(무술변법), 대청입헌 이후 신해혁명을 일으키는 등으로 반응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전쟁 승리국 중 하나인 중국의 이익은 열강들이 삼켜버렸다. 당시에 수많은 중국인은 앞의 세 반응이 모두 실패했다고 인정했다. 그래서 5.4운동이 나타났고 이로부터 네 번째 파동이 일어났는데 이는 또한 최후의 반응이기도 했다. 이로써 중국에서는 문화적으로 전면적인 서양화가 진행됐고 뒤이어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극단적인 혁명이 시작됐다.
이 글에서 주목하는 것은 중국 최후의 파동에 대한 반응의 결과물, 즉 공산주의 운동과 공산당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160여 년간 1억에 가까운 사람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하고 거의 모든 중국 전통문화와 문명을 대가로 치른 점을 분석하려 한다. 또, 중국이 선택한 것 혹은 외부에서 중국에 강제로 주입한 것이 어떠했는지 분석하려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견해와 의도를 감추는 것을 경멸받을 일로 여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현존하는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공공연히 선언한다.” 「공산당 선언」의 결말은 이렇다. 폭력은 공산당이 정권을 탈취한 수단이자 가장 주요한 수단이었다. 공산당이 탄생하던 그날부터 결정된 첫 번째 유전자였다.
세계적으로 최초의 공산당은 사실상 마르크스가 죽은 후 수년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1917년 10월혁명 이듬해, 소련 공산당이 정식으로 탄생했다. 이 공산당은 ‘계급의 적’들에 폭력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생겨났고, 동시에 자기편 사람들 중 반역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생존을 유지했다. 소련 공산당은 내부 숙청 중에서 2천여만 명을 간첩, 반역자 및 의견이 다른 사람으로 몰아 학살했다.
중국 공산당은 바로 소련 공산당이 통제하는 제3공산주의 인터내셔널(The Third Communist International)의 한 지부로 출발했고, 자연히 이런 폭력 전통을 계승했다. 1927년부터 1936년에 이르는 이른바 첫 번째 국공(國共) 내전시기에 장시(江西)의 인구가 2천여만에서 1천여만으로 줄었다. 공산당 폭력이 몰고 온 심각한 재난을 상상할 수 있다.
정권을 탈취하려는 전쟁과정에서 폭력을 불가항력적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공산당처럼 평화적인 시기에도 여전히 폭력 정치를 사용하는 정권은 세계에 둘도 없을 것이다. 중국이 공산화 된 1949년 이후 중국 공산당의 폭력에 상해(傷害)를 입은 중국인의 숫자는 놀랍게도 그 이전 30년의 전쟁시기를 훨씬 웃돈다.
중국 공산당이 폭력을 사용한 가장 좋은 예는 중국 공산당이 전력을 다해 지원한 캄보디아 크메르루주(Khmer Rouge)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정권을 탈취한 후 전 인구의 4분의 1을 학살했다. 여기에는 대다수 화교들이 포함됐다. 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당은 지금까지도 크메르루주에 대한 국제사회의 공개적인 심판을 가로막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당연히 중국 공산당이 그 가운데서 일으킨 작용과 그들이 담당한 악랄한 역할을 계속 은폐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세계적으로 가장 잔혹한 무장단체와 정권들이 모두 중국 공산당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를 제외하고도 인도네시아 공산당, 필리핀 공산당, 말레이시아 공산당, 베트남 공산당, 미얀마 공산당, 라오스 공산당, 네팔 공산당 등등이 있으며 이들 역시 중국 공산당의 지지 하에 건립된 것이다. 이들 당의 두목 중 많은 자들은 모두 중국인이며 어떤 자들은 지금도 여전히 중국에 숨어있다.
아울러 세계적으로 마오쩌둥주의를 종지(宗旨)로 하는 공산당에는 남미의 광명대도(Shining Path), 일본의 적군파가 있다. 이들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행동 역시 모두 세상 사람들이 혐오하는 대상이다.
