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문학동네 1998년 봄/제5권 제1호/통권14호/단편소설
해에게서 海에게
류소영
12월 31일 19시 30분 매봉역 4번 출구
여자는 십 분쯤 늦었다. 역에 도착하자마자 개포동에 있는 여자의 허름한 아파트로 전화를 넣었을 때 여자는 상기된 목소리로 ꡒ응, 알았어. 오 분 내로 집으러 갈게ꡓ 했었다. 집으러? 나는 갑자기 내가 땅콩이나 팝콘이 된 기분으로, 역시나 상기된 목소리로 ꡒ얼른 와. 여기 되게 추워. 난 강남이 싫어ꡓ라고 대꾸했었다.
여자, 최정미. 그러니까 거의 반년 만에 만나는 셈이었다. 개포동에 있는 13평 남짓한 오래된 주공아파트에 사는 이혼녀 최정미는 나의 학교 동창이었다. 오늘 함께 만나기로 되어 있는 박사 부부와 문과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학교 동기 동창…… 우리를 강하게 결속시키고 있는 그 학교는 우리에게 개근을 요구하거나 체벌을 가하거나 학점을 안겨주는 그런 학교가 아니었다. 건강과 활력과 화목한 가정을 위한 시민금연센터. 우리 모두는 그곳을 금연학교라 불렀고, 우리는 그곳의 6기 동창이었다.
내가 그곳에 드나들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나는 을지로에 있는 작은 영화기획홍보사의 말단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이 년 전쯤 새로 홍보를 맡은 어느 외화와 관련하여 작은 쪽글을 부탁하기 위해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하는 김동주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그 뒤로 몇 번 만나 잡담을 나누곤 했다. 그러던 중 김동주가 권유한 것이 금연학교였다. ꡒ지숙씨, 지숙씨도 대책 없는 골초지?ꡓ ꡒ골초? 동주씨에 비하면야 가난한 집 굴뚝이지요, 뭐. 그래도 줄이긴 줄여야 하는데…… 오래 살고 싶은 욕심이야 없지만 머리가 띵하고 기운이 없어서 일을 제대로 못 할 정도니 이건 진짜 문제야, 문제.ꡓ ꡒ우리 금연학교나 다녀볼까?ꡓ ꡒ금연학교?ꡓ
그렇게 시작하게 된 금연학교 생활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결심 아닌 결심과는 달리 그곳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는 흡연을 더욱 자극하는 곳이었다. 몇십 년간 지극히 성실하고 체계적인 흡연을 해온 사람의 폐 사진이나 비디오 자료를 엄숙하게 쳐다보는 일까지야 예상했던 수준이었지만, 모이는 시간과 마치는 시간마다 마치 무슨 중요한 통과제의처럼 따라붙는 구호 외치기는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ꡒ난 할 수 있다!ꡓ ꡒ나는 금연한다!ꡓ ꡒ나는 반드시 금연한다!ꡓ ꡒ나는 기필코 금연한다아!!ꡓ 더욱더 고역인 것은 비디오 자료를 열심히 보고, 구호를 누구보다도 크게 따라하고, 구체적인 금연 전략이나 행동 지침을 부지런히 받아적는 사람들의 진지한 얼굴 표정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금연학교에 다닌 이후로 나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 대한 좋은 쪽으로의 대책 없는 선입견, 그러니까 대체로 털털하고 대범하고 그러면서도 진지하고 이해타산에는 그렇게 밝지 않고……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철회하게 되었다. 나는, 자주 결석했거니와 몇 번 나가지도 않고 그만두었지만, 그곳에서 나오는 걸음으로 참았던 담배를 피워 물곤 했다.
우리들은 그 학교의 대책 없는 열등생으로 그렇게 만났다.
