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리셋 코리아] 의대 정원, 우선 1000명 이상 더 늘려야
중앙일보
입력 2023.10.23 00:47 업데이트 2023.10.23 01:12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의료관리학)·리셋 코리아 보건복지분과 위원
10년 후에 의사 10% 늘어나도
필수·지역의료 붕괴 해결 못해
의사협회의 대승적 협력 필요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9일 “국민 건강과 생명에 직결된 지역 필수 의료가 붕괴하고 있고, 소아청소년·산부인과 같은 필수 진료 과목의 인력 수급이 어려워서 적기에 치료를 받지 못하는 국민들이 많다”며 “지역 필수 의료를 살리고 초고령 사회에 대비하기 위해 의료 인력 확충과 인재 양성은 필요조건”이라고 강조했다.
윤 정부가 약속한 대로 의대 정원을 늘린다면 지난 20여 년간 의사 기득권 카르텔에 막혀 역대 어느 정부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이뤄낸 정부로 기억할 것이다. 애초 예정대로 의대 정원 규모를 확정해 발표하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의사협회의 반발을 고려하면 지금 한발 물러설 수도 있다. 2020년처럼 동네 병·의원 의사뿐 아니라 대학병원 전공의까지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비우고 파업하면 많은 국민이 고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러스트=김지윤]
윤 대통령은 새로 배출된 의사들이 미용·성형이 아니라 필수 의료 분야를 선택하고, 지역 의대생들이 수도권으로 옮겨 가지 않고 지역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도 함께 약속했다. 산부인과·소아과 등 필수 의료 분야에 인력이 유입될 수 있도록 의료 분쟁의 부담을 덜어주고, 건강보험 수가를 올리고, 의료 전달체계를 정상화하겠다고 했다. 지역 의료 붕괴를 막기 위해 국립대병원을 필수 의료 체계의 중추로 지원·육성하고, 국립대병원 소관 부처를 교육부에서 보건복지부로 바꾸겠다고 밝혔다.
올바른 정책 방향이다. 필수·지역 의료 붕괴를 막는 데 의대 증원이 ‘필요조건’이라면 필수 의료 분야에 대한 지원과 국립대병원 중심으로 지역 의료 체계를 강화하는 것은 ‘충분조건’이다. 의대 증원과 함께 이 같은 정책이 이뤄져야 늘어난 의사들이 미용·성형 분야나 수도권으로 몰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의사협회가 “의대 정원만 늘려봐야 소용없다”고 주장하면서, 해결 과제로 요구했던 사항이 대부분 발표 내용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국립대병원이 늘어난 의대 정원을 자기 병원 교수와 전공의를 늘리는 데만 쓰면 우리나라 의료 체계의 고질병인 대형 병원 쏠림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 지역에 있는 사립대 병원과 중소병원도 국립대병원과 협력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국립대병원이 아무리 좋은 병원이 돼도 국립대병원 혼자 지역 필수 의료를 책임질 수는 없다. 시·도 지방정부를 중심으로 필수 의료를 제공하는 병원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늘어날 의사 인력을 지역에서 함께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 의사 인력만 함께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필수 의료기관 네트워크’에 속한 병원들이 힘을 합쳐 진료해야 유리하도록 건강보험 진료비와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무한경쟁·각자도생의 의료체계를 상생과 협력의 의료생태계로 바꿔야 한다.
지역에 의대를 신설하는 방식은 기존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것에 비해 시간이 더 걸리고, 돈도 더 들고, 좋은 대학과 대학병원을 만드는 어려운 숙제도 해내야 한다. 물론 지방소멸 시대에 지역 사회·경제와 교육·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으니 지역 의대는 좋은 대안은 맞다. 하지만 이번에는 의대 정원을 늘리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 지역 의대 신설을 논의할 기회가 생긴다. 이번에 의대 정원을 1000명 늘린다고 의사 부족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증원 규모도 중요하다. 만약 정부가 의사들에 굴복해 의사협회가 내심 생각하는 300~500명 증원에 그친다면 응급실 뺑뺑이, 소아 진료대란, 지방 의사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10년 후에 의사가 10% 늘어난다고 필수 의료와 지역 붕괴가 해결될 리 없다. 적어도 1000명을 늘리고 단계적으로 2000~3000명을 더 늘려야 한다.
의사협회가 지난 18일 “2020년 파업 때보다 더 큰 불행한 사태가 나올 수 있다”고 한 것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환자 생명도 볼모로 잡겠다는 협박처럼 들린다. OECD 국가 중 의사 소득이 최고 수준인 우리나라 의사들이 할 말은 아니다. 의대 정원이 늘어나도 새로 전문의가 배출되는 2036년까진 의사 소득은 계속 높아질 것이다. 만약 의대 정원을 당장 4500명 늘린다고 해도 OECD 의사 소득 평균에 가까이 가려면 2070년은 지나야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의료관리학)·리셋 코리아 보건복지분과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