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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 (Arbeit) / 가정교사의 길이 나의 운명을 열어주었다
어느 가난한 인생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미리 말씀드려야 이해하실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이야기만 듣고는 픽션(fiction)이 아니냐 하실 수도 있기에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제 이야기입니다.
1956년 그러니까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중학교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아 1년을 쉰 후에 중학에만 넣어주면 걸어 다니겠다는 조건으로,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집에서 40 리나 되는 중학이었기에 참으로 힘든 하루하루였지만,
오직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약속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1955년 10월 어느 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그 비를 흠씬 맞고 집으로 왔는데
어머님께서 한 마디 한 것이 제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니 이 빗속에 옷을 벗어들고 오지 그 비 다 맞고 왔어?” 바로 그 한마디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3년을 다니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죽을 각오로 다녔을 때 저만 힘들었겠습니까?
어머님 아버님은 그 힘든 농사일을 하시면서 자식 학교 보내느라 일찍 일어나셔 모든 준비를 다
하시느라 저보다 더 힘드셨고, 하교 시에는 어디로 오나 하고 호롱불을 들고 기다리시던 부모님
이셨으니 저의 고통보다는 더 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이 못난 불효자식은 어머님의 한 마디에 참았던 서러움이 폭발 울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도 울고 어머니도 우셨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부모님께 불효지심이 저를 아프게
합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버지는 학교 바로 옆에 집을 사서 가장 먼 거리를 다니던 아들이 가장 가까운
데서 다니도록 마련하신 거였습니다. 아버님은 그 거금을 장만하시느라 빚으로 하셨겠지요.
그래서 그때부터 시작한 것이 가정교사였습니다. 먼 훗날 나의 아내가 된 사람의 남동생과 민 준규라는
아이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부모님께 보답하려는 마음에서 그랬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또 가정형편으로 대학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짐을 정리해서 집으로 돌아오던 날
모든 것을 포기하는 마음에 눌려 우울증이 생겼고, 집에 와서 며칠 지난 뒤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다 발각돼
병원신세를 지어야 했습니다. 겨우 목숨을 건져 집에 다시 왔지만 부모님께 지은 죄가 너무 커서 집에 있을 수
없었고 그래서 가방 하나 달랑 메고 집을 나왔습니다.
아 그런데 그 외출이 나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우연히 버스 속에서 아는 선배를 만났습니다.
“아니 너 아프다고 들었는데 언제 퇴원했어? 그리고 그 몸으로 지금 어디를 가는 거여?”
“예, 며칠 되었어요. 그저 집에 있기 싫어 나왔어요.”
“그래, 어디 갈 곳도 정하지 않고 나왔다고? 그럼 나 지금 서울 가는데 너도 나랑 같이 갈래?”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막상 서울에 따라 간다고 대답은 했지만 어디를 가야 하나 막연했거든요.
서울까지 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부모님을 생각해서 딴 마음 먹지 말고 며칠 있다가
꼭 부모님께 돌아가야 해 하시며 다짐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서울역에 내려서 형님은 갈 곳으로 가시고 저는 기차 속에서 생각해둔 친구 임 의상(지금
캐나다에 이민 가서 살고 있음) 집을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처음 서울 길에 얼마나 막막합니까?
그래서 북아현동을 가려고 한다며 물어보니까 전철을 타고 적십자 병원에서 내려 찾아가라 했습니다.
세상에 한 정거장인데 모르니까 탄 것이었지요.
적십자 병원 앞에서 내려 지나가는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운명의 도움이었을까요? 하필 학생은
북아현동에 있는 한영고등학교 학생이었고 친절한 학생 덕분으로 임 의상 집을 찾아갔습니다.
이게 다 무엇일까요?
난데없이 임 의상을 찾아왔다는 이 촌뜨기를 아무 말씀 묻지도 않고 맞아주신 친구의 인척이나
거기까지 안내해준 학생이나 저에게는 은인이었고, 지금도 그 학생을 한 번만이라도 만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입니다.
지금 80세 전후일 것입니다.