금연센터에는 아마 학교에서 선도과정의 일환으로 의무적으로 보내는 모양인지,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까까머리들이 더러 섞여 있었다. 자율학습 시간이나 학원 다닐 시간에 정당한 사유로 빠져나와 저녁에 그곳에 모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즐거움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나란히 뒷줄에 앉아 저들끼리 키들대거나, 불을 끄고 비디오 자료를 볼 때는 숫제 코까지 골아가며 잠들곤 했다. 교육 기간이 중반에 이르자, 그들 중학생과 같은 그룹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그들이 ꡐ우리ꡑ가 되었다. 나와 김동주, 그리고 오 년 전에 검사 남편과 이혼하고 개포동에 혼자 살면서 TV 드라마 보조 작가로 일하는 최정미, 그리고 내의 회사의 과장으로 일하는 문형희가 그들이었다. 우리는 그곳을 나서며 일제히 담배를 피워 물다가 눈인사를 나누었고, 교육용 비디오를 보며 졸다가 이마를 부딪히며 키들거렸고, ꡒ나는 기필코 금연한다!!ꡓ ꡒ나는 반드시 금연한다아!!ꡓ를 외치는 시간에 ꡐ금ꡑ자 대신 조그만 소리로 ꡐ흡ꡑ자를 끼워넣으며 웃음을 참았고, 그러다가 몇 번 술자리를 같이 하고 ꡐ우리ꡑ가 되었다.
ꡒ야, 지숙씨 이게 얼마 만인고?ꡓ
최정미가 모는 차를 타고 십 분 남짓 달려 그녀의 집에 도착했을 때, 김동주 부부는 미리 도착해서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들 부부는 박사과정에 다니고 있었고, 부부 모두 문화인류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부부 모두 동네의 작은 보습학원에서 중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ꡒ어머 오빠, 살아 계셨군요.ꡓ
나는 평소에 그렇게 친하게 지낸 것도 아니면서, 그의 아내를 의식하여 일부러 장난스레 말을 받았다. 그의 아내는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ꡒ근데 오늘 왜들 모이자고 한 거예요?ꡓ
ꡒ송년회죠, 뭐. 또 막날인데…… 미시령쯤 가서 일출이나 보자구.ꡓ
ꡒ일출? 새삼스럽게 일출은 무슨…… 학교 생각나서 찜찜하네.ꡓ
ꡒ학교?ꡓ
ꡒ그래요, 학교. ꡐ나는 반드시 금연한다!ꡑ 이런 거랑 비슷한 거 아냐? 떠오르는 해 쳐다보면서 ꡐ나는 반드시 이겨낸다!ꡑ ꡐ경제 난국 별거 아니다!ꡑ ꡐ나는 기필코 절약한다!!ꡑꡓ
ꡒ듣고 보니 그러네.ꡓ
그곳의 모두가 낄낄거렸다.
ꡒ근데, 아줌마. 나 지금 무지하게 배고파. 뭐 좀 먹을 거 없수?ꡓ
ꡒ지숙씨도 술 좀 할래? 난 운전해야 되고. 아니면 동태국 있는데, 밥 좀 줄까?ꡓ
우리는 밥상과 술상을 어정쩡하게 합친 상에 둘러앉아 이것저것 마구 먹고 떠들어댔다. 누군가 무심히 켜놓은 TV에서는 연기 대상, 코미디 대상 따위의 프로가 진행되고 있었다. 김동주는 대학원생답게 분석적인 말투로 얘기했다.
ꡒ연말에 꼭 저런 프로들을 내보내야 하나? 시청자들의 일 년을 참 친절하게도 정리해주니 고맙기도 하군. 시청자들은 완전 이런 거 아냐? ꡐ그래, 그래 저 프로 꽤 재미있었지.ꡑ ꡐ그래, 그래 저 여자 올 한 해 동안 죽였어……ꡑ 사람들은 일 년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마치 자기가 거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 같은 환상을 가진 채 TV를 쳐다보면서 고스란히 일 년을 정리당하는 것 같애. ……하긴 안 할 수도 없겠지, 저런 프로. 내일도 또 똑같을 거 아냐? 우리 내일 TV에 뭐할지 한번 알아맞혀볼까?ꡓ
ꡒ저요! 외국인 장기자랑.ꡓ
장난스럽게 오른손을 치켜들며 최정미가 말했다.
ꡒ삑! 연예인 청백전.ꡓ
이번엔 나다.
ꡒ삑! 세계의 서커스.ꡓ
김동주의 아내다.
