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도립공원(洛山道立公園)
*. 낙산사(洛山寺)
나의 이번 속초 여행의 주목적은 낙산도립공원(洛山道立公園) 탐방이어서 설악산 울산바위 등정 다음날 낙산사(洛山寺)를 향하고 있다.
강원도 양양군 낙산사(洛山寺)부터 하조대(河趙臺)까지 연장 24km 해안선 주변을 낙산도립공원(洛山道立公園)이라 한다. 그래서 낙산사(洛山寺)는 나의 낙산사도립공원 출발 기점이기도 하다.
洛山(낙산)은 ‘補陀伽洛山(보타락가산, Potalaka)’의 준 말이다. ‘補陀洛(보타락)’이란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는 곳을 말한다.
이웃나라를 둘러 보아도 관세음보살이 상주(常住)하는 곳은 해안가로, 인도(印度)인 경우도 남쪽 해안의 보타낙가산(‘補陀洛伽山)’이며, 중국은 경치가 좋은 주산열도(舟山列島)의 보타도(‘補陀島)에 있다.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觀音聖地)도 남해 금산사의 보리암(菩리庵), 서해 강화도 낙가산의 普門寺, 동해의 오봉산(五峰山)의 낙산사(洛山寺)로 모두 바닷가에 있다.
낙산사는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화엄학(華嚴學)을 마치고 귀국한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신라 문무왕 10년에 관세음보살이 낙산 동쪽바닷가 굴 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친견(親見)하기 위해서 그 굴 앞에서 7일간 간절히 기도한 후 이침이었다. 그동안 앉아 있던 좌구(座具)를 물 위에 띄웠더니 8부 신장들이 나타나 의상대사를 굴속(관음굴)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들어가 참배하고 공중에서 떨어진 수정염주 한 벌과, 동해 용이 주는 여의보주 한 벌을 받고 물러 나왔다.
의상은 다시 7일 동안 수행하여 드디어 관세음보살님을 뵈었더니 의상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이 자리 꼭대기에 대나무 한 쌍이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 자리가 바로 지금의 원통보전(圓通寶殿) 자리였다.
굴에서 나오니 말씀하시던 그 자리에 과연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나왔다. 의상은 그곳에 금당을 짓고 흙으로 관음상을 만들어 모시고 절 이름을 관음보살이 상주하는 곳이라 하여 낙산사(洛山寺)라 하였다. 의상대사는 용왕에게서 받은 구술을 법당에 모셔 두고 절을 떠났다.
관세음보살님의 건립 위치를 전해 받아 지은 원통보전은 이 낙산사의 중심 금당(金堂)으로 법당에 봉안된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1362호), 법당 앞에 서 있는 칠층석탑(보물제499호) 등 귀중한 보물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뿐인가 원통보전 주변을 둘러 싸고 있는 220m의 담장은 세조가 낙산사를 중창할 때 쌓았다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담장으로 강원도 유형문화제 제36호로 알려진 담장이다.
이 담장이 유명한 것은 이 담을 쌓을 때 적토 빚은 진흙에 기름을 먹여서 구운 벽돌로 쌓은 것이어서 매우 튼튼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 높이가 4m, 둘레는 30여m이다.
이후 낙산사는 1,340여년 동안의 관음성지로 역사를 이어 관동8경(關東8景)의 하나로, 국가 명승 제27호, 사적지 제495호로 지정된 명찰이다.
*.의상대(義湘臺)
우리의 낙산사 탐방은 후문 매표소에서 시작되어 이 절에서 가장 유명한 의상대를 향한다.
의상대(義湘臺)는 의상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깎아지른 절벽 위에 지은 정자로 고송(古松)과 8각정자가 바다와 어울린 경치로 서 있는데 이를 시샘하듯 이슬비가 내리고 있다.
이곳에 맑은 날 아침 해가 뜨기 시작할 무렵이 되면 동해 최고의 일출(日出) 명소로 손꼽히는 곳이라는데-.
나도 모르게 관동별곡(關東別曲)의 일절이 입가에 맴돈다.