친구 의상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아무 연락 한 번 없이 찾아온 제가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그렇게 그날 밤 함께 자고 다음 날 친구 따라 그가 다니는 대학에 같이 갔습니다. 그런데 그 만남이
저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그로 인연이 이루어져 가정교사 자리를 얻게 되었으니
이 이야기를 픽션이 아니냐고 믿겠습니까?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황 재면(가명)이 저를 반갑게 맞아주더니
“너 잘 왔다. 조금 있으면 우리 중간고사 시험이 있다. 그러니 네가 시험 좀 봐다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학에 문턱도 밟지 않은 내게 시험이라니 황당했지만 교양과목이니 너라면 충분하다 하여 응했습니다.
벌써 65년 전 일이고 1959년의 일이니 큰 문제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는 저를 용서하세요.
시험은 끝나고 친구는 고향으로 내려가며 “친구야, 너 여기 있어. 내가 너 먹을 걸 두고 갈 터이니 나 올
때까지 있으라고”
거기가 제가 서울에 무작정 상경하여 자리 잡은 흑석동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에 신 태양 사에 다니시던
어른이 저를 보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생, 말씀 들었어요. 공부는 잘 하였다면서요. 우리 아들 가르쳐 주세요. 식사는 우리 집에서 하고 옷이랑
빨래를 해 줄 터이니 어때요?”하는 조건이었습니다. 은로국민하교 5학년에 다니던 학생이었지요.
그것이 제가 꿈에 그리던 대학에 갈 수 있는 길이 된 가정교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렇게 가정교사를 시작하였지만 대학에 가려면 돈을 벌어야 하는데 조건이 그랬으니 막연히 참고 시작한 지
두 달쯤 지난 후 소문이 번져, 흑석동 동장 하시던 김 현 식 씨 사모님이 저를 보자 하시더니 “학생, 제가 학생
다섯 명을 모아줄 터이니 아예 우리 집으로 오셔 같이 살아요.” 하는 제안을 하시는 거였습니다.
아 하늘이시여! 뜻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하였던가요? 그렇게 나의 가정교사는 정식으로 시작하게 되었고 그게
발판이 되어 다음 해에는 대학에도 들어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저의 부모님은 어떠하셨겠습니까?
대학에 못가서 극단적 선택을 하려다 겨우 살아서 무작정 상경하더니 그렇게 바라던 대학에 들어갔으니 어머님
칠성님께 빌고 비신 은덕이라 여기셨겠지요.
그렇게 해서 시작된 가정교사를 5년이나 하면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지금도 처음 있었던 그 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사시던 대성이라는 아이의 아버지가 목수셨는데 아무 관계도 없는
저에게 책상을 만들어 주신 그 은혜 잊을 길이 없습니다. 대성이 어머님은 저를 시동생처럼 대하시며 참 잘해
주셨습니다. 그 고마우신 분들 지금은 어디 계신지 참으로 보고 싶고 그 은혜 갚을 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대학 1학년 때인 1960년 4월 18일. 4.19혁명의 전일 저희 대학이 최초 데모를 시작했지요. 그래서 저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데모에 가담했는데, 경향신문이 있던 자리에서 경찰의 데모진압 몽둥이에 맞고 겨우 도망쳤습니다.
가정교사 하던 주인이 흑석동 동장이시며 자유당 영등포 부위원장이셨습니다. 그래서 귀가해야 하는데 교복
입은 학생은 무조건 검거하는 바람에 사청 앞 지금 프라자 호텔 옆에서 리어카 장사하시는 할머님에게 교복을
맞기고 귀가한 일이 있었습니다. 조금 늦어서 미안했지만 가정교사였기 때문에 귀가하느라 학교로 돌아가다가
천일극장 앞에서 자유당 깡패들에게 테러를 면했다는 생각을 하면 아찔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지나고 있던 차에 처음 시작된 가정교사 자리는 저와 한 방을 쓰던 제가 가르치던 영희의 삼촌(고등학생)이
여름에 한강에서 수영하다가 익사하는 바람에 더 할 수 없었습니다. 나와야 했지요. 어디에서 또 가정교사를 구해
공부를 계속할 것인지 막연했습니다. 천운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지요.
두 번째 시작된 가정교사 자리는 염리동에 사시는 이 은 명 씨 자제 이 경 주였습니다.
용강국민학교 6학년 학생이었는데 아버님은 자전거에 달걀을 싣고 아침에 나가서 종로 상점에 배달하고 오후에
나가서 수금해오는 어려운 가정이었습니다.
처음에 경주는 반에서 47등 하던 아이였습니다. 어려운 가정이었지만 아들 가르치려는 일념으로 저를 가정교사로
받아드렸습니다. 저는 감사해서 열심히 가르쳤지요.
