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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손교회 중고청년대학부 원문보기 글쓴이: 모황민
[구약연구21]
솔로몬의 노래, 그리고 회고록(전도서, 아가서)
전도서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인생의 황혼기에 선 솔로몬이 자신의 인생 실패에서 얻은 인생의 참 진리와 행복에 대한 교훈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고백 증언하고 있는 것이라면, 아가서는 솔로몬이 그의 통치 절정기 때 경험한 자신의 연예 체험을 통해 인간 상호 및 하나님과의 건전한 사랑의 기쁨을 교훈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도서 개요>
*제목: 전도서
-‘모여든 회중에게 종교적 진리를 전달하는 자’란 뜻을 지닌 ‘전도자’(히, 코헬레트/ 1:2,12;12:8)에서 유래함. 한편, 전도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코할렛’은 아주 드문 용어로 전도서에만 나타나며, ‘회중을 소집하다’, ‘회합하다’ 라는 뜻의 히브리어 ‘카할’에서 파생된 낱말로서 ‘회중하게 말하는 자’, 즉 ‘설교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자: 솔로몬
-본서의 저자는 ‘다윗의 아들’(1;1),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자’(1:12), 1:12~2:26에 묘사된 많은 지혜와 부와 권력과 향락을 체험해 본 인물은 오직 솔로몬 한 사람뿐입니다(유대 전승과 초대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본서를 솔로몬의 저작으로 봄).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1:1)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1:12)
*기록연대: B.C. 935년경(솔로몬 생애의 말기/이때는 솔로몬의 명성과 왕국은 쇠퇴할 무렵으로 육신의 향락과 우상 숭배에 빠져 인생의 후반부를 낭비해 버린 그가 후회와 반성을 하고 있었음).
*핵심단어: 헛됨(하나님을 떠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허망한 것에 불과함).
*핵심구절: 1장 2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핵심장: 1장, 12장
본서의 핵심주제는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 인생의 절대 허무(1장)와 하나님과의 관계 정립을 통한 이 인생의 절대 허무와 극복(12장)입니다.
*기록목적: 솔로몬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하나님 없는 인생의 모든 지식, 문화, 권력, 재물, 향락 등의 헛되고 무의미함’을 일깨워 주는 것은 물론 그러한 ‘해 아래’ 인생의 무상함을 통해 오직 ‘해 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회복만이 인생의 참된 본분이요 영원한 가치임을 교훈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기록장소: 예루살렘
-수도이자 솔로몬의 왕궁이 있던 예루살렘에서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배경: 솔로몬 왕은 일천 번제를 드린 후(왕상 3장) 하나님께 지혜를 받아, 전무후무한 영광과 명예를 누리며 살았지만(왕하4:20~34), 이후 그는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등 범죄의 길에 들어섰으며(왕상11:1~13), 그 대가로 자신의 아들 르호보암의 시대에 이르러 나라가 둘로 쪼개어지는 비극을 맞고 맙니다. 본서는 이렇듯 남다른 영욕의 세월을 모두 겪은 저자가 인생의 황혼녘에 서서 자신의 생을 회고하면서 얻은 결론을 후세대에게 교훈으로 주었던 것입니다.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왕상11:3~5) / “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는 많은 나라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으나 이방여인이 그를 범죄 하게 하였나니.”(느13:26)
*요절: 12장 13절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본서와 그리스도: 본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는 자의 삶이 얼마나 공허하고 헛된 것인지 설득력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3:11) 참다운 만족과 희락, 지혜를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개요:
제1부: ‘모든 것이 헛되다’는 논제(1:1~11)
1.허무함을 소개함, 허무의 실례들.
제2부: ‘모든 것이 헛됨’의 증거(1:12~6:12)
1.경험으로부터의 증거(1:12~2:26)
1)지혜의 헛됨(1:12~1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다.
2)쾌락의 헛됨(2:1~3): 즐거움도 헛되다.
3)사업의 헛됨(2:4~17): 사업 역시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 같으며 무익한 것이다.
4)수고하는 것이 헛됨(2:18~23): 수고도 헛되다.
5)결론: 자족을 권고함(2:24~26)
2. 관찰로부터의 증거(3:1~6:12)
1)하나님의 계획의 불변성(3:1~22)
-인생의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임,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 모두를 심판하실 것임.
2)인생의 불평등한 모습들(4:1~16)
-학대, 무익한 수고, 정치적 명성의 무상함.
3)헛된 예배(5:1~7):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라.
-하나님께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음.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급한 마음으로 서원을 하지 말되, 서원 이행하기를 더디 하지 말 것.
4)헛된 재물(5:8~20): 재물과 부요와 존귀도 헛되다.
-재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음,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은 좋지 않음.
5)피할 수 없는 인생의 허무함(6:1~12)
-재물의 헛됨, 많은 자녀로도 만족되지 않음, 수고의 헛됨.
제3부: 헛된 인생에 대한 조언(7:1~12:14)
1. 악한 세상에서의 대처방안(7:1~9:18)
1)지혜자와 우매자의 대조(7:1~14): 지혜자의 책망이 우매자의 노래 듣는 것보다 낫다.