공산주의 이론 근거 중 하나는 진화론(進化論)이다. 공산당은 종의 경쟁을 사회진화 중의 계급투쟁으로 발전시켰으며, 계급투쟁이야말로 사회발전과 진보의 유일한 원동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투쟁은 공산당이 정권을 획득하고 생존을 유지하는 주요한 ‘신앙’이다. “8억 인구가 있는데 투쟁하지 않으면 되겠는가?”라는 마오쩌둥의 유명한 말은 바로 이런 생존논리의 표현이다.
이 표현과 마찬가지로 유명한 것이 바로 마오쩌둥의 다른 한 마디 말이다. 즉, 문화대혁명을 “7~8년마다 한 번씩 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폭력사용을 반복하는 것은 공산당 정권이 통치를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폭력의 목적은 바로 두려움을 양산하는 데 있다. 매번 투쟁운동은 모두 공산당의 한 차례 테러훈련으로, 인민들이 내심으로부터 공포에 떨며 굴복하도록 했고 이로부터 테러의 노예로 만들었다.
오늘날, 테러리즘은 문명과 자유세계에 대한 최대의 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공산당의 테러리즘은 국가를 매개체로 했기에 규모가 더 거대하고 지속시간도 길며 끼친 재앙은 더욱 잔혹했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 우리는 공산당의 이 유전적인 요소가 적당한 시기에 반드시 공산당의 미래에 결정적 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류 문명을 가늠하는 지표 하나는 제도 중에서 발생되는 폭력 작용의 비례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공산정권 사회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인류 문명의 한 차례 큰 퇴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진보적이라고 간주되어 왔다. 이런 사람들은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이런 종류의 사회 진보에 반드시 필요하며 또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인식한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미국이 특별히 친근한 나라라고 느꼈다. 이는 단지 미국이 중국의 토지를 강제로 점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 대하여 침략적인 전쟁을 발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더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중국인은 미국에 대하여 호감을 갖고 있는데 이는 미국 국민성에서 풍기는 민주적인 풍격과 넓은 흉금 때문이다.”
이글은 중공 중앙의 기관지인 『신화(新華)일보』가 1947년 7월 4일 발표한 논평이다. 하지만 불과 3년도 안되어 중국은 북한에 군대를 파견하여 미국과 전쟁을 치렀으며 또한 미국인을 세계에서 가장 사악한 제국주의자로 묘사하였다. 중국대륙에서 온 사람이 50여년 전의 이 논평을 본다면 모두 깜짝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 공산당은 이와 유사한 문장을 어떤 식으로든지 새로 출판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은 정치권력을 잡은 후 숙반(肅反, 역주:반동분자 숙청), 공사(公私)합영, 반우파 투쟁, 문화대혁명, 6.4학생운동(역주:천안문 민주화 운동), 파룬궁 탄압 등에 매번 동일한 수단을 채용하였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57년에 중국 공산당이 지식인들에게 공산당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라고 해놓고 그에 따라서 ‘우파’를 체포한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음모라고 지적했을 때 마오쩌둥은 공개적으로 “그것은 음모가 아니라 ‘양모(陽謀)’다.”라고 말했다.
거짓과 기만은 공산당이 권력을 탈취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예로부터 중국 지식인들의 가장 중요한 믿음 중 하나는 바로 역사이다. 중국은 세계적으로 역사가 가장 길고 완전한 나라이다. 중국인들은 역사에 근거하여 현실을 판단하고 심지어 이 가운데서 개인의 정신적인 승화를 얻는다. 그러므로 역사를 속이고 뜯어 고치는 것 역시 중국 공산당의 중요한 통치수단이 되었다. 일찍이 춘추전국시대부터 최근에는 문화대혁명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으로 속이고 뜯어 고치고 거짓 논술을 펼쳤는데 50여년 동안 한번도 중단한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본래 모습을 되돌리려는 시도는 모두 무자비하게 봉쇄당했다.
은폐하고 덮어 감출 필요가 있을 때, 폭력으로 이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공산당은 기만과 거짓을 사용한다. 거짓은 폭력의 다른 한 면인 동시에 폭력의 윤활제인 셈이다.
