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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광의예술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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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작품 소개 스크랩 시대를 빛낸 문화 예술가·이응노와 오윤
호산 추천 0 조회 469 14.04.08 15: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시대를 빛낸 문화 예술가·이응노와 오윤

 

 출처http://blog.naver.com/vingoho/100045482694

우리 같은 사람은 무단펌질을 매우 찬양하고 고무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맘놓고 무단펌했다.

이응노 전시회는 88년 당시 정동의 호암(삼성 이병철 호)아트홀에서 있었다.

김기덕과 같이 본 기억이 난다.

  

 

 

 

 

 

 


두 사람, 서로 다른 생애
그 둘의 춤, 통일무
과거와 미래 사이
최열/ 미술평론가


두 사람, 서로 다른 생애

이응노(李應魯, 1904~1989)가 태어나던 1904년 1월 대한제국 전역에 대규모의 일본 육군이 상륙했고 곧이어 일본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1906년 3월에서 5월 사이 민종식이 충남 정산 홍주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 무장 항쟁의 기치를 올렸으니 이응노는 이때 겨우 세 살이었다. 일본군은 80명을 살육하고 수백 명을 체포했지만 의병장 민종식은 바람처럼 움직여 11월 20일 체포당할 때까지 그 이름을 떨쳤다. 이응노가 태어난 이웃 땅에서 일어난 사건이었거니와 같은 해 큰아버지 청광자의 의병 기병은 어린 이응노에게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전설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의병 대열에도,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을 당했고 이때 큰아버님께서 자결하고 말았다. 일곱 살 이응노의 눈앞에서 펼쳐진 신화였다.

이응노가 마흔세 살 때 오윤(1946~1986)이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때 단독정부가 수립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오윤이 다섯 살 때 끝내 남북 사이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전시 임시 수도가 된 부산에서 자라나 열 살이 되던 1955년 상경한 오윤은 전후 황폐한 풍경의 서울에서 학창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오윤에게 전설이나 신화는 없었다. 이응노에겐 제국에 항쟁하는 의병의 장엄이 있었으나 오윤에겐 살육의 참혹만이 모두였다.

 


이응노는 열일곱 살 때 당진의 송태회 문하에 입문해 그림 수업을 하기도 했지만 시골에서 아무런 희망조차 없음을 깨치곤 몰래 가출하여 서울로 진출했다. 열다섯 번을 거절당한 끝에 입문한 김규진 문하에서 3개월만에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대나무 그림으로 입선에 올랐다. 첫 스승 송태회도 이때 입선하였으므로 1924년은 이응노에게 감격스러운 한 해였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묵죽을 한 아름 쳐서 미술 시장으로 가져 나갔지만 전혀 팔리지 않았고 이때부터 이응노는 가게 글씨와 영화 간판을 제작하는 간판집에 취업하였는데 어느덧 독립하여 사업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거꾸로 조선미전에서는 낙선을 거듭해야 했다. 다섯 해가 지나가고 여섯 해가 되던 어느 날 문득 비바람 몰아치는 대밭에서 그 ‘천변만화(千變萬化)’를 발견했다. 스물일곱에 이르른 청년 이응노에게 비로소 자득(自得)의 경지가 밀려들었던 것이다. 물길이 트인 것일까. 곧장 다음 해에는 황실에서 특선 작품을 구입하여 화단에 이름이 퍼지기 시작했고 1933년에는 개인전을, 게다가 당대의 문인 정병조로부터 고암이란 호를 받을 수 있었다. 내친 김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화와 서양화를 동시에 수련하기 시작한 때가 1935년이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미술협회 전람회와 새로운 의욕으로 출발한 일본화원 전람회에도 진출하여 기량을 뽐내는 가운데 1939년에는 제18회 조선미전에서 조선총독상을 수상하였다.

