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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숲 우화 외 4편
이화영
암록의 허물이 얹어 있는 겨울 숲의 일이란
붉은 의심을 떠나보내고
시리도록 맑은 풍경을 비워두는 것이다
몸 하나 버릴 것 없이 온 몸이 공양인 계절은
뿌리에서 불 같이 타오르는 묵음 뒤로
지상의 배후는 사는 일이 차갑다
차가운 관능을 한 줄 문장으로 풀어놓았는지
저무는 산그늘이 검푸르다
낡은 슬픔으로 피어있는
병속의 마른 꽃들에게
냉동실에 넣어 두었던 나비유충을 보낸다
목이 잘린 물物들의 핏기와 향이 사는 오래된 방
나비는 날개를 펴 보지도 못하고 죽어갈 터인데
어깨를 맞대고
서서히 꺼져가는 숨결을 어루만져주는 일도
실은 다른 이름의 부화라는 걸
나비는 알까
별조차 없는 어둠 속 천지에서
짝을 잃고 미쳐버린 나비 한 마리를 위해
결로의 아침을 비워둔다
나와 같고 나를 빨개지도록 썼고
축축하고 물기 있고 젖어있는
계단의 시간
목재루버계단으로 햇살이 쏟아진다
계단에 앉아 오지 않을 그를 기다린다
그리움이 극렬해지면 죽음을 몰고 오기도한다
누가 놓고 갔는지 쑥부쟁이 한 다발이 놓여있다
저 꽃도 계단에 기대어 꺾여버린 지상의 꿈을 꾸고 있을까
시간이 졸아드는 동안
제 그림자를 먹은 공간은 치즈처럼 늘어졌다
고요가 벽을 친다
그의 수줍은 미소도 내 어깨를 벽으로 몰았었다
그 순간은 말이 녹아 없어졌다
스크린 가득 흐르는
호르몬의 탱고가 눈썹에 떨어졌다
가슴에 손을 대면 숨 찬 나이테가 느껴졌다
계단을 오르는 개미의 밀교를 더듬어 가면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줄지어있다
가늘고 긴 이별은 모범적이어서 지루했다
메마른 바람이 불어오면
바람의 목소리로 환幻을 불러들였다
저무는 저녁이 아슬하고 멋져서
잊으려 했지만 그리 하지 못했다
태양을 먹은 소리는 냄새를 기억한다
*1954년 만들어진 트로트곡
소접素蝶
시끄러운 가을비가 다녀가고
나비가 날개를 펴는 법을 잊었다
나비의 젖은 날개를 결 따라 천천히
한 장씩 찢어 날렸다
일몰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울음이 되어버린 사내가
결빙의 시간 속에 자신을 가두어
염전의 우물 속으로 들었다
흰 폐를 소원하여 맑은 숨을 기도했으나
끝내 비인칭 물고기가 되었다
내장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물고기가
상한 지느러미로 느리게 밤하늘을 거슬러 올라간다
거친 날숨은 몸속에 흰 알을 슬어놓고
존재 한 적 없는 고요 속에서 별을 틔웠다
손을 빌어 별을 훔치고 싶었으나
죄를 더하는 일이 될까 귀로 훔치었다
눌러 붙은 겹눈은 뒤로 사라져가고
갸름한 더듬이는 갸륵하게 몸 안으로 시들었다
축축한 것들에 대한 기의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나와 다른 것은 두렵도록 닮았으므로
어제는 바깥을 오늘은 안쪽을 지웠다
동공이 사라진 텅 빈 눈 속이
제 어둠인 듯 흰나비가 떼 지어 날아올랐다
물이 나에게
수초와 돌 틈을 유영하는 물고기를 본다
물의 느낌이 얼마나 좋은지
저들의 지느러미를 보면 알 것 같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물보다 빠르게
투명한 막을 가르면서
오래된 정인처럼
빠져나가는 물길 슬그머니 당기었다
풀어주는 지느러미 활
꼬리의 탄력이 들려주는
낮은 통주저음에 귀를 기울인다
음표가 하나씩 거품으로 사라질 때마다
태어나는 맨발의 아가씨들
나는 그들에게 다가 갈 수 없으나
내 옆구리를 스쳐 간 안부를 묻었고
그들의 가락을 들어 본 적 없으나
내 귀는 심해의 변주에 대하여 길 들여져 있다
은밀하게 거래 되는 수신 없는 발신
미지의 행성에서 이름 없는 혈족으로 떠돌다
오래 전 바다 밑에 순장 된
나는 하백의 이름 없는 여자인지도 모른다
사이프러스
오는 소리도 없이
숲으로부터 맵찬 바람이 불어온다
겨울이 깊어가는 지
한 낮인데도 어둑어둑하더니
길 위의 죽음처럼 눈이 무진하게 쏟아진다
서늘한 오늘을 종이삼아 몇 자 기별을 전한다
지는 소리도 없이
이파리가 질 때
생이 저만큼 멀어져가더라도
땅에 닿는 순간까지 생명을 담아
사이프러스 사이프러스……
순례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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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에스프리 / 이화영
나의 글쓰기에 대하여
-나비를 기다리며
이 화 영
연암 박지원은 글 쓰는 자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동심문학론≫을 보여주었다.
