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9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오 6,1-6.16-18)
When you give alms, do not let your left hand know what your right is doing, so that your almsgiving may be secret. And your Father who sees in secret will repay you.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선행을 베풀되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고 기쁘게 실천하라고 권고한다. 기쁘게 선행을 실천하는 이에게는 하느님께서 은총을 내리시어 뿌린 씨앗의 여러 곱절과 의로움의 열매를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위선자들처럼 다른 이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며 행하라고 가르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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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참으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로 가능할까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수가 있을까요? 좋지 않은 행동에는 이것이 가능합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기억하는데, 정작 그 상처를 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좋은 일을 할 때에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저희 집은 아들만 넷이고, 식당을 운영하였던 부모님은 늘 바빴습니다. 그래서 저를 포함한 아들들은 끼니때가 되면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조금이라도 도와야 했습니다. 또 밥을 다 먹은 뒤에도 자기 그릇은 자기가 스스로 설거지통에 갖다 놓아야 했고, 어머니가 없으면 설거지까지 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자란 형이 어느 날 처갓집에서 밥을 다 먹은 뒤 자기 그릇을 설거지통에 자연스럽게 갖다 두었습니다. 그때 처갓집 식구들은 이러한 행동에 대하여 조금 놀랐다고 합니다. 밥을 다 먹고 자기 그릇을 갖다 놓는 것이 신기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형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는데 말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일일이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 이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공치사해야 할 만큼 대단한 일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을 했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일일이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좋은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그것이 습관이 되어 버리는 것, 바로 여기에 오른손이 왼손도 모르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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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아침마다 늘 신문을 한참 동안 보는 노인이 계셨습니다. 수십 년째 아침이면 신문을 보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자이셨습니다. 그분이 신문을 보시기 시작한 것은 아들이 혼인하고부터입니다. 며느리와 같이 살면서 자신이 문맹자임을 감추시려고 아침마다 신문을 읽는 척하셨던 것입니다. 글을 모르는 아버지를 부끄러워해서 아들은 늘 아버지 앞에 신문을 가져다주었고 아버지도 자신과 아들의 체면 때문에 아침마다 신문을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문맹자임을 밝히시고 수십 년 동안 글을 배우셨으면 한글만 깨우치셨겠습니까? 그런데도 힘들게 신문을 읽는 척하시며 세월만 보내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 체면치레와 겉꾸밈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부끄러워하셔야 할 것은 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을 꾸미고 사시는 위선적 태도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척’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는 척, 가진 척, 잘난 척, 있는 척…… 그야말로 우리 모습에 척을 가져다 붙이면 척척 들어맞습니다. 엄청난 가격을 지불해야 살 수 있는 명품이라고 불리는 상품들이 왜 불티나게 팔리겠습니까? 이 좁은 땅에서 왜 대형 고급 차, 고급 아파트에 사람들이 몰려듭니까? 성형 수술이 왜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까? 주관이 없고 삶에 중심이 없을 때 온통 겉꾸밈에 의지하며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두리번거리며 사람들 눈치를 살피며 살면 이렇게 겉꾸미는 행동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 눈길을 두고 삶의 중심을 잡으면 참으로 자유로워집니다. 그 방법을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과 만남을 이루는 내밀한 기도, 보이지 않는 자선, 그리고 자신을 비우는 단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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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은 남을 돕는 선행입니다. 진정한 자선은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사람 앞의 선행이 아니라 ‘주님 앞의 선행’이 되게 하라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알지 못하게 처신하고 주님만이 아시도록 선행을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그런 선행을 베푸는 이들이 많습니다. 끝까지 자신을 감추며 선행이 드러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별나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들을 인도하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기쁨’을 아무도 모르게 반드시 주십니다. 자선의 다른 말은 ‘적선’입니다. ‘선을 쌓는다’는 뜻으로 불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악한 기운이 넘어오지 못하게 선행으로 무장한다는 표현입니다. 불교에서는 자신의 ‘업보’를 없애려면 반드시 적선해야 한다고 가르치지요. 살면서 저지른 생활 속의 잘못을 보속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자선은 이렇듯 사람의 앞날을 밝게 합니다. 누군가를 돕는다고 하면 돈과 재물을 먼저 연상합니다. 넉넉해야 쉽게 베풀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물질을 베푸는 것만이 자선은 아닙니다. 따뜻한 말과 눈빛에서도 얼마든지 자선은 가능합니다. 어린이를 칭찬하고 젊은이에게 용기를 주는 것도 아름다운 자선입니다. 이웃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면서 살고 있다면 가장 큰 적선을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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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선(積善)하는 사람은 귀신도 두려워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적선에는 하늘의 힘이 담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불안하면 점을 보고 부적을 붙이고 액을 쫓는 데에만 열중했지 적선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말은 쉬워도 행동은 예로부터 어려웠던 것입니다. 남을 돕는다고 모두가 적선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적선은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합니다. 복음 말씀처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적선을 금전과 연관 짓습니다. 돈으로 도와야 적선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남을 돕는 일이 어찌 금전뿐이겠습니까? 불교의 보시(布施)에는 세 등급이 있습니다. 첫째가 무외시(無畏施)입니다. 삶의 두려움을 없애 주는 것을 최고의 적선으로 보았습니다. 두 번째는 가르침을 베푸는 법시(法施)입니다. 제일 낮은 것이 재시(財施)입니다. 재물로 도우는 것을 적선의 기본으로 본 것이지요. 그러니 진정 요구되는 것은 돈과 재물이 아니라 애정입니다. 때로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강렬한 적선이 됩니다. ‘다정한 눈빛 하나’가 어떤 행위보다 힘 있는 자선이 됩니다. 베풀면 반드시 은총이 옵니다. 하늘의 힘이 그와 그의 주변을 지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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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과 기도, 단식은 우리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올바른 자선과 기도, 단식이란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남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우리는 짐짓 옳고 멋진 사람이라는 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선과 기도, 단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드러내 보여야만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숨은 일도 모두 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전능하심을 먼저 인정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선행이나 악행은 하느님께 결코 숨길 수 없습니다. 사람을 속일 수는 있으나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정제천 신부와 함께 하는 수요 묵상
우리는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주변 사람의 평가를 통해 어떤 사물의 가치를 배운다. ‘좋다, 나쁘다, 싸다, 비싸다’ 등의 평가가 내 가치관을 이룬다. 요즘에는 문화와 교육, 광고 등의 매스컴 환경이 우리를 더 그런 방향으로 향하게 만든다. 그래서 대부분의 가치가 사람들의 인정과 금전적 가치로 결정된다. 그러나 어떤 가치들은 고유하고 본래 좋은 것도 있다. 그 자체로 좋은 것들에 대한 감각이 우리 삶의 깊이를 더해 준다. 그런 것이 없으면 삶이 표피적, 피상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타이르신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자선이나 기도를 하지 않아야 한다. 하느님은 숨은 일도 보신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숨어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하느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다. 그렇다고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숨어 계신다는 것이다. 바람이 눈에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바람이 불 때에 소리와 움직임을 일으켜 놓듯이 하느님 아버지도 당신의 흔적들을 곳곳에 남기면서 지금도 내 곁에 계신다. 문제는 내가 그것을 알아보는 눈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을 하느님보다 더 무서워한다면 하느님을 알아볼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영적 맹인 상태를 면치 못한다. 영적인 눈을 뜨려면 하느님을 모든 것에 앞서 흠숭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골방이 필요하다. 아무도 침범하지 못할 골방을 내 마음에 만들고 그 안에서 나오지 않을 각오를 해야 한다. 버스를 타고 갈 때에도, 길을 걸어갈 때에도 그 골방에서 나오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하느님이 왜 숨어 계시는지 알게 된다. 또 숨어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갖게 된다. 이제 그분이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게 된다.
오늘 복음을 보며 떠오른 시가 있다. 최민순 신부님이 지은 <두메꽃>이다.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 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 숨어서 피고 싶어라.” 도심 한복판에 피는 두메꽃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양승국신부-
<하느님을 향한 발돋움>
6월 24일 있을 이태석 신부님의 삶과 영성을 주제로 한 심포지움을 준비하면서 ‘영성’ ‘영성생활’의 의미에 대해서 연구를 좀 하고 있습니다.