이는 결코 공산당이 발명하고 창조한 것이 아니며 공산당은 단지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불한당과 같은 행실에 아름다운 가면을 씌워 사용했을 뿐이다. 중국 공산당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주기로 약속했고, 노동자들에게는 공장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지식인들에게는 자유와 민주, 평화를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지금 어느하나도 실현된 것이 없다. 한 세대의 기만당한 중국인들이 세상을 떠났으며 다른 한 세대의 중국인들은 계속해서 거짓말에 속고 있다. 이는 중국인들의 가장 큰 비애이자 중화 민족의 큰 불행이다.
2004년에 있었던 미국 대선 TV토론에서 한 후보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사람이 어떤 문제에 대한 관점을 늘 바꿀 수는 있으나 문제를 보는 원칙을 자주 바꿔서는 안 된다. 만약 원칙이 늘 바뀌는 사람이라면 그는 결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 말에는 의미심장한 내포가 담겨있다.
끊임없이 원칙을 바꾸는데 있어서, 공산당은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중국 공산당을 예로 들면, 당 창립 80년 동안 16차례의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놀랍게도 당장(黨章)을 16차례나 수정하였다. 아울러 정권을 탈취한 후 50년 동안 중국 헌법을 크게 5차례나 수정하였다.
공산당의 이상은 사회적인 평등이며 결국 공산주의를 실현하는데 있다. 그러나 오늘날, 공산당이 통치하는 중국은 이미 전 세계에서 빈부격차가 가장 심각한 나라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원들은 8억 인구의 가난을 기반으로 큰 부를 누리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사상은 최초의 마르크스주의로 부터 마오쩌둥사상을 합쳤으며 거기에 또 덩샤오핑 이론을 더했고 최후에는 또 장쩌민의 3개 대표이론까지 합하였다. 그 중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사상, 덩샤오핑 이론과 장쩌민의 3개 대표론은 모두 전혀 다른 이론으로 서로간에 차이가 아주 크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이들을 함께 나열하여 숭배하고 있는데 정말 역사적으로 기이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원래 공산당에게는 조국(祖國)이란 것이 존재한 적이 없으며, 전 세계적인 대동단결을 주장하는데 오늘날 중국 공산당은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원래 공산당은 모든 사유재산을 박탈하고 일체 착취계급을 타도할 것을 주장하는데, 오늘날 중국 공산당은 도리어 자본가들을 끌어들여 공산당에 입당하게 하는 등, 그들의 기본 원칙은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공산당 정권이 출현하고 유지해 온 역사를 보면 어제 견지했던 원칙을 오늘 포기하고, 내일이면 다시 바뀌는 사건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아무리 바뀌더라도 공산당의 목표는 명확한데, 그것은 바로 정권을 탈취하고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며 또한 사회 권력을 절대적으로 독점하여 행사하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에게는 역사적으로 십여 차례의 이른바 ‘생사를 건’ 노선투쟁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그들이 입장과 원칙을 바꿀 때 발생한 내부의 혼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매번 입장과 원칙을 바꿀 때마다 중국 공산당의 합법성과 생존에 피할 수 없는 위기가 도래했다는 점이다. 국공(國共)합작, 친미외교, 개혁개방, 민족주의의 추진 등이 모두 이러하였다. 그러나 매 차례의 타협은 모두 권력의 탈취나 혹은 권력을 고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매 번 탄압을 하고 나중에 명예를 회복『平反』시키기를 반복한 일 역시 이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서양에 이런 속담이 있다. “진리는 견지할 수 있지만 거짓은 영원히 변화한다(Truths are sustainable and liesmutable.)” 이 말은 너무나도 맞는 말이다.
중국 공산당은 레닌 식의 정당이다. 중국 공산당이 당을 건립한 초기에 당을 건설하는 3대 노선 즉 정치노선, 사상노선과 조직노선을 확립하였다. 이 3대 노선을 알기 쉽게 풀이한다면, 사상노선은 공산당의 철학적 기초이며, 정치노선은 공산당의 목표를 확립한 것으로 나중에 엄격한 조직형식으로 이 목표를 실현한다.