ꡒ귀신이구만, 귀신. 다들 정초에 뭐 좋은 계획도 하나 없이, 해 바뀔 때마다 아랫목에 궁둥이나 지지고 있었나봐. 하긴…… 맨날 똑같앴으니.ꡓ
김동주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술 마시는 중간중간에 TV로 눈을 돌려, ꡒ어, 저 여자가 연기를 뭐 잘한다고 상을 주나, 상을 주길……ꡓ 하기도 하고 ꡒ우와, 저 여자 드레스 파인 것 좀 봐. 끝내준다 끝내줘ꡓ 하기도 했다. 최정미는 별말 없이 담배를 피웠고, 김동주의 아내는 최정미가 워낙 무심해서인지 주인도 아니면서 과일도 깎고 떨어진 안주를 가지러 부지런히 부엌에 드나들곤 했다. 나는 우리가 속수무책 노인네가 되어간다는 생각을 하며 구석에서 맥주를 마시며 졸았다.
이상한 밤이었다. 나는 구석에 놓인 오늘자 신문을 뒤적여 하릴없이 일출 시각을 확인해두었다. 강원도 지역 오전 7시 37분, 날이 흐리고 혹 비나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고 했다.
1월 1일 0시 10분 최정미의 집
화면은 보신각을 비추었다. 종소리. 거의 대부분이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인파들. 그리고 상투적인 아나운서의 말들이 이어졌다. ꡒ무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국내․외로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었습니다. 한민족의 힘찬 기상으로 다시 도약할 때입니다. 대화합과 고통 분담의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점입니다…….ꡓ
ꡒ왠지 비감하군. ……저 인파들 좀 봐. 장난스럽게 카메라 쳐다보며 V자나 그리는 사람은 꼬마들뿐이잖아. 저 결연한 표정 좀 봐. 새해를 맞으면서 저렇게 결연한 표정을 짓는 게 더이상 촌스럽거나 낯간지러운 게 아닌 세월이 와버린 거야. 왜냐? 진짜거든. 진짜 살기 힘들거든. 장난이 아니거든. ……근데 지숙씬 해 바뀌면서 종칠 때 저기 종로 나가본 적 있어요?ꡓ
ꡒ아니오. 아직 한 번도. 사실 좀 그렇더라구요. ……근데 문과장은 왜 이렇게 안 와요?ꡓ
ꡒ응, 회사에서 송년회가 있는데 끝나는 대로 이리로 온댔어.ꡓ
ꡒ회사 송년회까지 있고, 또 오늘은 새해 첫날인데 그냥 집으로 들어가시라 그러지 그랬어요?ꡓ
ꡒ자기가 먼저 야단이던데, 뭘. 가정 있는 몸이라고 혼자 빼놓을까봐. ……그리고 또 운전 땜에 필요하기도 해요.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정미씨뿐이라 밤 운전에 피로하거든요. 그래서 술도 몇 잔만 하고 빠져나오랬어.ꡓ
ꡒ자, 자 쓸데없는 얘기 좀 그만하고 새해 소망들이나 밝혀봐. 먼저, 동주씨.ꡓ
최정미는 주먹 쥔 왼손을 마이크 삼아 들이대며 김동주를 쳐다보았다.
ꡒ나? 나야 얼른 논문 준비해서 박사과정 끝마치는 거지, 뭐. 또 하나 더 있다면 학원에서 안 짤리는 거고. 방학 시작되면서 학원 개편이 있었는데, 고 코딱지 만한 학원에서도 여섯, 일곱이 짤렸어. 아주 미치겠다니까. 그래서 요새 내가 학원 수업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몰라. 당장 밥줄인데 어떡해. 요즘 학원 수업 준비하는 것처럼 앞으로 공부한다면 난 아마 인류학계의 거두가 되고도 남을 거야. 사는 게 아주 슬퍼지더라니깐. ……난 새해에 그 두 가지만 잘 풀려준대도 소원이 없겠어.ꡓ
ꡒ애는? 애는 안 가져요?ꡓ
걱정스럽다는 듯 최정미가 되물었다.
