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03
4월22일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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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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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BpYPPjQbIhg (배우석 리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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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실패의 밤을 건너온 우리에게 건네시는 주님 위로의 말씀, "와서 아침을 먹어라!">
그날 새벽 티베리아스 호숫가 제자들의 마음은 착찹함 그 자체였습니다. 하늘처럼 믿었던 스승님께서 그리도 무기력하고 끔찍하게 세상을 떠나신후, 제자들은 삶의 의미요 기둥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돌아버리겠다는 생각에, 몸이라도 좀 움직이면 나을까 싶어, 야간 작업을 나간 것입니다. 고기라도 넉넉히 잡혀주었다면, 매운탕이라도 끓여놓고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쓰라린 심정을 달랠 수 있었을텐데, 그날 따라 단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
뭘해도 안되는 자신들의 처지가 한심하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해서, 큰 상심에 빠져있는 제자들 사이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스승님의 부재상태에서 임재상태로 상황이 전환되자 우울했던 제자단 분위기는 급반전됩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던 밤 바다는 어두웠던 실패의 밤이었지만, 날이 밝아오면서 이른 아침의 신선함 속에 주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주님의 현존과 부재 사이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주님께서 우리 내면에, 우리 공동체 안에 부재하실 때 풍기는 분위기는 절망과 낙담, 우울함과 나약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활발히 현존하실 때 풍기는 분위기는 기쁨과 희망, 따스함과 풍요로움, 강한 생명력과 낙천성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절망과 시련의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손수 맛갈지고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이 아침에도 실패의 밤을 지새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다정한 위로의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와서 아침을 먹어라.”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까지 고수해온 낡은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계명을 선택하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이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 속에 새로운 판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헛된 망상의 그물을 거두어들이고 주님께서 건네시는 새로운 그물을 펼칠 때 놀라운 사랑의 기적은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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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pnTTDG6IL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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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 살 때 의미 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첫 번째는 토마스가 없는 가운데 나타나셨고, 두 번째는 토마스가 돌아왔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지금 세 번째에는 제자들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밤새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빛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새벽이 되자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요한 21,6)
오른쪽은 ‘의식’을 상징합니다. 의식적으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백쉰세 마리’나 잡혔습니다. 숫자 ‘153’은 히브리어 ‘하느님의 자녀들’(베니 하엘로힘)을 의미하기도 하고 ‘파스카’(하파사크)의 숫자 값이기도 합니다. 배에는 일곱 명이 타고 있었는데, ‘7’은 성령을 상징하기도 하고 창조를 상징하며 칠성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 칠성사, 곧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배는 곧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고 하느님의 자녀들을 탄생시킵니다.
요한복음에서 하느님의 자녀는 어떤 사람일까요?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요한 8,41)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러도 그들은 살인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는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는 사람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요한 10,33)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는 것이 곧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밀가루 안에 넣어 밀가루도 하느님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성체를 말합니다. 하물며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신 인간을 하느님으로 만드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이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 곧 하느님이 됩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요한 10,34-36)
여기서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을 하느님이라 했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잘못되었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왜 사람이 신이 될 수 없다고 말하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교리서도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CCC, 460)라고 말하고, 사제란 이 믿음을 전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 말합니다. 사제란 먼저 자신이 “하느님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하느님이 되게”(CCC, 1589) 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성경과 교리의 가르침입니다.
저는 저 자신이 하느님이라 고백할 수 있었을 때 많은 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을 체험하였습니다. 아무리 하느님을 믿어도 벗어날 수 없는 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하느님으로 믿을 때 그런 욕망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욕구는 자신의 정체성, 곧 자신이 누구냐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개라고 믿으면 네 발로 걷고 싶은 욕구가 나오고, 사람이면 두 발로, 하느님의 자녀라면 물 위를 걷고 싶은 욕구가 나옵니다. 이는 성체가 그리스도이시고 그 성체를 영한 우리도 그리스도, 곧 본성상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을 때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깨닫고 책을 내었지만, 너무 많은 반대에 부딪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는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서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이라 말할 것입니까?”라고 물어보면 거의 100% 다 인간이라고 대답할 것이라 말합니다. 그것이 겸손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믿음은 하느님 부모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 부모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성당을 다니면서도 꼭 가져야 하는 믿음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거의 아무도 이 믿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것이 밤이었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책을 낸 것은 제 의지로 냈던 것입니다. 그렇게 밤새 노력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헛수고만 한다는 생각으로 힘이 빠져있었습니다.