1년 후 경주는 반에서 2등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화여대 부속중학교에 무시험으로 들어갔지요. 그러자 경주의
할아버지께서 손주가 중학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셔서 설 명절 때였는데 저를 부르시더군요.
할아버지는 갓을 쓰신 충청도 양반이셨습니다. 그러시더니 “선생, 고맙소. 우리 손자를 잘 가르치셔서 좋은 중학교에
갔으니 참으로 감사하오.” 하시며
“경주야, 선생님께 세배 올려라.”하시는데. 대학생인 제가 갓 쓰신 할아버지 앞에서 세배를 받다니 쑥스러웠습니다.
“아니에요, 할아버지. 저는 지금 대학생인데 할아버지 앞에서 어떻게 세배를 받습니까.” 하고 거절을 하니
“선생, 군사부일체라 했소. 받으시오.”하시면서 공경의 말씀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세배는 받았지만
참으로 기억에 남는 일화입니다.
그나저나 경주네 댁에서 또 나와야 하니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막막해 할 때 저에게 영원한 안식처가 되고 참으로
제게 큰 은혜를 준 마지막 가정교사 자리가 났습니다. 고향 어른으로 백부님과 동년베이신 어른 댁이었습니다.
국정교과서에 다니셨는데 참으로 성공하신 분이었습니다. 처음 찾아간 곳이 세종로 1번지 33호 집이었는데 경복궁
속에 있던 일제 강점기에 지은 집이었습니다. 얼마 후 군사혁명 이후 집들이 다 헐리고 두 번째 이사하며 옮긴 집이
통의도 88번지 한옥 집이었습니다. 엄청나게 큰 집이었고 가정부가 셋이나 두고 같이 살던 집이었습니다.
내가 가르치던 아이는 이동희였는데 동생 종숙이도 같이 가르쳤습니다. 할머님(사모님 친척 분)이 계셨는데 저에게는
손주 이상으로 잘 해주신 어른이셨고 심지어 시골 우리 집에 까지 다녀오시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할머니에 대한 감사함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동 희에게는 피아노를 가르치는 여선생님도 계셨는데
하루는 선생님께 피아노 한 곡 부탁드렸더니 ‘엘리제를 위하여’를 들려주셨습니다. 먼 훗날까지 그 곡에 대한 향수와
선생님의 안부가 궁금하지만 알 길이 없지요.
가정교사!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루에 세 시간씩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심지어 시험을 볼 때도 방학 때도
쉬지를 못했습니다. 점점 지쳐갔습니다. 결국 통의동 9번지 1호에 살 때 전화를 받다가 쓰러져 기절을 하기 까지
했습니다. 마침 쿵 소리에 할머님이 쫓아와 쓰러져 있는 저를 발견하시고 놀래셔서 부들부들 떨기도 하셨습니다.
그때가 대학 2년 때였지요. 그 댁에서 익선동, 낙원동, 봉익동까지 같이 이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때 사모님이
윤 석 연 여사님이셨는데 제게는 어머니 같은 분이셨고 믿음이 가서 그러셨겠지만 저를 집사처럼 믿고 가정사를
다 맡기시기도 하셨습니다.
대학 졸업 때는 부모님은 상경하지 않으셨는데 졸업식장에 까지 오셔서 같이 사진도 찍어주시고 졸업 축하 파티도
챙겨주신 고마운 은인이십니다. 또 한 가지 일화는 저는 대학 2학년까지 운동화를 신고 다녔습니다.
그러자 주인 어른이 자기가 신으시던 구두를 주셨는데 그게 제가 처음으로 신은 구두였습니다.
그렇게 그 댁에서 가장교사를 이어가던 대학 4학년 여름이었습니다. 학교에서 귀가하니 종로경찰서 경찰 두 명이
집에 와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기피자 단속을 하러 왔다며 종로경찰서로 연행해 갔습니다. 1학년 때 영장이
나왔었는데 하늘의 별따기로 구한 가정교사였기에 놓치면 대학에도 다니지 못할 것이기에 미뤘던 것이 결국
기피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잠시만 조사하고 귀가 시키겠다며 데려간 경찰의 속임에 넘어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열흘 동안 있다가 풀려났습니다.