2)중용의 능력(7:15~18):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라.
3)지혜의 능력(7:19~29): 지혜가 지혜자를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 있게 한다.
4)권위에의 복종(8:1~9)
5)하나님의 일은 신묘막측함(8:10~17):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사람이 능히 알 수 없다.
6)모든 자에게 미치는 심판(9:1~6):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7)만족과 기쁨의 생활(9:7~12):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먹고 마시되,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라.
8)지혜의 가치(9:13~18): 지혜가 힘과 무기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 받는다.
2. 불확실한 삶에 대한 조언(10:1~12:8)
1)지혜의 특성(10:1~15):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다.
2)왕과 관련되는 지혜(10:16~20)
3)사업과 관련되는 지혜(11:1~6):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다 알 수 없으므로 부지런히 밤과 낮으로 씨를 뿌리고 손을 놓지 마라.
4)청년과 관련되는 지혜(11:7~12:8):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3. 결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들을 지킬지어다’(12:9~14)
<아가서 개요>
*제목: 아가
-‘노래’(히, 쉬르)란 명사를 반복하여 최상급, 즉 ‘가장 아름다운 노래’(히, 쉬르 하쉬림)라는 뜻을 지닙니다. 한편, 1:1에 솔로몬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솔로몬의 노래’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저자: 솔로몬
-서두(1:1) 등에 나타나 있듯 본서의 저자는 솔로몬임이 분명합니다. 언어 및 문체의 통일성, 반복적인 후렴구, 발전적으로 상승, 고조되는 사랑의 주제 등은 본서가 단일 저자, 곧 솔로몬의 작품임을 입증합니다. 그 구체적인 증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본문 중 솔로몬 자신의 이름이 7번 등장합니다.
“솔로몬의 아가라.”(1:1) /“볼지어다 솔로몬의 가마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 명이 둘러샀는데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솔로몬 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가마를 만들었는데.”(3:7~9)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두고 그들로 각기 그 열매로 말미암아 은 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솔로몬 너는 천을 얻겠고 열매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8:11,12)
2)저자는 화려한 궁중생활을 누리는 자이며 많은 왕후와 비빈을 가진 자입니다.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6:8)
3)저자는 풍부한 문학적 소양을 가졌고, 동식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졌습니다. 참고로, 솔로몬은 1005편의 노래를 지을 정도의 문학적 소양이 풍부했으며 동식물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습니다.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 다섯 편이며 그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한지라.”(왕상4:32,33)
4)본서에서는 팔레스틴 남방과 북방의 지명이 자유롭게 나타나는데, 이는 본서의 배경이 통일 왕국의 시대임을 보여줍니다.
*기록연대: B.C. 970~960년경 (솔로몬 통치의 초기)
이 당시 솔로몬은 비록 왕후 60명, 비빈 80명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이는 (본서에 등장하는 술람미 여인과의 결혼을 제외하고) 모두 정략결혼의 산물일 뿐 참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은 점은 그녀가 아무런 정치 배경이 없는 시골 동리의 포도원지기라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1:5~6)
*핵심단어: 순결한 사랑의 기쁨
성경에는 성도와 하나님과의 신앙 관계를 이런 남녀 관계에 비유한 곳이 많은데(삿2;17; 대상5:25); 시106:39: 겔6:9; 호4:12) 이는 1차적으로 건전한 남녀 사랑의 기쁨을 보여주고 있으나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교회가 나누는 뜨거운 사랑의 교제를 형상화시켜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핵심구절: 6장 3절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본서 이해: 아가는 솔로몬이 지은 연가로, 한 여자 포도원지기에 대한 솔로몬의 구혼과 결혼, 그리고 결혼생활의 기쁨과 아픔을 묘사한 노래입니다. 그러나 이는 비유적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신부로 묘사, 인간의 삶이 남녀의 사랑에서 가장 완전하게 채워지는 것처럼 영적인 삶 역시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가장 완전하게 채워지는 것을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본서는 신부(술람미 여인), 왕(솔로몬), 무리들(예루살렘 여자들) 세 명의 주요 배우가 등장하는 연극처럼 전개되고 있으며, 예수님 당시에는 유월절에 그 기쁨을 노래하는 공식시로서 전국에서 낭독되기도 했습니다.
*본서와 그리스도: 본서는 일차적으로 남녀간의 건강하고 진솔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예표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신령한 관계를 시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구역성경은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신부’로, 신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개요:
1. 사랑의 시작(1:1~5:1)
솔로몬 왕은 술람미 지역에 한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고(6:13; 8:11), 술람미 여인은 오라비들과 같이 그 포도원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1:6; 8:11,12). 그런데 왕이 그곳을 둘렀을 때 그녀를 심히 사랑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그녀를 신부로 취해 예루살렘 궁전으로 데려오게 됩니다. 한편, 술람미 여인은 비록 바깥 포도원에서 일하느라고 얼굴은 검게 그을렸지만 여인들 중에서 가장 매력 있고 건강미가 넘쳤던 것 같습니다(1:6,8).