ꡒ애는 무슨, 이 마당에…….ꡓ
ꡒ그럼 윤경씬?ꡓ
김동주의 아내 이름이 윤경인가 보다. 나는 아직 그녀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ꡒ저도 비슷하죠, 뭐. 다만 전 논문은 아직 안 급해요. 제가 형보다 박사과정을 한 해 늦게 시작했거든요.ꡓ
ꡒ그러는 누나는?ꡓ
김동주다.
ꡒ나야 뭐 단순하지. 좀 오래 끌 만한 괜찮은 드라마 맡는 거. ……심란해 죽겠어. 방송사들도 많이 어려운가봐. 실제로 어려운 것도 있고, 또 사회 분위기 자체가 이러니까 대형 쇼 프로랑 드라마 쪽은 줄이려는 추세야. 경제 관련 프로는 늘리고. 젊고 빠릿빠릿한 작가들은 계속 치고 올라오지, 드라마 편수는 줄인대지…… 아! 소원 하나 더 있어, 애들 공부 잘하고 몸 건강한 거. 그 사람하고 갈라서고 나서, 그 사람이나 시부모 걱정은 눈꼽만큼도 안 들고 이젠 그 집구석이 어떤 구조로 생겨먹었는지도 까맣게 잊을 정돈데, 애들 걱정은 돼.ꡓ
ꡒ몇 학년들 되지?ꡓ
ꡒ중3, 중1 올라가. 걔들도 많이 컸어.ꡓ
ꡒ아줌마는 그 소원에 하나 더 보태야겠는걸.ꡓ
나다.
ꡒ뭔데?ꡓ
ꡒ살 좀 빼. 그게 뭐야. 안 보던 새에 왜 그렇게 쪘어?ꡓ
ꡒ어…… 지숙씨도 드라마 써봐. 생각은 잘 안 되지, 어찌됐든 정해진 기간 안에 원고는 딱딱 나와야 되지. 아주 미치겠어.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컴퓨터 앞에만 꼼짝 없이 붙들려 앉아 있는 거야. 스트레스 받으니까 컴퓨터 옆에 씹으면 소리 크게 나는 딱딱한 스낵 같은 거나 잔뜩 쌓아놓고 와작와작 먹으면서. 아주 죽겠어. 가끔 거울 들여다보다가 나도 놀래. ……그래. 암튼 그 문제도 노력해볼게. 아랫배가 조금만 차가워지면 바로 화장실 달려가야 되는 이놈의 과민성 대장증센지 뭔지만 아니라면 스낵 대신 얼음 조각으로 바꿔볼 텐데…… 지숙씨는 새해에 뭐하고 싶어?ꡓ
ꡒ글쎄…… 시집이나 갈까?ꡓ
ꡒ뭐?ꡓ
ꡒ왜 눈은 흘기고 그래요? 시집 좀 갈 수도 있지. 아 사실 뭐, 서로 잘 맞는 사람이면 결혼해도 나쁠 거 없잖아요. 그러기가 어려우니까 문제지만. ……그건 그냥 해본 소리고 나도 동주씨랑 비슷해. 안 짤리면 그걸로 캄사, 캄사야. 그러니까, 나 돕는 셈치고 어렵더라도 영화들 많이 보러 다녀요. 아, 지갑이 아무리 얇아져도 영화 안 보고야 어떻게 살어. 아줌마는 특히나 더, 생각거리도 얻고…….ꡓ
우리가 시시한 새해 소망을 늘어놓는 사이, 화면은 31일 저녁부터 1일 새벽까지 다섯 시간인가 일곱 시간 동안 마라톤 라이브 콘서트를 열고 있다는 산울림의 공연 현장으로 옮겨갔다. 헤어 스프레이를 한껏 뿌려 폭탄 맞은 머리를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장년의 김창완과 공연장을 가득 메운 채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따라 부르는 십대부터 사십대까지의 산울림 팬들이 비춰졌다. 그는 천진해 보이고 행복해 보였다. ꡒ라디오로 기차를 타자, 오토바이로 기차를 타자, 풍선으로 라디오를 타자, ……타고 가자…….ꡓ
ꡒ야, 진짜 근사한데…… 저 사람 지금 몇 살쯤 됐지?ꡓ
ꡒ글쎄요. 사십대 중반 정도?ꡓ
ꡒ부럽다, 부러워. ……지숙씬 올해 몇이죠?ꡓ
김동주다. 그는 진짜 저 가수가, 그리고 자기 또래의 남자들도 군데군데 섞인 저 대열이 부러운 표정이다.