거기에 들어가자 감방장이 무엇하다 들어왔느냐고 묻기에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극진히 예우(?)해 주어 그 어려운
감방생활도 쉽게 보내고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한려수도에서 해적생활 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 이름도 쓰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마루 방바닥에 물로 이름을 써주고 가르쳐 자기 이름은 쓰도록 해 준 기억이
새롭습니다. 가정교사의 연장이었을까요?
제가 군대에 입대하여 7사단 최전방에서 근무했습니다. 민통선 너머에 부대가 있고 바로 북한과 마주 보는 최전방
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전라도에서 함께 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인연으로 같이 군대생활을 할 때 만난
김상철이라는 친구의 집에서 제대 후 머무르며 직장을 구하고 있었고, 직장을 구하고 제가 셋방살이를 시작할 때까지
계속 머무르며 상철이 친구의 처남 오진선을 가르쳤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다니다 그만 둔 아이였는데 제가 가르쳐
염광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지요. 그 인연으로 그 처남은 고등학교도 졸업했고 배운 덕으로 군대에 가서 대위까지
지내고 저에 매우 감사해 하였지요.
그렇게 그 집에 있으면서 제가 첫 직장을 다녔습니다. 그래서 매일 살 집을 얻으러 다니었지요. 단 돈 1만원을 쥐고
셋방을 얻으러 다녔는데 얼마 후 6만 원 짜리 셋방을 구해 신혼살림을 시작했습니다. 1968년의 일인데 최소한 10만
원은 가져야 셋방을 구할 수 있는데 6만 원짜리 방을 얻으려니 쉽지 안했지요. 그래서 헤매다가 매우 지친 몸으로
귀가 하다가 가지고 다니던 만 원을 잃었습니다.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죽을상으로 직장에 나가 그 얘기를 하니까
주 영철이라는 대리가 보자 하더니 제 주머니를 보고 소매치기 맞았네 하면서 흔적을 보여주는데, 가위로 봉투 넓이
만큼 째서 가져갔더라고요. 6만 원 전셋방을 얻는데 1만 원을 잃었으니 그 절망감이 얼마나 컸을가 짐작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제 한 달 월급이 8천 5백원 하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한 방을 쓰던 처남이 매우 언짢아했는데 그 모양을
보여주며 오해를 풀었지요. 매우 미안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고등학교 때 시작된 가정교사를 졸업 후 직장을 구할 때까지 계속했으니 가정교사가 나의 운명을 키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대학을 가정교사 하느라 쉼없이 지나다 보니 친구들과 만남을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끝나면 집으로 달려가야
했으니까요.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대학 졸업이 결정된 날 친구들이 "친구야, 너 이제 졸업했다. 오늘은 우리와 함께
술이나 한 잔 하자" 며 데리고 간 곳이 제기역 옆 냇가에 자리잡은 원두막 같은 술집이었습니다. 친구들 축하한다며
막걸리 한 잔 따라주어 마신 술이 제가 대학을 나올 때까지 처음 마셔본 술잔이었습니다.
그 술 막거리 한 잔 어느 노랫말처럼 입가에 맴돌며 그 친구들 또한 보고 싶네요.
아무튼 천운으로 가정교사라는 자리를 얻어 목숨까지 앗아갈 뻔한 대학을 나와 오늘의 제가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그때 입었던 은혜의 분들이 얼마나 보고픈지 모르는데 다 알 길이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 간절합니다.
면접에 대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이야기를 마치렵니다.
직장에 들어갈 때 면접관이 “무엇하고 대학을 졸업했느냐 하시기에 아르바이트 하고 졸업했습니다.” 했더니
‘아르바이트가 무슨 뜻이냐 “ 고 묻는 거예요. ”아르바이트가 아르바이트지요.“ 하며 웃은 기억이 납니다.
대학에 입학할 때도 면접 교수님이 원서를 내놓고 해석하라는 지시였는데 ‘그룹(group)이라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룹이라 해석했더니 자꾸 우리말로 그룹이 무엇이냐 묻는 겁니다. 그래서 그룹이 그룹 이지요 대답했더니
면접 교수님이 고집스레 묻는 겁니다. 그러자 옆에 계신 영문학 교수님이셨던 민 영빈 교수님(시사영어 회장)이
그래도 됩니다, 하시니까 넘어갔습니다.
법대 나오신 분의 아르바이트 질문이나, 회계학 교수이신 분의 그룹 질문이나 우스운 이야기였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