현대 영성 신학의 흐름 가운데 두드러진 동향 한 가지는 신앙의 실천, 신앙과 삶의 접목에 대해 강조점을 두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에 따르면 “영성적인 삶은 자신의 깊숙한 자아와 동료 인간, 그리고 하느님께로 향한 발돋움(reaching out)입니다.”
진지한 영성생활의 결과는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연결되어야 함을, 제대로 된 영성생활은 세상과 이웃을 향한 투신으로 열매 맺어야 함을 교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참된 영성생활이란 하느님의 외침인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일입니다. 또한 불행한 처지에 놓인 이웃들의 절박한 호소를 통해 들려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에 응답하는 일이입니다. 또한 내가 체험한 하느님을 내 삶을 통해 이웃들에게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지요.
제대로 된 영성생활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비추어본 끝없는 자기 성찰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란 거울에 내 삶을 지속적으로 비추어보는 것입니다. 또한 꾸준히 내가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메꾸어 나가는 여행길입니다.
영성 생활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십니다. 그 길에서 하느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사울을 바오로로, 시몬을 베드로로 변화시키셨듯이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위선자를 진실한 사람으로, 떠벌이를 진중한 사람으로, 허풍선이를 내면이 든든한 사람으로 바꿔놓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날나리, 떠벌이, 위선자가 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거짓이 없으시며 진실하신 하느님이시기에 그분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있습니다. 과장되게 자신을 부풀리는 사람입니다. 가식적인 얼굴을 지닌 사람입니다. 삶이 이중적인 사람입니다. 별 것도 없으면서 있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하느님께 눈이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들이 있습니다. 꾸밈없는 사람입니다. 진실한 사람입니다. 안과 밖이 같은 사람입니다.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 진실한 사람입니다.
나를 겹겹이 포장하고 있는 두꺼운 껍질을 말끔히 벗겨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별 도움도 안 되는 껍질을 칭칭 감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피곤하겠습니까?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약점을 감추려 굳이 애쓰지 말며, 상처가 있으면 그 상처를 열어 보이며,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하느님께 다가서길 바랍니다. 그것 역시 영성적 삶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보고 계시는 아버지
-안승태 신부-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을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동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까지도 주님께서 모두 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위선적인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 아니라 하느님께 나아가는 통로로써 그러한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숨겨두라는 말씀입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선행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심이 앞선 행동입니다. 다른 이들을 위한 사랑의 마음이 적고 자기만족이 크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상처를 주는 행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과 위선, 사랑과 교만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자랑하지 않는 겸손한 모습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숨기는 사랑이 하느님께도 우리의 이웃에게도 더 크게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외적인 행동과 우리의 마음이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의 내면은 공허해집니다. 또한 우리가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 위하여 행하는 기도와 선행은 하느님께도 사랑의 실천으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은 주로 사순시기 들머리에 잘 봉독되는 부분입니다. 올바른 자선과 올바른 기도 그리고 올바른 단식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두고 기도할 때는 관상보다는 묵상이 적합하겠습니다.
순서대로 묵상해 나가면 되겠습니다. 우선 올바른 자선이 무엇인지에 대해 찬찬히 살펴봤으면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위선자처럼 자선하는 행태는 우리도 이미 알고 있는 바이기에 오히려 기도가 피상적으로 흘러버릴 위험이 있으므로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정치가들을 비롯한 세상의 가벼운 풍조들을 그저 눈구경하듯 해서는 기도를 통해 얻는 바가 약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선 그 자체가 무엇인지, 나랑 너랑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나아가 물질이나 재화와 인간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해 깊이 숙고하며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는 올바른 기도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아들으려 해야 하겠습니다. 기도에도 다양한 형태의 모습이 있습니다. 스스로 기도하는 모습도 비춰보면서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유익하겠습니다. 여기서는 위선적인 기도보다 오히려 기도에 임하는 자신의 내적 태도를 깊게 들여다보는 게 더 유익하겠습니다.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가 기도를 통해 어떤 식으로 표출되고 있는지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끝으로 올바른 단식을 살핍니다. 위선적인 단식과 관련하여 스스로를 드러내고 자랑하고픈 내면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이해하는 것이 유익하겠습니다. 나아가 좀 더 긴요한 것은 단식 자체에 대한 이해입니다. 도대체 단식을 왜 하는지, 단식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내 삶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단식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잘 알아들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참 자기를 살려면
-김찬선신부-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의나 선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왜, 무엇이 문제인가?
얼마 전 40대를 막 넘어선 자매와 얘기를 나눴는데 나이를 먹고 애 셋을 키우다 보니 남에게 잘 보이려고 했던 것이 참으로 부질없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제는 자기 모습 그대로 편하게 산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보이기 위해 거짓을 살았던 과거에 비해 지금은 자기를 솔직하게 살아가니 잘 된 것이라는 생각도 하였지만 뭔가 자기 발전을 포기한 듯한 느낌도 받았습니다. 그래도 처녀 때는 남을 의식하고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자기를 향상시키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남을 의식하는 것도 순기능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도 큰 문제 중의 작은 순기능일 뿐입니다. 우선 인간적으로, 칭찬을 받아야지만 자존감을 가지는 것이 문젭니다. 칭찬을 받아야지만 자존감을 가지는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이 비난을 하면 자존감이 형편없이 추락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에 의해 나의 존재가 좌우되고, 자존감이 널뛰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신앙적인 측면입니다. 인간의 시선과 평가에 연연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서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고귀한 사람의 집에 가서 그분과 친교를 나누기보다 그 집 하녀에게 마음이 뺏겨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녀에게 잘 보여 봤자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는데 말입니다.
나의 존재는 하느님에 의해서만 진정 구원을 얻고 하느님 앞에서만 참 자아와 진정한 자존감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은 우리의 기도와 자선과 단식이 하느님 앞에서 참 자기를 찾는 것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연인이 클래식 음악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잘못 먹었는지 여자 친구의 속이 별로 좋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방귀가 나오려고 하는 것이었어요. 속이 워낙 불편했기 때문에 방귀라고 뀌면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베토벤의 운명’이 연주되었고, 여자 친구는 “빠바밤 밤~~”이라고 연주될 때 장단에 맞춰서 시원하게 해결했지요. 그리고 장단에 맞춰서 방귀를 뀌었기 때문에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문득 쑥스러운 마음에 남자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자기 ~~ 저곡 너무 좋지?”
그러자 남자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 방귀 소리 때문에 못 들었어!”
여자 친구는 큰 음악 소리로 인해서 자신의 방귀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오히려 음악 소리보다도 방귀 소리가 더 컸나 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해봐요. 소리도 그렇다 쳐도 냄새는 어떻게 할까요?
이 여자 친구의 완벽하다고 생각한 작전(?)은 ‘눈 가리고 아웅’ 식이었던 것이지요. 물론 그 순간에는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최악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모습을 간직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겉으로만 그럴싸한 모습으로 자신의 옳음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오히려 나의 옳지 않음을 드러내게 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를 인정받으려는 행동을 하기 보다는, 하느님께 인정받는 행동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다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은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인정받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보장됩니다. 따라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옛날, 시골에 가면 수도꼭지보다는 펌프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단순히 펌프질만 열심히 하면 절대로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지처럼 생긴 펌프의 주둥이 안에 물을 조금 부어넣고 펌프질을 하면 많은 물이 쏟아지지요.
우리의 인생도 이 펌프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요? 내가 이웃들에게 행하는 모든 사랑이 바로 펌프의 주둥이에 물을 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많은 물을 내 것으로 만들게 되지요. 이처럼 이웃을 향한 조금의 사랑이 결국은 나에게 커다란 사랑으로서 되돌아오는 것이고, 결국은 나를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아무런 것도 베풀지 않으면서 받기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나도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께도 인정받을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두려움은 적게 희망은 많이 먹기는 적게 씹기는 많이 푸념은 적게 호흡은 많이 미움은 적게 사랑은 많이 하라. 그러면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이 당신의 것이다.(스웨덴 격언)
하느님의 시선만 바라보는 사람들
-이준석 신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가장 가련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다른 사람들의 평가로부터 찾으려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진 자신을 대면하기보다 타인에게 내가 어떠한 모습으로 비추어질까를 더 고민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온전하게 채워주는 것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어지는 명예와 좋은 평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인식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들의 무의식 깊은 곳에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주어지는 존경과 영예에 대한 갈망이 용솟음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선도, 기도도, 단식도 그러한 목적에 맞게 실행했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일’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거룩한 행위들을 ‘자신을 향한’ 행위로 변질시켰습니다. 우리도 내면으로부터의 성화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신심행위에 더 몰두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되물어야 합니다. 내 자신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지 아니면 나를 영예롭게 해줄 다른 사람의 시선에 따라 살아가는지….
