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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2편 7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이 말씀은 원래 시편 기자가 극심한 고난과 하나님의 압도적인 다루심 속에서 고백한 시적 표현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영적인 세계의 한 중요한 원리를 묵상하게 한다.
깊은 것이 깊은 것을 부른다.
영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부른다.
선한 것은 선한 것을 부르고, 악한 것은 악한 것을 부른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 공명의 법칙”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공명이라는 것은 같은 성질의 울림이 서로 반응하는 것이다. 한쪽에서 어떤 울림이 일어나면, 같은 성질을 가진 다른 쪽도 함께 울린다. 영적인 세계에도 이와 비슷한 원리가 있다. 사람의 내면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은 어떤 것에 끌리고, 무엇에 반응하고, 어떤 세계와 연결된다.
사람 안에 빛이 있으면 빛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사람 안에 어둠이 있으면 어둠과 반응한다. 사람 안에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으면 진리를 향해 나아가지만, 사람 안에 죄를 붙들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빛을 피하고 어둠 속에 머무르려 한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과 공명한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 20절과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악을 행하는 사람은 빛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빛 앞에 서면 자기 안의 어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반대로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그 안에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은 결국 자기 안에 있는 것과 공명한다. 내 안에 있는 것이 나의 끌림을 만들고, 나의 끌림이 나의 선택을 만들고, 나의 선택이 나의 삶의 방향을 만들어 간다.
그러므로 영적인 삶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겉으로 어떤 행동을 하느냐만이 아니다. 내 안에 무엇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내 영혼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깊은 것은 깊은 것을 부르기 때문이다.
어둠은 어둠을 부른다
1969년 8월 8일 밤, 미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끔찍한 사건이 있다.
자정 무렵, 텍스 왓슨이라는 남자가 운전하는 포드 자동차가 베벌리힐즈의 한 주택가에 도착한다. 그 차에는 텍스 왓슨 외에도 세 명의 젊은 여성이 타고 있다. 당시 텍스 왓슨은 23살이고, 나머지 여성들도 19살에서 22살 사이의 젊은 사람들이다.
그 시간에 스티븐 패런트라는 고등학생이 그 건물의 관리인을 방문했다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전자시계와 라디오 같은 물건을 팔기 위해 그곳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 네 사람이 담을 넘어 집 안으로 침입하려 하고, 떠나려던 스티븐 패런트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어린 청년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그 집 안에는 몇 사람이 있었다. 파티가 끝난 뒤 두 사람은 각자 방으로 들어가 잠들어 있고, 두 사람은 거실에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침입자들은 그들을 칼로 잔혹하게 공격했다. 그날 밤 가장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이 샤론 테이트다. 샤론 테이트는 당시 헐리우드의 떠오르는 배우이고,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였다. 무엇보다 그는 임신 8개월이 넘은 상태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칼에 찔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애원했다고 전해진다. “제발 아기만은 살려 달라.” 그러나 그 간절한 애원도 그들의 잔혹함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이 사건은 당시 미국 사회 전체를 충격에 빠뜨린 가장 끔찍한 살인 사건 가운데 하나가 된다.
원래 목표가 아니었던 사람들
이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이 있다.
그날 모두 5명이 살해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원래 죽이려고 했던 사람은 그 5명 가운데 아무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날 죽임당한 사람들은 그 살해 계획의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다.
이 살인을 사주한 사람은 찰스 맨슨이다.
맨슨은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던 인물이다. 그가 원래 분노를 품고 있던 대상은 테리 멜처라는 음악 프로듀서다. 테리 멜처는 비치 보이스 같은 유명한 음악가들과도 연결되어 있던 프로듀서다. 찰스 맨슨은 음악가로 인정받고 싶어 하고, 자신의 음악을 담은 데모 테이프를 보냈지만 인정받지 못한다. 그는 그 일에 분노하고, 그 분노가 결국 살인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테리 멜처가 이미 그 집에서 이사한 뒤라는 것이다. 그는 사건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그 집에는 당시 로만 폴란스키와 샤론 테이트가 살고 있었다. 로만 폴란스키는 영화 촬영을 위해 유럽에 나가 있고, 샤론 테이트와 손님들만 그 집에 있었다. 그런데 찰스 맨슨의 추종자들은 그 집을 테리 멜처의 집으로 생각하고 침입하고, 결국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비극 앞에서 던져지는 무거운 질문
여기서 우리는 아주 무거운 질문 앞에 선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하나님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한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
그렇다면 왜 이 5명은 그렇게 애꿎게 죽임을 당하는가?
이것은 그냥 우연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어떤 비극을 두고 “그 이유는 이것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고난당한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 욥기의 친구들이 바로 그 일을 했다. 그들은 욥의 고난을 보고 너무 쉽게 원인을 단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책망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건을 두고 “그들이 이런 이유 때문에 죽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권한이 아니다.
영적인 세계는 중립적이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영적인 세계는 중립적이지 않다. 인간의 선택은 반드시 파장을 일으킨다. 죄는 죄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둠은 어둠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이 심은 것, 문화가 심은 것, 영적으로 열어 놓은 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파장을 만들어 낸다.
그 파장이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돌아오는지 우리는 다 알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깊은 것이 깊은 것을 부른다.
어둠은 어둠을 부른다.
악한 것은 악한 것을 부른다.
비극을 단정하지 말되, 영적 원리는 외면하지 말라
비극을 단정하지 말되, 영적 원리는 외면하지 말라
여기서 우리는 균형을 가져야 한다.
한쪽으로는 조심해야 한다. 특정한 사건, 특정한 비극, 특정한 죽음을 놓고 “이것은 반드시 어떤 죄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13장에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을 두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다른 한쪽으로는 영적인 원리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성경은 분명히 죄에는 열매가 있다고 말한다. 불순종에는 결과가 있다고 말한다.
