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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가해 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청주] 협력이 필요하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묵시 3,1-6.14-22
† 복음 루카 19,1-10
★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사르디스 교회와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신자들에게 전하는 주님의 말씀이다. 그들이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라고 꾸짖으시며 깨어 있기를 촉구하시는 말씀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오셨을 때 키 작은 자캐오는 나무에 올라가
그분을 보려 애쓴다. 그와 눈이 마주친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을
방문하신다. 세관장으로서 부자였던 자캐오는 자신의 삶을 바꾸겠다고
다짐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최근 들어 많이 알려지고 있는 체코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할리크
신부는 불확실성과 혼돈의 시대에 진정한 교회의 길을 여는 길잡이로 오늘
복음의 ‘자캐오 이야기’를 제시합니다. 그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
그리스도인이 자캐오를 멸시하며 바라보는 군중과 같은 관점에서
오늘날의 ‘자캐오’, 곧 세상과 교회 밖의 사람들을 대한다는 점에 대한
철저한 성찰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 곧 우리 그리스도인이
피상적이고 오만하게 자캐오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벗어나, ‘자캐오의
시각’에서 세상과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한 ‘예수님의 태도’로 자캐오를
만나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자캐오의 시각’이란 사람들에게 밀려나 예수님을 멀찍이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시선이며, 돌무화과나무 위에 몸을 숨긴 채로 예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시선입니다. 자캐오가 큰 부와 세력을 지녔지만 내적으로 황폐하며
공동체에 제대로 속하지 못한 이였듯이, 오늘의 자캐오들인 현대인들도
복잡한 사회 안에서 고립감과 내면의 부자유로 고민하고 번민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움츠리고 있던 ‘키 작은’ 자캐오를 사람들 앞에 나서게 한
것은 그를 부르신 예수님의 태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만한 모습으로
미리 준비된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눈을 맞추시며 그가 용기를
내도록 이름을 불러 주시고 그의 집에서 묵으신 예수님의 태도가, 언제나
문밖을 맴돌던 자캐오를 마침내 진리의 문 안으로 이끌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길이라는 할리크 신부의 묵상을 읽으며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추기경 시절에 하신 유명한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매우
지혜로운 신부님 한 분이 제게 말씀하시길, 지금 우리는 울타리 안의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의 비유와
정반대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하셨습니다. 현재 울타리 안에는 단 한 마리
양이 있을 뿐 아흔아홉 마리 양이 길을 잃었는데 찾아 나서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이 말씀은 그저 누군가를 신자로 만들거나 일방적인 시혜를 베풀듯이
인생의 해답을 먼저 던져 주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자캐오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자세, 곧 오늘의
자캐오들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내며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는 자세, 그들과
손을 맞잡고 진실한 만남으로 나아가는 모습이야말로 우리 교회의
길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의 뜻을 항상 마음에 새기면서
2014년 가해 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루카 19,1-10
언젠가 어떤 교육 프로그램에 참석을 했다가 풍선을 부는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별로 풍선을 불어서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었지요. 아무튼 저희 조는 풍선이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선 풍선을 크게 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그맣고 납작했던
풍선에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기 시작하자 커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커졌습니다. 곧 터질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풍선을 불고 계신
분은 그 풍선의 크기가 부족했는지 계속해서 바람을 불어 넣습니다.
주변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만 부세요. 터지겠어요.”
하지만 풍선을 불던 분은 “풍선이 터지면 모두 깜짝 놀라겠지만, 그래봤자
터진 풍선일 뿐입니다. 해롭지 않아요.” 하면서 계속해서 바람을 넣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의 예상대로 풍선은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지만 다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분의 말씀 “풍선이 터지면 모두 깜짝 놀라겠지만, 그래봤자 터진 풍선일
뿐입니다. 해롭지 않아요.”라는 말씀이 인상 깊었습니다. 실제로
그랬거든요. 풍선이 터졌다고 해서 집이 망하는 것도 아니고, 건물이
부서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아주 잠시 깜짝 놀라게 할 뿐 별 것 아닌
아주 사소한 일일 뿐입니다. 그런데 터지기 직전에는 세상에 멸망할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또한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큰 소리를 치지요.
