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3일(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그리스도의 수난을 나눔 봉사는 마라톤처럼 중독성이 있다. 그 긴 거리를 뛰면서 죽을 듯이 힘들었는데도 또 뛰고 싶은 것과 같고, 거기에 더해서 하던 봉사활동을 중단하면 죄책감 같은 마음의 부담을 가진다. 왜 이런 건지 잘 모르지만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은 다 안다. 먹어 본 사람만 그 맛을 아는 거처럼, 아름다운 광경을 직접 목격한 사람만 느끼는 깊은 감동처럼 그렇게 사는 사람만 아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다.
봉사에는 보수가 없다. 그 대신 보람이라는 내적인 선물과 그런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들 무리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 그리고 고귀한 품위를 가지게 된 거 같은 느낌을 받는다. 보수와 보답을 바라고 봉사하는 사람은 그런 내적인 선물을 받지 못한다. 무보수나 어려움이 아니라 사람들의 무관심과 더 나아가 비난이 봉사활동을 방해한다. 그때 봉사하려는 마음은 내적으로 공격을 받는다. 그래서 그만둘 건가, 아니면 그래도 계속 해 나갈 건가.
하느님은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을 세상에 드러내신다. 예수님은 이를 등불에 비유하셨다. 등불의 목적은 비추어 밝히는 거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루카 8,16-17).” 보수와 보답을 바란다면 그 빛은 점점 작아지고 결국 꺼져버린다. 보람 없이 주위의 무관심과 비난에도 그런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빛은 더 커진다.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많은 의인과 순교자들이 이를 증언한다.
오늘은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라고 불리는 비오 성인 축일이다. 예수님의 다섯 상처와 그 고통을 50년 동안이나 온몸에 지니고 살아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런데 오상을 받아서가 아니라 사목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며 하느님 백성을 섬겨서 성인품에 올려진 거다.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시던 그리스도 예수님을 드러내 보였다. 주님의 다섯 상처, 오상은 그중 하나다. 세상의 무관심, 비난, 죄악을 당신의 고귀한 몸에 짊어지고 당신을 희생하여 봉헌하셨고 지금도 그러고 계시는 예수님이 지니신 상처를 세상에 드러내 보였다. 봉사의 기쁨과 보람을 모를 사람은 없을 거다. 그런 기쁨 없이, 무관심과 비난에도 봉사 그리고 희생을 이어나가는 사람이 지닌 내적 동기는 신적(神的)이다. 그것이 굳은 의지나 오기라면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을 비난하고 폭력적으로 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신적인 동기를 지닌 이들은 예수님처럼 오상을 아프고 힘들지만 받아들인다. 그들은 자신 안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 목소리를 알아듣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루카 8,18).”
예수님, 세상의 모든 선하고 의로운 이들을 응원하고, 연대하고, 그들 편에서 그들과 함께 주님 뒤를 따르기를 원합니다. 봉사활동에 중독성이 있는 거처럼, 도전을 받을수록 그 열망이 더 커지는 줄 압니다. 그래서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겁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마음이 상할 때에 아드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이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