이때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하던 일들을 다 멈추고 나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성체 앞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유튜브를 시작하라는 강한 열망이 솟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유튜브 채널조차 만들지 못하는 거의 컴맹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분들에게 도움을 구했더니 생각보다 유튜브를 어렵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팀을 꾸려서 녹화하게 도와주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은 아니라 생각하고 유튜브를 보며 채널을 만들고 그냥 복음 묵상을 올려보았습니다. 처음엔 카메라를 보면서 하는 게 매우 어색하였습니다. 카메라를 봐야 하는지 모니터를 봐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많은 조언을 들었고 그렇게 조금씩 발전해갔습니다. 물론 나의 동영상을 보는 분들의 숫자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백쉰세 마리란 숫자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행복은 물고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순종하여 열매를 맺게 해 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있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집을 부리고 그물을 내리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그에게 부활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부활하신 분이 되려면 내가 물고기가 아닌 그분을 위해서 그물을 던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만날 때 입을 겉옷을 선물합니다. 그리스도를 부활시키는 것이 그분의 가죽옷을 입은 우리의 소명입니다.
영화 ‘레이스’(2016)는 미국에서는 흑인 차별, 독일에서는 유색인 차별이 심했던 1930년대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베를린 올림픽 4관왕에 오른 제시 오언의 이야기입니다. 제시는 자녀까지 있는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래리’라는 코치를 보고 대학에 입학합니다. 래리는 제시의 능력을 보고 잘 가르쳐 세계 신기록을 갈아치웁니다. 이렇게 제시가 유명해지자 그를 유혹하는 여인도 많았습니다. 그런 모습이 신문에 나자 제시의 애인은 결혼이고 뭐고 다 취소라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후로 이상하리만큼 실력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래리는 제시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도와줍니다. 제시는 애인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게 사과하고 청혼하여 결혼합니다.
베를린 올림픽 때 히틀러는 흑인과 유대인은 경기에 뛰지 못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은 뛰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러 가지 정신적으로 혼란한 제시를 돕기 위해 래리는 사비를 털어서 베를린으로 옵니다. 이 사실을 안 제시는 래리를 코치로 함께 연습하게 해주지 않으면 경기를 뛰지 않겠다고 말해서 자신의 스승을 높여줍니다. 그리고 함께 모든 역경을 뛰어넘고 금메달을 네 개나 따게 된 것입니다. 제시는 처음에 기록에 목적을 두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관계가 흐트러지고 결국 기록도 하강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를 위해 뛰기로 다시 결심한 순간부터 다시 기록이 좋아졌습니다. 이때 아마도 목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희생한 이들을 위해 뛰어야 함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끝까지 믿어준 코치 래리를 위해 뛸 줄도 알았습니다.
사람은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 뛰어야 합니다. 특히 나를 위해 희생해준 사람을 위해 뛰어야 합니다. 그렇게 그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기록도 좋아집니다. 베드로가 기뻤던 이유는 물고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그물을 던진 것이 예수님을 위해서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분이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감사한 일은 유튜브를 하라고 하셨던 그 음성이 주님의 음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분명 부활하셔서 나를 도구로 쓰고 계십니다. 그래서 내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합당하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백쉰세 마리의 물고기는 참 행복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그분 목소리에 순종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합당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죽옷, 그것이 나를 참으로 행복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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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1,1-14 :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다. 베드로와 토마스, 나타나엘,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다른 두 제자들이 함께 있었는데,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네.”(3절) 하자 모두 함께 고기를 잡으러 갔다.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 주님께서 성령을 불어 넣어 주셨는데, 제자들은 갑자기 예전의 직업, 고기를 잡는 어부로 돌아갔다. 사도라는 직책도 자기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그들이 일하다가 지쳤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신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고기잡이를 하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것을 보신다. 그분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느라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지 않으신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못 잡았습니다.”(5절)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6절)제자들은 스승님을 뵙고, 그분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잔뜩 잡았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제자들은 배에 있었다. 다른 제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그분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7절) 그 말을 듣고 베드로는 그분께로 달려갔다. 다른 제자들이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8절)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9절) 제자들의 아침을 준비해주신 것이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물고기의 모습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다. 물고기가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물 밖으로 나와야 하며, 죽어야 하고 그리고 불에 구워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들에게 구원의 원천이 되기 위하여, 당신의 신성을 버리시고 즉 물 밖으로 나오셨고 죽으시고(십자가 형) 영광을 받으셨고(성령의 불꽃)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제는 우리의 삶도 이러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고집으로부터 나의 선입견에서 과감히 벗어나(물 밖으로 나옴),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 자신이 죽는 삶(죽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는 삶(성령의 불로 타오름)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는 삶이(“와서 아침을 먹어라”(12절)) 되어야 한다.
고기가 물속에 있으면서는 음식이 될 수 없다. 밖으로 나와야 한다. 우리 자신 항상 나의 편견이나 아집에서 하느님을 향해 끊임없이 탈출하는 삶이 필요하다. 여기에 우리의 삶의 근본적인 변화와 하느님 안에 기쁨이 있다.