梨花는 벌써 지고 접동새 슬피 울 제
洛山 동반으로 義湘臺에 올라 앉아
日出을 보리라 밤중만 니러하니
祥雲이 집히는 듯 六龍이 바치는 듯
바다에서 떠날 제는 萬國이 일위더니
천중에 치뜨니 毫髮을 헤리로다.
*.홍련암(紅蓮庵)
홍련암 가는 길에 관세음보살이 병으로 물을 떨구는 감로수(甘露水)가 있는데이와 연관된 재미 있는 전설이 나그네의 발을 멈추게 한다.
-원효대사가 낙산사를 참배하기 위해 오다가 보니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다.
대사가 그 벼를 달라고 하자, 여인은 벼가익지 않았다고 하였다.
대사가 다시 길을 가다가 보니 속옷을 빠는 한 여인을 만나서 물 한 목음을 청했더니 여인이 빨래를 빠는 더러운 물을 퍼 주는 것이 아닌가.
원효가 그 물을 버리고 그 윗물을 먹자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가며 "스님 가지 마세요" 하더니 숨어 버렸다.
원효가 돌아 보니 여인은 없어지고 짚신 한 짝이 남아 있었다. 절에 와서 보니 나머지 짚신 한 짝이 관음상 앞에 있었다. 비로소 원효는 앞서 만난 두 여인이 관음의 진신(眞身)이었음을 깨닫고 이를 못 알아본 자신을 후회하였다 한다.
-삼국유사( 일연)
홍련암(명승 27호)이 가까워 지면서 목탁소리가 은은한데 깎아진 절벽의 관음굴에 세워진 암자였다.
염불이 한창이지만 염치를 무릅쓰고 들어가서 마루 가운데 뚫린 네모진 곳을 통하여 밑을 보니 깊은 저 바다의 파도가 하얀 포말을 내며 부서지고 있는데,거기 사진과 비디오 촬영을 금하는 그림이 있어 차마 무례하게 카메레를 들이델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냥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의상대사가 이곳을 참배할 때 푸른새가 석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서 그 굴 앞에서 7일 동안 기도하자 바다 위에 붉은 연꽃(紅蓮)이 솟으면서 그 가운데 관음보살이 현신(現身)하여서 그 자리에 암자를 짓고 그 이름을 홀련암(紅蓮庵)이라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관음보살이 말한 죽순을 돗은 자리에 지은 것이 홍련암이란 설도 있고, 의상에게 여의주를 바친 용왕에게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절벽 위에 법당에서 바다가 보이도록 지었다고도 한다.
*. 해수관음상 가는 길
이정표 따라 해수관음상 가는 길에 의상대사기념간에 들렀더니 의상의 영정도 모셔져 있지만 그중 인상 깊은 것은 지난 2005년 낙산사 화재로 불탄 당우의 기둥, 종들이 있어 당시의 참상을 엿보게 한다.
밖을 나서니 봉황이 날개를 펴고 있는 약수터에 '마음을 씻는 물', 그 옆에 고송 아래에 '길에게 길을 묻다'와 같은 법어나 화두 같은 말들이 써있다.
길에게 길을 묻는 대신 나는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 해수관음상을 향해 가다 보니 '지장전(地藏殿)' 앞에 낙산사 경내에서 가장 큰 불전이라는 '寶陀殿(보타전)이 있다. 법당에는 천수(千手), 십일면(11面), 등 많은 관음보살을 모신 것을 보니 낙산사가 우리나라 대표적인 관음성지임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설레임이 있는 길'을 따라 가다 보니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20m 아래에 공중사리탑(보물제1723)이 그냥 가지 말고 들렸다 가라고 이정표로 나를 유혹한다.
-1683년(숙종9년) 홍련암 불상에 금칠을 할 때였다. 갑자기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하더니 공중에서 탁상 위로 떨어 지는 것이 있다. 보니 사리(奢利)여서 이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탑비가 해수관음보살 바로 아래 중턱에서 망망대해와 의상대 그리고 제방과 등대를 굽어보고 있는 공중사리탑(보물제1723)였다.
이 사리탑의 고풍스런 유래비인 해수관음공중시리탑비가 홍련암 입구 언덕에 고풍스럽게 서 있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 것이다.