1)사랑에 빠짐(1:1~3:5): 구혼에 대한 회상
-사랑을 간구하는 신부(1:1~8): 결혼식 전에 신부가 사랑을 구하다.
-서로의 사랑을 표현함(1:9~2:7): 연회장에서 서로의 사랑을 나타내다.
-신부의 집을 방문하는 왕(2:8~3:5): 어느 봄날 왕이 시골의 신부 집을 방문함, 술람미 여인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것을 염려하는 꿈을 꾸게 되다.
2)사랑으로 연합됨(3:6~5:1)
-결혼예식(3:6~11): 신부의 집까지 이어지는 화려한 혼인 행렬
-신부의 아름다움을 칭송(4:1~15): 신랑이 적절한 직유법과 은유법을 구사하여 자신의 신부를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노래하다(한편, 신랑은 여기서 자신의 신부의 고결함을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산 샘’ 등에 비견함/4:12).
-신혼생활에 들어감(4:16~5:1): 신랑이 신방에 들어갈 때의 모습을 동산에 들어간 것으로 묘사하다.
2. 사랑의 확대, 성숙(5:2~8:14)
1)사랑의 갈등(5:2~7:10)
-두 번째로 이별을 꿈꾸는 신부(5:2~7): 결혼 초 술람미 여인은 왕이 궁을 떠나 있는 동안 어수선한 꿈, 즉 솔로몬이 문 앞에서 문소리를 냈으나 그녀가 너무 늦게 대답하는 바람에 솔로몬이 가버렸고 뒤늦게 나선 술람미 여인은 예루살렘 거리에서 밤늦도록 남편을 미친 듯이 찾아다니는 꿈을 꾸게 됩니다(5:2).
-신랑의 용모가 칭송됨(5:8~6:3):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신랑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면서...
-신부의 아름다움이 칭송됨(6:4~7:10): 그러나 솔로몬은 돌아오자 신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신시키며 그녀의 아리따움을 칭찬한다.
2)성숙되는 사랑(7:11~8:14)
-신부의 초청(7:11~8:4): 한편 술람미 여인은 고향집을 추억하기 시작하면서 사랑하는 자에게 같이 그곳에 돌아가기를 애원합니다.
-사랑의 위대함(8:5~14): 결국 8:5~7에서 여행은 시작되었고 그들의 사랑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그들의 사랑은 질시나 주변 환경으로도 변질되지 않는 것이었음). 고향에 다시 왔을 때 술람미 여인은 어렸을 때 오라비들이 돌보아 주던 것을 회상합니다(8:8,9). 이제 본서는 남편이 아내에게 그리고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2중 초청으로 그 막을 내립니다.
성경여행
1. 가까움과 먼 것의 균형(전3:5하)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사람들과 친밀해지기 위해서는 ‘가까움’과 ‘먼 것’ 모두가 필요합니다. ‘가까움’은 이해되는데 ‘먼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다구요? 그렇다면 두 사람 이상이 쌍을 이루어 춤을 추는 것을 통해 ‘가까움과 먼 것의 균형’에 대해 더욱 자세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두 사람이 쌍을 이루어 춤을 추는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어떤 것들이 관찰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파트너와 함께 춤을 추면서 때로는 파트너에게 가까이 나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에게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생긴 공간을 통해 그들은 자유스럽게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아름다운 춤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들이 필요합니까? 공간의 활용, 가까움과 먼 것과의 균형 등일 것입니다. 대인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까이 해야 할 때가 있고 멀리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전3:5하)
우리는 서로에게서 잠시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들 사이에는 약간의 공간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들은 그 벌어진 공간을 통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친밀해지기 위해서는 계속 가까워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쪽짜리 답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가까이 할 때가 있는가 하면 멀리해야 할 때도 반드시 있다고 말입니다. 춤을 추는 한 쌍의 댄서를 상상해 보세요. 춤을 추면서 어떤 때는 가까이서 춤을 추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조금 떨어져서 춤을 추기도 합니다. 이것들이 잘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멋진 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균형이 지켜지지 않은 채 너무 가까이에서만 춤을 추게 되면, 멋진 춤이 될 수가 없습니다.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부딪히거나 상대방의 발에 걸려 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마찬가지입니다.
*가까운 것과 먼 것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대인 관계에서 가까운 것과 먼 것의 균형은 더욱 절실히 요구됩니다. 이 균형을 적당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노력만큼 더욱 성숙한 인간관계를 이루어 나갈 수 있음). 특히 파트너 사이의 생각이 서로 매우 다를 때에는 더욱 더 그리합니다. 한 사람은 가까워지기를 원하는데 상대방은 멀어지기를 원할 수도 있으며, 한 사람은 붙잡아 주기를 원하는데 그 사람의 파트너는 홀로 서 있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이 점을 간과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상대방의 생각이나 의중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 십상이었던 것입니다.
완벽한 균형이란 좀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직하게 그리고 마음을 열고 그 균형을 찾을 때, 우리들은 보기에도 아름다운 춤을 출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냥 무대보로 밀어붙인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에 대한 아무런 배려 없이(특히 이성인 경우) 행동하는 것은 돌이키기 어려운 벽을 쌓아올리는 것입니다.