공산당원과 공산주의 사회의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조직노선의 전체 내용이다.
중국에서, 사람들은 공산당원들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이중인격의 특징을 잘 알고 있다. 사적인 장소에서 공산당원들은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혹은 남편으로서 혹은 친구로서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끼며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성(人性)을 능가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공산당이 가장 강조하는 당성(黨性)이다. 당성은 공산당의 요구에 따른다면, 언제까지나 보편적인 인성을 초월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그들은 인성은 상대적이고 변하는 것이지만 당성은 절대적이고 의심할 바 없으며 도전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중국인들은 부자(父子)지간에 서로를 죽이고, 부부 사이에도 서로 투쟁했다. 모녀 사이에 서로 고발하고, 사제지간에도 얼굴을 붉히기가 예사였는데, 이는 당성이 일으킨 작용이었다. 초기에 중국 공산당 고위관리의 가족들은 계급의 적으로 분류되어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가족들을 구해내지 못했는데 이런 사례가 무척 많다. 이 역시 당성이 일으킨 작용이었다.
이러한 당성은 공산당 조직이 장기간의 훈련을 통하여 얻은 결과이다. 이러한 훈련은 유아원부터 시작된다. 유아원 교육에서 공산당이 아이들에게 주는 표준답안은 비록 아이들의 인성에는 부합되지 않지만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는 기준이 된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에 이르기까지 정치교육에서 학생들은 반드시 당에서 제시한 표준답안에 따라야 한다고 배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급학교에 진학하거나 졸업을 할 수 없었다.
당원들은 평소에 어떠한 의견을 말해도 좋지만 일단 당원의 신분으로 태도를 표명할 때에는 반드시 ‘조직’의 의견과 일치해야 한다. 아래에서부터 위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집단으로 구성된 피라미드의 최정상과 의견이 통일되어야 하는 것이 공산당 정권의 가장 중요한 구조적 특징인데, 한마디로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중국 공산당은 더 이상 공산주의라는 목표를 추구하지 않으며 이미 자신의 이익만 수호하는 정치집단으로 탈바꿈했다. 그럼에도 공산당 조직의 원칙은 변하지 않았으며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당성의 요구도 변하지 않았다. 이 당은 인류와 인성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며, 당 조직 혹은 당 지도자에게 위협이 되는 사람이라면, 일반 백성이건 당의 고위 관리이건 상관없이 즉시 제거해 버린다.
천지만물은 모두 생성하고 쇠망(衰亡)하는 생명과정이 있다.
공산당 정권과는 달리 다른 모든 사회에는 그 사회가 비록 아무리 전제적이고 독재정치를 하더라도 모두 일부 자발적인 조직과 자주적인 성분이 존재한다. 중국 고대사회도 사실 이원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농촌에는 종족(宗族)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인 조직이 있었으며, 도시에는 같은 업종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인 조직이 있었고, 정부기구는 현(縣)급 이상만 관리했을 뿐이다.
근대에 이르러 공산당을 제외하고 가장 심한 독재정치를 한 독일의 나치정권도 여전히 사유재산권과 사유재산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공산당 정권은 이러한 자발적인 조직과 자주적인 성분을 철저하게 제거했으며, 위에서 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중앙집권적인 구조로 대체하였다.
만약 이전의 사회 형태를 아래서부터 위에 이르기까지 자연적으로 발생하고 성장한 사회형태라고 한다면, 공산당 정권은 일종의 반자연적인 사회형태이다.
공산당에게는 보편적인 인성의 표준이 없다. 선과 악, 법률과 원칙은 멋대로 바꿀 수 있는 표준이다. 살인을 해선 안 되지만 그러나 공산당이 적(敵)으로 분류한 사람은 제외한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지만 그러나 계급의 적으로 분류된 부모는 제외한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지켜야 하지만 그러나 당이 원하지 않을 때는 제외한다. 때문에 보편적인 인성을 철저히 부정하는 공산당은 또한 반인성적이다.