터져봐야 터진 풍선일 뿐인데 말입니다.
복잡하고 힘든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
어렵고 힘든 상황도 거뜬하게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요? 문제는 이 어렵고
힘든 상황에 대해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쉽게 포기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도 얻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한 남자에게 커다란 칭찬을 하십니다. 바로
자캐오이지요. 그가 칭찬을 받았던 이유는 도저히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포기하지 않는 노력 때문이었습니다. 세관장이고
부자였던 자캐오였습니다. 물론 세리라는 직업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창녀와 더불어 완전한 타락한 죄인의 본보기로 뽑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했었지요. 그러나 그는 세관장으로
부자였습니다. 부자이고,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로마와 가장 가까운
세관장이라면 그 누구도 소홀히 할 수 있는 위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자신의 체면을 내려놓고
돌무화과나무 위로 오릅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 하나 때문에 체면도 또한 사람들의 시선도
두려워하지 않고 나무 위로 올랐던 것이지요. 그 결과 구원을 얻습니다.
내 앞을 가로 막는 많은 환경들이 있습니다. 그 환경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셨습니까? 주님 앞에서는 모든 장애물들이 별 것 아님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뜻을 항상 마음에 새기면서 힘차게 해쳐 나가셨으면 합니다.
분명히 주님으로부터 커다란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속도를 줄이고 인생을 즐겨라. 너무 빨리 가다 보면 놓치는 것은 주위
경관뿐이 아니다. 어디로, 왜 가는지도 모르게 된다(에디 캔터).
아름다운 용서(인터넷에서 퍼온 글)
하루는 아내가 이웃집에 놀러가게 되었습니다. 집안으로 들어간 아내는
우연히 안방 화장대에 놓인 커다란 진주 반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
순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아내는 그만 반지에 손을 대고 말았습니다.
반지가 사라진 것을 안 아주머니는 이웃집 여자가 가져간 것으로 알고
결국 경찰까지 불렀는데요.
마침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은 그 상황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 아내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아내를 믿습니다. 그러니
모두 돌아가 주십시오.”
경찰은 물론 이웃집 아주머니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안정을 취하도록 침대에 눕혔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잠이 들자 전날 밤
화장대 서랍에서 보았던 그 반지를 꺼내들고 조용히 이웃집을 찾았습니다.
남편은 아주머니에게 반지를 건네며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아내가 한 순간의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습니다.
아내와 저는 한 마음이고 한 몸입니다. 그러니 아내의 잘못은 제
잘못이기도 합니다. 차라리 저를 벌해 주십시오.”
남편의 질실한 사랑에 깊이 감동한 아주머니는 말없이 남편을
돌려보냈습니다. 한편 멀리서 남편의 행동을 모두 지켜본 아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남편의 강한 믿음과 사랑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아내는 다음날 동이
트자마자 아주머니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깊이 사죄했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아내의 손을 지긋이 잡으며 “나는 새댁이 부럽네요.”
남편의 진실한 큰사랑이 아주머니에게는 잘못을 용서하고 포용하는
마음을, 아내에게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자세를 선물했던 것입니다.
용서란 참 힘든 것 같으면서도 이렇듯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것, 한 번
용서하면 여러 사람이 편해지는 상황을 만드는 좋은 기제인 것 같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긴 것에 대한 용서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청주] 협력이 필요하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연중 33주간 화요일(루카19,1-10)
2014년 가해 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루카 19,1-10
협력이 필요하다.
사람은 각기 자기 위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그에 맞는 처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접은 크게 받기를
원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잘 대해주기를 바라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줄 수 있는 풍요로움이 있을 법 한데 그 반대입니다.
