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러한 여성의 교차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된 계기는 아일랜드에서 ‘아시안 여성’으로서 겪었던 차별 경험이었다. 나는 유럽에 오면 한국의 지독한 가부장제와 성차별주의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실제로 아일랜드 생활을 시작하며 정작 깨달은 것은 ‘아시안 여성’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이었다. 단순히 성차별에 인종차별을 더한 것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험들을 겪으며 고민은 나날이 깊어갔다.
‘나고 자란 국가, 문화권에 실망해 이민을 고민 중’이라는 내 말에, 어학연수를 핑계로 유럽 국가에 와서 서양 남성을 꼬셔 결혼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은 적도 있다. 심지어 으슥한 밤 골목을 거닐다, 아시안 성매매 여성으로 여기고 다가온 백인 남성이 화대를 묻는 일도 있었다. 길거리 괴롭힘에 노출되는 것 또한 같은 아시안 남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곤니찌와~ 니하오~” 하며 노골적인 인종차별 캣콜링(길거리에서 여성에게 던지는 추파와 희롱)을 일상적으로 당했다. 어학원에서 만난 한 일본인 친구는 타인종이 거의 없는 작은 도시의 쇼핑몰에 아침 일찍 장을 보러 갔더니, 청소부로 오해를 받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결국 그곳에서의 여성인권은 백인 여성의 인권이었다. 인종주의에 대한 고민 없이는 무엇도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내가 겪은 일들을 유색인에 대한 인종차별이라고만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들이 너무 많았다. 이 모든 일들은 내가 아시안이며, 동시에 여성이어서 겪은 일들이었다. 당시에는 교차성 이론의 존재조차 몰랐음에도, 막연하게 이러한 차별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각각 다른 차별의 합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 깨닫고 있었다.
이를테면 ‘조국에서 성차별을 견디느니 유럽 이민 가서 인종차별을 견디는 게 훨씬 나을 걸?’ 같은 주장에는 나는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다. 아무리 선진문화를 자랑하는 유럽 국가라 해도 그곳에서 이루어낸 성평등의 주인공은 백인 여성들일 뿐, 유색인종의 여성이 아니다. 다른 인종의 여성들은 마치 다른 존재이기라도 하듯 취급된다.
서구 국가 남성들의 아시안 여성에 대한 성적 판타지가 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유색인종의 여성, 특히 그 중 아시안 여성은 이국적이고 수동적이며 남성에게 복종하고 순응하는 존재로, 백인 여성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성적 대상화되고 있다. 우연히 페이스북에서 아시안 여성에 대한 서구 남성들의 비뚤어진 페티쉬(특정 부위나 물건에 대한 성적 집착)와 성적 대상화를 비판하는 동영상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달린 역겨운 몇몇 댓글의 내용이 더욱 명확하게 그 현실을 드러내 보여준다.
‘아시안 여성들은 피부색이 아니라 문화적 가치와 여성성 때문에 욕망의 대상이 되는 거야. 그들은 서양의 여성들보다 남성들을 존중하고 상냥(sweet)하고 남자들을 상처 입히지 않는다(harmless)고.’
‘남자들이 피부색 때문에 아시안 여성을 좋아한다고? 셀 수 없이 많은 타입의 아시안이 있지만 그 중 페티쉬가 되는 것은 밝은 피부색의 마르고(slander) 애기 같은(child-like) 여성들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