다음으로 153마리에 대한 것이다. 이 100이라는 숫자는 앞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모이는 이방인들이 가득 찬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리고 50 역시 완전한 숫자 7의 일곱 배와 1이 더해진 숫자이다. 50은 여기서 또한 충만한 숫자이다. 희년이 50년마다 오고 있다. 이것은 모일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뜻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마지막으로 3은 삼위일체를 뜻하며 모든 것은 그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진다는 뜻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0은 10계명을 의미하며, 7은 성령을 나타내는 수이다. 그래서 1부터 17까지를 더하면153이 된다. 이 숫자는 계명과 성령 안에서 은총을 나누는 모든 사람의 수를 상징한다고 한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10절)
153은 물고기의 종류가 또한 그만큼 된다는 것으로 모든 종류를 포함한다는 의미이고, 고기가 그토록 많이 잡혔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라는 그물은 아무리 많은 나라의 백성들이 들어와도 그 모두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그물을 베드로가 끌어올렸다는 것은 그의 역할로서, 백성들을 모아 사도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고 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12절)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잔치를 벌이신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13절)
물에서 나와 인간의 음식이 되는 고기처럼, 하느님이신 아드님이 사람이 되시어 인간의 구원의 빵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도 같은 삶으로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그분을 닮아 가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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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요한 21,3-6)
이 이야기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새로운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로 해석됩니다.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라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자기들만의 힘으로 선교활동을 해 보려고 하다가 실패했음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밤’은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있음을 상징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제자들이 자기들만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하다가 실패한 일이 연상됩니다.(마르 9,18) 그때 제자들은 자기들이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는지를 예수님께 물었고(마르 9,28),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다는 말씀은, 그들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고,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예수님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만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뜻입니다. 선교활동을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의(신앙인들의) 선교활동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예수님의 힘을 받아서 해야 하는 ‘예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그 일은, ‘예수님 없이’ 제자들(신앙인들)만의 힘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겉으로는 크게 성공한 것으로 보이더라도, 예수님 없이 한 일이라면 그 성과는 오래 가지 못하고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선교활동에서 큰 성과를 거둔 것 같았는데 결과적으로 냉담자만 대량 생산하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영적으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으면서도 그분의 지시대로 행동합니다. 왜 그랬을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아주 잊어버린 것은 아니고, 또 복음서에는 아무 설명이 없지만, 실패한 후에 예수님을 그리워했거나 찾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라는 질문과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라는 지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새롭게’ 부르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에서, 처음에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체험했던 ‘고기잡이 기적’이(루카 5장) 기억났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그분의 지시에 순종했고, 기적을 체험한 뒤에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지시에 순종하자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 성과는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거두신 성과입니다. <선교활동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해서 잘난 체 하면 안 됩니다.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협력자일 뿐입니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9-1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서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 일에서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예수님은 쉴 틈도 주지 않고 제자들을 마구 부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지쳐 있으면 ‘새 힘’을 주시고, 실망하고 낙담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힘’과 ‘용기’를 잘 받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신앙인은 기도를 통해서 힘과 용기를 얻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기도하지 않으면 점점 힘이 빠지다가 결국 모든 힘을 잃게 되고,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어쩌면 배반자 유다는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153’은 교회의 ‘완전함’과 ‘충만함’과 ‘보편성’을 상징합니다. 그 완전함과 충만함은 ‘지금’이 아니라 ‘마지막 날’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그 완전함과 충만함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찢어지지 않은 그물’은 교회의 ‘일치’를 상징합니다. 그 일치도 지금이 아니라 마지막 날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여러 종파로 갈라져 있는 것이 교회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도 역시 완전한 일치를 향해서 나아가는 길에서 겪는 과정입니다. 마지막 날이 되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모두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실한 일이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말은 필요 없고(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고 설명하는 단계는 이미 지났고), 이제는 ‘믿는 대로 사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의 경우에는 그렇지만,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안 믿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고 설명하는 일은 아직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더라도 ‘말’보다 ‘삶’이 먼저입니다. ‘부활 신앙’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믿는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면, 말로 부활을 증명하고 설명하는 것은 헛된 ‘빈말’을 되풀이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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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들을 뽑을 때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됨됨이를 잘 아셨습니다. 그 중에 예수님을 배반할 제자도 아셨습니다. 