*서로의 공간을 비워두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기술에는 서로의 공간을 비워두는 기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공간을 침해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신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때, 인간관계에 커다란 고통이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에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허용하고 우리의 재능을 함께 나눌 때, 참된 친숙함이 가능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 자신만의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 공간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되도록 하는데 꼭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허용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너무 밀착되어 있다 보면 질식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비워져 있는 그 공간, 자신만의 공간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습니다. 자기개발을 위한 취미나 여가활동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일대일 밀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과의 거리를 재조정하는 여유를 갖게 됩니다. 자기성숙과 자아발견의 시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는 사람들 속에 둘려져 있을 때보다 홀로 있을 때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람들에게 법적으로 보장되는 ‘사생활(프라이버시)’가 있듯이 사람은 최소한의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특히 자매들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허용해야 합니다. 서로가 너무 밀착된 대인관계 속에서 질식해버리기 전에 말입니다. 우리는 그 벌어진 공간에서 자유스럽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분리, 격리시키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격리’와 ‘공간을 허용하기’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공간을 통해서 서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도 하고, 잠시 멀어지기도 할 수 있습니다.
*사생활을 상실해버린 사람들
각종 많은 모임들과 지나치리만큼 밀착된(마치 감시받고 있는 듯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은 머지않아 그 속에서 질식해버리거나 밖으로의 탈출을 감행하게 되고 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그의 공간을 침해하여 그로 하여금 그 자신이 되도록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주체적인 자아로 성숙하지 못하게 됩니다. 인간관계에 커다란 고통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대인공포증이나 정신적 미성숙 초래할 수도).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사적 공간’ 뿐만 아니라 개인경건의 시간 또는 취미, 여가 등의 시간을 반드시 확보해 두어야 합니다. 또한 대인관계에서 있어서 너무 사적인 것들을 캐묻지 않도록 하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삼가며, 무조건적으로 밀어붙이지 않는 등 상대방을 배려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직업선택 7원리(전 3:22)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오늘 이 시간은 직장사역연구소가 발행한 <비전, 직업, 선택>(2004년) 중 방선기 목사님의 글을 중심으로 '크리스천의 직업선택'에 대해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직업을 선택하기 위해서 어떤 기준과 원리를 가져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비전을 확인하고 그에 맞는 일을 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 선한 일이란 개인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확인하셨습니까? 확인하셨다면, 응당 그에 맞는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외에도 우리는 직업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원리 몇 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돈, 인기, 안정성, 사회적인 위치 등의 세속적인 기준 말고서 말입니다. 몇 해 전에 한국능률협회가 한 조사에 따르면, 연봉(39.3%), 안정성(18.6%), 회사의 발전성(12.6%), 개인의 비전(12.3%), 근무환경(7.8%), 회사의 브랜드(5.4%), 보람(1.8%), 개인 경력(0.9%), CEO(0.6%) 순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직업 선택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고 있었다면, 다음의 몇 가지 원리들을 함께 살펴봄으로써 보다 성경적인 직업선택을 해나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1. 선한 일을 택하라!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
우선적으로 크리스천이 택하는 일은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는 선한 일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데전5:22)는 말씀처럼 악한 일은 피해야 합니다. 어떤 일들을 말할까요? 예컨대 굳이 성경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아도 사람들의 양심에 비추어 볼 때도 충분히 문제가 있는 일들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합법적으로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라면 발을 들어놓지 말아야 합니다(네트워크 마케팅 등).
2. 땀 흘리는 일을 택하라!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4:11-12)
크리스천들은 일의 가치와 노동의 책임도 직업 선택의 중요한 요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즉 경제적인 책임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살전4:11-12, 살후3:10). 이 말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이는 돈을 벌기 위해서 일한다는 뜻이 아니라 건전한 가치관을 가지고 땀 흘려 일함으로써 수입을 얻고 보람을 얻는다는 뜻입니다(건강한 땀).
