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1일(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부르심은 구원 부르심은 구원의 시작이다. 인류 구원을 위해 인간의 도움이 필요해서 우리를 부르시는 게 아니다. 하느님이 누군가 당신을 도와주기를 원하신다면 그분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다. 그분은 전능하시고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완전하신 분이다.
마태오 사도 직업은 세리였는데, 세리는 그 당시 공적인 죄인이었다. 그걸 모르고 그 직업을 선택했을 리 없다. 아마도 셈에 밝고 문서를 다루는 업무 능력도 있고 보수가 좋은 안정된 직업을 찾다 보니 그 자리에 있게 됐을 거다. 직업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친구가 돼주지 않으니 직장 동료 그리고 같은 공적 죄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됐을 거다. 그는 의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죄스러운 구조에 들어가 있었던 거다. 그 죄스러운 구조는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내적인 것도 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어느새 그렇게 돼버리고, 싫어하면서도 그걸 하게 되는 것 말이다. 수백, 수천 번 결심해도 개선되지 않는 그것 말이다. 정말이지 나는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구세주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마태 9,13). 부르심은 죄인이 죄스러운 구조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죄스러운 구조 밖에서 죄인을 빼내시는 게 아니라 몸소 그 안으로 들어오셔서 죄인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신다. 풀을 뜯기러 푸른 초원으로 양 떼를 데리고 나가는 목자처럼,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데리고 가는 모세처럼 말이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고, 죄인들 무리에 들어오시고, 그들을 탈출시키신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5). 이 세상에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없으니 양들은 목자를 완전히 신뢰하고 그를 따른다. 하느님은 그들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아프고 불쌍하니까 그러시는 거다.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로 인간을 구원하신다.
거룩해지려고 병적으로 정결을 따졌던 바리사이들은 공적인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고(마태 9,13).” 하셨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건 무죄함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다. 하늘나라는 무죄한 영혼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자비를 베푼 영혼이 사는 영원한 나라다. 나 홀로 구원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교회 안에서 구원받는다. 죄스러운 구조 안에서 죄스러운 몸으로 사는데 죄 안 짓고 어떻게 살겠나. 죄는 이 몸이 죽어야 끝난다. 성공하라고 부르신 게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고 부르셨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한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 4,1-3).”
예수님,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씻어 깨끗해집니다. 그게 아니면 무슨 수로 이 죄스러운 구조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죄인이 우글거리는 이곳에서 사랑을 배우고 실천합니다. 인내 이해 도움 봉사 희생하며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게 은총을 베풀어 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하느님이 저를 부르셨음을 더 깊이 깨닫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