예수님께 속한 기쁨
- 임순연 수녀-
기도에 대해 부끄럽게도 이제야 조금씩 그 의미를 알게 됩니다. 기도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경험이고 내 안에서 술렁이며 내 안에서 퍼져 나가는 기쁨입니다. 기도는 외적인 의식이나 자신만의 만족이나 유행처럼 퍼져 있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한 나의 반응이 아닌 하느님과 나의 관계 안에서 은총으로 씨 뿌려지고 성장하고 열매 맺어 가는 소리 없는 생명입니다. 기도의 결과는 삶에서 드러나는 열매에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자신이 경험한 기도에 대해, 그 내용에 대해, 체험에 대해 표현하는 데 한계를 느낍니다. 그러기에 그 결과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유혹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기도의 결과는 기도 후에 바로 드러나지 않고 생활에서 드러납니다. 그 모습은 사랑입니다. 기쁨과 즐거움과 함께 어려운 가운데 희망을 가질 때 우리는 그곳에서 기도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열매는 충실한 매일, 매 순간의 기도가 꾸준히 조금씩 이어질 때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일상을 통해 드러나고 영글어 가는 것입니다.
부자되세요.
-김찬선신부-
몇 년 전에 “부자 되세요.”라는 새 해 인사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참 천박한 새 해 인사라고 그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코린토서의 말씀을 빌려 제가 그 인사를 드립니다.
부자는 많이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부자도 부자 나름입니다. 돈이 많은 부자를 보통 생각하는데 다른 것은 없고 돈만 많은 부자를 우리는 졸부라고 비웃습니다. 욕심만 많은 사람도 많다는 면에서 부자라면 부자인데 이런 부자는 욕심만 많지 사실은 가난한 사람이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욕심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부리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오늘 고린토 서에서 바오로는 모든 면에서 부유해져 매우 후한 인심을 베풀게 됨에 대해 말합니다. 모든 면에서 부유해진다면 돈이 많은 것도 흉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이 부자인 사람, 사랑이 많은 사람, 인정이 많은 사람, 지식이 많은 사람, 아는 사람이 많은 사람, 거기다 돈까지 많은 사람은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어려운 사람을 도울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자기가 잘 나서 내 것을 준다는 식이 되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하느님 은총 덕분에 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인의 재물을 가지고 선심을 쓰는 약은 청지기에 대해 칭찬으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주신 것을 가지고 팍팍 인심을 써야 합니다. 하느님의 것을 내 것인 양, 가지고서 바들바들 떨지 말고 받아서는 연신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어주어야 합니다.
물은 흘러야 합니다. 사랑도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은총으로 받은 선을 가둬두지 않고 대가 없이 주는 것, 이것이 물이 썩지 않듯 사랑을 사랑이게 하는 것입니다. 선행은 하느님의 사랑을 탐욕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고 사랑이게 하는 것입니다.
위선자의 영혼
-전삼용신부-
프랑스 작가 알퐁소 도데는 그의 책 ‘고셰 신부의 불로장생주’라는 책에서 신앙인의 위선이란 어떤 것인지 정곡을 짚어 보여줍니다.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가난을 미덕으로 삼았던 수도원으로 다른 수도원처럼 종을 살 돈이 없어 나무로 된 딱따기를 사용하여 기도시간을 알릴 정도였습니다. 보통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부족함 없이 채워주시는데 이 수도원은 가난한데다 마지막 남은 재정까지 바닥나서 이젠 끼니를 잇기도 힘들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에 젖소를 돌보는 일을 맡았던 고셰 신부는 불로장생주를 만들어 재정난을 해결하자고 합니다. 유럽의 유명한 술들이 대부분 수도원에서 나왔다는 것을 가만하면 이런 일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양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어깨너머로 배웠던 주조기술을 육 개월 동안의 노력으로 되살려내고 불로장생주를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그 술은 불티나게 팔렸고 수도원은 재정의 회복을 넘어서서 돈방석에 앉게 됩니다. 고셰 수사는 그 덕으로 사제 서품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매일 술맛을 보느라 어느새 알코올중독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비틀거리며 흥청거리는 수사를 본 신부들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치며 그를 내쫓았습니다. 어느 날 고셰 수사가 미사 중에 또 술주정을 해서 정말로 귀신들렸다고 여겨져서 감금되게 되었고 그날부터는 혼자 기도하며 술을 빚게 되었습니다.
고셰 수사가 이제는 자신의 영혼까지 걱정되어 수도원장에게 다시 예전처럼 젖소를 돌보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원장은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시니 걱정할 것 없다. 술을 빚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니 수도원을 위해 열심히 불로장생주를 빚으라. 주님의 뜻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그의 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순진한 고셰 수사는 원장의 말에 순종하여 계속 술을 빚었고 수도원은 술로 인해 매우 바빠졌습니다.
신부나 수도사들은 술병을 포장하고 상표를 붙이고 또 그것을 운반하느라 마사까지 거르는 일이 생겼습니다. 저녁 미사가 끝날 때마다 사제는 고셰의 영혼을 위하여 합심하여 기도하자고 권고합니다. 그 때 술을 빚고 있는 고셰 수사의 슬픈 노래와 고함소리가 낡은 건물 저편에서 들려옵니다. 이때 신부들은 염려하며 말합니다.
“이를 어쩌나! 교구의 신자들이 알면 큰일인데...”
수도원 전체를 한 사람으로 생각해 보세요. 겉은 멀쩡해 보일지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영혼인, 고셰 수사는 죽어가는 것입니다. 위선은 이렇게 겉과 속의 분열을 이루어 영혼을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셰 수사가 다시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단순합니다. 진실 되게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스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고 그것을 고쳐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영혼은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말과 행동으로 거짓이 없는 사람의 영혼은 살게 되고 위선자의 영혼은 죽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위선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 그들에게 보이려고 선행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선행을 할 때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면서부터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서부터 저절로 위선적이 되고 그렇게 영혼이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고 칭찬받으려고 하고 내 자신의 단점을 숨기려하면서부터, 즉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면서부터 위선적인 사람이 됩니다. 성경은 ‘선행은 숨기고 자신의 단점은 드러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결국 나를 심판하게 될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좋아해도 하느님이 아니라고 하면 그만입니다.
위선자가 되어 자신의 영혼을 시들게 하지 않기 위해서 주님께만 잘 보이려고 노력하고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집시다.
선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궁전이 있었습니다. 어떤 소녀가 이 궁전에 들어가고 싶어서 매일 몸을 단장했지만 궁전의 열쇠는 주어지지 않았어요. 이렇게 애만 쓰고 있는 소녀에 대해 안타까워하던 궁전의 문지기가 남몰래 소녀에게 귀띔해 주었습니다.
“얘야, 이곳의 열쇠는 남을 위해 사랑을 실천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단다.”
이 말을 들은 소녀는 곧바로 눈에 보이는 나이 많은 거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궁전으로 달려가서는 남을 위해서 사랑을 실천했으니 어서 열쇠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렇지만 열쇠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실천해도 열쇠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한 소녀는 힘없이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지요. 그때 강아지 한 마리가 덫에 걸려 신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소녀는 정성을 다해 강아지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녀의 손과 발에서는 덫에 찔려서 피가 흘러내렸지요. 바로 이 순간, 어디선가 궁전의 문지기가 나타나서는 열쇠를 주는 것이 아니겠어요? 소녀는 깜짝 놀라며 말했지요.
“저는 열쇠를 얻기 위해 강아지를 구해준 것이 아닌데요.”
그러자 문지기가 말했습니다.
“자신이 지금 선행을 베풀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잊은 채 남을 돕는 사람에게만 열쇠가 주어진단다.”
대가를 바라는 선행을 진정한 선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한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선행을 가리켜서 아름다운 선행이라고 말할까요? 아니지요. 자신의 선행이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최선을 다해서 선행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들은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이 점을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요즘은 자기 PR 시대라고 이야기하지요. 남들이 나를 알아주어야 취직도 하고, 승진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다른 사람의 도움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행동을 드러내 놓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대신 숨어서 행하는 것까지도 모두 보고 계시는 하느님을 일깨워주시면서, 우리가 기대했던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시지요.