이응노의 도전이 거둔 열매는 달콤한 것이었지만 그저 획득한 것이 아니었다.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으로부터 비롯한 것이거니와 1939년에 화신화랑에서 개최한 개인전 제목을 ‘이응노 신남화(新南畵)전’이라 하였으니 자신의 세계야말로 가장 새롭다고 내세우는 당당함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30대 후반의 중견 화가로 성장한 이응노는 일본과 조선을 무대로 삼아 활동을 지속하였는데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3월 마흔둘의 나이에 귀향했다. 충남 예산 수덕사 어귀에 있던 수덕여관을 인수하여 고즈넉한 산중 생활에 접어들 무렵 닥친 해방의 소식은 또 다른 세계를 향한 부름이었다.

해방 공간에서 이응노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다. 서울에 올라온 이응노는 조선미술건설본부에 가담하고서 고암화숙을 마련하여 동료들의 집결지로 삼았으며 또한 단구미술원을 설립하는 의욕을 과시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해낸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진 대결의 시절이었다. 이때 이응노는 중도 노선을 지지하고 있었지만 특별히 정치 활동 일선에 나서지 않았으며 이런 태도를 1958년 12월 독일에 건너갈 때까지 유지했다.


이응노가 서구 세계로 떠나던 해에 오윤은 중학교에 입학했다.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학창 시절 오윤은 방학 때면 무전여행을 즐기는 자유로움을 만끽했으되 장차 농부를 꿈꾸는 소박하고 정직한 청년으로 자라났다. 1960년 4·19민중항쟁이 일어났을 때 오윤은 열다섯 살이었고 다음해 고등학교 1학년 때 5·16군사정변이 일어났지만 별다른 행동의 변화를 보여 주지 않았다. 말 없이 내성을 깊이 키워 나가던 시절이었으므로 세상의 변화를 주의 깊게 지켜보며 그 많은 것들, 이를테면 사회나 시대, 역사에서 불의에 대항하는 정의로움 같은 시대정신을 소화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열여덟 살 때인 1963년 누이 오숙희는 저항하는 지식인의 길을 선택하고 있었는데 뜻을 함께하는 동료 대학생 김지하를 소개해 주었다. 고등학생이지만 성숙한 오윤에게 불화에 관심을 기울이라는 도움말을 주었다. 동양 문화에의 문을 열어 주고 싶었던 것인데 이 무렵 오윤에게 그것은 흥미로움 이상일 수는 없었다. 농과대학 진학을 희망하고 있었으므로 그림 재능은 단지 타고난 것으로 유희에 지나지 않았던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가인 아버지는 농과대학이 아닌 미술대학을 허락했고 오윤은 한 차례의 낙방 끝에 1965년 스무 살 나이로 서울미대 조소과에 합격했다. 조소과에 입학한 오윤은 가장 큰 명성을 떨치던 헨리 무어, 마리노 마리니와 같은 거장의 조소 세계를 배웠다. 그리고 그제서야 김홍도의 풍속화와 민간 장식화 그리고 오륜행실도는 물론 나아가 돈황 벽화와 멕시코 미술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이때 오윤이 산대놀이, 판소리, 농악에 심취하여 온갖 연희 현장을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 다녔으니 삶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김지하와 연관 짓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1969년 김지하와 더불어 현실 동인을 조직하고 김지하가 장문의 선언문을 써 주었을 때 오윤이 멕시코의 디에고 리베라의 양식을 수용하여 4·19민중항쟁을 소재로 한 작품 <1960년 - 군상> 발표를 준비한 일만으로도 쉽게 헤아릴 수 있는 일이다.
55살의 나이에 이른 이응노는 ‘유럽을 비롯한 세계의 화가들과 대결하겠다’는 마음으로 독일에 건너갔지만 대결보다는 먼저 가족의 생계가 걱정이었다. 마침 ‘서양과 동양의 가교를 이루는 작품 세계’라는 평가와 더불어 인정 넘치는 구매자의 등장으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독일 활동을 마감하고 1959년 12월 파리로 건너간 이응노는 어떤 사건 탓에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고 이때 쓰레기통에서 주운 낡은 잡지를 찢어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게 바로 꼴라쥬 연작이다. 난관을 극복해 가는 데는 서구 미술인들이 동양 회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당시 풍토야말로 가장 커다란 힘이었다. 정신없을 만큼 여러 곳에서 이응노의 작품을 원했고 마음껏 출품했다. 더욱이 1964년에는 파리 시립동양미술관의 협력으로 관내에 동양미술학교를 개설하여 제자를 거두는 데 이르렀으며 1965년 9월에는 제8회 쌍파울로 비엔날레에 초대 받아 명예대상을 수상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영광을 누리고 있던 1967년 예순네 살의 노화백 앞에 운명의 사건이 다가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민족문화를 선양한 선생을 초대하여 발전하는 조국의 모습을 비밀리에 시찰해 달라는 뜻을 파리 한국대사관의 공사관으로 하여금 전달했다. 이응노는 ‘불현듯 치밀어 오르는 그리움’에 수락했다. 조국에 도착한 이응노, 박인경 부부는 공항에서 곧장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고 영문도 모른 채 북괴의 간첩으로 둔갑해 버리고 말았다. 터질 듯한 가슴을 부여안고 눈물을 흘리는 순간 중앙정보부는 동베를린 거점 북괴대남적화공작단 사건을 발표하고 있었다. 7월 15일 제6차 발표 때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교육을 받으면서 공작금 수천 달러와 암호표 따위를 수령한 부부 간첩이 탄생했다. 12월 6일 이응노에게 무기징역 구형이 떨어졌고 또한 독일에서 활동하는 위대한 음악가 윤이상에게는 사형 구형이 떨어졌다. 그리고 9일, 공판에서 구형한 대로 선고되었다. 간첩이라고 했던 박인경에겐 차마 더할 수 없었던지 6개월만에 석방했거니와 이 부부 간첩 사건은 이응노 생애에 가장 경이로운 현실이었고 실제로 예술 세계의 전환을 이룩할 수 있는 개벽이었다. 한국 미술 사상 눈부신 옥중 창작을 잉태시켰을 뿐만 아니라 예술과 미학의 전환을 준비하게 해 주었으니 뒷날 이응노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개성에 넘치는 양식인 <군상> 연작을 토해 냈던 것이다. 이응노가 파리로 귀환한 것은 2년 8개월만에 형 집행정지로 석방된 1969년 3월 이후였다. 프랑스와 독일 전역 심지어 교황까지 참가한 윤이상, 이응노 석방 운동의 힘이었다. 파리로 귀환한 이응노는 투옥 시절을 ‘사회를 배우게 해 준 학교’라고 일렀다.