제자들은 능력과 재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두려움에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하고,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도 하고, 십자가를 포기하고 다락방에 숨어 있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능력과 업적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셨고, 사람들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셨고, 사람들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셨던 것처럼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삶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표징과 기적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알베르트 까뮤는 ‘페스트’에서 성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페스트가 창궐한 세상에서 사제는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율법과 계명을 충실하게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성스러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페스트가 창궐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도망가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스러움의 또 다른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도망가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는 것은 의사로서 나의 직무에 성실하고 싶어서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내 직무에 성실하지 않고 도망간다면 나는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성실함은 곧 성스러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까뮤는 ‘페스트를 옮기는 세균은 어쩌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진정한 페스트는 자아를 잃어버린 인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직무에 태만한 인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틴 루터 킹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이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게 주어진 직분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부활의 기쁨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의 제자로서 규율은 지키지만 이웃의 아픔과 슬픔에 깊이 공감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성당에 다니는 것은 혼자만의 신앙은 외롭고,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군가 길을 만들었고, 그 길을 함께 걷는 것은 축복이고 은총입니다. 베드로와 동료들은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들이 어부였기 때문에 고기를 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너희들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겠다.’라고 하신 분, ‘중풍병자를 치유하시고,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풍랑을 잠재우셨던 분, 하늘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셨던 분’ 과의 기억은 하나의 추억이 되어버렸습니다. 빌딩 숲에 있던 한 그루의 목련처럼 제자들은 외로워보였고, 그 향기가 도시의 화려함에 묻혀버린 것처럼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다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제자들은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다시 기운을 차립니다. 역시 주님과 함께 해야 힘이 나고, 주님께서 이끌어 주셔야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고, 주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제자들의 모습에서는 외로움도, 두려움도, 쓸쓸함도 찾을 수 없습니다. 밤새 충전한 핸드폰의 배터리는 한참을 통화해도 충분한 것처럼, 주님과 함께했던 제자들에게는 박해도, 시련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웃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이웃의 기쁨과 희망을 함께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나눔이 있고, 그 안에 위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이 이루어지는 삶의 현장입니다.
매년 주님의 부활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단순히 매년 왔다가 가는 행사와 전례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주님을 향해 모든 것을 버리고 뛰어내려야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부활을 삶 속에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얻으셨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 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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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지훈 D.안드레아 신부님]
<인간은 부끄러울 때 얼굴을 가립니다>
인간은 두려울 때 도망을 갑니다. 누가 가려쳐 준 바 없는 어린아이들도 똑같은 행동을 하는걸로 보아, 그것은 인간의 본능인가 봅니다.
사도중의 사도 베드로가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겉옷으로 몸을 가리고 호수로 뛰어들어 버립니다. 왜일까요? 왜 몸을 가렸을 까요? 왜 호수로 뛰어들어 버렸을까요? 아마도 베드로가 많이도 부끄럽고 또, 두려웠나 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며, 세상에 복음을 선포해야 할 베드로가 옷을 벗고 고기나 잡고 있는 모습이 예수님 앞에서 너무나도 부끄러웠나 봅니다. 또한 두려웠나 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많은 사랑을 주셨고, 많은 가르침을 주셨는데, 끝내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주님이신 예수님 앞에서 적나라하게 들켜 버렸으니, 많이도 두려웠나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단 한마디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복음 어디에도 호수에 빠진 베드로를 추궁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저, 처음 베드로를 만났을 때처럼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다가가십니다. 또한 언제나처럼 그들과 함께 빵과 고기를 나누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던집니다. 예수님은 부끄러워하는 우리를, 두려워하는 우리를 절대로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으시려고, 일상의 편안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을 부르시던 때와 같이 오늘도 새로운 마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다시 한 번 시작해 보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안고서 말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무디어져, 여간해서 부끄럽지도, 두렵지도 않는 내 모습이 문제입니다. 오늘은, 몸을 가리고 호수로 뛰어든 베드로의 모습처럼 내 잘못을 뉘우치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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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훈일 세례자요한 신부님]
<고기 잡이>
티베리아스 호숫가에 베드로를 포함하여 일곱 명의 제자들이 모였습니다. 그날도 그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토론하였습니다. 그러나 뾰족한 수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일어섭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잡겠다는 것은 원점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3년 전 고기 잡다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겠다는 예수님께 끌려 그물을 팽개치고 예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이제 다시 그물을 손에 잡겠다는 겁니다.
그러자 나머지 여섯 명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면서 따라 나섰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그들은 그저 그런 과거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물을 칩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느라 실력이 없어진 것인지 밤새 노력했지만 도무지 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던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고 그분의 말씀대로 그물을 치니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고기가 잡혔습니다. 베드로는 그제야 주님을 알아 뵙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세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주님을 떠나서 옛 삶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일하는 사람에게는 풍성한 수확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부활을 전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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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초심에 자리잡은 부활체험의 완성>
우리는 지난 부활 팔일축제 내 화요일 복음묵상을 통하여 요한복음의 원복음은 20장을 마지막으로 편집되었고, 21장은 추가로 편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통상 21장의 저자는 요한복음의 원저자를 추종하던 요한학파에 속하는 사람일 것으로 추정된다. 21장을 단락으로 구분하면, 티베리아 호수에서 일곱 제자에게 발현한 예수(1-14절), 부활예수와 수제자인 베드로의 특별한 관계묘사(15-19절) 및 사명전달, 예수와 애제자의 관계(20-24절), 그리고 에필로그(25절)의 4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한복음 21장을 추가로 편집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는 21장 전체에 짙게 깔려있다. 즉, 예수님을 이미 한꺼번에 세 번이나 배반한 적이 있는 베드로(요한 13,38; 18,15-18.25-27)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단의 으뜸으로, 그리고 초대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고 내세우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특별한 관계를 엮어주려는 의도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베드로'라는 이름도 지나칠 정도로 빈번히 등장한다. 신약성서 전체에 베드로의 이름은 총 198번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9번(1코린 4번, 갈라 3번, 1베드 2번)을 빼고는 모두 4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두루 등장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총 40번 베드로의 이름이 발견되는데, 이를 구분하여 보면,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5번, 최후의 만찬에서 십자가 죽음 직전까지 18번, 부활사화 20장에서 4번, 부활사화 추가부분인 21장에서 무려 13번 등장한다.