공산주의를 제외한 다른 사회에서는 대부분 우선 인성에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승인하고 그 다음 고정적인 계약을 정하여 사회의 평형을 유지한다. 그러나 공산당 사회에서는 인성을 승인하지 않는다. 인성 중의 선(善)을 승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惡)도 승인하지 않는다. 공산당은 이러한 인성의 선악 관념을 배제하고, 오로지 마르크스의 말대로 낡은 사회의 상부구조를 철저하게 뒤엎을 뿐이었다.
공산당은 신(神)을 믿지 않으며 자연만물도 존중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과 싸우고 땅과 싸우며 사람과 싸우니 그 즐거움은 끝이 없다.”라고 말한다.
중국 사람들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중시한다. 노자(老子)의 말에 따른다면,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즉, 사람과 자연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연속적인 우주 상태인 것이다.
공산당도 일종의 생명이다. 그러나 그는 반자연적이고 하늘, 땅 그리고 사람의 보편적인 도리에 어긋나는 반우주적인 사악한 생령(生靈)이다.
공산당 조직 자체는 결코 생산과 발명, 창조에 종사하지 않지만 일단 정권을 획득하면 바로 국가와 인민의 몸에 붙어 인민을 조종하고 통제하는데, 사회의 최소 단위까지 통제하여 권력을 잃지 않도록 보호한다. 동시에 사회의 생산수단을 독점하여 사회적 부를 다 뽑아간다.
중국에서, 공산당 조직은 없는 곳이 없으며 관여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태껏 중국 공산당 조직의 재정 예산을 보지 못했으며, 다만 국가 예산과 지방 정부의 예산이 있고 기업 예산이 있을 뿐이다. 중앙정부에서부터 줄곧 농촌의 촌위원회에 이르기까지 행정 관원은 영원히 당의 관원보다 낮고, 정부는 자신과 동급(同級) 당 조직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당의 비용 지출은 모두 행정 부서의 비용 중에서 지출하되 단독으로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이 당조직은 마치 거대한 사악한 영(靈)의 부체처럼, 중국사회의 모든 세포에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정교하고 세밀한 흡혈관(吸血管)을 통해, 사회의 모든 모세 혈관과 세포 속에까지 깊숙이 들어가 사회를 통제하며 조종하고 있다.
이런 괴상한 부체(附體) 구조는, 인류 역사상 때때로 사회의 일부에서 나타난 적이 있으며 때로 사회 전체에서 잠시 나타난 적도 있다. 하지만 공산당 사회처럼 이렇게 철저하고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지속된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러므로 중국 농민은 이렇듯 가난하고 많은 고생을 겪어야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전통적인 국가 관원들을 부양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 행정관원과 똑같거나 심지어는 그 수가 더 많은 부체 관원들을 부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 노동자들이 그처럼 대규모로 실직하는 이유도 없는 곳이 없는 그런 흡혈관이 몇 년 동안 줄곧 기업의 자금을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의 지식인들은 자유가 너무나도 얻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행정부서 이외에도 하는 일 없이 모든 곳에 존재하면서 전문적으로 그들을 감시하는 그림자가 있기 때문이다.
부체(附體)는, 부체 당한 자의 정신을 절대적으로 통제해야만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에너지를 획득할 수 있다.
현대 정치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사회 권력에 세 가지 내원(來源)이 있다고 한다. 즉 폭력과 재물, 그리고 지식이다. 공산당은 폭력을 독점하고 제멋대로 사용하여 인민의 재산을 박탈했다.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언론과 매스컴의 자유를 박탈하고 인민의 정신적인 자유와 의지를 박탈하여 사회 권력을 독점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였다. 이로 볼 때 중국 공산당이란 이 부체의 사회에 대한 엄밀한 통제는 동서고금을 통해 능가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1848년에 발표한 공산당의 첫 번째 강령 『공산당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하나의 유령,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에서 빈둥거리고 있다.” 백년 후, 공산주의는 단지 유령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실물(實物)과 실상(實相)을 구비하게 된다. 이 유령은 지난 100년 동안 마치 전염병처럼 전 세계적으로 범람하여, 몇 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숱한 사람들의 재산을 박탈하였고 심지어 본래 자유로웠던 그들의 정신과 영혼마저 박탈하였다.