이스라엘의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어떤 생물도 살지 못하고 주위에는 나무도 새소리도
없습니다. 사해는 물이 흘러 나가는 강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인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썩어버렸습니다. 반면에 갈릴래아 호수는
요르단 강에서 물을 받아들인 만큼 사해로 흘려보내기 때문에 언제나
생명이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을 모르면 결국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세관장이라는 위신과 체면을
포기하고 나무에 올랐습니다. 주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 때문입니다.
갈망이 큰 만큼 키가 작다는 장애를 극복해야만 했고, 따라서 나무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달려가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의 정성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5). 하시며 그를 기억해 주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캐오가 세리였기 때문에 그를 죄인 취급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을 찾아주시고 품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처신을 보고 못마땅해 하였지만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9-10).
만약 자캐오가 부자라는 것에 대한 자만이 있었더라면, 세관장이라는
위치를 고집했더라면 그 위신과 체면 때문에 나무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돈에 눈멀었던 그였지만 가난한 이를 위해
재산의 반을 내놓을 마음이 생겼고, 혹시라도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라도 갚아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치룰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자캐오는 채우고 또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을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극복하였습니다. 작은 키에 세리라는 공적인
죄인으로 시쳇말로 왕따의 삶을 살아야 하는 열등감은 부자라는
이름으로도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모든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아무리 풍요하더라도 인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가 나무에 오르지 않더라도 자캐오를
부르실 수 있으시지만 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10).고 하신대로 모든 이를 구원에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모두가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선물이지만 주님 때문에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이에게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은 협력과 맡김으로써 가능합니다.
자캐오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나무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주님과의 깊은 입맞춤으로 삶의 쇄신을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1티모1,15).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예수님과 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뉴튼수도원 8일째),
요한묵3,1-6.14-22 루카19,1-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루카 19,1-10
예수님과 나
어제와 오늘의 복음이 은혜롭고 흥미로우며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제의 주인공인 눈먼 걸인과 오늘의 주인공은 자캐오는
둘다 우리 가난하고 불쌍한 인간 존재를 상징합니다.
모두가 나름대로 열등감과 내적 상처를 지닌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어제 여기서 묵묵히 살아가는 수사님들을 보는 순간,
소유의 유무를 떠나 존재자체가 가난임을,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일 때
수도자답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도대체 보이는 희망 하나 없는
사막 같은 수도원에서, 잘살고 못살고를 떠나 하느님 때문에 그냥 살고
있다는 자체가 고맙고 또 기적처럼 느껴졌습니다.
때로 형제들이 힘들고 부족하여 보여도 '연민(compassion)'의 대상이 될
지언정 결코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절감했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찾는 사람이자 참 내 얼굴을 찾는 사람입니다.
어제 눈먼 걸인은 주님을 열망했고, 오늘 작은 키의 자캐오는 주님을 보고
싶은 열망에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바로 주님의 얼굴은 참 내 얼굴이기에
주님을 봄으로 참 내 얼굴을 찾기위한 본능적 행동임을 깨닫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주님은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참 내 얼굴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함은 바로 내 얼굴을 보고 싶은 까닭입니다.
주님을 봄으로 참 나를 보라 있는 우리의 눈입니다.
눈이 있어도 주님을, 참 나를 보지 못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어제 복음의 눈먼 걸인 대신, 또 오늘의 자캐오 대신 내 이름을 넣어
묵상해보십시오. 이보다 더 좋은 렉시오 디비나 묵상도 없습니다.
내 상처와 열등감을 통해 내 가난하고 불쌍한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 없는 눈먼 걸인을, 예수님 없는 자캐오를 상상할 수 없듯이,
예수님 없는 나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나는 둘이자 하나임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영원히 반쪽
얼굴이자 인생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함은 바로
내 반쪽인 주님을 찾는 갈망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영원히 결핍된 반쪽 존재인 인간일 뿐입니다.
하여 주님의 얼굴을 찾아, 내 얼굴을 찾아 미사에 참석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을 만나 하나될 때 온전한 나의 실현입니다.
