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강동리 마애보살입상(榮州 江東里 磨崖菩薩立像)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74호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강동리 산887-3
고려시대
불상 전체높이 5.76m, 전체 폭 4.5m, 佛身高 4.26m, 佛身幅 2.15m, 絹幅(견폭)-어깨폭 1.6m
이 불상(佛像)은 평은면(平恩面 ) 강동리(江東里) 왕유(王留)(왕머리)마을에서 당곡골로 넘어가는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왕유마을은 고려말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蒙塵)을 가던 공민왕이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불상(佛像)을 부처바위라고 부르는데,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여기는 불상(佛像)을 이룩할 데가 못되니
안동(安東)땅에 가서 자리를 찾으라’하여 미완성(未完成)으로 남겨둔 채 제비원 불상(佛像)을 조성(造成)하였다는 말과,
여기 불상(佛像)의 머리를 떼어다 제비원 불상(佛像)으로 옮겼다고 하나 사실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전체높이가 5.76m에 이르는 거대한 마애불로 조각양식은 이웃한 안동 이천동 마애불입상과 구미 황상동 마애불입상,
충주 미륵대원 등과 같이 고려초에 유행하던 거석마애불 계열의 불상이다.
불두(佛頭)는 절단(切斷)되었는데 절단(切斷)된 목부분 상단(上段)에 턱의 일부가 남아있어 원래(原來)는
불신(佛身)과 한 돌에 조각(彫刻)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잘린 부분을 평평하게 다듬은 흔적(痕迹)으로 보아 불두를 다시 조성하여 안치하였을 가능성도 추정해 볼 수 있다.
불두(佛頭 )뒷편 바위면에는 두광배(頭光背)의 조각선(彫刻線)이 2겹 남아있는데, 광배 내부(內部)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불두(佛頭)가 환조(丸彫)로 조각(彫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암면(巖面)의 상태에 따라 어깨와 가슴부분은 고부조(高浮彫)로 새기고 하체(下體)는 선각(線刻)으로 처리하였다.
발아래는 운문(雲紋)과과 3겹의 연화대좌( 蓮華臺座)가 조성(造成)되어 있으며
대좌위에는 불상의 발가락만이 조각되어 있어 특이하다.
수인(手印)은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대어 가슴 위에 올려놓고,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가슴 위에서 손바닥이
밖을 향하는 특이한 자세를 하고 있는데 오른손에 잡고 있는 연꽃가지가 왼쪽 가슴위에 놓여 져 있다.
불상(佛像) 우측(右側 ) 중하단부(中下段部)에는 명문(名文)이 상하(上下)로 두 글자 새겨져 있는데 정확히 판독(判讀)할 수 없다.
또한 불상(佛像 )좌측(左側 )상단부에는 각기 다른 형태의 감실형(龕室形) 조각(彫刻)이 4개 배치(配置)되어 있는데
이제까지는 다른 곳에서는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것 이여서 매우 주목된다.
자연암면(自然巖面)을 최대(最大)한 이용하여 불상(佛像)을 조성(造成)하는 과정(過程)에서 조각의 깊이나 두께가 달라졌고,
좌우(左右) 균형(均衡)이 다소 맞지 않으나 당시 유행하던 거불상계열(巨佛像系列)의 조각수법(彫刻手法)이 부조(浮彫)와
선조(線彫)인데 반해 이 불상에서는 환조(丸彫)의 불두(佛頭)에 두광배(頭光背)까지 갖추어 다양(多樣)한 조각기법(彫刻技法)을
시도(試圖)하고 있으며, 발아래로는 3겹의 운문연화좌(雲紋蓮華坐)가 배치(配置)된 점 등은 매우 특이(特異)하여,
당시(當時) 조각기법(彫刻技法)을 연구(硏究)하는데 좋은 자료(資料)로 평가( 評價)되고 있다.
출처:영주시 문화관광
@영주.2022.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