1969년에 박정희는 삼선개헌을 추진하여 장기 집권 의욕을 드러냈고 이에 야당 및 재야세력의 저항이 물결을 이루던 때였다. 대학 4학년생 오윤은 김지하를 비롯한 동료들과 더불어 미술 단체를 구성하고 그 이름을 ‘현실동인’이라 지었다. 전시회를 10월에 열기로 하고서 발표작품 제작에 혼신을 기울이는 한켠에서 길고 긴 선언문을 준비했다. 선언문은 김지하가 집필하고 오윤이 함께 윤독하여 확정지었다. 개막 일이 다가오면서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벽보는 개막 당일에 배포하기로 했으나 누군가 하루 전날 미술대학 건물에 붙였고 이를 발견한 교수가 해당 학부모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현실동인의 ‘현실’이라는 낱말이 ‘불온’하므로 이 전시를 사전에 봉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베를린간첩단에 이어 통일혁명당 사건이 줄을 잇고 있던 터에 박정희는 계속 집권하기 위해 철권통치를 하던 암흑의 시대였다. 교수와 학부모 누구 할 것 없이 공포 속에서 스스로를 검열하였던 것인데 제자와 자식의 안녕을 위해 끝내 전시를 막고 말았다. 오윤은 항의하는 뜻으로 준비한 모든 작품을 스스로 파괴해 버렸다. 그러나 역사마저 봉쇄당한 것은 아니었다. 오윤의 미학과 창작 방법이 고스란히 선언문으로 남았고 또한 그 주제 의식은 꼬박 10년 뒤 바로 그 오윤에 의해 화려하게 꽃피웠다. 오윤은 다음 해 갑오농민전쟁을 소재로 삼은 조각 작품 <황토현>을 졸업 작품으로 제출하고서 광화문에 테라코타 연구실을 개설했다. 한껏 흙과 불 속에 파묻혀 세월을 보내고 있을 즈음 스물여섯의 나이에 나온 영장을 받고서 입대하였다.