아무튼 성서학자들은 21장의 저자가 초대교회 안에서 차지하는 베드로의 교회론적이고 사목적인 주도역할을 강조하고 있다고 본다. 편집자의 의도가 이렇다 보니 의도의 일관성과 성취도는 보장되지만, 이야기 전체가 구도상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구도상의 문제점은 여기 저기서 발견된다. 우선 앞서간 20장의 내용과 연결이 잘 되지 않고 있다. 20장의 무대는 예루살렘이고, 여기서 제자들은 이미 두 번이나 부활예수의 발현을 체험했었다.
저자는 단순히 '그 뒤'라는 표현으로 예루살렘과 티베리아 호수의 연결점을 찾고 있다. 참고로 티베리아 호수는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지명으로서(요한 6,1; 6,23) 다른 복음서의 갈릴래아나 겐네사렛(마태 14,34; 마르 6,53; 루가 5,1)과 같은 호수를 말한다.
밤새도록 베드로를 포함한 일곱 제자들은 헛수고를 했다. 원래 어부출신이었던 그들의 실력이 떨어진 것일까? 3년간 고기잡이에서 손을 뗐으니 그럴 법도 하다.
새벽녘 호숫가에 서 계신 예수와 베드로의 배까지 거리가 제법 멀다고 느껴지는 100미터나(8절) 되지만, 쌍방의 대화는 아주 가깝게 이루어진다. 애제자가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그냥 물 속에 뛰어 든 점도 이상하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육지까지 헤엄쳐 나왔다는 결론이다. 물론 그런 말은 없다. 일행이 육지에 올라 왔을 때, 예수께서는 숯불과 빵과 이미 생선을 준비해 놓으셨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방금 잡은 생선 몇 마리를 가져오라고 한다. 차라리 준비 없이 생선을 가져오라고 했다면 더 어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구도상의 문제점이 아니다. 물론 요한복음의 원저자는 구도상의 논리를 상당히 중요시하였다. 요한복음(1-20장) 전체가 장고(長考)의 성찰과 명상에 의한 결론이 아니던가.
그러나 21장의 저자는 구도상의 논리보다는 상징적이고 신비적인 표현을 통하여 베드로와 부활예수, 그리고 교회의 긴밀한 삼각관계를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베드로의 역할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21장의 무대를 갈릴래아(티베리아)로 옮긴 것은 제자들이 처음으로 예수를 만났던 곳이 이곳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제자가 배를 탔다고 했는데, 배는 교회를, 7이라는 숫자가 풍요와 완전을 뜻한다.
그들만의 수고는 헛되었지만 부활예수의 지시와 명령을 따름은 성취와 보람과 기쁨을 가져온다. 그물에 걸려든 고기의 숫자가 '153' 마리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학자들은 통상 아우구스티노의 해석법을 따르는데, 이들에 의하면 153은 1부터 17까지의 수를 다 합한 것으로 보편성과 완전성을 의미한다. 여기서 17 또한 10이라는 완전수와 7이라는 완전수를 합한 절대 완전수를 의미한다.
총 153장으로 구성된 [기도론]을 저술한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399)는 153의 숫자를 아주 색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안셀름 그륀, 정하돈역, 부활의 기쁨, 100배 맛보기, 2002년 분도, 118-121쪽 참조)
오늘 복음이 필자의 머리에 남기는 점은 제자들이 갈릴래아(티베리아) 호수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체험을 완결했다고 보는 것이다.
갈릴래아 호수가 어떤 곳인가? 어부들이 예수를 처음으로 만난 곳이며, 그들이 불림을 받았던 곳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예수와 동고동락을 시작하였다. 따라서 부활체험의 완성은 초심에 있다는 말이다.
