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2일(연중 제25주일) 섬김과 평화 평화는 구원의 분명한 표지다. 폭력과 두려움에 의한 고요한 거짓 평화 말고 서로 아끼고 사랑해서 생기 있는 참 평화를 바란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예수님이 남겨 주신 평화를 서로 주고받는다. 그 평화는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같지 않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는 이들은 마음이 산란해지지도 않고 겁을 내지도 않는다(요한 14,27).
요즘 한국에 온 외국인 관광객들이 놀라는 일들이 몇 가지 있다고 하는데, 그중 하나가 한국 사람들은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그냥 올려놓고 있는 거란다. 나도 그거 있고, 때론 내 것이 더 좋고, 훔쳐 가봐야 별 도움도 안 되고, 게다가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있어서 금방 적발된다는 거 다 안다. 그래서 누가 내 핸드폰 훔쳐 갈까 봐 걱정하지 않는다. 공동체가 튼튼하면 나는 편하고 평화롭다.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을 준비하셨고, 제자들은 누가 가장 높냐고 말다툼했다(마르 9,34).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면 안 된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수난당하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실 걸 몰랐지만 지금 우리는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죽음을 이기셨고, 그분을 믿는 이는 모두 그분처럼 부활한다. 믿는 우리는 죽지 않는다. 예수님이 인간의 탈을 쓴 하느님 아들이었다면, 죽는 척한 거였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 예수님은 우리 중 하나로서 그 길을 가셨다.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셨다. 힘과 폭력과 두려움으로 지배하는 게 아니라 사랑과 섬김과 신뢰로 이루어지는 공동체를 만드셨다. 봉사하고 섬기는 새로운 권력을 만드셨다. 그 권력은 절대 깨지지 않는 신뢰를 만든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내려오실 수 있었고, 아니 그 이전에 그런 일을 겪지 않게 하실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당신이 아빠라고 부르시는 하느님이 바라시는 게 아니었다.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그 멋진 나라를 우리에게 열어젖혀 보여주시려는 아버지 하느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그러니 하고 싶어도, 할 수 있어도 그러실 수 없었다. 아버지 하느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하기 싫어도 그가 원하니 그렇게 하는 게 사랑이다. 하늘나라는 그런 나라다. 우리는 그런 나라로 초대받았고 우리 중 일부는 벌써 거기서 살고 있다.
평화로운 공동체는 성격이 온순하고 평화로운 사람들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평화를 이루는 길은 참으로 골치 아프고 험난하다. 초인적인 인내는 물론이고 여러 작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필요하다. 누가 높냐고 말다툼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 세우시고 그를 껴안으셨다(마르 9,36). 예쁘고 귀여운 어린이를 사랑하라는 뜻이 아니다. 모자라고 모나고 사람 구실 못해도 그를 너의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려면 인내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섬기는 사람이고 더 나아가 모자란 그를 위해서도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바로 그런 사람이 우리 중 가장 높은 사람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예수님, 그런 공동체에서 산다면 지금 죽어도 좋을 거 같습니다. 유토피아는 이 세상에 없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하늘나라는 이미 저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 나라를 죽도록 원하니 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갑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섬김과 희생이 더 수월해지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