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는 스물일곱 살에 미술을 시작해서 서른일곱 살에 자살하기까지 불과 10년 동안
850여 점의 창조적인 미술 작품을 그린 천재 화가였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불행했고 정신이상으로 귀를 자르더니 2년 후에는
가슴에 권총을 쏘고 자살했다.
고흐도 우리의 휴처럼 '마음속의 아이' 가 있었다.
그 아이는 엄격한 칼빈주의 목사인 아버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고흐는 자학적이었다. 죄책감을 많이 느꼈고 그것을 씻기 위해서
동정심을 발휘하는 일이 많았다.
그는 누예덴의 광산에서 전도사 생활을 할 때는 불쌍한 광부들을 위해
자기 빵과 매트리스까지 주고, 자신은 2년 동안 거의 거지처럼 살았다.
헤이그에서 공부할 때는 늙은 창녀와 그녀의 딸을 먹여 살려 주기도 했다.
그는 가난한 농부들을 그렸고 그들의 거친 손을 예찬했다.
엄격한 마음의 대상을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동정심이 많다.
아버지에게 눌리고 고통 받는 불쌍한 자신의 모습을 그들에게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면서 무의식적으로는 자신이 위로 받는다.
또한 약한 자들을 돕는 선한 행동을 한 것이므로 죗값을 치르는 속죄 행위가 되기도 한다.
고흐가 그림을 시작한 지 5년쯤 되었을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 사건 이후 그의 그림은 극적으로 발전했다. 대작을 그렸고 색채도 화려해졌다.
그것은 그를 짓누르던 아버지라는 존재가 사라진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면에 자리 잡은 아버지는 계속 그를 괴롭혔다.
고흐는 대인관계가 아주 나빴다. 그래서 지독한 고독 속에 살아야 했다.
폭발적으로 화를 내고 상대를 비난했기 때문이다.
귀를 자르던 날 밤도 동거하던 고갱과 싸운 끝에 귀를 잘라
고갱의 단골 창녀에게 갖다 주었다. ' 마음속의 아이'의 행동이었다.
위선적 행동을 참지 못하는 고흐의 성격 때문이었다.
직선적인 표현이 문제였다.
마음속에 살아 있는 아버지는 "거짓은 죄악이다.정직해야 한다"고
호령하고 있었다.거짓을 고발하고 비난한는 사이에 친구들은 모두 그를 떠나 버렸다.
고흐에게는 고마운 남동생이 있었다.
그보다 네 살 어린 그림 매매업자인 태오가 고흐의 그림을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평생 동안 고흐에게 생활비를 보내 주었다.
고흐의 동생은 마치 인자한 아버지 같았다.
그런 동생이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수입도 시원치 않게 되었다.
고흐는 자기가 동생에게 짐이 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그는 자살했다.
'마음속의 고흐'는 인자한 아버지를 계수씨와 조카에게 내어 주어야 했고
동생의 짐이 되는 죄책감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스스로를 죽임으로 죗값을 치른 것 같다.
고흐의 경우 내적 갈등은 분명 창조성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우울증 발작 후에 고흐는 정신병원에서 굉장히 많은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현상을 나는 고흐의 생애에 대한 내 논문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 도덕적 아버지(가혹한 초자아)의 압력에 지친 '마음속의 어린 고흐'는
아버지를 미워하고 두려워했다.
그런 내적 긴장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을 때 우울 발작이 왔을 것이다"
자학적이고 피해 망상적인 환청과 망상은 내면에서 들리는 내적 아버지의
비난의 소리를 투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발작 기간 동안 고통스럽지만 그는 이 대상에게 자기 분노와 공격성을 쏟아 버리고
발산했던 것 같다. 억눌린 분노와 공격성이 발산되고 나면 어느 정도 갈등과
긴장이 풀리고 정신은 평온을 되찾는다.
그리고 내적 갈등과의 싸움에 소모되고 있던 정신 에너지가 해방되고
다시 풍성해지면서 자아는 창조적이 된다.
벌떼처럼 창조적인 영감이 몰려왔다는 고흐의 글이 이것을 입증해 준다.
* Vincent 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