성인들은 모두 주님과의 일치로 제 얼굴을 찾은 분들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자기를 찾은 눈먼 걸인이듯 오늘 자캐오도 주님을
만남으로 잃었던 자기를 찾았으니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런 구원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제집에 기쁘게 맞아들임으로 온전히 주님과 하나된
자캐오입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이어 자캐오의 자발적 회개의 응답이 뒤따릅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주님을 만나 구원의 기쁨으로 가득 채워짐으로 모든 내적 상처는 치유되고
이제 소유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참 부자 자캐오입니다.
주님은 이런 자캐오에게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구원하러 왔다.“
우리 잃은 이들을 모두 구원하러 오신 주님은 우리 문 밖에서 두드리며
우리의 환대를 촉구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자캐오처럼 우리 모두 마음 문을 열어 주님을
환대함으로 잃었던 나를 찾는 구원의 시간입니다.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시편16,11).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서울]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2014년 가해 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루카 19,1-10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핸드폰 문자 메시지에 이런 글이 있더군요. “여름은
싫은데 비가 와서 좋고, 겨울은 싫은데 눈이 와서 좋고, 세상은 싫은데
네가 있어 좋아! 사랑해.”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은 작은
행복입니다.
지난 2월 교황방한 준비위원회가 발족하였습니다. 저는 영성신심분과를
맡아서 일을 하였습니다. 저와 분과 위원들은 교황방한 전에 자료집을
발간하였고, 교황방한 이후 실천사항들을 모색하였고, 지난 10월 25일
심포지엄으로 활동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결산을
하였습니다. 해야 할 일들을 기획하고, 예산을 신청하고, 결산을
함으로써 모든 일을 마쳤습니다. 시작할 때는 부담도 되고, 무엇을 할지
막막했지만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오늘 제1독서인 묵시록을 묵상하면서 ‘하느님께서는 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내가 문을 열면
하느님께서는 제게로 다오 오시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문 앞에
계시지만, 제가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과 친지들의 도움으로 일찍 문을 엽니다. 어떤 사람은 깊은 상처
때문에 열었던 문을 닫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것들에 빠져서
문을 굳게 닫기도 합니다. 남을 깎아 내리면 자신이 올라간 다고 생각하는
사람, 어떤 일을 자신이 이룰 수 없으니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바꾸거나 고칠 수 없는 일로 걱정하는 사람, 세상을 떠밀려서 살아가는
사람, 독서와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틀리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오늘 묵시록은 그런 사람들이 있는 교회를
걱정합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는 교회는 분열과 갈등이 생기고,
그 안에서 사랑과 평화가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병아리가 달걀 안에서
껍질을 쪼아야만 세상을 볼 수 있듯이, 우리는 나를 감싸고 있는 허위,
교만, 욕심의 껍질을 쪼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캐오는 문을 여는
사람의 태도와 행동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무위로 올라갔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문을 열기 위해서는
기도의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권력, 명예, 재물의 구름에
가려졌던 것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가치와 삶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캐오는 이제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결산을 해보니,
영성신심분과가 어떤 일을 했는지 보였습니다. 매달 가계부를 정리하면
나의 관심과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올 한해 나는
나의 마음에 주로 무엇을 초대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약속을 합니다.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겠다고 하였습니다. 빚진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변화된 마음을 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캐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과
이 가족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서 힘들기도 합니다. 가족이 아파서 힘들기고 합니다.
근심과 걱정이 어깨를 짓누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평화와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평화와 기쁨은 나눌수록 더 커지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전 왜 뜨거운 걸까요?"
2014년 가해 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
복음: 루카 19,1-10
< 전 왜 뜨거운 걸까요?>
‘행복한 왕자’란 동화에서 제비는 금으로 된 동상인 행복한 왕자의 청을
들어주다가 얼어 죽습니다. 제비는 날씨가 추워지면 동료들과 함께 따듯한
곳으로 몸을 옮겨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행복한 왕자 동상은 눈물을
흘리며 제비에게 애원합니다.