파리로 귀환한 이응노에게 프랑스 정부는 작품 구입으로 지원을 계속하였고 특별히 일본에서도 관심을 기울여 1970년 오오사카 국제미술전에 초대를 받았으니 이응노는 창작의 열정을 되찾아 생애의 마지막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연이어 서울의 화랑에서 기획전이 열리기도 해서 조국에서의 고통을 씻어내는 듯했다. 하지만 1977년 윤정희, 백건우 부부가 북한으로 떠나는 이른바 ‘납치사건’이 일어났고 여기에 이응노 부부가 개입했다는 정부의 발표에 따라 또다시 어이없는 배신감에 휩싸여야 했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응노와 오윤은 아무런 인연이 없는 듯했다. 실제로 두 사람 사이에 그 어떤 만남도 교감도 없었다. 하지만 그해 오월 광주에서 일어난 학살과 항쟁은 두 사람을 하나로 엮어 주었다. 일흔일곱의 노화가 이응노는 “광주항쟁을 계기로 내 그림도 변화되었다. 1967년부터 3년 동안 형무소 생활은 단지 내면의 싹이었을 뿐이다”라고 회고하고서 “이제부터 나 자신 스스로 저 민중 속에 뛰어들어 여생을 보낼 생각이요, 매일 매일 군중의 외침을 화폭에 옮겨 내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서른다섯 살의 오윤은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고서 6개월 뒤 ‘현실과발언’ 동인 창립전에 참여하여 꼬박 10년 전 이루지 못한 현실동인의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지금껏 지켜 온 미술의 순수 신화를 깨뜨리고 사회 현실에 접근하는 미술, 민중과 함께하는 미술을 주장하는 가운데 ‘현실로부터 소외된 조형의 사회적 효력성을 회복하는 일’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응노는 오랫동안 지켜 온 국적을 1983년에 포기하고서 이때부터 활동 무대를 일본으로 옮긴 듯 잦은 왕래를 통해 조국의 가장자리를 맴돌며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인간 군상 연작을 국제무대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외침이었고 머나먼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대한 지원이자 합류였다. 오윤은 광주항쟁 이후 청년 활동가들의 눈부신 활동으로 펼쳐지기 시작한 민중미술 운동의 대열에서 단 한순간도 이탈하지 않았다.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건강 탓으로 최전방에서 활약할 수 없었지만 노동자나 농민 스스로 창조하는 ‘자생적인 대중 미술’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가운데 당시 시민미술학교와 같은 민중미술 교육 활동가들과 깊은 유대와 교감을 나누었다. 한 사람은 파리에, 한 사람은 서울에 있었으나 두 사람은 나란히 바로 그 민중을 중심에 두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나갔던 것이다.

 

 


1983년 나이 겨우 서른여덟의 오윤에게 닥친 병마는 그 생애만이 아니라 막 시작한 민중미술 운동의 불행이었다. 입원하고서 한 달 가량 머물던 오윤은 스스로 무당(巫堂)임을 선언하고 병원을 빠져 나와 강원도 홍천을 떠돌며 자가 요법을 통해 운명과 맞서기 시작했다. 학교와 학원 강사를 사직하고 그해 문제작가 선정도 거부한 오윤은 당시 민중미술 운동의 핵심 부위에 서서 열정에 넘치는 창작과 발표를 그치지 않았거니와 특히 현실동인의 전통을 장악한 오윤은 그 미학과 방법에 거점을 둔 판화, 회화를 숱하게 공급함으로써 많은 청년 활동가들에게 강렬한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실제로 홍성담, 이철수, 김봉준을 비롯한 광주자유미술인회와 두렁 집단은 물론, 숱한 청년들에게 오윤은 형님이자 선배이며 존경의 대상이었다. 또한 오윤은 남도 지역을 유랑하며 판소리, 육자배기, 북춤의 가락에 몸을 싣고서 이애주, 채희완 같은 민중 춤꾼들과 더불어 고통받는 노동자 농민의 피땀을 씻는 해원(解寃)의 무당 춤에 스스로를 바쳐 나갔다. 병든 몸을 추슬러 1986년 5월 ‘칼노래’란 이름의 생애 첫 개인전을 서울에서 열고 부산에서의 순회전을 마친 며칠 뒤 7월 5일 숨을 거두었다. 마흔둘의 요절이었다.

