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일(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단련 순교는 죽음이 아니라 증언이다. 목숨을 내놓으며 그것이 참되다고 증언하는 것이다. 수많은 우리 순교 성인들이 그렇게 증언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천주님이고 천주님 계명대로 사는 게 참된 삶이라고 증언한 것이다. 그들은 평등하게 서로 형제자매라 부르고 남을 내 몸처럼 아끼고 천주님을 섬기며 살았다. 그런데 그 당시 조선 사회는 병적으로 엄격한 신분 계급 사회였다. 그런 사회 안에서 평등과 임금보다 더 높은 천주님이 있다는 주장 자체가 매우 위험한 반국가적 행위였다. 하지만 그들의 증언이 참됨이 증명되었다. 지금 우리는 완전하지는 않아도 평등하게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모두가 잘 살도록 사회와 국가가 노력하고 있다.
한국에 천주교가 전해지는 과정은 참으로 특이하다. 선교사들이 선교한 결과가 아니었다. 일부 양반 계급 특히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천주교 교리를 서학(西學)이라고 부르며 연구하기 시작했다. 서양 학문이라서 그리 불렀다고 한다. 조선 사회 통치 이념인 유교, 성리학이 잘 맞지 않음을 그들은 이미 알고 새로운 통치 이념을 찾았을 거다. 유교가 부족하고 나빠서가 아니다. 다 그렇듯이 그 원리와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이 온전하지 못했던 걸 거다.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고 돌아가신 조상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걸 누가 나쁘다 하겠나. 교황청이 조상에 대한 효(孝)로서 지낸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금지해서 천주교를 떠난 다산 정약용 세례자 요한은 정직했다. 양반 학자들의 학문 연구가 신앙으로 바뀌고, 점차 중인과 상인 계급으로 이어져 퍼져 나갔다. 그것이 일시적 유행이었다면 수만 명이 목숨을 잃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지금까지 이어오지 못했을 거다. 일부 깨어있는 양반들만 아니라 많은 백성이 그런 세상을 바라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죽어도 괜찮을 만큼 그런 세상을 원했던 거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공동체를 위해 보이지 않게 희생하며, 남의 일을 내 일처럼 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면 죽어도 좋을 거다.
우리 순교자들은 모두 그 당시 엄한 국법을 어긴 범법자였다. 인권이란 개념이 잘 정립되지 않은 시절 반국가 범죄자를 처형하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심문자들은 배교를 요구했다. 배교하면 살려줬다. 실제로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한 교우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교우들을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최양업 신부 어머니인 이성례 마리아(1801~1839) 복자는 모정(母情)으로 배교했다가 다시 돌아와 순교했다. 심문자들은 교우들에게 생명과 죽음의 길을 제시했다. 순교자들은 그 제안을 거꾸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예수님 말씀을 믿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얕은 생각으로 입으로만 배교하고 속으로 믿으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겠지만 신앙은 그런 게 아니다. 신앙은 입으로만도 아니고 마음으로만도 아니고 온 삶으로 살아내고 증언하는 것이다. 순교자들은 그렇게 죽음을 선택했지만 정말로 죽었는지는 모른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지혜 3,1-5).”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순교자를 기억하며 그 시간 그런 상황에 놓으면 나도 순교할 수 있을지 성찰한다. 무섭고 두렵다. 못할 거 같다. 사제는 제일 먼저 죽임을 당할 테고, 더 모진 고문을 당할 텐데 말이다. 그렇다고 배교한다고 말하자니 그것은 괴롭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존경하는 부모를 부정하라고 요구하는 거와 같기 때문이다. 너만 살 수 있다면 얼마든지 당신을 욕하라고 할 분에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 생각하면 순교할 수 있을 거 같다. 게다가 나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옆에 동료 교우들이 있으니 더 그럴 수 있을 거 같다. 나의 신앙은 단련을 받아 더 굳건하고 깊고 순수해진다. 처음부터 의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겠나. 단련을 받으며 의인으로 성장해 가는 거겠지. 그 단련으로 성장하는 건 내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다. 내 의지가 커졌다면 투사 될 거고, 사랑이 커지면 순교자가 될 거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버렸는데 어떻게 모른다고 거짓말을 한단 말인가.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을 약속받았는데 무엇을 두려워한단 말인가(로마 8,39).
예수님, 주님 말씀은 모두 진리이고 생명입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의인은 언제나 고통과 도전을 받습니다. 그것을 이겨내는 게 아니라 잘 견디면서 제 하느님 사랑이 더 커지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콘이 있으니 이 여정을 무사히 잘 마친다고 믿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