“아이들이 나비를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司馬遷)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앞다리는 반쯤 끓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 손가락을 벌리고 앞으로 가서, 손이 닿을 둥 말 둥 할 때, 나비는 날아가고 만다. 사방을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열적게 웃고, 성난 듯 부끄러운 듯한 이 경지가 바로 사마천이 글 지을 때다.”
―박지원 『연암집』 권5, <答京之>(三)
“시뻘건 얼굴이나 수염은 염연히 관공(關公)이다. 남자나 여자나 학질을 앓는 사람을 그 좌상(座牀)아래 들이밀어 놓으면, 당장 질겁하고 그만 춥고 떨리던 증세가 도망하고 만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무서운 줄 모르고 위엄과 존경을 모독해서, 그 눈망울을 굴려보지만 끔벅거리지 않고, 콧구멍을 쑤셔 보지만 재채기도 하지 않는다. 덩그렇게 흙으로 만든 소상(塑像)에 지나지 않는다.”
―박지원 『연암집』 권7, <영처고서(嬰處稿序)>
아이들의 자세를 통해 기존 권위를 넘어서는, 당대의 현실 속에 살아 움직이는 역동성을 지닌 문학론을 표명하고 있다. 나비를 잡으려고 할 때의 상황, 문학하는 자세와 관우의 소상을 통하여 죽은 문학을 비판한 글이다.
때 없이 나비를 찾아 다녔다. 상상과 관념을 넘나들며 나를 떠난 나비, 내가 떠난 나비, 나를 찾아오고 있을 나비, 내가 찾아 떠나야 할 나비를 비오는 거리에서 눈 내리는 공원에서 바람 부는 숲에서 찾아 헤맸다.
나비의 실체가 보고 싶어 얼굴이 붉어지고 눈물이 패이고 때론 꼬꾸라지는 날도 있었다. 예전의 내가 없이는 지금의 내가 존재하지 않듯, 옛것을 받아들이되 변화를 알아야 하고 새로운 것을 알아야 하되 옛것에 능해야 한다는, 연암의 <法古創新>에서 참된 경험이 바탕이 될 때 눈과 귀가 열리고 손이 풀리는 깨달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수천의 나비가 다녀가셨는지 날 것의 비린내가 코끝으로 쏟아졌다. 나비를 입안에서 되뇌다 보면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Na’vi)족이 떠오른다. 나비족의 언어는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 언어를 근거로 탄생된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언어에는 살아있는 숲, 생명체의 교감이 천지 구분 없이 떠다니며 숨 쉬고 있다.
숨은 소리이다. 피어나는 것이고, 걷는 것이며, 날개를 활짝 펴는 것이다. 눈빛 하나만으로도 모양과 맛이 넘치는 온기의 언어다. 풀잎에 맺힌 이슬은 식물이 추울 때 흘린 땀방울이다. 풀잎의 호흡은 땅이며 이슬은 그들이 호흡을 통해 밖으로 배출한 온기이다. 우리 몸은 땅에서 멀어지는 만큼 건강에 해롭다는 말에 숨어 있는 뜻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숨결의 위대함은 숨이 끝나고 나서야 절절하게 다가온다. 숨이 오갈 때 숨의 소중함과 그 숨으로 인하여 내면의 살이 오르고 성숙되며 그로인해 호흡하는 눈물겨움을 나는, 당신은 아무렇지 않게 간과한다. 숨이 멈추는 순간 모든 소리는 사라지고 한 세계는 막이 내린다. 그 이후 창문 안과 밖에 마르거나 젖어있는 눈빛만 흐른다.
나비의 팔랑거리는 작은 몸짓에 우주의 신호가 있고 기별이 있다. 명분에 사로잡히지 않고 소품에 머무르지 않는 나비, 지난한 삶을 끊임없이 맴도는 그 나비를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은 열망으로 책상 아래 뻐근했던 무릎의 시간들이 흘러간다.
마주보지 않고 마주잡지 않고 우리가 느끼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나무와 동물과 인간이 나누는 교감의식이야 말로 始原의 언어다. 빨려 들어가 듯 빨아 당기는 촉수나무처럼, 그렇게 나비를 빨아들여서 겹눈과 긴 더듬이와 언젠 떠날지 모를 여린 날개를 가만 안아주고 싶은 봄밤이다. 그 詩原과 조우하는 날을 동심의 자세로 겸허하게 기다릴 뿐이다.
▪ 타나토스, 그 음울과 광기여
규율과 통제를 철저하게 따르던 내성적이고 무뚝뚝한 아이였다. 학습된 대로 따르고 좇았지만 내부 한구석에는 늘 공격적이고 불안한 괴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장 아름다워야 할 스므 해 나는 시든 꽃처럼 야위고 말라갔다. 나를 괴롭히는 보이지 않는 우물의 혼돈 때문에 사람보다는 술을 찾았고 술에 빠져서 술에 의존했다. 큰 오빠 눈을 피해 내 장롱 깊숙한 곳에는 술병이 음전한 눈빛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물 넷, 나는 모아둔 수면제를 입에 털었다.