*. 해수관음상
드디어 낙산사 가면 누구나 꼭 들리는 해수관음상이다.
활짝 핀 연꽃 위에 우뚝 서서 왼손에 감로수(甘露水)병을 받쳐 들고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수인을 짓고 있는 해수관음상 앞에 섰다. 수인(手印)이란 불보살이 당신의 서원(誓願)을 양쪽 손가락으로 나타내고 있는 모양을 말한다.
낙산사 해수관음보살의 서원은 무엇일까?
대자대비(大慈大悲)가 부처들의 서원이니 중생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일 것이다.
여기가 바로 6.25의 수복지역이라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일 것이다. 평화 통일일 것이다.
높이 16m의 불상 밑에 화살표가 있어 다가 가보니 "두꺼비(삼족섬)를 만지고 가면 두 가지 소원이 이루어 집니다." 하여 불상 밑의 거북이를 만지며 나도 소원을 빌었다. 그때 나 왈
"저를 영웅으로 만들어 주소서. 서민의 영웅으로 만들어 주소서. 서민의 영웅이 되어 가난한 사람을 대자대비하고 싶나이다. 그 길이 로또에 당첨되는 길이외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꿈이 이루어지는 길'이라는 원통보전으로 가는 길에서의 나의 서원이었다.
*. 불탄 사찰 문화재들
나는 화재로 불탄 후 새로 건축한 지금의 남대문이 과연 국보1호일까 하는 생각에 회의를 품고 있는 사람이다.
만약 국보 제180호인 김정희의 '玩堂歲寒圖'가 불의에 참화로 불타버려서 그걸 원형과 똑 같이 복원해 놓았다면 그 세한도가 국보 제150호라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엄밀한 의미에서는 국보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다. 국보란 원형에 따르는 이름이지 이름만이 세습되는 것이 아니란 견해다.
그런 생각에서 보면 낙산사에는 누차 화재로 소실된 보물급 아까운 문화재들이 너무 많다.
의상대사의 창건이래 너무 잦은 화마가 휩쓸고 갔기 때문이다.
낙산사는 고려 초기에ㄷㅎ 산불이 있었고, 몽고의 침략, 성종 때, 임진왜란과 6.25 때도 전소된 사찰이다. 2005년에은 또 산불로 거의 전소된 절이라서 낙산사를 둘러 보고 느끼게 되는 것은 여느 고찰(古刹)에 들러서 느끼게 되는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맛이 전혀 없이 새로 지은 사찰 같다.
그래서 복원한 낙산사 동종(銅鐘)은 보물479호에서 해제되었다는 소식이 있다.
2005년 화재에서 당우 20여 채 중 홍련암과 의상대를 제외한 거의 모든 목재 당우가 전소되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원통보전에 봉안되어 있던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1362호) 불상을 스님들이 지혜와 원력으로 화마 속에서도 안전한 지하로 옮겨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불행중 다행이었다.
그 중에도 아까운 것으로 홍예문(강원도유형문화재 33호), 동종(보물479호), 원통보전(강원 유형문화재 제36호), 보타전 등이다.
그래 그런가 설산당이나 동해의 일출을 맞이하는 누각이라는 賓日樓(빈일루)도, 사천왕문도 그리고 세조가 1467년 낙산사에 행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인 홍예문(강원도 유형문화제 33호)도원형이 아닌 복원한 건물들이라 시쿤둥하게 보고 온 것 같다.
낙산 탐방을 마치고 정문을 통하여 내려 오다 보니 낙산해수욕장이 울창한 송림을 뒤로 하고 4km의 백사장이 커다란 활모양을 그리며 파도와 어울리고 있다.
해안에서 70m까지 바다로 들어가도 1.5m밖에 안되는 깊이에다가, 낙산사와 설악산의 주변 관광지 등으로 하여 경포대와 함께 동해안 2대 해수욕장이라는 낙산해수욕장이었다.
게다가 절벽 위의 팔각정 의상대의 일출은 해수욕장으로서의 모든 조건을 두루 가춘 곳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