ꡒ묻지 마요, 아홉수야 아홉수. 그러니까 나 올 한 해 조용히 넘어가게 다들 나 건들지 말라구. 요즘 나 밤에 김광석 노래 틀어놓고 청승맞게 따라 부른다니까. 그거 왜 있잖아요, <서른 즈음에>ꡓ
ꡒ됐어요, 됐어. 어울리지 않게, 청승은…… 정미씨는?ꡓ
ꡒ나? 마흔둘. 별로 안 돼. 김창완보다도 내가 더 어릴걸?ꡓ
모두들 낄낄 웃었다. 우리들 대화를 엿들었는지 어쨌는지 화면 속의 그는 더 열심히 노래 부르고 있었다. ꡐ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 창문 밖이 훤하게 밝았네…….ꡑ
ꡒ동주씨가 지숙씨보다 더 위였던가?ꡓ
ꡒ그럼요. 난 이제 중후한 서른하나. 집사람은 저보다 세 살 아래구요.ꡓ
씩씩하고 천진난만한 화면 속의 남자 때문에 괜한 나이 타령이 이어졌다. 우리는 서로서로 어정쩡하게 반말과 존댓말을 섞었고, 호칭도 기분에 따라 달라졌다. 최정미에게는 정미씨, 누나, 아줌마 등의 호칭을 기분 내키는 대로 섞어 불렀고, 김동주에게는 동주씨라고 주로 불렀지만, 기분이 나쁠 때는 김박사라고도 불렀다. 곧 우리와 합류하게 될 문과장은 김동주를 꼭 ꡐ김주사ꡑ라고 불렀다. 김동주에게 남부럽지 않을 주사(酒邪)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스운 것은 문과장이 어느 자리에서나 김동주를 김주사로 부른다는 것이다. 언제 한번은 회사 동료에게 김동주를 소개하면서도 ꡒ이 사람은 대학에서 인류학을 공부하는 김주사ꡓ라고 하여 주변 사람들 모두를 웃겼다.
사소해져가고 시시해져가는 ꡐ우리ꡑ들. 밤은 깊어가고 있었고, 우리들은 우리들을 엮어준 최초의 끈이 무색해질 만큼 많은 담배를 피우며 노곤하게 취해갔다. 김동주의 아내는 불안한 표정으로 최정미로부터 술잔을 멀찍이 밀어놓았고, 최정미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씨익 웃어주었다. TV를 켜놓지만 않았다면 시간이 우리를 비껴가는 느낌이 들었을 터였다. 문득문득 최정미가 ꡒ씨팔, 지겨워…… 지겨워 죽겠어ꡓ라고 말했고, 욕이 나오기 시작한다는 건 그녀가 취해간다는 증거였으므로 우리 모두는 조금씩 불안해했다. 은평구 불광동, 기자촌의 초입에 위치한 옹색한 연립주택의 반지하 전세방, 31일 아침 일곱시 사십분쯤 무심히 문을 잠그고 나온 그곳이 무슨 이국의 땅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몇 년 전에 떠나온.
견딜 수 있을 만한, 편안한 피로에 쌓여 있던 우리들을 깨운 것은 문과장의 전화 연락이었다.