악을 심으면 악한 열매가 있고, 육체를 위해 심으면 썩어질 것을 거두며,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영생을 거둔다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극의 원인을 함부로 단정하지 않으면서도, 영적인 세계의 원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사건의 정확한 영적 원인은 하나님만 아신다.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에게 두려운 질문을 던진다. 내가 무엇을 심고 있는가? 내가 무엇과 공명하고 있는가? 내가 어떤 세계에 마음을 열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선택은 영적 파장을 만든다
죄는 개인적인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죄를 개인적인 문제로만 생각한다. 내가 혼자 마음속으로 품은 생각, 내가 혼자 보는 것, 내가 혼자 즐기는 것, 내가 혼자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죄를 그렇게 가볍게 보지 않는다.
죄는 반드시 파장을 일으킨다.
욕망은 반드시 방향을 만든다.
반복된 선택은 반드시 길을 만든다.
열어 둔 문은 반드시 무엇인가를 불러들인다.
처음에는 작은 호기심처럼 보일 수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문화생활처럼 보일 수 있다. 처음에는 그저 재미로 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안의 어둠과 공명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단순한 오락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가 계속 바라보는 것을 닮아간다.
사람은 자기가 반복해서 듣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사람은 자기가 즐기는 것과 영적으로 연결된다.
마음은 영적인 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을 지키라고 말씀한다. 잠언 4장 23절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씀한다.
왜 마음을 지켜야 하는가? 마음은 단지 감정의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은 영적인 문이다. 마음은 공명의 자리다. 내 마음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내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내 마음이 무엇에 반응하느냐에 따라 내가 어떤 세계와 연결되는지가 달라진다.
빛을 사랑하는 마음은 빛으로 나아간다.
어둠을 즐기는 마음은 결국 어둠으로 끌려간다.
빛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분명히 말씀하신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악을 행하는 사람의 특징은 단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빛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말씀을 불편해한다. 책망을 싫어한다. 회개의 자리로 나아오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빛 앞에 서면 자기의 행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다르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말씀 앞에 선다. 회개한다. 자기 안의 어둠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어둠 속에 머무는 것보다 빛 가운데 고침받는 것을 더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과 저주를 가르는 중요한 차이다.
복과 저주를 가르는 차이
복 있는 사람은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복 있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저주의 길에 서 있는 사람은 단지 실수한 사람이 아니다.
저주의 길에 서 있는 사람은 빛을 미워하고 어둠을 붙드는 사람이다.
영적 공명의 법칙은 바로 여기서 작동한다. 빛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점점 더 빛의 세계와 공명한다.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은 점점 더 하나님의 뜻과 공명한다.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점점 더 성령의 인도하심과 공명한다.
그러나 죄를 숨기고, 어둠을 즐기고, 불순종을 합리화하는 사람은 점점 더 어둠과 공명한다. 처음에는 작은 타협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삶의 분위기가 되고, 결국 삶의 방향이 된다.
무엇과 공명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과 공명하고 있는가?
내 마음은 무엇에 반응하고 있는가?
나는 빛을 향해 가고 있는가, 어둠을 향해 가고 있는가?
나는 진리를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진리가 드러내는 불편함을 피하고 있는가?
우리가 매일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 즐기는 것, 가까이하는 사람들, 반복해서 머무는 분위기들은 모두 우리 안에 어떤 울림을 만든다. 그 울림은 우리의 영혼을 형성하고, 우리의 영혼은 다시 우리의 선택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단지 교회에 나오는 문제만이 아니다. 내 영혼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의 문제다. 내 영혼이 무엇을 부르고 있는가의 문제다. 내 안의 깊은 것이 무엇을 향해 울고 있는가의 문제다.
깊은 것이 깊은 것을 부른다.
내 안에 말씀의 깊이가 있으면 말씀의 세계가 열린다.
내 안에 기도의 깊이가 있으면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갈망이 일어난다.
내 안에 거룩함의 깊이가 있으면 죄가 불편해진다.
내 안에 사랑의 깊이가 있으면 하나님의 긍휼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내 안에 욕망의 깊이가 있으면 유혹이 쉽게 들어온다.
내 안에 분노의 깊이가 있으면 다툼이 반복된다.
내 안에 음란의 깊이가 있으면 음란한 것들이 계속 나를 끌어당긴다.
내 안에 교만의 깊이가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조차 내 기준으로 판단하게 된다.
결국 영적인 삶은 내 안의 깊이를 무엇으로 채우느냐의 싸움이다.
빛을 심고, 생명을 부르라
복과 저주는 어느 날 갑자기 임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것은 오래전부터 심겨 온 것들의 열매다. 우리가 무엇을 심었는지, 무엇을 사랑했는지, 무엇과 공명했는지가 시간이 지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부터 빛을 심어야 한다. 말씀을 심어야 한다. 기도를 심어야 한다. 순종을 심어야 한다. 거룩함을 심어야 한다. 선한 것을 심어야 한다.
작은 순종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작은 죄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작은 기도도 헛되지 않다.
작은 타협도 결코 작게 끝나지 않는다.
깊은 것이 깊은 것을 부른다.
오늘 내 안의 깊은 곳이 하나님을 부르게 해야 한다.
내 영혼의 깊은 곳이 말씀을 부르게 해야 한다.
내 삶의 깊은 곳이 성령의 임재와 공명하게 해야 한다.
빛을 사랑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와 복을 부르게 된다.
복과 저주를 가르는 영적 공명의 법칙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무엇과 공명하느냐가
내가 무엇을 부르느냐를 결정한다.
내 안의 깊은 것이
내 삶의 깊은 것을 부른다
에하드하우스 손성무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