공산당의 최초 원칙은 모든 사유재산을 박탈하고, 나아가서 모든 ‘착취 계급’을 소멸한다는 것이었다. 개인의 사유재산은 민중들의 모든 사회권리의 기초이며, 민족문화를 전달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사유재산을 박탈당한 인민들은 역시 필연적으로 정신과 의지의 자유를 박탈당함으로써 최후에는 사회적,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는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중국 공산당은 자신의 생존위기 때문에, 1980년대부터 경제개혁을 시작하여 인민들의 재산권 중 일부분을 돌려주었으며, 또한 공산당 정권이란 이 방대하고도 정밀한 통제 기계에 최초로 구멍을 만들었다. 오늘날 이 구멍은 점점 더 커져서 전체 공산당원들이 미친 듯이 재물을 끌어 모으는 상태까지 발전하였다.
폭력과 거짓말로 끊임없이 자신의 외모를 바꾸는 이 부체(附體)한 사악한 영(靈)은 최근 몇 년 동안 실패한 모습이 모두 드러났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말처럼, 이미 하찮은 일에도 겁을 집어먹고 크게 놀라는 정도가 되었다. 그것은 더욱 미친 듯이 재물을 모으고 권력을 통제하여 스스로를 구원하려 하지만 이것은 위기가 도래하는 것을 더욱 재촉할뿐이다.
현재 중국은, 겉으로는 아주 번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에 쌓인 위기는 이미 전대미문의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중공의 습관으로 볼 때, 어쩌면 또다시 과거의 수단을 사용할지도 모른다. 이 수단이란, 다시 한 번 타협을 통해 6.4 사건의 당사자들 혹은 파룬궁(法輪功) 등의 명예를 회복해 주는 것을 말하는데 한편으로는 또 다른 ‘소수’의 적을 만들어 중공이 계속 폭력테러를 자행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중화 민족이 일백여 년 간 직면한 도전 중에서, 각종 기구를 도입하거나 제도를 개량하는 데서부터 최후에 극단적인 격렬한 혁명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대가를 치렀으며 대부분의 민족문명 전통을 상실하였다. 현재 이미 증명된 것처럼 이것은 완전히 실패한 반응이었다. 전체 국민이 증오하고 분노하는 중에 사악한 영(靈)이 틈을 타고 들어와, 결국 세상에서 가장 오랜 문명을 지닌 중국 민족을 통제하였다.
미래의 위기 속에서, 중국인들은 다시 한 번 불가피한 선택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하던지 간에 중국인들은 현존하는 이 사악한 영의 부체에 대해 품은 환상이 모두 중화민족에 대한 재난을 더 크게 하는 것이자 몸에 붙은 사악한 생명에게 에너지를 주는 것임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오직 공산당에 대한 모든 환상을 버리고 자신을 철저히 반성하며, 증오와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이 중국을 좌우지하는 것을 단호히 배척해야만, 반세기동안 중국사회를 통제해온 공산당 부체의 악몽 속에서 철저히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자유 민족의 몸으로 인성을 존중하고 보편적인 관심과 사랑을 기초로 하는 중화문명을 다시 건립할 수 있을 것이다.
——————————————
1) 양무운동 [洋務運動]
중국 청(淸)나라 말기인 1860∼90년대까지 유럽의 근대기술을 도입하여 중국의 자강(自强)을 도모하고자 실시한 운동.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좌종당(左宗棠) 등 한인대관료(漢人大官僚) 및 공친왕(恭親王) 등 양무파로 총칭되는 그룹이 중심이 되어 추진하였다. <자강>과 <구부(求富)>를 슬로건으로 내세워 군사공업부문에서 시작했으며, 1870년대에는 관독상판(官督商辦;官民合營) 방식을 취한 민간기업부문으로 확대되었다. 85년 이후 양무파는 해군부문을 장악하여 북양해군도 창설하였다. 양무운동의 결과 태평천국운동 등으로 동요하던 청나라의 지배를 일시적으로 바로잡을 수는 있었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그 뒤 1884∼85년 청·프 전쟁과 94∼95년 청·일 전쟁의 잇단 패배로 실패로 끝났다. 양무운동에 대해 역사학계에서는 중국 민족산업의 발전을 저해하였다는 설과, 추진측의 의도와는 달리 객관적으로는 중국 자본주의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는 설 등의 평가가 있다.
