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집에 맷돌이 하나 있었습니다. 믹서기가 없던 시절이니 집집마다 있던 흔한 생활필수품입니다. 그 맷돌에 콩을 넣어 어처구니를 땀나게 돌리면 거기서 나온 콩국물로 국수를 찰지게 말아 먹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맷돌은 그렇게 무언가를 갈아냅니다.
책장을 정리하다가 경제학자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몇 년 전에 읽은 책이라 내용이 하나도 생각 안 나서, 혹시 메모라도 해놨나 하고 펼쳤습니다. 연필로 살짝 표시해 놓은 대목을 보고 강렬했던 그때 생각이 났습니다. 줄을 그어 놓은 구절은 ‘악마의 맷돌’(Satanic mills)입니다. 폴라니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서 따온 말인데, 20세기 자본주의 시장 질서를 비유하는 개념입니다.
20세기 자본주의 시장은 모든 가치를 이 맷돌에 넣고 갈아버립니다. 인류가 이제껏 간직해 온 생명, 평화, 정의, 윤리 같은 가치는 물론이고, 역사와 정신적 유산도 이 맷돌은 거침없이 삼켜버립니다. 그리고는, 무엇이든 ‘돈’이라는 경제적 이익으로 갈아버립니다.
폴라니에 따르면, 20세기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참혹한 해악을 끼친 것이 바로 이 악마의 맷돌이라고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맷돌은 인간을 인간답게 지켜주는 사회적 관계를 파괴하고 제거하는 원흉으로 지목됩니다. 이 맷돌은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는 대신 돈으로 환산하고, 고유한 문화와 정신 심지어 종교마저도 돈으로 갈아버리는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저마다 이 맷돌을 품에 안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정치 사회 종교 모든 분야가 악마의 맷돌을 돌리고 거기서 나오는 콩국물에만 신경 씁니다. 사회생활에서 일어나는 대립과 분쟁을 조정하고 질서를 만들어야 할 정치인들도 악마의 맷돌을 돌리고, 인간 본연의 가치와 생명, 연대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보전해야 할 종교도 악마의 맷돌을 돌립니다.
목사라서 교회부터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무엇을 품고 있을까요? 하나님이 부르실 날만 기다리던 노년의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드디어 이 종을 평안히 놓아주신다’라며 찬송하던 모습이 사뭇 진지하게 그려집니다. 성탄의 절기에 교회가 예수를 품에 안고 기뻐하는 건지, 아니면 악마의 맷돌을 품고 기뻐하는 건지 모를 일입니다. 더 늦기 전에 저 맷돌에서 어처구니를 제거해야 합니다. 어이없는 맷돌로 만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