그들이 이곳 갈릴래아에서 원래 하던 고기잡이를 통하여 부활예수를 뵙게된 점도 중요하다. 부활체험의 장소가 일상속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부활체험도 크게 예외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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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와서 아침을 먹어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발현하셨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절망에 빠져있고, 과거의 생업이었던 고기 잡는 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그물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절망과 실의에 빠져 엉뚱한 곳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제자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시어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요한 21,6)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날 아침을 열치시고 오시어,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서 식사를 준비하시고 부르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을 먼저 알아본 이는 요한이었지만, 그분께 먼저 달려간 이는 베드로였습니다. 요한은 관조적이고 베드로는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한은 사랑을 받은 이가 되고, 베드로는 일을 맡은 이는 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른 것은 와서 시중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그들에게 시중을 드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하고 깨우쳐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은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그리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지만, 당신께서는 그들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숯불에 구운 물고기’는 수난 받으신 당신의 몸을 드러내줍니다. ‘빵’은 십자가에서 찢어지고 바수어진 당신의 몸을 드러내줍니다. 그렇게 당신 자신을 바쳐 부활생명을 담은 사랑의 아침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먼저 당신의 밥상을 받아먹는 일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시중을 받는 일,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당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당신의 향기를 뿜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당신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이요, 당신의 사랑을 아는 일이요, 그리고 그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그 사랑을 증거 하고 부활생명을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곧 저희의 삶으로 당신께 상을 차려 올려야 할 일입니다. 형제를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의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해야 할 일입니다.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과 내맡김의 생선을 구워 드려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상을 차려 올리는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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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
이 아름다운 아침, 당신이 차려주신 생명의 밥을 먹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당신 생명과 사랑을 먹고 자란 제가 종일토록 당신의 색깔을 내고,
당신의 향기를 품게 하소서.
오늘 저의 삶이 당신께 차려 올리는 밥상이 되게 하소서.
형제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하게 하소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의 생선을 굽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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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부활의 아침>
요한 21,1-14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 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부활의 아침>
패배의 밤
동틀 무렵
물가의 낯선 분
따사로운 목소리
내려놓은 그물
물고기와 빵
살아난 기억
새로 깨달음
당신은 저의
주님이십니다
저는 당신의
사람 낚는 어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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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려놓는 만큼 풍성해질 것이다>
우리 앞길에는 항상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놓여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오르막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내리막길은 쉽고 편하지만 밋밋하고 지루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은 기왕이면 쉬운 길을 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거듭나는 길은 어렵고 힘든 것을 통해서입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결코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는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하였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간 고된 삶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고 그래서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할 수밖에요.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며 그들에게 말하였지만, 그들은 그분이 예수님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은 이미 빵을 준비해 놓고 당신의 식사를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물고기의 유무를 물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부활 식사를 위해 너희가 할 수 있는 몫이 무엇이냐?’ 그분의 나눔에 우리 역시 무엇인가를 준비하기를 바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식사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새 애썼지만 그들의 손에는 그 어떤 것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힘없이‘ 못잡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이 먹을 양식조차 구하기 힘든 무력함과 고단함이 느껴지는 이 자리에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이르셨고, 말씀을 받아들인 순간 나눔의 자리는 풍성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덜컥 겁을 먹고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해 내지 못할 사건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내려놓는 포기를 통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는 누구보다 빠르게 주님을 알아봤고, 베드로는 빠르게 행동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깨달음과 행동의 조화로움이 어디에서든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잡은 고기 몇 마리를 직접 요리하시고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고 난 후입니다. 이른 아침 왠 젊은이가 나타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했는데 그들이 어부라는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워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아 뵙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순명을 한 것입니다. 순명은 주님을 알아보는 눈을 뜨게 했고, 많은 고기를 낚는 기적을 낳기도 했습니다.
순명은 이성과 판단의 희생입니다. 어부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희생은 다른 어느 것보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삶이 우리 뜻대로만 되지 않는 데서 오는 포기의 순간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근심과 걱정, 실망과 좌절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함께하십니다. 다만 문제에 집착해서 그분의 손길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내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를 내려놓는 만큼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을 잃은 것이 더없이 큰 아픔이었지만 주님의 부활을 통해 믿음을 키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실 때 수차례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했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는 “누구십니까?”하고 묻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거듭날 기회로 알고 기뻐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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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14절의 고기잡이 이야기는 루카 복음(5,1-11 참조)과 마태오 복음(4,18-22 참조) 그리고 마르코 복음(1,16-20 참조)의 고기잡이 이야기를 떠오르게 합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고기잡이하던 제자들을 부르셨던 것처럼, 부활하신 그분께서 고기잡이하던 제자들을 다시 부르십니다. 제자들은 밤새 그물질을 하였지만, 빈손인 채 날이 밝습니다. 피로와 절망에 빠져 있던 그들은 물가에 서 계신 부활하신 분을 보지만, 그분을 알아보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라는 말씀대로 하자,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지경에 이릅니다.