오윤이 세상을 떠나던 해, 동경 현대미술관에서 군상 연작으로 조국의 독재자를 향해 포효하던 이응노는 다음 해 1987년 부인 박인경과 함께 평양으로 건너갔다. 조선미술박물관에서 2인전을 열었던 것인데 분단에 대한 저항과 통일의 열망을 그 누구보다도 앞서 실현하고자 했던 의지의 실현이었다. 그리고 1988년 1월 1일 호암갤러리에서 고암 이응노전이 막을 올렸다. 간첩 화가이자 10년 간 금기의 작가요, 더욱이 지난 해 평양에서 전람회를 열었던 그이의 서울 작품전, 그것도 대규모 회고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대 사건으로 6·10민주대항쟁에 밀려 힘을 잃어 버린 독재정권의 후퇴와 함께 그 순간 솟아 오른 무지개였다. 새해의 대충격은 개막 열흘만인 1월 10일 이응노가 여든여섯을 일기로 숨을 거둠으로써 비탄으로 바뀌었고 전시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둘의 춤, 통일무


이응노가 사군자와 단청으로부터 시작하여 표구와 영화 간판에 이르는 수업기를 보내다가 일본에 건너가 일본 회화 및 서양 회화 전반을 아울렀음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것은 오윤이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동서양 미술을 아우르며 민간 연희에 탐닉했던 수업기와 같은 일이었다. 이응노가 초기에 조선미전 연속 낙선을 당하고 또한 해방 뒤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소외당해 끝내 파리로 떠나는 질곡은 오윤에게 있어 현실동인전 무산과 그 충격으로 침묵의 유랑을 떠나는 고통과 같은 것이다. 오윤이 1977년 아호를 개도치로 짓고서 동학농민전쟁, 한국전쟁, 만주 유민사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현실과발언’을 창립하고서 민중미술 운동의 맏아들로서 젊은이들의 정신을 이끌어 나간 일은 이응노가 1967년 투옥 당한 이래 민주화와 통일의 소망을 키우며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국적을 포기하고 반체제 세력의 해외 역량임을 자처해 나간 일과 온전히 같다. 비로소 이들이 하나의 시대, 하나의 물결 위에 만난 것이다.

1980년 이후 몇 해 동안 전력을 기울여 쏟아 낸 그것은 다른 형상, 하나의 미학이요 다른 사람, 하나의 정신이다. 이응노는 전공인 수묵 채색을 넘어 이미 일상의 재료들로 숱한 실험을 해 온 작가였으며 오윤은 전공인 조소 예술을 벗어나 오직 권진규가 탐닉했던 테라코타에 관심을 기울여 분방한 세계를 개척했으니 이 또한 같다. 이응노는 1986년 동경도미술관에서 열린 ‘인인(人人) 전시회’ 때 다음처럼 말했다.