1월 1일 1시 40분 판교
ꡒ모두들, 안녕! 아…… 아니지, 벌써 해가 바뀌었으니 새해 인살 해야지.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다들.ꡓ
문형희다. 최정미의 집 앞 사거리에서 우리가 차를 세운 채 십여 분쯤 기다렸을 때 그는 택시에서 내려 우리 쪽으로 장난스럽게 뛰어왔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시절, 무슨 머피의 법칙처럼 꼭 지지리도 못생기고 항상 누런 코를 달고 다니는 아이하고만 추게 되어 있던 그 포크댄스라는 춤에서 익힌 투스텝으로.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고, 와이셔츠엔 멀리서도 눈에 뜨일 정도로 넓게, 붉은 국물 자국이 번져 있었다. 김동주가 수차례 당부했다고 했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불그스레했다. 우리들, 그러니까 김동주 부부와 나는 다시 한번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운전을 교대로 하기 위해 부른 문과장이었지만, 최정미의 취기 때문에 도착하자마자 그를 운전대 앞에 앉힐 작정이었는데 지금으로서는 최정미의 상태가 훨씬 나아 보였다. ꡐ목숨을 걸어가며 그놈의 일출이란 걸 봐야 하나……ꡑ 나는 그런 생각으로 문과장의 면모를 살폈고 김동주 부부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ꡒ시도씨, 내가 그렇게 강조했는데 진짜 너무하네.ꡓ
ꡒ아냐, 아냐 나 하나도 안 취했다구. ……그러고, 새해부터는 그 망할 놈의 ꡐ시도씨ꡑ 좀 그만할 수 없나?ꡓ
우리 모두는 문과장을 ꡐ문시도ꡑ라고 불렀다. 그것은 잘 나가는 어느 내의의 영어 이름을 우리 식으로 바꿔 부른 별명이었다. 사실 문과장이 근무하는 내의 회사에서는 그 ꡐ시도ꡑ 내의를 만들지 않았다. 원래대로 하자면 ꡐ문경호ꡑ가 되어야 하는데, 그건 별명이라고 하기엔 너무 ꡐ사람 이름답다ꡑ는 게 우리 모두의 중론이었다. 때문에 문과장은 ꡐ경호ꡑ 내의보다 좀더 유명하고, 내의 이름으로 그걸 삼은 의도가 무언지 자못 수상하게 느껴지는 ꡐ시도ꡑ 내의를 자신의 별명으로 달게 되었다. 처음 김동주가 ꡐ문시도ꡑ라는 별명을 제안했을 때, 문과장을 제외한 우리 모두는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었다.
ꡒ왜? 그 별명이 어때서. 난 내가 지금까지 붙여본 별명 중에 그게 가장 성공작인 것 같은데…… 그나저나 운전하겠어요?ꡓ
ꡒ아, 그런 걱정일랑 붙들어 매. 내가 원래 몇 잔만 마셔도 얼굴이 잘 붉어지는 체질이잖아. 그래서 취해 보이는 거야, 사실 말짱해. 정미씨, 피곤하면 언제든지 말씀만 하시라구요.ꡓ
문과장은 최정미의 옆자리에 올라앉자마자 호기롭게 떠들어댔다. 뒷자리엔 김동주 부부와 내가 앉았는데, 김동주의 아내가 워낙 야위어서인지 비좁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김동주의 아내는 벌써 피로한지 고개를 젖히고 잠깐잠깐씩 눈을 감았다. 최정미는 차에 꽂혀 있던 카세트 테이프를 그대로 작동시켰는데 흘러나온 노래는 이적․김동률의 <그땐 그랬지>였다.
ꡒ우와, 정미씨 세련됐네. 얘들 되게 어린애들 아녜요? ……하여튼 화려한 솔로는 뭐가 달라도 달라, 나이 문제가 아니라니까.ꡓ
ꡒ세련은 무슨…… 맨날 우중충한 것만 듣고 다니니까 우리 아들이 선물한 거야. ……근데 이거 날씨가 되게 수상하네. 일기예보에선 뭐랬지? 오늘 챙겨 들은 사람?ꡓ
ꡒ아까 신문 보니까 일출 보긴 어렵겠다고 하던대요. 비나 안 오면 다행이죠, 뭐. 비나 눈이 내릴지도 모른댔거든요.ꡓ
ꡒ아 그거 해 뜨는 거 좀 안 보면 어때? 난 암튼 오늘 기분 최고라구. 사실 나 빼놓고 갈까봐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요? 나이 들기 시작하니까 느는 건 그런 걱정뿐이야. 나만 소외되면 어떡하나, 주변 사람들 중에 점점 소원해지는 사람은 없나, 나만 찍히는 거 아닌가…… 뭐 그런 거. 쫌생이가 다 돼가는 거지, 뭐.ꡓ
ꡒ주변 사람도 주변 사람 나름이지 우리 이 무리야 멀어질수록 좋은 무리 아닌가? 맨날 ꡐ시도ꡑ니 뭐니 놀리기나 하고…… 참, 시도씨 올해 몇 살 되죠?ꡓ
김동주다.
