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적·추상적 묘사에 신비함까지
1731년 ‘십자가의 길’ 제6처에 베로니카 포함
이후 ‘베로니카의 수건’ 주제로 많은 작품 등장
▲ 작품 해설 : 엘 그레코, 〈수건을 든 베로니카〉, 1577-1580, 캔버스에 유채, 84×91cm, 톨레도, 산타 쿠루즈 성당.
베로니카(Santa Veronica)는 전 세계에서 가장 공경 받는 성녀 가운데 한 분인데 그 이유는 ‘십자가의 길’ 제6처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리다’ 때문일 것이다.
베로니카는 예수님이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해골산을 오르실 때 군중 속에서 주님을 지켜보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힘겹게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을 보니 마음이 아팠고, 가지고 있던 수건으로 주님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 드렸는데 거기에 예수님의 얼굴이 찍혔다고 한다.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실존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했으나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고, 다만 전설로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 참고로 베로니카라는 이름은 ‘vera icona’,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실제 형상’이라는 뜻이다.
전설에 따르면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린 그 문제의 수건은 교황 보니파치우스 8세(재위, 1294-1303) 때 로마의 베드로 성당에 모셔져서 공경을 받다가 1527년 로마가 독일 황제군의 침략으로 약탈당하면서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 글의 시작에서 밝혔듯이 베로니카가 대중과 가까워진 것은 ‘십자가의 길’ 제6처에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리다’가 포함되면서부터인데 14처가 오늘날과 같은 내용으로 만들어진 것은 1731년 교황 클레멘스 12세 때의 일이라고 하니 적어도 이때부터 성녀 베로니카는 신자들의 기도와 묵상의 대상이 되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베로니카의 수건이라는 주제는 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림으로 그려졌으며, 그것이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된 때는 중세 말로서 십자가의 길에 베로니카가 포함되기 전에는 독립적인 그림으로 그려졌다. 화가들이 그린 예수님의 얼굴은 ‘성스러운 얼굴’(Volto Santo)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보통은 가시 면류관을 쓴 모습이지만 때로는 면류관 없이 그려지기도 했다.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는 여러 점의 ‘베로니카의 수건’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그 중 하나다. 엘 그레코는 이름이 말해주듯 그리스 출신의 화가이지만 주 활동은 스페인에서 했으며,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까지 스페인 왕실과 톨레도에서 활동하면서 당시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종교분열을 겪고 있던 가톨릭교회에 가톨릭의 정신을 그림으로 보여준 위대한 화가다.
이 그림에서 상반신으로 그려진 베로니카는 두 손으로 성스러운 얼굴이 찍힌 수건을 들고 있다. 수건에 찍힌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고 있으며, 긴 머리카락을 하고 있다. 검은 바탕에 거의 흑백으로 그려졌는데 이 같은 단순한 색상 처리는 성녀의 모습과 예수님의 얼굴에 신비로움을 더해주는 듯하다. 수건은 접힌 자국이 선명하여 대단히 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반면 베로니카는 보다 평면적으로 처리되었는데 그녀의 시선은 화면 밖을 바라보고 있어 관객의 시선을 예수님의 얼굴로 집중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사실 베로니카는 실물이고 예수님의 이미지는 수건에 찍힌 그림이지만 이 작품에서 두 인물 사이의 경계는 대단히 묘해서 그림과 실제 사이를 혼동하게 만든다. 사실 화가는 이 모든 것이 결국은 그림이라는 사실을 감상자로 하여금 잊게 만들고 있다.
이 같은 유희야말로 사실적이면서도 추상성을 추구했던 엘 그레코의 매력이자 능력이다. 그가 20세기 추상 미술가들에 의해 가장 추앙을 받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종희·한양여대 조형일러스트레이션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