“저 가난한 작가에게 내 사파이어 눈을 빼서 갖다 주렴.”
“저 가난한 아이의 병을 위해 내 칼의 루비를 빼서 갖다 주렴.”
“저 성냥팔이 소녀에게 내 몸의 금딱지들을 떼어서 가져다주렴.”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는데도 제비는 추운 줄 모릅니다. 행복한 왕자는
제비를 잠시도 쉬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제비는 그 추운 겨울에도 추운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왕자에게 이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왕자님, 이상해요. 날씨가 추운데도 제 몸은 왜 뜨거운 걸까요?”
물론 그렇게 제비는 할 일을 다 하고 왕자의 발밑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맙니다.
이런 예화도 있습니다. 두 친구가 겨울 산행을 하는데 길을 잃습니다. 얼어
죽게 생겼는데 이미 쓰러져 죽어가는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한 친구는
자신이라도 살아야겠다고 먼저 가고 다른 친구는 그 죽어가는 사람을 업고
산을 넘습니다. 다행히 마을이 코앞인데 자신보다 먼저 갔던 친구가
쓰러져 얼어 죽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은 열이 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을 업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를
뜨겁게 하는 원동력은 내 자신을 바쳐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성령께서는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라오디케아 교회를
꾸짖으십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라오디케아에 가 보면 멀리 눈 덮인 산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쪽엔
온천이 있습니다. 즉, 위치상으로도 라오디케아는 뜨거운 곳과 찬 곳의
중간에 위치한 미지근한 동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신앙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신앙이 미적지근해 진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라오디케아는 상업으로 돈이 많은 도시였습니다. 신앙을 가져도 이 세상
것에 집착하고 또한 풍족한 가운데 절박한 것이 없다면 뜨거워질 수
없습니다. 즉, 부모님이 이혼을 하려고 한다거나, 아이가 매우 아프거나,
혹은 부도가 나서 길거리에 나 앉게 되었을 때는 하느님께 간절하고
뜨겁게 기도합니다. 그 뜨거움은 누구도 쫓아올 수 없습니다. 간절함이
뜨거움을 만들고 풍족함이 식게 만듭니다. 우리나라 교회가 가장 뜨거웠을
때는 지금이 아니라 가난과 고난이 바로 옆에 있던 박해시대 때였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것이 없어질 때는 신앙도 함께 식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온 부자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성령의 뜨거움이 스며들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됩니다.
부자청년은 뜨거워지기를 거부합니다. 십자가를 지기를 거부합니다. 그
십자가가 나를 땀나게 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제가 영과 육은, 그리고 영과 세상은 반대라고 하며 그리스도인은
이웃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 가난해 져야 한다고 말하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반박하십니다.
“신앙생활 하려면 돈도 있어야 해요. 교무금도 내야하고, 건축헌금도 해야
하니까요.”
과연 그럴까요? 프란치스코 성인은 부자여서 신앙생활을 잘 했던
것일까요?
전에 오래된 그릇으로 라면을 끓이려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냄비가
뜨거워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바닥이 여러 겹이었는데
떨어져서 너덜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성령의 불이 우리를
뜨겁게 태우기를 원하신다고 하더라도 우리 중간에 약간의 공기가 들어가
있다면 우리 전체는 뜨겁게 달구어지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뜻을 온전히 따름으로써 뜨거운 신앙을 살 수 있는데 이 세상의 욕심들이
그 뜻을 따르지 못하게 잡고 있으면서 우리를 미지근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라디오케아 교회에 하신 말씀은 바로 현대의 우리들에게도
해당하는 말 같습니다. 우리 신앙이, 물론 풍족하기 그지없는 저부터라도,
이 세상의 이물질이 끼지 않아 뜨겁게 타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요셉 신부님의 새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2014~2015년 나해 주일 대축일 복음 묵상집입니다.