“나의 그림은 추상적인 표현이었으나 1980년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은 뒤로 좀 더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구상적인 요소를 그림 속에 가져왔다. 2백 호 화면에 수천 명 군중의 움직임을 그려 넣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그림을 보고 이내 광주를 연상하거나 서울의 학생 데모라고 했다. 유럽 사람들은 반핵운동으로 보았지만 양쪽 모두 나의 심정을 잘 파악해 준 것이다.”
이응노는 이미 1960년대 전반기에 수묵으로 인간 군상을 화폭에 담았다. 얼핏 추상화된 기호처럼 보이는데 거친 발묵(發墨)으로 말미암아 유희와 격정이 함께 어울려 강렬한 기운을 뿜는다. 이러한 기운은 1970년대의 군상에서도 비슷한데 ‘우리가 살길은 조국 통일 뿐, 통일무’라는 화제(畵題)를 써넣은 1981년의 조그만 소묘야말로 어떻게 1980년 이전과 이후의 인간 군상이 다른가를 알려 주는 증거다. 1979년의 한 작품에는 ‘공간과 선의 춤, 통일 조국을 생각하는 춤’이라고 썼고 또한 옥중에서 밥풀과 신문지를 짓이겨 제작한 인간 군상 조소작품을 1981년에 다시 제작하고 있으니 그 격정에 찬 동세가 뜻하는 바의 차이를 강조할 이유는 없겠다. 하지만 1980년 이후 점차 국내 민주화운동이 무르익어 갈수록 인물 동작이 격렬함을 더하는 가운데 한 화폭에 수천 명이 운집한 장대한 구도의 대작이 1983년을 기점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점을 헤아려 보면 다름이 뚜렷함을 간단히 알 수 있다. 어떤 작품에도 제목을 달지 않고 있는데 하늘을 메운 새 떼의 흐름과도 같고 우주를 수놓은 은하수 물결과도 같은 구도의 군상은 매우 다양한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다. 때로는 무질서한 듯 사방팔방으로 펼쳐지고 있거나 또는 ㅇ, ㄹ 형태의 물결 흐름을, 또는 10명이 손을 맞잡은 수십 무리가 대열을 형성하거나 철망 구조를 갖추어 나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격렬한 분노의 회오리가 몰아치는 화폭을 탄생시키기 시작한 1983년 오윤은 너무나도 굵은 선과 흑백 대비가 살벌한 판화 <대지>와 <애비>를 세상에 내놓았다. 자식을 데리고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을 것만 같은 장엄함으로 음흉한 자들을 바라보는 이 작품은 내일을 향한 서시로써 더불어 내놓은 <사상체질도>, <사상팔면도>의 추악한 지배자를 향한 분노의 시선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걸작을 내놓은 1983년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1985년 그는 저 유명한 <칼노래>와 함께 춤 연작을 쏟아 냈다. 때로는 흑백으로, 때로는 채색으로 강렬한 기운을 내뿜는 춤 연작은 농민과 노동자, 무당과 도깨비, 노인과 청년, 여성과 남성, 산 자와 죽은 자를 등장시켰다. 세상과의 불화에 맞서 견뎌 나가는 그 민중들은 따지고 보면 모두 세상을 치유하는 무당이자 온몸으로 세상의 귀신들에 맞서는 개도치 자신이었다. 1984년의 작품 <원귀도>는 옆으로 5미터에 이르는 두루마리 회화인데 화폭 안 인물들은 모두 역사의 상처를 안고서 치유를 향해 해원의 길고 긴 길을 떠난 자들의 이야기다. 그이들이 춤 연작에 들어와 씻김굿을 하고 있음을 헤아리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윤은 위기에 처한 인간과 예술의 구원을 위해 ‘살아 온 숨결이고, 맥박이고, 혼이고, 민중이 살아 온 삶 그 자체’인 주술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고 또 자신이 만든 탈 작품이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 그 탈은 어느새 살아 움직이는 생동하는 형상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일그러진 세계를 혁명하기 위하여 다음처럼 해야 한다고 했다.