질긴 명줄에 식상해진 나는 배낭 하나 짊어지고 다시 바닷가를 찾았다. 두 번의 죽음 뒤에서 나를 살리신 하늘의 뜻을 나는 지금도 모른다.
결혼을 하고 남편의 품에서도 내 몸은 잠들 줄을 몰랐다. 대학에서 미술치료를 하는 친구가 정신신경상담을 권했다. 약물이나 자살 경험이 있는 자들은 보이지 않는 검은 악마가 타르처럼 뇌에 붙어 있어서 그것을 떼어내야만 온전하게 삶을 건널 수 있다고 말해주곤 했다. 그런 곳은 나와는 무관하고 내가 가서는 안 되는 곳으로 흘러들었다.
시를 썼다. 등단을 하고 시집을 준비하면서 내 몸은 아득하게 풀리고 말았다. 먹는 것은 죄다 탈수현상으로 몸에서 빠져나가고 결국 다린 풀린 짐승처럼 네 발로 집안을 기어 다녔다. 나를 바라보는 두 아이의 젖은 눈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네 발 짐승의 충혈 된 눈은 아이들을 바로보지 못했다.
예민하고 까다로운 내 감성은 발톱을 요구했다. 내 발톱의 쓰임은 놀이와 슬픔에 구분 없이
쓰였으며 간섭과 방해로부터 자유롭고자 하였으나 시선이란 덫에 곧잘 걸리곤 하였다. 시를 쓰는 일은 스스로 폐쇄시킨 밀실에서 외부와의 소통 구실을 하는 듯 보였지만 무기력과 대인기피증은 외부를 견디지 못하고 곧 문을 닫아버렸다.
원인을 찾기 위한 검사와 질문에 응했다. 1년 동안 상담을 하고 약물치료를 병행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우울과 불안이란 친구가 전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함께 가야 할 동반자가 생긴 것이다.
자율신경계가 망가져 머리와 손이 달가닥 거리는 내게 의사는 말했다.
“당신의 모든 우울은 자궁으로 연결된다. 약을 먹고 상담을 하는 동안 그 길에 잡초도 우거지고 뒹구는 돌도 쌓여서 길이 막힐 것이다.” 천형天刑 같은 말이었지만 몸에 대한 비밀이 풀리면서 한줄기 숨통이 트였다.
그 시절, 내 안의 우물은 자주 끓어 넘쳤으며 어린 나는 그 우물이 내게 전하려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불 속처럼 뜨겁기만 하여서 도망부터 치려했다. 감당이 안 되어 퍼낼 수만 있다면 바닥이 드러나도록, 다시는 고이지 못하도록 말리고 싶었다. 어느 곳에서 한 점 먼지로 떠돌다가 내 안에 들어오셨는지 첫 만남이 참 적막하기도 하였다.
약을 보면 토할 것 같았다. 의사와 상담 끝에 약을 끊고 요가를 시작했다. 골반과 자궁이 상생할 수 있도록 보완의 동작을 꾸준히 해줬다. 낮잠을 피했고 많이 걸었다. 서너 번씩 깨곤 하던 수면장애가 극복되고 자율신경계가 안정이 되면서 살이 붙고 사람이 되어갔다.
요가를 하면서 사지를 부드럽게 열어 단계별 동작을 취하곤 한다. 양수를 떠나온 이후 하나 되는 몸 길에 뭉클한 감동이 밀려온다. 내 몸이 내게 말하려는 것을 이제 조금은 알아들으며 거리를 두고 관망 하는 여유도 생겼다.
프로이드는 꿈의 해석을 통해 무의식을 드러내는 방법을 연구하면서 1923년에 지형론적 체계의 두 번째 학설을 발표했다. 이드(id), 에고(ego), 슈퍼에고(super ego)가 바로 그것이다.
이드(id)는 라틴어로서 영어의 It에 해당된다. 육체의 필연적 욕구에서 기인하는 본능적 충동에 해당되며, 쾌락원칙에 의해 움직인다. 이드는 1차적 충동에 지배되는 원초적이고 무의식적인 정신활동의 원천인 것이다.
나는 아직도 이드(id)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의식에서 꿈을 꾸고 있다. 몸에 붙어버린 악마의 목소리가 이제 무섭지 않다. 긴 시간을 동굴 속에 있다가 나오면 햇살을 바로보지 못하는 것처럼 가슴속에 맑은 평온이 오래 지속 되면 오히려 내가 아닌 것 같고 불안해진다. 무기력이 단단한 에너지 化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또 다른 불안이 나를 두드리고 있는 것임을 안다. 내 숨이 멈추기 전까지 나는 이것들을 버릴 수 없다. 스스로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하여 지금의 이 열병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무의식 속에서 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과 함께 지나야 할 긴 터널을 이미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화영 시인
전북 군산 출생.
2009년 《정신과 표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침향』(혜화당, 2009)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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