이 대목에서 요한복음서 저자는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라고 서술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파스카 신비를 겪은 제자들은 이제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활동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많은 고기’는 새 계약의 교회 공동체의 선교 활동을, ‘찢어지지 않은 그물’은 모든 민족들을 포함하는 인류를 이 공동체 안으로 모아들이게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고기를 건져 올린 제자들은 뭍에 올라와 스승님과 아침 식사를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가시어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십니다. 이 모습은 교회 공동체의 성찬례를 떠올리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교회 공동체는 이처럼 주님께 초대받았기에, 함께 둘러앉아 그분께서 주시는 양식을 나누는 거룩하고 복된 ‘밥상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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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요한21,6)
<예수님을 따라가자!>
오늘 복음(요한21,1-14)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어부들인 제자들이 자신들의 삶의 자리인 호숫가로 나가 고기를 잡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삶의 자리에 나타나셔서 그들이 하는 일에 직접 개입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도 하십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못 잡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을 정도의 많은 고기가 잡힙니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4,11-12)
'예수님을 따라가자!'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그 안에 충만한 은총(대박)이 함께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믿게 되어,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사도4,4)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요한21,6b)
예수님 말씀에 늘 귀를 기울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늘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갑시다!
그래서 넘치는 은총, 충만한 은총을 받고, 이 은총을 너에게도 나누어 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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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술을 좋아하고 담배도 많이 태우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술과 담배를 끊은 것입니다. 워낙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서 술도 많이 마시고, 줄담배를 피우는 골초였는데 그 모든 것을 끊어버렸으니 주변에서 다 의아해했습니다. 건강이 안 좋아졌나 싶었는데, 이 청년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여자 친구가 생겼거든.”
여자 친구가 술과 담배를 너무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여자 친구를 사랑하는데, 여자 친구가 싫어하는 것을 하겠습니까? 싫다는 술과 담배를 단번에 끊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술과 담배를 더 사랑했다면 여자 친구와 헤어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랑이 훨씬 커서 불가능해 보였던 금주와 금연이 가능했습니다.
세상 안의 유혹이 너무 크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유혹을 끊기 힘들다고 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유혹에 빠져서 죄짓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죄를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죄의 유혹이 너무 힘들 때, 주님께 대한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이 커질수록 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티베리아스 호수에서는 어민들이 낮보다 밤에 출어합니다. 밤에 고기가 더 잘 잡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아침에 신선한 상태로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사실 베드로가 전문 어부 출신이지만 그의 고기잡이는 그리 신통하지 못합니다.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도 그리고 이번 역시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힘과 재주만으로는 어떤 성과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얘들아~~”라고 부르십니다. 이 말은 부모가 귀여운 자녀들을 부를 때 쓰는 말입니다. 그만큼 제자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고 하시지요. 그때 비로소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요한이 주님이심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듭니다. 신속한 행동파 같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모습을 갖추고 있었을까요? 사도 요한처럼 예리한 통찰력으로 주님을 알아봅니까? 또 주님이라는 확신에 곧바로 실천하는 행동파 베드로의 모습입니까?
두 모습 모두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주님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과 바로 행동했던 것은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에 멀리서도 주님이심을 알 수 있고, 사랑하기에 주님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주님께 나아가기 위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에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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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과의 만남>
-구원의 삶-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118,1)
참 아름다운 계절, 파스카의 봄입니다. 때로 초여름에 들어선 느낌이지만 나무는 모두 꽃나무같고 풀은 모두가 꽃풀같습니다. 이름없는 작은 풀꽃들이 참 예쁘고 청초합니다. 지상의 아름다움이 이러하면 천상의 아름다움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합니다. 어제 피정온 분에게 드린 말이 생각납니다.
“자매님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가장 아름다운 곳에 가장 아름다운 분,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 파스카의 삶을 살아갈 때 그대로 참 행복한 구원의 삶입니다.”
면담성사차 방문한 이들마다 배즙 한잔씩 대접하며 환대하니 얼마나 기쁘던지요! 마침 어제 수도원 곳곳에 피어나기 시작한 파스카의 봄꽃 샛노란 민들레꽃들과 애기똥풀꽃들을 보며 쓴 글도 나누고 싶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들의 구원의 행복을 노래한 “꽃자리”란 시입니다.
