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목공소
양해기
굵은 말뚝이 대패를 간다 지난 해 나무 아래에 파묻은
딸 아이의 울음소리를 내며 나무의 굳은 껍질이 떨어져
나간다 잔뜩 날이 선 대패는 켜켜이 붙은 나무의 나이테
를 차례로 안아낸다 얇은 나무판자에 땅-땅 못 총을 쏘아
대는 사내의 얼굴이마치 성장을 멈춘 어린 통나무 같다
사내의 가슴팍에서 땀이 배어나온다 땀은 가장자리에
틀을 만들며 헐렁한 런닝에 격자무늬 창살을 짜 넣는다
사내의 창을 열면 운동장에 아이들이 뛰어 다닌다 갈래
머리 딸아이가 달려와 매달린다 다시 사내의 모습이
사라진다 사내 앞에 놓인 통나무 안엔 사내와 팔뚝 그리고
그의 딸아이가 뛰어다니는 통로가 있다 팔뚝은 나무를
열어 하루 종일 창문을 내고 사내의 딸아이가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심사평]
시인으로서 언어를 행사한다는 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이야기하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실천 자체이어야 마땅하다. 시의 외형을 지닌 모호한 설명과 감상들, 일부 투고작들의 필연성을 수긍하기 어려운 산문화 경향에 대해 우려를 갖는 것은, 그것이 언어의 시적 사용이 지니는 근원적 의의와 위엄에 대한 자각의 결핍을 반영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예심을 통과한 9명의 후보들 중 ‘매듭론’ ‘고치의 시간’ ‘에버랜드 화원에서’ ‘깃을 날리며’의 4명을 우리는 대체로 시적 사유가 다소 도식적이거나 언어 운용의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판단하여 제외하였다. 남은 5명의 후보 중 이현수는 ‘뿌리의 방’ 같은 섬세한 안정감이 인상적이었으나 좀더 새로울 필요가 있었다. 정구영은 ‘인드라의 그물’ 등 일부 작품의 재기가 신선했으나 그것이 과연 재기를 넘어 진정한 시적 모험이라 할 만한 것인가에는 의문이 남았다. 이재훈은 생기 있고 도식성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며 특히 ‘공중전화 부스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부적절한 비유와 표현이 부분적으로 지적되었다.
마지막으로 신미나와 양해기 두 후보를 놓고 심사위원들의 의견은 크게 엇갈렸다. 신미나의 시편들은 감각과 수련이 높은 수준에서 결합된 가작들이며, 삶을 누추함에서 건져내는 독특한 생기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에 대해, ‘입김’ ‘흙잠’을 제외하면 가벼운 감각에 주로 의지하고 있으며, 크게 새롭다고 보기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양해기의 시편들에 대해서 역시 고단한 생활 현장에서 건져올린 살아있는 글감과 시적 몽상이 잘 통합된 작품들이며, 근년의 젊은 시 일각이 드러내는 해체와 일탈 지향에 비해 신선하고 힘이 있다는 긍정적 평가에 대해, 제출된 매편의 시적 발상과 전개가 대동소이하고, 제재의 선택이 상대적으로 신선해 보일 뿐 1970, 80년대 민중시 운동이 이룬 성과에 비할 때 시적 사유가 새롭다고 할 수 없다는 부정적 의견이 제기되었다. 재독과 삼독, 격론과 휴회가 긴 시간 이어진 끝에, 결국 신인작가상이 ‘이 한편’을 독자 앞에 내놓는 제도라는 점과 신인다운 패기에 가산점을 주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 의견을 모았으며, 이어 양해기의 ‘서울 목공소’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합의할 수 있었다. 당선작은 마음의 안과 밖이, 밈과 당김이 잘 균형 잡힌 수작이다. 울분을 벼려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사랑의 포즈가 아니라-짐을 당선자는 지고 있는 듯하다. 건투를 빈다. 신미나를 비롯한 아홉 분 또한 우리는 잊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김종해 김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