사실 세상의 칭찬은 제한적입니다. 즉, 쉽게 잊히는 것이 세상의 칭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칭찬은 이렇게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영혼이 기억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구원이 결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다시금 마음속에 새기면서, 이 세상에 기대하기보다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기대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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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계신 하느님께 보여드리라
-김선오 신부-
‘돈 보스코’라는 이탈리아의 성인이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젊은이들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고 살레시오 수도회를 창립한 분이신데 그분은 늘 젊은이들에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보고 계신다”라고요. 그런데 이 말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숨어 계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계시니 ‘늘 조심하여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들은 쉽게 ‘아무도 보지 않는데 어떤가?’라고 생각하고 나서 유혹에 빠집니다. 그 말의 뜻은 사람들이 보고 있으면 행동이 달라진다는 말이지요. 두 번째 의미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정성과 마음 하나하나까지도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별것 아닌 것 같은 기도와 선행이고 단식이지만 그 마음 하나 하나를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기억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늘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건과 만남들을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맺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기도와 단식은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위한 것이기에 이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반응은 오히려 방해만 될 뿐입니다. 어린아이가 사심 없는 마음으로 멍든 자리를 엄마에게 보여주듯 우리를 항상 지켜보고 계시고 격려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말씀드리고 의탁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에게는 늘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넘쳐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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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복 짓는 일
- 박혜원-
다음은 친정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다. 목욕탕에서 대강 몸을 씻고 등을 밀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는데 한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등, 밀어드릴까요?” “아니,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내 밀어드릴게. 사양하지 말고 돌아앉으세요.” 더 이상 거절하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아 등을 내밀었다. 아주머니는 아주 정성스럽게 때를 밀고 비누칠까지 해서 깨끗하게 마무리를 해주었다. 모처럼 등을 밀어 개운함을 느끼며 감사했다. “아주머니도 씻어드릴게. 돌아앉으시구랴.” “아니에요. 저는 좀 전에 다 씻었습니다.” “아이구, 이렇게 고마우실 데가! 아주머니 성함이라도 압시다. 내 생각날 때면 기도라도 해드리게.” “아이구, 기도해 주신다니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이름은 알아서 뭐하시게요? 그저 복 짓는 일일 뿐인걸요. 이미 받을 건 다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덧붙였다. “그 사람, 절에 다니는 모양이던데 정말 많은 걸 배웠다. 그저 베푼다는 게 이런 것 아니겠냐. 우리도 그래야 될 텐데….”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가 한 것을 내세우는 본성이 있다. 관성의 법칙처럼 허례와 자기 가식에 빠지곤 한다. 선행을 하면서도 그 선행 안에 들어 있는 자기 오만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어떻게 해야 하느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을까? 진정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이 많았으면 좋겠다. †♡†♡†♡†♡†♡†♡†♡†♡†♡†♡†♡†♡†♡†♡†♡†♡†♡†♡†♡†♡†♡†♡†
위선할 수밖에 없는 우리 -김찬선신부-
어제 길을 가다 초등학생의 어머니들로 보이는 이들의 얘기를 엿들었습니다. 들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들린 것은 그동안 큰 궁금증 중의 하나였던 것에 대한 대화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전철을 탓을 때 요즘 아이들-청년까지 포함하여-거의 대부분이 어르신이 앞에 있어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양보하는 모범을 보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양보해야 한다는 의식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닌지,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태연할 수가 없지 않을까 늘 생각했었는데 그 궁금증이 풀린 것입니다.
얘기인 즉 학교에서 자기 아이에게 선행일기를 쓰고 어머니 서명을 받아오라고 하였는데, 보니 여러 날 일기를 한꺼번에 쓴 것이었고 똑 같은 내용의 거짓 일기였기에 서명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선행의 내용이 무엇이었냐 하면 집에서 어머니 도와드린 것, 길 모르는 할아버지, 할머니 길 친절히 가르쳐드린 것, 전철에서 자리 양보한 것이었는데, 이런 몇 가지를 시간, 장소, 상황만을 조금 바꿔서 일기를 쓴 것입니다.
선행을 할 수 없고, 그래서 선행을 하지 않는 아이들과 선행을 요구하는 우리 사회 사이의 僞善의 Mechanism(매카니즘)이 너무도 잘 드러나는 얘기였습니다. 한 마디로 위선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우리 사회인데 이것은 비단 요즘의 우리 사회 뿐 아니고 보편적 인간의 역사가 위선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너도 나도 선하지 않는데도 선행을 요구 당한다는 것이고 선행을 요구한다는 것은 비록 선하지 않지만 모두 선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의 선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위선적입니다. 그렇다고 위선을 하지 않기 위해 악행을 일삼으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의 위선도 그렇게 나무랄 일이 아니지 않을까요? 나는 위선적이지 않고 이들만 위선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다면 이것이 더 고약한 위선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인간이 나의 것이라곤 죄와 악습밖에 없고 나의 선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하느님의 것이기에 아무도 자기의 선과 선행을 자랑할 수 없는데 인간은 그 선을 하느님께 돌려드리지 않고, 즉 하느님의 선과 하느님께서 자기 안에서 이루신 선을 찬미, 찬양하지 않고 자기 것인 양 자랑합니다.
저는 프란치스코의 제자이기에 이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위선하고픈 것을 꾹 참습니다. 그리고 내 놓고 자랑하는 사람을 보면 비웃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저를 들여다보면 제가 더 나쁜 위선자입니다. 은근히 하느님의 선을 내 것인 양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위악도 좋지 않고 위선도 좋지 않지만 위선을 가리는 고차원적인 위선은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구역질나고 참으로 나쁘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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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 - 권순호 신부-
요즘 젊은이들에게 아주 인기 있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하나 있습니다.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이 프로그램을 보지 않으면 젊은이들과 대화가 안 될 정도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사목상의 이유로 저도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이 프로그램을 같이 보았습니다. 간접 광고가 되기 때문에 프그로그램 이름을 밝힐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쯤 어떤 프로그램인지 감이 오시는 분도 있으라 생각됩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재미있을까 반신반의 하였는데 막상 선생님들과 같이 보니 그럭저럭 재미있었습니다. 프로그램 중, 왕따를 당하는 학생들이 동수라는 가상의 투명인간과 벌이는 에피소드를 다루는 코너가 특히 저에게 재미있었습니다. 왕따라는 현대 학교의 병폐를 코믹하게 그리고 있어 단지 코미디 이상의 흥미를 끌었습니다.
그 코너에 말을 안 듣는 오른손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나옵니다. 그 남자의 오른 손은 그 남자와 상관없이 가출을 하기도 하고, 물에 빠지기도 하고, 군대에 가기도 합니다. 오른 손이 생각도 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다니, 코미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정말 허무맹랑한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제멋대로 행동하는 오른손은 우리에게 많은 웃음을 선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 손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오른 손이 왼손이 하는 일을 알 수 있습니까? 손들은 그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당연히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당연한 말씀을 하실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마더 데레사와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새겨 들어야 하겠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가장 작은 몽당 연필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저를 쓸 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연필이며, 손과 발이며, 지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쓰시도록 맡겨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왼 손이 오른 손이 아니라고 몸에 딸린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귀가 눈이 아니라고 몸에 딸린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귀가 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눈이 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손과 발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른 손이 주인과 상관 없이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연필이고, 지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지체로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할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왜 ‘왼 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는 당연한 말씀을 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머리이신 예수님의 손과 발이며, 연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다른 형제 자매를 시기하고, 예수님과 상관없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오른손은 그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나 보고 웃어야 할 것입니다.
