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주제의식과 대중성
사실적 관찰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는 시작된다. 예감하고 그 예감에 참여하며, 의미를 만들고 답이 없는 질문까지도 찾아내는 그 과정은 마치 어딘가에 숨은 보물을 채굴하는 일처럼 설렌다.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매장된 새로운 시어들과 문장을 만나는 일은 즐거운 일이지만, 내 몸 어딘가에 갇혀 있는 ‘비밀한 문장’을 만나지 못할 때는 즐거움은 사라진다.
시인의 역할은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상징을 찾아내어 정신세계의 본질에 다다를 수 있게 돕는 것”이라고 한다. 시가 지닌 또 하나의 ‘가치’는 그것이 우리의 “반성적 사유”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유하는 기억들이 현실과 어떤 접점에서 만나게 될까.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물의 내면에 잠재된 미시적인 요소들을 발견해 그것들의 ‘존재가치’를 증언하는 일일 것이다.
지난봄 마당 하수구 구멍으로 잡풀이 벽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흙 한 줌 보이지 않는 뻥 뚫린 PVC관의 캄캄한 구멍을 붙잡고 밖으로 나오려는 잡풀이 마치 시 쓰는 시인 같았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기어 나오는 잡풀을 보며 안간힘으로 세상에 나와 “빛이 되지 못하고 사라진” 시를 생각했다. 그동안 우리가 조준한 것들은 다 시가 되었을까. 표적을 찾았다고 모두 시가 되지는 않는다. 논리적 사고와 재구성으로 “표적의 심장”을 명중해야만 시로써 유효하다. 어디에도 고정된 표적은 없다. 대상의 뒤편에 숨어 있는 ‘미시적인 것들을 감각’하는 일이 시인에게는 필수일 것이다.
시 쓰기는 실패하기 위하여 벌이는 작업이다. 사르트르는 “시에 있어서는 패자가 곧 승자이다. 그리고 진정한 시인은 승리하기 위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패배하기를 선택한 사람이다.”고 하였다. 가혹한 현실 앞에서 ‘비실용성’인 시가 어떤 힘을 가질 수 있는가? 불운한 현실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예고된 싸움의 결말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인은 패자가 승자이며 스스로 ‘패자를 선택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시는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적자생존의 진화법칙을 따른 것은 아닐까, 약자는 생존하기 위해 모험을 감수하는 진화적 압력을 받게 되고 그 대부분이 실패하더라도 하나의 전략이 성공하면 지배 질서를 뒤집을 수 있다는 진화법칙, 냉정한 현실에서 최약자인 시가 시인에게는 최상위 포식자로 변신한다.
그런데도 ‘폐업한 시인’보다도 ‘개업한 시인’이 훨씬 많다. 현실에서 쓸모가 없는 시가 아직도 살아남은 이유는 ‘최고의 이윤’이 아닌 ‘최고의 가치’와 ‘최고의 신실’을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쓸모가 없어 누구도 탐내지 않았던 최고의 가치는 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가치여서 훼손되지 않고 원래의 모습으로 살아남은 것이리라.
보이지 않는 내면이나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의 예감까지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모든’이며 ‘온갖’이다. 나 역시 이 작업에 동참하며 삶의 기척들을 발견한다. 새벽의 식은땀이나 오한처럼 내 몸에 깃든 징후들을 눈치 채고 그들의 존재를 언어로 드러낼 때 ‘모든 것’과 ‘온갖 것’들을 동원할 “언어의 자유”가 주어진다.
프로이트는 “해결되지 못한 상처를 꺼내 승화시키는 치유의 과정”을 문학창작 과정으로 보았다. 인간을 제압하는 상실감, 음지에서 고통 받는 세상의 뼈아픈 것들, 실체가 모호한 존재마저 찾아내려는 나의 시 쓰기는 내면에 쌓인 어둠을 발설하고 그 암흑 속에서 빛을 찾아내는 행위로 존재를 확인하고 위로를 받는다. 건강한 주제의식으로 대중성을 추구하는 나의 시는 무엇보다 독자와의 소통을 중시한다.
보편성을 획득하고 상상력과 논리 사이의 긴장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쉬운 시란 “새로운 세계의 발견과 표현의 묘를 지니고 우리에게 다가온 감동 그 자체로서 존재해야 한다” 고 하니 그 점은 나에게 숙제로 남아 있다. 얼마 전 모 문예지에 소개한 ‘나의 시론’을 살펴보자. 시론이라기보다는 진심이 깃든 ‘고백’에 가깝다
그동안 사물을 소재로 시를 쓰고 사물 시집을 출간했다. 나무 중에서 가장 고운 목소리를 지닌 살구나무가 목탁이 되고 가지를 꺾어 물에 담그면 파란 물을 토해내는 물푸레나무처럼 사물도 저마다 소리와 색깔이 있다. 사물의 특성을 이해하고 사물의 본질을 나만의 관점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은 사물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호기심 덕분이었다.
익숙한 규정에서 벗어나 능청스레 슬픔을 감추고 뼈아픔을 이야기하고 싶다. 또는 눈물 뒤에 숨어있는 은밀한 기쁨을 전하고 싶다. 고요함 속에 일렁이는 격렬함, 바닥을 모르는 슬픔의 깊이, 부드러움 속에 깃든 단단한 언어의 근육을 보여주고 싶다. 불편한 진실과 마주치며 함께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렇구나,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울거나 웃고 싶다. 공감은 증언의 가치를 인정하는 의견이기에 삶을 버티기 위한 환상을 어딘가에 남겨두고 끝까지 울음을 참는다.
신은 태초에 시인에게 특별한 기능을 추가하였다. 바람과 소리를 볼 수 있는 눈과 군중 속에서도 고독을 느낄 수 있는 외로움과 절망을 만질 수 있는 손과 쓰디쓴 어둠을 맛볼 혀를 허락한 것이다. 신의 특혜를 받은 시인은 숙명처럼 시와 동거하며 신의 ‘비밀한 기호’를 해독해서 세상에 알린다. 그러나 암호문 같은 파격적이고 난해한 문장들, 정체불명의 절뚝거리는 절망들이 진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고 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피치 못할 “시대와의 불화”와는 달리 “독자와의 소통”은 시인의 의지에 달려있을 것이다.
“가장 나약한 자들이 벌이는 가장 치열하고 위험한 싸움터에 문학의 행복이 있다”고 한다. 나약한 자들끼리 대결하는 ‘위험한 싸움’이 오로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행복이다. 험한 길일지라도 무리 지어 같은 길을 갈 때 우리는 동질감을 느끼고 서로에게 위로를 받는다. 심보선 시인은 우리 시대의 영웅은 슈퍼스타가 아닌 같은 운명을 나누는 동시대 소수자들, ‘고독한 패잔병들’이라고 하였다. 나 역시 패잔병 대열에 끼어 ‘문학의 길’을 가고 있다.(마경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