2) 무술변법 [戊戌變法]
중국 청나라 말기의 무술년(1898)을 정점으로 수행된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탄쓰퉁(譚嗣同) 등 사대부들의 개량주의적 변혁운동.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이라고도 한다. 당시 중국에서는 농민봉기와 자본주의열강의 침략으로 청나라의 지배체제가 크게 동요되고, 이를 재정비하려는 노력도 아편전쟁 이후 여러 번 시도되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변법운동은 청나라 조정의 최후 시도에 해당하며, 청·프랑스전쟁, 청·일(淸日)전쟁 등의 2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양무운동(洋務運動)의 결함이 폭로된 이후 급속히 고조되었다. 변법운동의 목표는, 어린 광서제(光緖帝)를 옹립하고, 그 통치하에서 입헌제와 의회제를 채용하며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과 러시아 표트르대제의 신정(新政)을 모범으로 하여 근대적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 일련의 개혁을 추진한 주체는 량치차오, 탄쓰퉁 등 사대부들이 각 지방에 설립한 학회였으며, 이들은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고 전족(纏足)폐지 등의 계몽활동을 벌이는 등 사람들을 각성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관료사대부층의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으며 게다가 민중들의 지지도 거의 받지 못하여 점차 고립되어 갔으며, 결국 서태후(西太后) 일파의 무술정변 쿠데타로 불과 100여 일만에 실패로 끝났다.
3) 대청입헌[大淸立憲]
중국 청(淸)나라 말기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부강을 목표로 한 위로부터의 개혁운동. 청나라 정부는 1905년 6월 5대신(大臣)을 일본과 유럽에 보내 각국의 헌정을 고찰시키고, 고찰정치관(考察政治館)을 마련하였다. 이어 1906년 예비입헌의 방침이 선포되자, 입헌파 신사층은 각지에서 예비입헌공회(豫備立憲公會), 헌정공회(憲政公會), 자치학사(自治學社), 헌정주비회(憲政籌備會) 등 입헌을 고취하는 단체를 조직하여 지역별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는 국내 입헌파 신사층의 요구를 끝내 수용하지 않고, 이들의 국회청원운동을 탄압하였다.
4) 신해혁명 [辛亥革命]
1911년에 일어난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으로 제1혁명 또는 민국혁명(民國革命)이라고도 한다. 이 혁명을 통해 청(淸)나라가 멸망하여 2000년간 계속된 왕조정치가 종말을 고했으며 중화민국이 탄생하였다.
5) 5.4운동
1919년 5월 4일 발생한 중화민국 최초의 대중운동. 5.4 운동은 이전에 소수 혁명가의 무장봉기나 정객, 군벌의 세력다툼에 불과했던 정치운동을 학생, 상인, 노동자들이 스스로 조직하여 시위, 파업, 불매 등을 통해 정치세력화 하였다는 점에서 중국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이다.
6) 양모(陽謀)
음모가 은밀히 추진하는 모략인데 반해 양모는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하는 모략을 의미한다.
7) 하늘과 싸우고 땅과 싸우며 사람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끝이 없다.
–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 공산당의 모토
8)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 노자 『도덕경』 제25장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9) 부체(附體)
한 생명체에 달라붙어 그 생명을 통제하며 에너지를 뽑아가는 다른 공간의 생명체를 말한다. 쉬운 예를 들자면, 무당이 굿을 할 때 신이 달라붙어 빙의하는 현상도 일종의 부체현상에 해당한다. 본문에서는 공산당을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거대하고 사악한 부체로 보고 있다.
10) 부체 관원들
– 공산당원들을 말한다
11) 흡혈관
– 중국 사회 말단까지 침투해 들어간 부패한 공산당 조직을 말한다
12) “하나의 유령,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에서 빈둥거리고 있다”
–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도입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