그러나 요즘 우리 시대의 직장인들은 어떻습니까? 이런 건강한 땀 흘림 없이 그저 불로소득이나 대박의 꿈만을 좇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들처럼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크리스천들에게는 '대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잠28:19-20). 다만 우리의 손이 수고한 대로 먹고 누릴 뿐입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 되고 형통하리로다."(시128:2) 물론 투기가 아닌 투자라면, 건전한 제테크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우리 크리스천 청년들도 이런 투자와 재테크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노동의 가치를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점수를 매겨 노동에 관한 네 가지를 비교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3. 돈 버는 일을 택하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를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 하였더니.”(살후 3:10)
청년 실업자들 중에 부모에게 재정생활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캥거루족'이 40%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아르바이트라도 하면서 구직의 끈을 놓지 않는 등 경제적인 책임을 지는 연습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럴 때에라야 부모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변호사, 의사, 회계사 등의 전문직과 부가가치가 높은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사로 일한다거나 출판사에서 일한다면 보통은 돈을 많이 버는 일은 아닙니다. 이 차이를 우리는 인정하면서 직업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소득이 어느 만큼인지 가늠하고 필요에 따라서 균형 있게 직업을 결정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소득이 직업의 가치를 결정하게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돈 버는 일을 택하라'는 직업선택 7원리 중 하나이지 가장 중요한 요인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4.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라!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전3:22)
3D(Dangerous, Dirty, Difficult)가 있듯이 직업 선택에 3E(Easy, Effortless, Enjoyable)가 있습니다. 의대를 나와 의사로 일하다가 요리사로 전직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말하기를 '진료하느라고 사람의 몸을 만지면 기쁨이 없지만 요리하기 위해 고기를 만지면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의사가 되기 위해서 그 자신과 사회가 지불한 기회비용 문제는 생각할 여지가 많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려는 그의 결심은 높이 살만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일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합니다(전 3:22). 간혹 즐길 거리를 찾았을 때도 기쁜데 평생 할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운 인생이겠습니까? 따라서 우리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즐기는지, 어떤 일들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열정을 가지고 평생 할 수 있는 그런 일말입니다.
이런 일을 찾기 위해서 여러 방면의 노력 등이 필요합니다(MBTI, Strong 등의 각종 검사). 물론 그러한 검사들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으므로 이것들 외에도 다각도로 자신의 적성을 찾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직장에 취직해 몇 년간 일하다가 '난 이 일이 안 맞나 봐!'라면서 적성 탓을 하기보다는 아르바이트를 통해서 미리 적성을 확인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5. 잘 하는 일을 선택하라!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언 22:29)
비단 직업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저마다 각각 잘 하는 일이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잘 한다'는 것은 잠언 기자가 말하는 대로 왕 앞에서도 떳떳하고 인정받을 만큼 '능숙하게 잘 하는 일'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 자신만 잘 한다고 취해 있지 말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면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능한 한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 외에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줄 만한 사람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물론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서 다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므로 신중하게 관찰, 확인해야하겠습니다.
6. 필요한 일을 선택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
앞에서 우리가 다룬 직업 선택의 원리들은 스스로 준비하여 가지고 있으면 직업 선택에 매우 유용한 원칙들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준비를 잘 해도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래서 필요한 일을 하는 자세가 긴요합니다.
장기적인 청년실업이라는 상황 속에서 억지로 떠맡겨진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필요한 일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상황에서 맡겨진 일이기에 그것이 자신의 기호나 적성, 혹은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에 비추어서도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다보면 그 일이 그의 평생 직업이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노예의 일, 죄수로서 감옥에서 잡일 도와주기, 이집트의 총리 일 등 어느 하나 자신이 원해서 택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꿈을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것도 어쩌면 그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복음 사역에서 재정적인 면이나 다른 이유로 그 일이 필요했기에 선택해서 감당했습니다.
7. 복음을 전하는 일을 선택하라!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살전2:9)
우리 크리스천들은 사도 바울처럼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세워나가야 합니다(공통적인 사명/마28:19-20).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복음 전파의 사명이 곧 직업의 종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혹 청년들 중에 전도를 직업 선택의 첫 번째 선택 기준으로 삼는 경우를 보는데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직장은 우선 일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논리적인 우선순위를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해외선교를 염두에 두면서 직장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해외선교에 비전을 가진 경우에 그 나라와 관계된 업종의 직장을 선택하는 것은 직업 선교를 위한 적절한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도 자신이 가진 직업은 선교를 위한 수단이라고만 생각하여 열등하게 대하거나 건성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일 자체가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3.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습니다(전4:9~12).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9절)
오늘 본문 속에서 유난히 강조되고 있는 낱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두 사람’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9절)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10절)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11절)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12절)
또한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바는 무엇입니까?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9절) 물론 여기서 ‘두 사람’은 수적으로 반드시 두 명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닌, 오히려 두 사람 이상으로 구성된 연합체(또는 공동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은 당시 여행이 어려웠던 상황에서 여행할 때 여럿이 함께 가면서 서로 돕고 사랑하는 것이 옳음을 피력함으로써 연합의 기쁨과 필요성을 교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혼자이십니까? 아직도 홀로 그 길을 걸어가시려 합니까?
* 목적을 보다 쉽게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9절)
성경은 왜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첫째, 좋은 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여기서 좋은 상을 얻게 된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말이 있듯) 목적한 바를 보다 쉽게 성취할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공공의 목적을 위해 다른 이들과 함께 의기투합해 본 적이 있습니까? 공통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두 사람 이상이 연합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사단은 흔히 우리를 향해 무엇이라고 꼬드깁니까? ‘한 사람이 두 사람보다 낫다’ ‘같은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결코 있을 순 없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왜 입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누구보다도 ‘연합의 위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여전히 혼자서 그 길을 가겠다고 고집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손을 내밀고 함께 가시겠습니까?