왼 손이 하는 일에 시기를 하는 오른 손도 그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나 보고 웃어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제멋대로 행동하는 오른 손이 나오는 코미디를 생활 속에 사시는 분은 안 계시겠지요. 오른 손이 하는 일은 왼 손이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만이 아십니다. 우린 그저 예수님의 손과 발로서 예수님이 원하는 대로 행할 뿐입니다...................◆
늘 이루어지고 있는 기도의 응답 -이봉하수사-
수도원 입회 전, 1년 가까이 성당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낡고 오래 된 옛 사제관 회의실 안쪽에 조그마한 방이 하나 있었는데 전깃불도 희미하고 연탄보일러도 작동이 잘 안 되는 그야말로 골방이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본당 단체들이 사용하였으나 모임이 끝난 이후는 늘 조용해서 기도와 공부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저는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이면 어둠으로 가득한 성당에서 성체등을 바라보며 기도했고, 밤이면 혼자 마당을 오가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방으로 들어와서는 성경을 읽고 기도를 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갈 수 있는 은총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때는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오직 예수님과 수도원 입회만이 내 생의 전부인양 생각하였기 때문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기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여도 그때는 참으로 은총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수도원에서 살고 있는 오늘, 공동으로 기도하는 시간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홀로 있는 시간과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은 오직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 높고 깊이 갖도록 순간순간 마음 안에 골방을 만들어 끝까지 수도생활을 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합니다. 하루 중에 많은 시간을 그분을 위해 사용하고 또 그런 공간이 주어지는 수도자로서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임을 고백하며 인류의 평화와 공동체를 위해 감사와 청원의 기도를 바칩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강민구 목사-
◆누구나 숨을 쉬며 살아가지만 기분이나 상태에 따라 호흡과 맥박이 빨라지거나 느려지기도 하고, 답답하거나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가령 거짓말을 하거나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면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거칠어집니다. 무언가를 두려워하거나 불안한 상태에서는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이러한 상태는 모두 인간 본연의 자연스런 모습이 아니기에 어딘가 어색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는 단지 겉모양을 그럴듯하게 꾸민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생명과 숨을 주신 하느님께 뿌리를 두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어떤 선한 행위를 할 때 주님께 뿌리를 내린 사랑이 아니라 모양만 갖춘 것이라면 그것 역시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진실되지 못한 선한 행위를 통해서 주위 사람들은 잠시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속사람을 중요하게 보시는 예수님은 절대 속일 수 없는 법입니다. 주님은 선한 행위 자체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숨은 의도를 보고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누구나 다 선한 행위라고 인정하고 칭찬했던 기도·자선·금식마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동기와 의도에 따라 변할 수 있었음을 기억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무엇을 행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의 속사람을 돌아봐야겠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하늘 아버지께 온전히 뿌리내리고 있는지, 그래서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이 주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선물을 하느님께 받게 됩니다.
-윤용선 신부-
우리는 오늘 복음말씀 안에서 세 가지 단어를 접하게 됩니다. 즉, '자선', '기도', '단식'이 그것입니다. 유대교에 의하면, 자선을 베풀고, 기도를 하고, 단식을 하는 자는 율법의 위반을 속죄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특별한 공로를 쌓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율법 이 요구하는 바를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는 경건한 유대인을 나타 내는 특별한 표지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세 가지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기로 합시 다. 유대교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을 특별하게 돌보는 '자선'은 매 주일 각기 다른 장소에서 필요한 금전과 물품을 제공함 으로써 실천되었고, 금전과 물품이 공정하게 배분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이 외에도 개별적 으로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을 높이 평가하며, 자선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 이라고 보았습니다.
'기도'에 있어서는, 구약의 시편뿐 만 아니라 후대에 저술된 유대교의 문헌들 역시 기도를 매우 진지하게 그리고 전심전력을 다해 실천하 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을 계속 그리고 영원히 찬미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에 있어서 '단식'은 속죄의 힘을 지 닌 것으로서 공식적으로 규정된 단식 혹은 개인적인 단식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이 저지른 죄악 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를 막게 되고,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은 불행으로부터 보호받게 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선업, 즉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그 당시에도 그러했거니와 지금에 와서도 좋은 것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실천되어야 할 내용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의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필요하고 실천되어야 할 선업들이 있다는 것을 소개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습니까 ? 그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 는 내용은 이 세 가지 선업의 소개가 아니라, 이들을 어떠한 자세로 행해야 하는지, 즉 '올바른 자세로써의 실천'을 전하려 하십니다. 올바른 자세로써의 실천이란, '나를 드러내기 위함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 때문'에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오늘 예수 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는 말씀이 계속 반복되 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위선자들에게 해당되는 잘못된 자세들이 오늘의 말씀 안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 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의 행동', '칭찬을 받으려는 행동', '스스로 나팔을 부는 자세',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동'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들은 바로 위선자들의 자세로서, '하느님 때문'이 아 닌 '나를 드러내기 위함 때문'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잘못된 자세 때문에, 비록 그것 이 선업의 실천일지라도 아무런 의미나 효과가 없게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실천해야 할 선업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선업들입니다. 그러나 실천에 앞서 더욱 중요히 생각해야 할 면은 그 자세입니다. 어떤 자세로써 내가 이 선업들을 실천하려는 지를 다시금 생각케 하는 오늘의 복음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하느님 때문에 행하는 선업들을 통해 받게 되는 보상이 있길 바랍니다. 그 보상이란 다름 아니라, 바로 '하느님 자신을 찾 아 얻게 되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선을 행하자. -경규봉 신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성경의 말씀처럼...많이 희사하는 사람은 그 만큼 많은 축복을 받고, 적게 희사하면 그만큼 적게 받을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기쁜 마음으로 희사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희사하는 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모든 은총을 풍성히 주실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 고린토 교우들은 넉넉하게 가질 수 있었고, 온갖 선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 가난한 교우들을 돕는 선행은 하느님께 영원히 기억되어 하느님으로부터 보상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교우들은 하느님의 영원한 축복을 받도록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희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느님께서는 고린토 교우들에게 필요한 뿌릴 씨를 주시고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주신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부요하게 해주시는 것은 그들 자신만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교우들이 넉넉하게 희사한다면 자신들에게는 의롭고,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는 유익이 되며, 더 나아가 하느님께는 영광이 된다. 왜냐하면 희사 받은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께 감사드릴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교우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희사할 것을 권고한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사람은 지상에서 사는 동안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관리할 따름이다. 하느님께서 지금이라도 주신 것을 거두어가시면 사람은 이내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 부자가 많은 재산과 곡식을 창고에 쌓아두었지만 그날 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면 그 재산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루가 12,15-21).
하느님께서 맡겨두신 기간 동안 그 재물을 잘 관리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맡기신 까닭은 곧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도록 하신 것이다. 남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은 곧 하늘에 재물을 쌓는 것이므로 그렇게 한 사람은 하늘에서도 많은 상급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남에게 베푸는데 인색한 사람은 하늘에 쌓아둔 보화가 없으므로 받을 상이 없을 것이다(마태 6,19-21; 루가 12,33-34; 갈라 6,7).
희사하는데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적인 결심에 의해 기쁜 마음으로 바치는 것이 중요하다. 자랑하거나 칭찬을 받으려는 마음으로, 또는 비난받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많이 바친다면, 이는 참다운 희사가 아니다. 또한 주기 싫은 것을 아까워하면서 희사하거나, 대의명분이나 외부적 압력에 의해 희사하는 것도 하느님께서는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한 희사는 하느님 앞에서 행하는 선행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다. 좋은 평판과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에 불과하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3-4)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행하는 선행을 기뻐하신다.
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며, 복을 주시는 것 역시 하느님의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그리고 그처럼 복을 주시는 까닭은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넉넉하게 주신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자선을 행할 때에는 오직 하느님을 생각하며,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 사람들의 이목이 두렵거나 좋은 평판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행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오직 하느님 앞에 서서,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하느님께서는 원하신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 -강영구신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그대에게
레위기 19,18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레위기의 가르침은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불이(不二)의 세계를 꿈꾸고 있습니다. ‘내 이웃’이 ‘나의 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나의 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우리’의 세계가 하늘나라(天國)입니다. ‘너’와 ‘나’가 따로 없는 불이(不二)의 세계에서 자선(慈善)이란 타인(他人)에게 무엇을 베푸는 행위가 아니라 나에게 베푸는 행위입니다. 배고픈 ‘너’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나’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추위에 떠는 ‘너’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은 나의 몸을 따뜻하게 입히는 것입니다. 병든 ‘너’를 치료해주는 것은 아픈 나의 몸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인 ‘너’에게 자선을 베풀었다고 해서 자랑하거나 나팔을 불거나 보상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누리는 것들도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늘이 베풀어주신 것들입니다. ‘나’의 것이 아닌, 잠시 동안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너’에게 베풀었다고 하느님께서 보상을 해주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무엇을’ ‘얼마나’ 베풀었는가를 기억하고 따지는 것은 참된 자선(慈善)이 아닙니다. 대가나 보상을 바라고 자선을 베풀었다면 그것은 자선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하느님은 거래 대상이 아닙니다. ‘나’나 ‘너’도 거래 대상이 아닙니다.