“음지든 양지든 상관없다
자리 탓하지 않는다
어디든 뿌리 내리면 거기가 꽃자리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성전옆 북향
그늘진 외딴곳
늘 거기 그 자리
일년 꼬박 기다렸다가
때되어 피어난 샛노란 하늘 사랑 별무리
민들레꽃들
애기똥풀꽃들
외롭지 않다
눈물겹도록 고맙다
반갑다
살아있음이 찬미와 감사다
꽃처럼 폈다 꽃처럼지는
인생이고 싶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 안에서 영원한 삶이다”-
오늘 복음은 일곱 제자들의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전해주고 사도행전 제1독서는 부활하신 주님과 만난 제자들의 신바람 넘치는 맹활약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단연코 제자들의 중심에는 베드로가 있고, 베드로의 수제자다운 리더십이 잘 드러납니다. 살아 있는 그림처럼 펼쳐지는 복음 장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전,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이후 제자들은 실의에 빠져 다시 예전 일상의 고기잡이 어부의 일터로 복귀합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베드로의 말에 “우리도 함께 가겠소.” 화답하며 동행하는 여섯 제자들,이니 모두 일곱이요, 일곱은 충만함을 뜻하며 부활이후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이들이 고기잡이 하는 동안 밤새 내내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다리고 계셨을 예수님의 다음 아름다운 장면이 참 신선한 충격입니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뭍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얘들아, 무엇을 좀 잡았느냐?”
“못잡았습니다.”
참으로 삶의 허무만 가득 담긴 빈 그물에 제자들의 가슴은 좌절과 실망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주님없이는 별무소득의 인생임을 뼈져리게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순종으로 응답하여 제자들은 그물을 던졌고,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애제자와 수제자 베드로의 반응이 전광석화, 곧장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봅니다.
“주님이십니다!”
애제자의 외침에 옷을 벗고 있던 수제자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에 뛰어듭니다. 오매불망 꿈에 그리던 사랑하던 주님의 발현에 너무 놀랍고 반가워 호수에 뛰어든 베드로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고, 그 안에는 153마리의 고기들로 가득했으나 그물은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견고한 교회일치뿐 아니라 미구에 있을 풍요로운 선교활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니 말 그대로 이 거룩한 아침 미사식사와 흡사합니다. 참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장면이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할 때 풍성한 구원의 삶임을 속속들이 체험했을 제자들입니다. 마침내 오늘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놀라운 고기잡이 솜씨를 보여줍니다. 물론 파스카 주님의 은총입니다.
무려 사도들의 말을 듣고 많은 이들이 믿게 되었고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명이나 되었다니 153마리 물고기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성공적 선교활동입니다. 심지어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들 모두가 사도들의 그물에 걸린 모습입니다. 성령에 가득 찬 주님 부활의 증인 베드로의 원고도 없이 하는 즉흥적인 강론이 시공을 초월하여 참 감동적입니다. 길다싶지만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너희 집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무슨 군더더기 말을 보탤 수 있을런지요! 구약성경은 물론 시편에도 정통해 있는 렉시오 디비나, 성독의 대가인 베드로 사도임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오직 파스카의 예수님께 있고 우리가 구원받는데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럽게도 이 거룩한 미사축제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을 모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주님 부활을 예견한 다음 화답송 시편의 고백이 참 은혜롭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하신 일, 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시편118,22-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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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Q2LwB68UL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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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요한 21, 5)
여지없이
우리의 욕심을
부활하신
주님께 다시
들키게 된다.
너무 커서
안 보이고
너무 작아서
안 보이는
우리들 욕심이다.
감사할 것은
많아도
소유할 것은
하나도 없는
우리들 삶이다.
욕심에 눈이 멀면
아무 것도 못 잡은
오늘이 된다.
하느님께서
내미시는
생명의
오늘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오늘이다.
건져 올린
많은 물고기처럼
주님의 은총은
늘 풍요롭다.
삶이란
하느님과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사랑의
선물이다.
우리가 정녕
바라는 것이
사랑이며
행복임을
깨닫게된다.
버리는 것과
바라는 것 사이에
계시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뜻과
서로 통하는 것이
부활의 선물이다.
믿음 앞에
건져 올린
수 많은
물고기들이
있다.
오늘이라는
일상의
물고기들을
함께 만지고
일상을 다시
시작하는
아침을 함께
먹는다.
함께하시려는
부활하신
주님의 기쁨이다.
은총의 오늘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건져 올려야
할 것은
다름아닌
감사이며 믿음의
물고기들이다.
풀리지 않는
욕심의 그물을
잡히지 않는
생명의 물고기를
풀어주시고
만나게하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아침을 드신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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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 12)
아무 것도
못 잡은 여기에서
다시 시작입니다.
우리에게서
이루어지는
참기쁨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아침입니다.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 가까이 있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일상이 부활이고
부활이 소중한
우리의 일상입니다.
쏟아져나오는
일상의 선물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랑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알게됩니다.
아침을 함께하듯
함께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아침처럼
예수님처럼 넘치게
가득 펼쳐집니다.
감사의 부활이며
일상의 새로운
부활입니다.
눈물겨운 아침을
예수님과 함께
먹습니다.
아무 것도 못 잡은
여기에서
선물처럼
예수님 사랑이
쏟아져 내립니다.
다시 사랑과
감사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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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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