*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10절)
본문은 여행 중 구덩이에 빠지는 경우를 예로 들어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행 중 구덩이에 빠졌다면, 특히 밤에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런 처지에서 동료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얼마나 불행이겠습니까?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구덩이들은 흔한 것이었습니다(한번 빠지면 도무지 헤어 나오기 힘든 ‘수렁’을 비롯해 물을 저장하던 ‘우물’, 짐승을 잡기 위해 파놓은 ‘함정’, 몸을 숨길 수 있는 ‘웅덩이’ 등). 이와 같은 장애물들이 언제 어디서 여행자를 엄습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 당시 혼자서 여행길에 오른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인생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위험들이 우리를 급습할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굳이 그 길을 혼자서 가시려 합니까? 명심하십시오.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10절)
* 혹독한 추위와 같은 현실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11절)
당시 팔레스타인의 밤 기온은 무척 차가왔습니다. 특히 여행 도중 밤을 맞아 홀로 노숙한다는 것은 무척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럴 때 함께 누어줄 동료가 있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습니까?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우리네 인생길도 마찬가지입니다. 혹독한 고난과 역경 등이 우리를 잔뜩 움츠러들게 만들며, 갖가지 실패와 비방, 유혹, 질병 등이 우리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혼자서 다 감내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을 홀로 다 받아내실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굳이 그 길을 혼자서 가시려 합니까? 기억하십시오.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11절) 지금이라도 손을 내미십시오. 함께 가자고, 더불어 헤쳐 나가자고 말입니다.
* 어떤 도전 앞에서도 당당히 맞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12절)
또한 그들에게는 항상 노상강도의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눅10:25∼37)에 등장하는 강도 만난 사람은 왜 그와 같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까? 혼자서 여행길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눅10:30)
만일 그가 다른 이들과 함께 여행길에 올랐더라면 그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요? 아마도 이와 같은 곤경에 처하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자! 이래도 혼자 가기를 고집하시겠습니까?
한편, 성경은 이와 같은 연합의 위력을 무엇에 빗대어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까? 단합된 힘이 보여주는 위력을 무엇으로 비유하고 있습니까? ‘세 겹줄’입니다.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12절) 말세가 될수록 우리가 더욱 모이기 힘써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우리가 더욱 교회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힘쓰십시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24:15,16)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분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최상의 파트너이자 동반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함께 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말의 응답은 오직 여호와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16:1) 그분과 함께 하면 잠간 넘어질 수 있을지언정 아주 엎드러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분이 우리의 손을 붙들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4)
또한, 그분과 함께 하면 혹독한 추위와 같은 그 어떤 현실도 결코 문제가 되질 못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녀를 안는 것 같이 우리를 안아 목적한 곳에까지 이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1:31) 끝으로, 그분과 함께 하면 어떤 도전 앞에서도 당당히 맞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반석과 요새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이시요 나의 방패이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2) 그런데도 굳이 그 길을 혼자서 가시려 합니까? 아니지요?
4.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전 7: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올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시작을 위해선 지금까지의 일들을 잘 마무리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시작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좋은 마무리는 더욱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과정이 어떠했든 간에 우리는 여태까지의 일을 나름대로 마무리 지어야만 합니다. 비록 시작할 때의 기대와 계획에 훨씬 못 미치는 결과를 얻는다 해도 말입니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왕에 이렇게 된 것, 그냥 다 잊고 새롭게 시작하면 되지!’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좋은 시작’, ‘좋은 출발’, ‘훌륭한 스타트’, ‘성공적인 이륙’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로부터 많은 제언들을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어떻게 하면 좋은 계획을 세울 수 있는지’에 대해 고심했고 여러 가지 생각들을 떠올려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 해 동안 어떤 일들을 시작했고, 또 어떤 식으로 마무리 지었습니까? 우리의 지난 삶들을 가만히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마무리 지은 것이 많습니까? 아니면 그렇지 못한 것들이 더 많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좋은 마무리’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마무리는 화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요란스러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시작한 일에 대하여 100%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버리십시오. 물론 계획했던 바대로 온전히 다 이룰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설령 그것의 절반을 얻는다 해도 ‘나름대로의 마무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습니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전7:8)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즉 ‘시작형’과 ‘마무리형’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유형에 속해 있는 것 같습니까? 시작은 잘 하는 데 좀처럼 뒷수습을 잘 못하는 형입니까? 아니면 시작은 조금 엉성해도 뒤처리를 아주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형입니까? 물론 이도저도 아닌 것보다는 시작이라도 잘 하는 사람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작심삼일, 용두사미라는 말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작도 잘 할뿐더러 마무리는 더 잘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그리고 우리는 비록 시작은 좋지 못했지만 훌륭하게 자신의 사명과 생을 마무리한 사람, 즉 마가 요한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행15:37,38)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하)
또 우리는 오네시모라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 역시 처음은 좋지 못한 모습으로 시작했으나 로마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 그 주인 빌레몬과 바울을 기쁘게 하는 사람도 변화되었습니다. “갇힌 자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간구하노라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몬10,11절)
반면, 시작은 좋았으나 끝이 좋지 못했던 사람들도 많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러했고,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그러했습니다. 나병에 걸려 비운의 생을 마친 유다 왕 웃시야, 12제자 중 한사람으로 시작했으나 결국 은 30에 스승을 배반한 가룟 유다가 또 그러했습니다.