“세계의 확대라는 것은 비단 어떤 방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작가 자신의 자기 해방을 비롯해서 스스로 그것을 넘어서는 춤이어야 한다. 자신이 춤을 추지 않는 한 신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외형적 껍질만 무수할 뿐이다.”
이응노의 군상 연작이 도달한 세계를 그대로 설명하는 듯한 오윤의 이 말은 또한 자기 자신의 춤 연작이 다가선 세계를 고스란히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응노가 군상 연작의 모습을 통일무라 하였으니 이어 오윤의 <통일대원도(統一大願圖)>에 써넣은 춘무인추무의(春無仁秋無義) 깃발을 들고 어울려 추는 춤을 어찌 통일무라 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두 작가의 화폭에 펼쳐지는 춤은 다르다. 이응노의 춤은 막춤이지만 오윤의 춤은 춤꾼의 그것이다. 이응노의 춤은 수천의 합창이 빚어내는 조화음이지만 오윤의 춤은 오직 한 사람의 빼어난 가락이다. 하지만 말이다. 그 몸짓과 가락이 어찌 다를 것인가. 살아 있음과 죽음의 경계 너머 한 몸에서 비롯된 것이요 고통과 좌절, 열정과 희망이 뭉뚱그려진 생명의 기운이 그대로 녹아 있으니 그 둘의 춤은 끝내 하나일 뿐이다.

과거와 미래 사이

이응노는 1986년 군상 연작의 한 화면에 군중들로 하여금 ‘반전평화’란 문자 형태의 대오를 전개하였다. ‘화가의 무기는 그림’이라고 천명했던 이응노가 그 무기로 평화를 이야기한 것이다. 그리고 오윤은 1985년 고난을 겪어 온 민중들을 꽃잎 속에 모시는 <팔엽일화>를 새겨두었다. 미술의 상상력으로 ‘세계의 확대’를 꾀해야 한다고 선언했던 오윤이 바로 그 미술로 완전한 세계를 그려 낸 것이다. 오윤은 1985년에 발표한 글 ‘미술적 상상력과 세계의 확대’에서 “언제부터인가 현세만 남기고 전생과 후생의 두 세계를 우리로부터 떼어 버렸다”고 지적하면서 전통 문화를 비과학, 비문명으로 내쳐 버린 결과 ‘자기 부정, 자기 상실’에 도달하였고 미술은 죽음에 이르렀다고 비판하였다. 오윤은 힘의 근원을 과학이나 해부학 따위 근육의 작용만이 아니라 직관 경험의 작용을 근거 삼아 내면의 기운을 표현해야 한다고 했다. 그 ‘열린 마음의 자유로운 유영’으로 ‘세계와 세계를 연결’함으로써, 다시 말해 과거와 미래를 하나로 통일시킴으로써 메마른 시대의 황폐한 세계를 구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응노가 자신의 서예 추상을 설명하면서 ‘글자가 아닌 획과 점들이 무형의 공간에서 자유자재로 엮어 내는 무형의 발언’이라고 해석하고서 말한 바 ‘자연 물질과의 융화야말로 나의 예술의 원동력’이라고 했던 생각과 뿌리를 같이 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세계관과 미학은 동서 융합의 기나긴 역사를 밟아 온 현대 아시아 문명사의 한 매듭이다. 프랑스 사람 미셸 타피에는 이응노의 그것을 ‘주술적인 매력이며 마술적이고 범신론적 미학’이라고 해석했는데 그러한 평가가 극동 아시아라는 지역으로 제한시켜 놓은 채 거둔 성취라고 축소하는 뜻이라면 특수한 세계의 독창성을 찬양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윤이상이 독일에서 거둔 음악사의 성취가 동서 융합의 토대 위에서 거둔 보편성을 지닌 것이듯 이응노가 프랑스에서 거둔 그 성취 또한 다른 것이 아니다. 다만 여전히 서구 사회가 동서 차별의 미신에 사로잡혀 있으니 수묵담채화와 같은 동양 고유 회화를 특정 인종과 주변 지역의 특수 산물로 규정하는 한 이응노나 오윤의 그것은 여전히 세계 미술사의 주류를 벗어난 주변 지역의 가치 이상으로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서구의 시선은 극동 문명이 서구 문명에 필적할 만큼 강력히 성장하는 21세기 어느 지점에서 수정될 것이다. 그와 같은 전망은 가능한 미래의 몫으로 두고 한반도의 시선으로 헤아려 두어야겠다.