기도를 하거나 단식을 할 때에도 거래하듯 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하루를 조건 없이 당신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불이(不二)의 세계에 머무는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천상의 보상을 누립시다.
-곽용승 신부-
세계인에게 자선의 ‘큰손’으로 불리는 빌 게이츠는 최근 소아마비 퇴치기금으로 6백억 원을 세계보건기구에 쾌척했고, 테드 터너는 유엔에 해마다 1조 2천억 원씩 기부금을 내고 있습니다. 원래 자선에 관심이 없던 게이츠에게 자선의 기쁨을 가르쳐 준 사람이 바로 터너였다고 합니다. 3년 전 터너는 사업에만 몰입하던 게이츠에게 충고를 했습니다. “지나치게 많은 돈을 은행에 예금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지. 그 돈으로 남을 돕는다면 인생이 훨씬 풍요로울 텐데….” 게이츠는 이 말에 감동을 받아 삶의 방향을 바꾸었답니다. 그렇습니다. 빌 게이츠가 자신의 부를 이웃과 나눌 수 있게 된 계기는 터너의 의미심장한 말이었지만 그 이면을 깊이 보면 자선을 베풀 때 인생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곧 자신의 자선에 대한 보상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의로운 일을 할 때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고. 자선을 베풀 때 남들이 알아주길 바라지 말고 숨어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 받은 사랑 때문에 하느님 사랑, 곧 이웃 사랑을 할 수 있고, 이 이웃 사랑이 내가 가진 것을 나누게 하며 이것은 곧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게 하는 것이기에 기뻐하고 만족해하고 행복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그 자선의 이유와 의미 추구가 하느님께 속한 것이라면 꼭 갚아주시겠다고.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우리가 베푼 자선은 하느님한테서 비롯된 것이며 우리는 단지 도구 역할을 한 것일 뿐인데, 이 도구의 역할을 수행한 것에 천상의 보상을 약속하시니 말입니다. 우리의 나눔이 천상의 보상을 불러온다는 사실은 우리를 하느님 뜻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더욱더 나누게 할 것입니다.
- 박갑조 신부 -
오늘 마태오 복음 6장 18절에서 말하듯이 왜 하느님께서는 숨어계시는가? 를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언가 부족해서 드러나 보이는 것(마태 6, 1.6.16.18)을 외면하시고 숨은 일 (마태6, 4.6.18)만 챙겨 갚아 주시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행동의 결과가 드러나야, 그것을 가지고 근거를 삼고 더 나은 발전을 모색할 수 있지 않게 습니까? 그리고 진위를 따져 정의가 구현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방식이 인간 역사의 점철인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방식으로 접근해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보상방식이 우리 인간에게는 숨은 모습이며, 드러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접근하는 방식이 하느님의 사랑의 방식인 것이요 인간 사이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 방식인 것입니다. 허면 인간의 측면에서 하느님의 이러한 사랑의 교류를 알고자 하는 물음이 제기 되어야 하는데, 보이는 것과 보여지는 것에 익숙한 자신의 습성에서 인간 본인이 식상되든지 또 다른 것을 추구하는 초월적 물음에 제기되어야만 지금까지 해 왔든 습성에서 벗어나 처음의 의문을 가지는 걸음을 내 디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 보여지는 것에만 만족하고 안위를 가지는것에 목적을 두어버린다면, 앞에서 말하는 현재의 습성에서 벗어나 비어있음으로써 채우려는 욕구가 생길 수도 없거니와, 그 물음 자체도 생각지 못하게 되어 보고야만 믿는 제한적 幸福에 머물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매스컴에서 사람의 눈의 한계시간은 13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제한적이며 불완전한 인식의 기능으로 무한하며, 영원한 하느님의 사랑의 방식을 소유하고 파악하며 분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이미 어떤 물음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물음이 왜? 하느님은 굳이 남에게 보이고 싶고 보여지기를 원하는 인간의 습성을 내면의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기를 원하는지를 궁금해지기 시작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문을 닫아라’(마태 6.6)라는 의미는 나의 의식이든 무의식의 상태적 능력이든 일체 타협하지 않고, 그분의 방식으로 그분의 총애에 의해 그분과 영원한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하느님의 의도인 것입니다. 이것이 실체적 행복이며 이 행복이 바로 하느님께서 한 영혼, 한 영혼에게 주시고자 하는 보상의 방식입니다. 이 보상은 바로 하느님 자신의 현존인 영원한 생명 안에 참여시켜 일치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조금 더 말씀 드리자면 보이는 것에 대한 보상은 이미 받았다(마태 6, 2.5.1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받은 것이 무엇이며 또한 무슨 연유로 주셨고 또, 주신 그분이 누구신가를 물어가야 하는, 바로 이 의문이 하느님의 숨은 방식 속에 있는 부르심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바로 자신의 방식을 ‘항상 모름’에 두는 작은 자의 길이요 낮은 자의 자세이며 자신 조차도 모르게 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이것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태 16,3)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은 것의 일부분이며 이미 주어진 것은 주시려고 하시는 분의 의도를 알아듣게 하기 위한, 즉 자격의 준비를 갖추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여 이미 받은 것에 집착하기보다 부단히 보이는 것의 원인을 찾아 매 순간 왼손이 모르게 하고, 찰나 찰나마다 그 분을 만나기 위해 자신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는 행동이 바로 골방으로 들어가는 역동성이며 문을 닫아거는 처연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좁은 길의 행동과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작은 자의 실천에서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본능적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하는 습성인 것입니다. 이렇게 끝없이 끄달려온 방식에서 매순간 벗어남이 바로 기도(마태 6,5)요, 인간을 통해 하느님께 봉헌하는 진정한 자선(마태6,3)인 것입니다. 이 벗어버리려는 목적은 바로 숨어계신 아버지 하느님께 보이고자(마태6,18)하는 원의에 의한 것입니다. 자신만의 안심입명이 아니라 구세주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상의 사랑으로 한 영혼, 한 영혼을 잠 깨우는 방식인 것입니다. 해서 정화되지 않는 본능적 사랑의 방식으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방식을 알 수 없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감추어진 사랑이라고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방식을 통해서만이 왜? 하느님께서 숨어 계신가를 알게 되는 것이고, 또한 이 앎으로서 보이는 것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보여주시는 분의 의도로 보여지는 세상을 창조주 본래의 의도로 풍요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분
-기정만신부-
이상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어떻게 사제가 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 5년이라는 시간 동안 하느님께선 저에게 많은 것을 체험해 볼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일반 대학생으로서 해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것, 레스토랑 아르바이트, 주유소 아르바이트, 막노동, 성당 청년회와 교사 활동, 거리에서 호두과자 판매 등등. 물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정도는 안 되지만 그런 경험을 통해 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즐거운 시간은 성당에서 보낼 때였습니다. 경쟁도 남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성당에선 모든 것이 기쁘고 흥미롭고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하느님 아버지께 드릴 만한 것이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선 저를 고등학교 졸업 후 5년이 지나서야 당신 부르심에 응답할 용기를 주셨습니다. 전 그저 ‘하느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조그만 희망을 가졌을 뿐인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사제라는 커다란 선물을 주셨습니다. 예전엔 후회를 많이 하는 삶이었지만 하느님께서 희망을 주신 이후로는 후회도 미련도 없이 늘 기쁘게, 자유롭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제 삶을 통해 저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작은 희망을 항상 우리에게 주고 계시며, 우리가 그 작은 희망을 깨닫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주시는 작은 희망을 저희가 깨닫게 해주소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작은 희망을 깨닫는 순간,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분임을 깊이 온몸으로 온 삶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보상에 대하여
-김웅태신부-
1) 자선을 베풀때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2)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3)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래야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이상은 당시 유대인들의 선행에 대해 으례히 그만한 보상이 있만??믿던 생각을 바꿔 놓기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 때, 선행을 하고도 남에게 보였다고 해서 무슨 대가를 못 바란다면 그게 무엇이냐? 잘 하려는 의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지적하시는 것은 자신이 선행을 하는데 하느님께 대한 보상 뿐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을 보이기 위한 오만이 곁들여 있는 그 행위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보이기 위한 선행, 타인에게 인정 받은 그 선행의 보상은 사람들의 인정으로 이미 상을 받았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행할 때, 흔히 어떤 보상, 보답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크리스찬은 어떤 선을 행할 때, 행한 일에 보상을 바라보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선행을 행할 때 적게나마 또는 막연하게도 어떤 보상을 생각하고 행한다면, 그는 하느님을 회계원이나 재판관으로 생각하는 결과가 됩니다. 계산서를 제출하고서는 "나는 이 만큼 많이, 이런 좋은 일을 하였으니 이제 거기에 상당하는 보수를 청합니다!" 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이 지적해 주고 있는 바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일러 주시는 방식대로 하는 것입니다. 즉, 어느 누가 존경하며, 사랑하는 어느 누구를 마음깊이, 또 예의있고 열렬하게 사심없이 사랑한다면, 무엇을 해 주고도,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부족하게 생각할 것이며, 그에게 해와 달과 별을 다 주어도 오히려 빚지고 있다고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랑하는 자는 언제나 능력껏 다해 주고도 항상 부족함을 느끼며, 상대방에게 당연히 자신이 받을 것이 있다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이와같이 신앙을 가진 우리가 하느님 앞에 회계나 보상의 결산을 바라며 선행을 하는 것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건없이 하고도 항상 더 못해서 부족한 마음을 갖는 것은 그 행위에 있어서 마음 자세에 있어서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이렇게 사랑이 깃든 겸손한 자의 선행만을 은밀히 모두 갚아 주십니다. 아멘.
