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81주년을 맞아 극동 러시아(소련)에서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선 두 한인을 조명하는 소식이 잇달아 들려왔다. 1910년대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 대부로 알려진 최재형 선생과 우리말 교육과 한글 문학을 통해 한인 사회(고려인 공동체)의 민족 정체성을 지킨 포석 조명희 선생이다.
15일 서울 용산구 최재형 선생 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제막된 흉상/사진출처:최재형 기념사업회
포석 조명희 선생/사진출처:국가 보훈처
15일 서울 용산구 최재형 선생 기념사업회 사무국에서는 최재형 선생(1860-1920)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생존 당시, 연해주 한인(고려인)들로부터 따뜻한 난로를 뜻하는 러시아어 '페치카'(Печка)로 불린 최 선생은 사업으로 일군 큰 재산을 모두 조국 독립과 한인 사회를 위해 내놓았던 독립운동가다. 그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물심양면으로 도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최재형 선생 기념사업회는 각계 모금 활동을 통해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날 제막한 흉상이 언제쯤 기념관에 제자리를 찾을지 궁금하다.
최 선생은 1920년 일본군이 연해주에서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한 '4월 참변' 때 피신하지 않고 자택을 지키다 체포돼 순국했다. 일본군은 처형 뒤 무덤까지 없애버려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유해는 찾지 못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2023년에는 순국 103년 만에 러시아 우수리스크 최재형 기념관 뒤편의 흙을 국내로 봉환해 부인 최 엘레나 여사와 함께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국내에서 그의 이름은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20년 연해주에서 순국한 탓으로 추정된다.
충북 진천군에 있는 포석 조명희 기념관/사진출처:진천군
포석 조명희 선생은 재외동포청에 의해 8월 '이달의 재외동포'에 선정됐다. 조 선생은 일제의 수탈과 식민지 민중의 삶을 문학으로 기록하고, 러시아 연해주로 옮겨간 뒤에는 우리말 교육과 한글 문학을 통해 고려인 공동체의 민족 정체성을 지키는데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3개월간 옥고를 치른 조 선생은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 모임인 동우회에서 극작가 김우진, 소프라노 윤심덕, 작곡가 홍난파 등과 교류하면서 1920년 극예술협회를 조직했다.
귀국 후에는 식민지 민중의 현실을 작품 속에 지속적으로 담았는데, 1920년 창작 희곡 '김영일의 사(死)'를 집필한 뒤 이듬해 조선 순회공연 무대에 올렸다. 시대일보 기자로 활동했으며 1924년 창작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발간했다. 이듬해(1925년)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에 참여했다.
조 선생은 일제강점기 민중이 처한 빈곤과 사회적 갈등을 담은 작품들(‘땅속으로’, ‘R군에게’ 등)을 잇달아 내놓았고, 1927년에는 대표작 '낙동강'을 '조선지광'에 발표했다.
항일 문학과 KAPF 활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조 선생은 1928년 8월 소련(러시아)으로 망명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육성촌, 하바로프스크 등을 오가며 현지 한인사회의 교육과 문학 활동에 참여했다. 한인 사회의 대표적 한글신문 '선봉'에서는 편집자로 일했고, 잡지 '노력자의 조국'에서는 주필을 맡았다.
조 선생의 애국 활동은 스탈린 체제의 대숙청과 한인 탄압 속에서 중단됐다. 1937년 소련 당국이 연해주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키던 시기에, (조직적인 반발을 막기 위해) 한인 지도자들을 대거 체포했는데, 조 선생도 같은 해 9월 18일 ‘일본 간첩' 혐의로 붙잡혀 이듬해(1938년) 5월 만 43세의 나이에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당했다.
조명희 선생의 손자 조 파벨 캐피털 그룹 회장/사진출처:캐피털 그룹 홈페이지
조 선생의 후손들은 러시아에, 친인척들은 한국에 흩어져 산다. 친손자 조 드미트리(포석의 차남 조선인·조 블라디미르의 아들)과 외손자 김 안드레이(포석의 장녀 조선아 씨의 아들) 등은 러시아에 살지만, 종손인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과 일가친척들은 한국에 있다. 동양일보는 충북 청주시에 본사를 둔 지역 언론이다.
주목할 인물은 러시아에서 부동산 개발업으로 성공한 조 선생의 손자 조 파벨(Павел Тё, 조 블라디미르의 아들, 그동안 '조파엘'으로 알려졌다/편집자) '캐피탈 그룹' 회장이다.
RIA 노보스티 통신 부동산면에 따르면 '캐피탈 그룹'은 모스크바에서 가장 큰 부동산 개발회사 중 하나다. 조 파벨이 지난 1993년 에두아르드 베르만과 블라디슬라프 도로닌과 함께 창업했으나, 2014년 두 사람과 결별하고, 혼자 '캐피탈 그룹'을 이끌고 있다.
위키피디아 러시아판은 조 파벨 회장의 가족을 다룬 코너에서 할아버지 조명희를 '한국의 작가'로 소개했다.
조 선생은 1956년 7월 20일 소련 극동군관구 군법재판소에 의해 사후 복권됐으며, 연해주 지역 고려인들에게는 ‘항일투쟁영웅 59인’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주러 한국대사관에서 열린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식. 포석 조명희 선생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애국장이 차남에게 전달됐다/페이스북 캡처
하지만 국내에서는 사회주의 계열 활동(KAPF 활동) 이력 때문에 오랫동안 그의 문학과 독립운동을 폭넓게 다루지 못했다. 1988년 월북 문인의 해방 이전 작품에 대한 공식 해금 조치 이후 그에 대한 재조명이 본격화됐다.
우리 정부는 조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해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고향인 충북 진천군에는 2015년 포석조명희문학관이 문을 열어 그의 문학과 생애를 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