이응노와 오윤은 살아 생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생애의 끝 무렵 반독재 민주화와 분단 극복의 민족운동 대열에서 통일무로 만났다. 두 사람의 작품은 20세기가 낳은 눈부신 성취로써 한국에서 높은 평가를 획득하고 있는데 이응노와 오윤이 현대 서양의 방법론과 함께 동양 고유의 고전예술을 지극히 다양한 형태로 변용하여 절정의 양식을 창출해 냈다는 것이다. 이응노는 파리로 떠나기 앞서 이미 동서 융합을 이룩한 대표 작가이자 전통의 관점에서 볼 때 ‘이단 화가’란 칭호를 부여받고 있었지만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는 가운데 서예 추상 또는 문자 추상과 같은 양식으로 격찬을 받았고 생애 끝 무렵엔 군상 양식으로 동양의 수묵채색화가 도달해야 할 경지에 올라섬으로써 거장의 세계를 구축해 놓았다. 오윤은 그 짧은 생애에도 주류의 서구 추종 대열에서 이탈하여 ‘자기 문제를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 쉬운 표현 방법의 개발’을 실현함으로써 소수의 열렬한 지지자를 획득했고 생애의 마지막엔 오직 자기만의 양식을 이뤄 냄으로써 미술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이러한 성취로 말미암아 두 작가는 살아 있을 때 획득한 높은 평가에 더하여 사후 20여 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 더욱 큰 영광을 누리고 있는 중이다.

20세기 한반도에서 정치 사회 현실에 개입하고 비판하는 미술과 그 운동은 정치 권력의 억압과 더불어 미술관을 비롯한 개인 소장가로부터 배척당해 왔다. 심지어 한국전쟁 이후 남한 사회에서 사회 비판을 꾀하는 사실주의 및 행동주의 미술은 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이 있기까지 암흑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조건을 극복해 온 미술 운동의 복판에서 적자로 활동한 오윤과 해외에서 세계관의 전환을 이룩하여 미술의 무기화를 제창한 이응노가 사후 갈수록 명성과 가치를 더욱 높여 나가고 있음은 우리 사회의 근본이 점차 바뀌어 가고 있음을 말해 주는 증거이다. 얼마 전 별세한 소장가 조재진의 컬렉션 일부가 민중미술이었음은 요즘에야 알려졌지만 이런 경우는 희귀한 예로서 여전히 정치 사회성 짙은 행동주의 미술의 터전이 척박하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응노와 오윤에 대한 사후 평가가 그 터전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으니 21세기 한반도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여기서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응노와 오윤은 이미 추억이다. 그이들의 시대는 가 버렸고 현실 또한 많이 변했다. 하지만 한반도 통일을 향한 열망과 반전 평화를 지향하는 구상은 여전히 미래 과제이며 이상 사회 실현은 난망스런 미래이다. 또한 지난 200년 동안 추진해 온 서구 이식에도 불구하고 조화로운 동서융합의 실현은 아득해 보인다. 아니, 오히려 서구 문명의 과잉 속에서 겪고 있는 열등 의식이 팽배해지고 있으며 조선, 극동의 유산은 살아 있는 문화가 아니라 관광의 대상으로 전락해 가고 있는 듯하다. 이응노는 물론, 오윤은 그와 같은 서구의 과잉을 일찍이 감지하여 동양의 민간 문화로부터 생명의 원천을 회복하고자 전력을 기울였고 그 요소를 추출하여 작품의 주제와 양식 그리고 방법론으로 환원시키는 데 혼신을 다 했다. 이러한 두 사람의 노력은 최근 근대주의 성찰에서 비롯하는 다문화주의와 같은 새로운 사유 체계 안에서 가치를 발휘하고 있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근본적으로 이응노가 한순간도 잊지 않았던 ‘자연’ 그리고 오윤이 과학을 비판하면서 자신을 투영하고자 했던 ‘주술’에서 짐작할 수 있는 바처럼 진보주의 세계관에 대한 성찰이야말로 훨씬 가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어떤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두 작가가 추구해 온 모든 것들을 더욱 세심하게 살펴야 할 것이고 또한 지워 버린 과거가 아니라 현재 그리고 미래에 항상 살아 있는 추억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더욱 지극한 존경과 뜨거운 사랑을 쏟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들에게 지워진 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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