익명의 천사
-양승국신부-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한 노인시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소규모에다가 시골에 위치한 시설이었기에 후원자 찾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월말마다 운영자는 머리를 싸매야했습니다.
어느 월말이었습니다. 납부해야할 고지서, 지출해야 할 곳은 셀 수도 없이 많았는데, 쥐꼬리만한 정부보조금은 금방 바닥이 나고, 빚이라도 내야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깜짝 놀랄 일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시설 통장에 당시로서는 ‘거금’에 해당되는 돈이 입금되어 있었습니다. 익명으로 보냈기에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누가 보냈는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도 급했던 시설 운영자는 답지한 익명의 후원금으로 우선 급한 불을 모두 껐습니다.
그렇게 급한 불을 끄고, 새로운 달이 시작되었는데, 운영의 어려움은 여전히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다시 월말이 다가와 이곳저곳에서 독촉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운영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통장을 확인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똑같은 액수의 후원금이 도착해있었습니다.
그렇게 1년, 2년, 5년,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그 익명의 천사는 단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그렇게 생명의 후원금을 지속적으로 보내왔습니다.
10년이 흐르자, 그 오랜 세월 동안 한결 같이 도와주신 그분이 어떤 분일까 사람들은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무나 고마웠기에, 어떻게 해서든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완벽하게 추적을 따돌리는 익명의 천사 앞에 다들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약간의 편법을 써서 그 후원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는데,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된 사람들은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답니다.
그 오랜 세월, 그 많은 후원금을 꼬박꼬박 보내주신 걸 봐서 재벌이나 큰 기업을 운영하시는 분이리라 생각했었는데, 큰 오산이었습니다. 구조가 건강하지만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분이셨습니다.
어린 시절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분이었기에, 그리고 성장하기까지 고마운 분의 은혜를 많이 받은 분이었기에, 그 은혜를 익명의 자선으로 갚기로 결심하고 평생 실천하고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너무나 고결하고 아름다운 마음씨의 소유자였기에 시설운영자는 이런 사실을 세상에 좀 알려야겠다, 이런 분 같으면 상을 받아도 큰 상을 한번 받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매스컴에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 익명의 천사는 완고했습니다. 죽어도 취재는 안 된다는 신조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부지기수로 기자들이 찾아갔었지만, 그 때마다 딱지를 맞았습니다.
작은 성취 하나라도 어떻게 하면 사람들 앞에서 드러낼까 기를 쓰는 우리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익명의 천사, 그분은 진정 하느님의 천사이십니다.
그분은 복음의 정수를 실천하고 계시는 분, 참 신앙인이십니다.
그분은 열심히 하느님 나라에 보화를 쌓고 계시는 분, 그래서 언젠가 영광스럽게 불멸의 상급을 받으실 분,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분이십니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저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마태 6, 1-6)
-유광수 신부-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게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나팔을 불지 마라/ ...해서는 안 된다/ ...빈 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표정을 짓지 마라." 는 부정적인 단어들이 많이 나오고 반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너는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는 긍정적인 단어들이 나온다.
즉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해야할 것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왜 이런 구분을 지으면서 살아야 하는가? 과연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부정적인 모습이 많은가? 아니면 긍정적인 모습이 많은가?
우리는 비교적 "... 하지 마라"는 것은 하고, 반대로 "..하라"는 것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 각자 "..하지 마라."는 것 중에 내가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 하라"고 한 것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는 것도 무척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가? 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칭찬을 받고 싶어하고, 내가 하는 선행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예뻐 보이려고 화장도 하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화려한 경력이나 학력을 내세우기를 좋아한다. 이런 모든 행동들은 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들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행동들은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또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잘 사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은 늘 경쟁의 대상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이기려고 하니까 늘 다른 사람들보다는 모든 면에서 앞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질투가 생기고, 미움이 생기고, 급기야는 원수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이와는 정반대의 삶을 요구하신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칭찬을 받으려고 하지도 말고,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금식할 때에는 애처로운 표정을 짓지도 말고 오히려 남이 알아보지 못하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고 까지 말씀하신다.
도대체 이런 사람은 어떤 인생관을 갖고 살아가는가? 이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을 만큼 모든 것에서 초월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완덕을 추구하는 사람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한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무렇게 살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해야할 것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항상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의 삶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완전하신 아버지를 닮을 수 있는 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의 원칙은 분명하다.
즉 아버지를 닮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피할 것이고 아버지를 닮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취할 것이다. 반대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을 위한 것은 취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취하지 않을 것이다.
즉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늘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갈 것이고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늘 자기 중심으로 살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 자신을 섬기는 자세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남들한테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모든 관심은 다른 사람들한테 칭찬 받고 존경받는 것에 있다.
이런 사람의 마음 안에는 하느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마음이 허전하고 그래서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한테 관심과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늘 바쁘다. 그리고 여기 저기 쫓아다녀야 하고 좋은 것을 입어야 하고 항상 최고의 것을 지향한다. 그래야 남한테 칭찬받고 의롭다는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힘이 분산되고 산만하다. 안정되지 못하고 늘 쫓기며 불안해 한다.
반면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오직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가기 때문에 조용하면서도 모든 힘을 한 곳으로 모은다. 따라서 시간 낭비가 없고 힘이 분산되지 않으며 한 곳에 투신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는 소원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쳐 투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하느님한테서 힘을 받고, 그 힘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 발산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한테 힘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힘을 얻기 때문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한다.
사람이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세 가지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는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이고 두 번째는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이고 세 번째는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이다. 이 세 가지 관계는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관계는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이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잘 이루어 져야 다른 관계도 원만하게 이루어 지고 삶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피하고 해야할 것은 최선을 다할 할 때 완덕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은 한발작 더 가까이 나아갈 것이다.
† 십계명의 응용 : 자선, 기도, 단식 † -박상대 신부-
십계명의 응용: 자선·기도·단식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도래한 하느님나라에 통용될 새로운 "의로움"을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선포하셨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되었으며, 이 새로운 해석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의 틀을 깨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었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구현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구약의 의로움이 폐기된 것은 아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구약의 율법을 글자 그대로 준수함으로써 예수로부터 위선자로 책망 받기도 했으나 그들의 "의(義)"를 인정받았다. 이는 구약의 율법 자체가 유효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구약의 모든 율법과 규정의 근간이 되는 "십계명"(十誡命, Decalogue)이 건재(健在)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 도래한 하느님나라를 위해 선포하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나은 의로움이 십계명의 기본 정신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십계명"이라는 단어가 모세오경에 들어 있지는 않다. 이 단어는 17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오경(五經)에는 "증거판"(출애 31,18; 32,15; 신명 4,15), "훈계와 계명의 돌판"(출애 24,12; 25,16), 또는 "두 돌판"(신명 5,22)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새로운 의로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구약에 주어진 십계명(출애 20,2-17; 신명 5,6-21)의 참 뜻을 하나하나 새겨들어야 한다.