이른 바 ‘시작형’과 ‘끝까지형’의 사람들이 각각 존재해왔던 것입니다. 전자의 유형은 아마도 ‘계속해서 시작해가다보면 그 중의 하나라도 맞아떨어지겠지!’라고 생각하며 마무리 과정을 생략한 채 갖가지 계획들을 무분별하게 남발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계획 남발형).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데후3:11)
*끝까지 잘 마무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좋은 마무리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노력들이 필요로 합니다.
첫째, 항상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딤전9:25,27)
사도 바울은 당시 고대 올림픽 권투 경기를 예로 들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어찌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실제로 당시 고린도 시는 2년마다 이스미안 운동경기를 개최했습니다).
운동선수는 경기를 위해서 항상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만 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경기장에서의 싸움보다 훨씬 더 처절하게 자신과의 싸움을 매일 싸웁니다. 잠도 줄여야 하고, 음식도 절제해야 하고, 체중도 관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여러 차례의 예선을 거쳐 올라왔다손 치더라도 언제든지 심판에 의해 ‘퇴장명령’이나 ‘실격패 선언’을 받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결승까지 끝까지 가기 위해서는 무던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시작한 일을 중도에 포기해버리고 싶은 마음으로부터, 적당히 타협하고 뒤로 물러서려는 마음, 다른 이 보다 좋은 스타트를 했다고 해서 자만하기 쉬운 유혹, 그날의 일을 뒤로 미루고자 하는 게으름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 말입니다.
둘째, 시작한 일은 반드시 마무리 짓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어떠한 일이든지 시작한 적이 있고 때가 되었다면, 이제는 서서히 마무리 지으십시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을 혼자만의 힘으로 끝냈을 때, 거기서부터 밀려오는 그 성취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며, 그것은 또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고취시켜 줍니다.
이런 성취감이 어렸을 때부터 차곡차곡 쌓여 온 사람은 항상 매사에 적극적이며 진취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취감을 별로 경험하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매사에 소극적이며 수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방법도 이와 맥을 같이 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지어다 하고.”(마25:21,23)
만일 우리가 지키지도 못할 계획들을 마치 ‘부도수표’처럼 남발해왔고, 그것들을 예초부터 지킬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형식적으로 계획들을 세워왔다면, 그것들은 우리의 성취감과 자심감 등을 보이지 않게 좀먹게 될 것입니다. 이는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도차 불신하게 만드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고야 말 것입니다. ‘내가 그런 일이 어떻게 하겠어? 예전에도 실패했잖아, 난 죽었다가 깨어나도 그와 같은 일들은 못해.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실패하고야 말거야.’
셋째, 때론 엉성한 마무리도 필요합니다.
시작할 때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결과에 직면한다 해도, 기대 이하의 성과를 얻는다 해도 ‘마무리’는 필요합니다. 엉성한 마무리라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도중에 포기하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
항상, 매번 완벽하게 마무리 지을 수는 없습니다. 많은 변수가 있고 우리 역시 연약한 점 투성이기 때문입니다. 질병, 컨디션 저하, 크고 작은 일들, 아르바이트, 직장, 여행 등
물론 우리는 계획을 세울 때부터 이와 같은 점들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뜻밖의 변수들로 인해 기대만큼의 성과를 못 얻게 된다 할지라도, 일단 시작한 것은 언젠가 끝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 한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꿩 대신 닭이라도 잡아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어떤 일들은 그 기간을 연장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는 구체적인 내용이나 항목, 분량을 현실에 맞게 조절해야 하며,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의 경우 과감하게 포기해야 합니다(도무지 마무리가 불가능한 경우).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시작뿐만 아니라 좋은 마무리도 함께 챙겨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5. 내일로 가는 길(전 7:10)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사람들이 자꾸만 과거에 집착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일로 가는 길을 제대로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미래로 나아가는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일’이 없는 사람의 눈엔 자꾸 '어제'만 들어옵니다. 내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즐비합니다. ‘내일로 들어가는 문’을 찾지 못한 사람은 자꾸만 '과거의 문' 앞에서 서성거리곤 합니다. 지난날의 그림자에서 좀처럼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꾸 과거가 현재보다 더 낫게 여겨지기 때문 아닐까요?
* 옛날이 오늘보다 낫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전7:10)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은 “옛날이 오늘보다 나음은 어찜이냐”고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이는 결코 지혜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는 종종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때가 좋았는데... 적어도 그때에는 이렇지가 않았는데...’ 지금보다 과거가 훨씬 낫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출16:2~3)
물론 누구에게나 화려했던 과거나 전성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일 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에만 더 이상 머무르고자 할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고 말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과거 운운해가면서 ‘오늘 우리게 주어진 일들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오직 한 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세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빌3:12~15)
여기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고백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처럼 화려했던 과거를 지닌 사람도 쉽게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 속 어느 부분에서 “옛날이 지금보다 나음은 어찜이냐?” “그 때가 좋았는데... 적어도 그때에는 이렇지가 않았는데...”라고 말했을까요? 그는 이미 얻었다, 온전히 이루었다 말하며 과거에 머무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태껏 한 일 즉 지난날들은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자 간절히 희망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 내일로 가는 길을 찾아 나섭시다.