구입은 하상출판사(031-243-1880)로 문의하시면 됩니다
^-^
'여인아, 왜 우느냐?'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저는 아직 속물
2014년 가해 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루카 19,1-10
저는 아직 속물
까만 외제 승용차가 제 앞에 서면서 생면부지의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면,
‘신부님, 오늘 제가 신부님의 사무실과 숙소를 방문해 쉬어가겠습니다.’
저는 그 분이 누굴까 의아해 하며 눈만 동그랗게 뜨고 답을 못할 겁니다.
요즘 세상 사기꾼이 많은데 하면서도 도움주려는 게 아닐까 생각할걸요?
그러나 거지 모습을 한(예수님)이 제게 와 쉬어가겠다 하신다면 다를까요?
거지에게 호떡 한 개도 대접한 적 없었으니 저는 아직 속물!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어느날 문득 찬란한 봄날이
2014년 가해 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루카 19,1-10
어느 날 문득 찬란한 봄날이
어린 시절부터 제 키는 작아도 너무 작았습니다. 눈에 띄게 작고 왜소한
저는 또래 친구들의 단골 놀림감이었습니다. 이런 저를 낳으신 부모님을
두고두고 원망했습니다. 어디 가나 밥 먹듯이 놀림과 괄시를 한 몸에
받다보니 삶은 점점 삐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어둠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다 생각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러다 나이 들고 철들고 나서 조금
정신을 차려보니 저는 어느새 뒷골목의 ‘두목’이 되어 있었습니다.
‘작음’이란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기를 쓰고 발버둥친 결과가 어둠의
세상 가장 끝에 서 있더군요. 반역자, 매국노, 고리대금업자의 대명사
세관장!
하는 일은 뻔했습니다. 로마에 정기적으로 할당액을 상납하려다보니 말단
세리들에게 눈을 부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갖은 협박과 권모술수를
통한 착취의 전문가가 되어 이 바닥에 이름난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물론 돈을 갈퀴로 낙엽 끌어 모으듯이 모았습니다. 현찰보유액이나 부동산
소유 면적으로 따지면 유다 고관대작 못지않았습니다. 물질적으로 아무런
아쉬움 없이 떵떵거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겐 친구가 한명도 없었습니다. 물론 다들 제 앞에서는
굽신굽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그러나 뒤돌아서서는 저런 천하의 난봉꾼,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 제일 먼저 지옥 불에 떨어질 놈...하며
수군거렸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상흔처럼 온 몸과 마음에 새겨진 제 깊은 콤플렉스, 엄청난
부자가 되면 해결되겠지 생각했습니다. 이 참혹한 열등감, 깊이를 알 수
없는 욕구불만, 억만장자가 되면 충족되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돈은
물론이고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가 않았습니다.
참으로 혹독하고 비루한 삶,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대체 뭔가...하며 깊은
좌절에 빠져있던 제 눈앞에 정말이지 꿈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분’께서 제게 다가오셨습니다. 꿈에도 기대하지 않던 뜻밖의 선물이 제
손에 쥐어졌습니다. 어느 날 문득 그분으로 인해 찬란한 봄날이 제 인생에
시작된 것입니다.
그 동안 이 세상 그 누구도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주로 저는
도둑놈, 매국노, 난장이. ‘저 인간’으로 불렸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황홀하게도 제 이름을 부르시며 다가오셨습니다.
“자캐오야!”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천하의 몹쓸 대 죄인을 당신 가까이
부르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죄인의 집에 머무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 친구가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카 복음 19장 5절)
황공스럽게도 그분께서 저를 찾아온 오늘부터 제 인생에 스산한 겨울은
지나갔습니다. 이제부터 제 삶은 언제나 꽃피는 봄날입니다.
“저를 찾아와주신 주님, 이제부터 저는 새 삶을 살렵니다.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이런 저를 향해 주님께서 더 큰 선물을 덤으로 건네주시는군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복음 19장 9~10절)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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