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OB의 진흙탕싸움 1984년 / 한국프로야구史 2011/01/31 20:04
스토브리그이긴 한가 봅니다. 들어오시기들은 하는거 같은데. 다들 명절보내시랴,달짫은데 하시는일 하시고, 졸업식.발렌타인데이
이거다 저거다.참석준비에 돈들도 많이 들어가는 달.. 임은 분명한가봅니다.
카페에 읽을 거리가 없는것같아 알고 계신분들은 추억을 되살리시고, 모르시는 회원분들에겐 이런초창기의 일도 있었구나하는 차원에서
제가 알고 있는 야구이야기에서 글을 옮겨서 올리겠습니다. 읽으시고 올해 두산의 또다른 용병 ..대박나길 다들 응원해주시는거
잊지마시고 자.. 시작합니다.
84년시즌의 중요한 키워드는 시즌막판의 져주기 경기였지만, 어찌보면 그 시발점은 바로 삼성과 OB간 1년내내 벌어진 감정싸움이었을 겁니다.
시작은 이렇게 됩니다. 83년 시즌을 마치고 OB의 김영덕감독은 사의을 표명합니다.
야구를 더 배우겠다면서 일본유학을 떠나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OB로서는 비록 83년 시즌은 하위권으로 쳐지긴 했지만 원년우승감독이자 당대최고의 명장을 그대로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일본유학경비를 지원하고, 다시 돌아올 때 팀복귀를 약속했지만 사직서를 낸지 2주일후 OB는 충격적인 뉴스를 들어야 했습니다.
바로 감독공석중이었던 삼성감독으로 김영덕감독이 취임한다는 소식이었죠.
그리고 그 삼성감독 자리에는 OB의 당시 코치였던 김성근에게 먼저 제의가 왔었다는 것이 훗날 알려지기도 합니다.
OB, 후임감독이 되는 김성근씨, 그리고 김영덕감독을 아버지라고 부르던 OB의 선수들은 큰 배신감을 느끼면서 김영덕감독과 삼성구단에 대해 날카로운 각을 세우게 됩니다.
한팀의 감독이 계약기간이 끝나면 본인의 의사대로 팀을 옮길 수도 있는 것이지만 당시만해도 한국의 정서가 그렇지 못했고 김성근감독은 김성근감독대로 본인에게 먼저 제의가 온 자리를 가로챘다고 느꼈을 것이며, 또 박철순의 부상에 대한 책임이라던지, 일본유학이라던지 하면서 사임의 핑계를 댔던 김영덕감독의 처신에도 세련되지 못한 부분이 분명 있었습니다.
OB는 김영덕감독을 빼간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삼성초대감독이었던 서영무씨를 관리이사로 선임하면서 삼성의 전력을 분석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감독출신중 프론트 임원으로 발탁되는 첫번째 사례로 기록된 서영무씨는 이 일에 큰 회의를 느끼던 중 대구원정 호텔에서 뇌출혈로 쓰려져 다시 회복하지 못하고 3년뒤 운명을 하기도 합니다.
거기에 시즌이 시작되기 전, 또하나의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장명부, 김무종 등 83년에 입단한 재일교포들의 대성공 이후 다른 구단들도 앞다투어 교포영입에 나섰고 OB가 가장 먼저 점찍었던 선수가 바로 요미우리의 투수 니우라 히사오, 바로 김일융이었습니다.
하지만 OB는 뒤늦게 뛰어들어 요미우리구단과 김일융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던 나가시마 전감독을 적절히 공략했던 삼성의 금전공세를 당해내지 못했고, 결국 방출선수나 2군선수들 위주였던 당시 재일교포 영입에서 유례없는 트레이드머니까지 지불하면서 김일융의 귀착지는 삼성이 되긴 했지만 OB에게 상도의를 벗어났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OB는 삼성이 김일융과 요미우리에 지불했다는 금액을 전해듣고 그 돈이 있으면 차라리 야구장을 짓겠다고 하면서 실제로 그 즈음에 창원에 연습구장을 마련했는데 그 때문에 창원구장은 관계자들 사이에서 한동안 '니우라구장' 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OB와 삼성은 시즌이 시작되기 전부터 극도의 신경전을 벌여야 했고 4윌 시즌이 시작되고 나서 첫번째 만난 경기에서부터 일이 터지게 됩니다.
경기중애 덕아웃의 선수들끼리 상대편의 기를 꺾는 야유를 보내는 일은 그 무렵 흔한 풍경이었는데, 김영덕감독이 떠난후 입단한, 즉 84년 신인이었던 배원영이라는 선수가 고참선수들의 지시를 받고 김감독이 가장 싫어하는 별명인 '변태'라는 야유를 해버렸던 겁니다.
분을 참지못했던 김영덕감독은 경기가 끝난후 철수하는 덕아웃에 찾아가 배원영의 따귀를 때린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또다시 만난 OB-삼성전에서 양팀은 무려 네번이나 난투극이 일어나 이 와중에 삼성 김근석이 부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을 했고, OB선수들 몇명이 경찰에 조사를 받게 됩니다. (이것 역시 김근석의 훗날 회고에 의하면 선배들의 지시에 의해 위장입원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양팀은 만나는 경기마다 몸에 맞는 볼이 나온다던지, 주자를 테그하는 글러브 위치가 조금이라도 얼굴쪽을 향한다던지 하면 어김없이 집단난투극이 일어나는 지경에 이릅니다. 관중들도 따라 동요되면서 대전경기에서는 삼성선수들에게, 대구경기에서는 OB선수들에게 오물투척의 위협이 가해졌고 5월의 한 경기에서는 OB 구천서가 대구관중이 던진 소주병에 머리를 맞아 부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6월까지 이어졌던 이 양팀의 진흙탕싸움은 삼성유격수 오대석이 2루로 발을 높이 들고 슬라이딩을 해오는 OB 이홍범의 스파이크에 큰 부상을 당하면서 또다시 난투극이 벌어지긴 했지만 이날 이후 어느정도 자정기미가 보여집니다.
오대석은 이때의 부상으로 선수생활 내내 정상컨디션을 찾지 못했습니다.
감정도 감정이었지만 양팀은 총력전을 벌이던 전기리그에서 2강 4중 가운데 2강을 형성하면서 성적에서도 내내 경쟁을 하던 팀이었습니다.
삼성이 전기우승후 힘을 비축하던 후기리그에선 더이상 경기중에 충돌하는 추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삼성은 감정적으로도, 전력상으로도 껄끄러웠던 OB가 한국시리즈의 파트너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면서 시즌막판 롯데에게 고의로 경기를 내주는 대참극을 벌이게 됩니다.
마지막 두경기에서 삼성을 거저(?) 이긴 롯데가 결국 OB를 반경기차이로 앞서면서 후기우승을 했기 때문에 이 고의패배 두경기는 프로야구사를 바꿨다고 할 수도 있을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이전투구(泥田鬪狗).
시즌전부터, 시즌내내 벌어진 OB와 삼성간의 이 다툼을 단순히 해프닝으로 치부하기는 너무 큰, 84년 시즌의 큰 변수였다고 할 수 있겠는데, 타팀에 대한 배려가 많이 부족했던 프로야구 초창기의 모습이었습니다.
[출처] 삼성-OB의 진흙탕싸움|작성자 최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