십계명은 유일(唯一)하고 참되신 하느님께서 그분이 선택하시는 백성과 맺으시는 계약이다. 그래서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유일하신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응답을 의미하며, 인간의 응답에 대하여 하느님은 자유와 해방을 선사하며, 이것으로 인간은 자신의 품위를 회복해 나가는 것이다. 십계명의 참된 의미에 대한 해설은 도서출판 "일과 놀이"가 펴낸 해설판 공동번역 성서를 읽어보도록 권하고 싶다.(116-119 페이지 참조)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십계명 전부를 열거하여 각각의 계명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해 주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행적은 십계명에 대한 충분한 풀이로 간주된다. 마태오복음 5장의 여섯 개 대당명제는 우선 십계명의 5계명부터 10계명까지의 새로운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오늘부터 토요일까지 4일간 평일미사의 복음으로는 산상설교의 둘째 부분(마태 6장)이 봉독된다. 마태오복음 6장은 대당명제와 같은 비중의 율법(律法)에 속하지는 않지만 신앙인으로서 지녀야할 성덕(聖德)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는 "십계명의 응용"인 셈이다.
예수께서는 신앙인의 성덕으로 자선(慈善)과 기도(祈禱)와 단식(斷食)을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제시하신다. 그렇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는 이미 유대교 안에서 널리 수행되었던 덕목(德目)들이며, 예수님 당대에는 특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선행(善行)을 쌓을 목적으로 사용했던 수단들이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하여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새로움은 무엇인가? 일단 이러한 선행(善行)을 수행함에 있어서 "일부러 남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1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선행이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수행되거나,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그 자체가 이미 상(償)을 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償)을 받기 위해서는 다음 선행지침을 엄수(嚴守)해야 한다. 즉, "자선을 베풀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것"(3절)이며,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할 것"(6절)이고, "단식할 때 얼굴을 깨끗이 하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할 것(17절)"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숨을 일까지 모두 보시는 하느님께서 보답해 줄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내리시는 선행지침을 글자그대로 따르라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 등의 모든 선행이 사람의 인정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숨을 일도 다 보시는 하느님을 지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선과 기도와 단식 등의 선행을 행하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이나 인정을 받고싶어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조그만 선행을 하고도 크게 불려서 나팔을 불며 떠벌리고, 남이 몰라주면 오히려 섭섭해하는 우리들이다. 자신의 선행을 남들이 알아줄 때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받을 상을 다 받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과 신뢰심과 겸손의 마음이다. 신앙인은 이웃에 대한 자선을 통하여 사랑을 배우게 되고,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를 통하여 신뢰심을 얻게 되며, 음식과 육정(肉情)을 절제하는 단식을 통하여 겸손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그리스도인의 선행 정신 †
지난 주부터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잘못 된 율법관을 재해석 해주시면서 우리에게 율법의 참뜻을 전해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알려주신 율법의 핵심은 우리가 저지르는 죄들을 행위를 기준으로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기준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즉 행위의 선행단계에서부터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원인을 차단해라는 뜻입니다. 쉽게 하나의 예를 들면 '마음으로 음행한 생각을 하는 것도 간음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다사회는 간음행위가 들어난 자를 돌로 쳐죽이는 행위결과 중심의 단죄를 했습니다.
요샛말로 표현하면 범죄예방교육 또는 정심(靜心) 수양을 우선하는 주님의 말씀들은 오늘복음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선행에서도 마음의 뿌리에 내재하고 있는 위선, 교만, 오만 등의 사악함을 근절하고자 하는 교훈을 3가지 사례를 들어 다시 설명해 주십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평상시에 지주하는 '자선', '기도', '단식'에 관한 선행의 지침입니다. 유대교에 의하면, 자선을 베풀고, 기도를 하고, 단식을 하는 자는 율법의 위반을 속죄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특별한 공로를 쌓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는 경건한 유대인을 나타내는 특별한 표지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세 가지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기로 합시다. 유대교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을 특별하게 돌보는 '자선'은 매 주일 각기 다른 장소에서 필요한 금전과 물품을 제공함으로써 실천되었고, 금전과 물품이 공정하게 배분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이 외에도 개별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을 높이 평가하며, 자선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기도'에 있어서는, 구약의 시편뿐만 아니라 후대에 저술된 유대교의 문헌들 역시 기도를 매우 진지하게 그리고 전심전력을 다해 실천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을 계속 그리고 영원히 찬미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에 있어서 '단식'은 속죄의 힘을 지닌 것으로서 공식적으로 규정된 단식 혹은 개인적인 단식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를 막게 되고,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은 불행으로부터 보호받게 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선업, 즉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그 당시에도 그러했거니와 지금에 와서도 좋은 것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실천되어야 할 내용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필요하고 실천되어야 할 선업들이 있다는 것을 소개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내용은 이 세 가지 선업의 소개가 아니라, 이들을 어떠한 자세로 행해야 하는지, 즉 '올바른 자세로써의 실천'을 전하려 하십니다. 올바른 자세로써의 실천이란, '나를 드러내기 위함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 때문'에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보듯이 우리가 평상시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얼마나 하느님의 생각과 다른 것인지를 깨닫도록 이끄셨고, 특히 오늘복음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곧 하느님이 주신 율법마저 우리의 생각으로 이용하거나 그 본의미를 헤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어제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우리 자신의 판단이 아닌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기준으로 서로를 대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오늘복음에서는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는 말씀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위선자들에게 해당되는 잘못된 자세들이 오늘의 말씀 안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의 행동', '칭찬을 받으려는 행동', '스스로 나팔을 부는 자세',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동'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들은 바로 위선자들의 자세로서, '하느님 때문'이 아닌 '나를 드러내기 위함 때문'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잘못된 자세 때문에, 비록 그것이 선업의 실천일지라도 아무런 의미나 효과가 없게되는 것입니다.
어제는 꼴보기도 싫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오늘은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사랑의 실천의 모습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또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참된 선행에 대한 가르침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자선을 베풀 때에 자선을 베풀 경우에도 상대를 도와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아량을 과시하고 어떤 개인의 감사나 모든 사람의 찬사를 받기 위해서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러한 일은 이미 자기가 받을 보상을 다 받은 것이어서 더 이상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2) 기도를 할 때에 기도를 할 경우 자기의 기도가 하느님 앞에 올려지기 위해 기도한다기 보다 사람들에 들려주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기도가 다른 사람한테 인정받고, 또 자기의 경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올바른 기도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3) 단식을 할 때에 단식을 할 때에도 하느님 앞에 겸손되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앞에 자기의 훌륭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보여주고자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 유대인들의 선행 정신
즉, 이러한 자선, 기도, 단식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선행의 큰 가치를 생각해 왔고 이를 잘 실천하는 사람이 존경을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들은 그들이 이러한 일을 한다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크리스찬은 하느님과의 은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한 예로서 어느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의 기도가 비교됩니다: 성전에서 오 하느님,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착한 일을 많이하며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 드립니다(바리사이의 기도).
*** 그리스도인의 선행 정신
- 우리 제자들은 선행을 할 때 : 자선을 베풀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게 은밀히 하라. - 기도할 때 :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 단식할 때 : 침통한 얼굴을 하지말고 기쁜 얼굴로 하라.
우리는 위 묵상에서 바리사이들의 선행 정신과 그리스도의 선행정신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선행정신으로 사는 삶을 원하고 계십니다. 다시말하면 우리의 올바른 행동은 사람의 마음에 들기보다는 하느님의 마음에 들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직접적이고 내면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며 실천해야 할 선업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선업들입니다. 그러나 실천에 앞서 더욱 중요히 생각해야 할 면은 그 자세입니다. 어떤 자세로써 내가 이 선업들을 실천하려는 지를 다시금 생각케 하는 오늘의 복음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하느님 때문에 행하는 선업들을 통해 받게 되는 보상이 있길 바랍니다. 그 보상이란 다름 아니라, 바로 '하느님 자신을 찾아 얻게 되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자랑하지 말고 겸손되이 합시다...(아멘)...............◆
[두올묵상팀] |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