내일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고 여기저기서 아우성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그 수를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로 말입니다. 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고 탄식하며 절망하는 소리들로 온 거리마다 집집마다 가득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어제'로부터 우리의 눈을 돌려야 합니다. 더 이상 과거 속에서 헤매느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에 붙들려 있느라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던 우리의 날개를 활짝 펼쳐야 합니다. 혹 내일로 가는 다소 험난하고 고생스럽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현재'라는 광장을 가로질러 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내일'로 가는 문'을 곧 찾을 수 있게 될 테니까요.
6.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라(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라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라(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되돌아보라’... 도대체 무엇을 되돌아보라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헤아려 보라는 의미입니다. 대체로 사람은 형통할 때에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형통한 날보다 곤고한 날들에 더욱 깊은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어느 때에 더욱 진지해집니까?
왜 사람들은 형통할 때, 기쁜 순간에 되돌아보지 않을까요? '생각'을 잘 하지 않는 것일까요? 기쁨에 취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게 느껴지거나 아예 '생각' 자체가 필요 없다고 판단되어서는 아닐까요? 주님은 이런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십니다.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아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손수 지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에게는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생각하고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은 그런 기회들을 주시는 거구요. 곤고한 날들을 주심으로써 말입니다.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생각할 시간이 왔구나.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렴.”
주님은 생각 없이 허겁지접 달려온 우리를 잠시 잠깐 멈춰 세우십니다. 한참 잘나가던 우리네 인생의 속도를 뚝 떨어뜨리면서 말입니다. 때론 우회로로 빙 돌아가게 하십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해 생각할 여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간 우리가 걸어온 길들에 대해 잠시 되돌아볼 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혹시 지금 곤고함에 처해 있습니까? 혹 지금 생각하지 못한 곤경에 빠져 있거나 마음이 심란해져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주저하지 말고 되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생각모드로 천천히 전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어디에 있는지 곰곰이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되돌아보기 수업 시작종이 올렸습니다. 학생 여러분들은 하던 일들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 그간 벌여놓은 일들에 대해 생각하길 바랍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의 기대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에만, 뜻밖의 사건에 직면하게 될 때,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에만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십중팔구 형통할 때에는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내일의 일을 능히 헤아리지 못할 때, 앞으로의 진로를 전혀 가늠할 수가 없을 때 그제서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 고통은 열정을 위한 연료입니다.
고통은 생각 밖의 결과를 늘 가져다줍니다. 우리가 보통 때 갖고 있지 않은 변화에 대한 열망을 일으키는 에너지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무기력함에 빠져 있을 때 우리에게 고통만큼 좋은 처방전을 또 없을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를 영적인 무기력함에서 일으키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인지도 모릅니다. 단순히 우리가 부딪히는 문제들은 우리의 잘못에 대한 징벌의 차원을 넘어설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상당수의 고통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주는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가 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주 깊이 생각하시는 증거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과의 교제 가운데로 우리를 다시 이끄시기 위해 무엇이든 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늘 찾아오기 쉬운 불청객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영적인 무기력감입니다. 이것은 형통한 날이 연이어질 때 더 쉽게 찾아들 수 있습니다. 열망도 열정도 다 빠져버린 아주 무감각한 상태로 우리를 몰고 갑니다. 주님과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우리를 습관적인 신앙인으로 후퇴하게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다시 열정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 종종 곤고한 날들을 허락하십니다. 어떤 점에서 우리가 다시 회복되어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생각할 기회들을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
* 생각하십시오.
“왜 나입니까?” 라고 묻지만 말고, “내가 무엇을 더 배우길 원하십니까?”라고 묻기 시작하십시오. “왜 나야만 합니까?”라고 묻지만 말고, “내가 무엇을 고쳐야, 회복해야 합니까?”라고 물으십시오. 모든 문제 뒤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들이 숨어 있습니다. 아니 우리의 발견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가끔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일부러 모습을 숨기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곤고한 날에는 그동안 잠시 잊고 있었던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생각하십시오.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생각하십시오. 곧잘 주님을 까먹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종종 고난을 사용하시곤 합니다. 사실 우리가 경험한 가장 깊고 친밀한 예배는 아마도 가장 힘든 순간에 드렸던 예배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세상이 홀로 버려진 것처럼 느껴졌을 때,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고, 심한 고통으로 신음조차 할 수가 없을 때였을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우리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배울 수가 없는 값진 것들을 배워갑니다.
누군가 그랬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말입니다. 형통한 날보다 곤고한 날에 더욱 주님의 음성을 더욱 뚜렷하게 들을 수가 있습니다. 곤고한 날..... 미리 낙담하지 말고, 미리 단정 짖지 말고 곰곰이 우리 주님만을 바라보십시다. 힘이 들더라도 그렇게 해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