ꡒ서른여덟. 삼팔 광땡. 삼팔 광땡마냥 인생이 확 풀리면 얼마나 좋겠어. ……난 올해 더 나이 들기 전에 근사한 연애나 한번 해보는 게 소원이야.ꡓ
ꡒ앗, 지랄…….ꡓ
최정미다.
용인을 앞두고부터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우리처럼 미시령이나 대관령 혹은 동해 쪽으로 나가서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혹은 1월 3일이 토요일이라 내처 4일까지 쉬는 사람들에게는 여유로운 연휴가 되는 셈이니 놀러 가는 차들일 수도 있었다. 간혹 스키를 매고 가는 차들도 눈에 띄었다. 정체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김동주의 아내는 마침내 잠든 것 같았고 최정미는 연신 하품을 해댔다. 카 스테레오에서는 이적․김동률이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ꡐ시린 겨울 가슴 뜨겁던 첫사랑의 추억도 이젠 안주거리. 이제는 세상이 무너진다 모두 끝난 거다 그땐 그랬지…….ꡑ
ꡒ와…… 대충 예상은 했지만 이건 좀 심하다, 심해. 지금 말이야, 나라가 부도가 났는데 무슨 여행들이야, 이 사람들이.ꡓ
문과장이다. 그는 이제 취기가 어느 정도 가신 모양이다.
ꡒ그런 소리 말아요. 저 차들도 지금 우리들 보고 그렇게 똑같이 욕하고 있을걸? 그러니 조용히 가요.ꡓ
ꡒ맞아. 그리고 또 경제가 어려울수록 일출은 봐야 될 것 아니겠어? <배달의 기수> 분위기로 하자면 ꡐ자, 우리는 오늘부터 다시 뛰기로 한다. 근검성실한 대한의 아들 문시도는 일출을 보며 새출발을 다짐한다ꡑ 뭐 이런 거죠.ꡓ
김동주가 내 말에 맞장구를 치며 문과장에게 장난을 걸었다.
ꡒ그건 그렇다 치고, 저기 저 스키 매고 가는 치들은 뭐야?ꡓ
ꡒ저 사람들이야 IMF랑 무관한 사람들이죠, 뭐. 이런 우스개 몰라요? IMF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문장이 될 수 있는데, 월급쟁이들한텐 ꡐ아이 엠 파이어드(I am fired)ꡑ고, 대학생들한텐 ꡐ아이 엠 에프(I am F)ꡑ고, 부유층들한텐 ꡐ아이 엠 파인(I am fine)ꡑ이래요. 이소라 분위기로 하자면 ꡐ난 행복해, 그 동안 널 볼 수 있던 그날들 때문에ꡑ가 아니라 ꡐ난 괜찮아, 그 동안 돈 벌 수 있던 그날들 때문에……ꡑ 뭐 이렇게 되는 거죠.ꡓ
나는 김동주를 흉내내어 장난을 쳤다.
ꡒ미시령 쪽 일출이 몇 시쯤 되지?ꡓ
김동주, 나, 문과장이 히히덕거리고 있는 사이 최정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ꡒ일곱시 삼십 몇 분이던가? 아까 신문에서 봤어요.ꡓ
ꡒ그래? 이거…… 아무래도 어렵겠는데.ꡓ
최정미가 차 안의 디지털 시계를 흘낏 쳐다보다가 말했다.
거북이 운행이라는 말이 정말이지 실감날 정도로 차는 거북이처럼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이적․김동률은 최정미의 신경질적인 손동작에 의해 밀려났고, 한동안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김동주는 차창을 조금 내려 마치 담배를 피우는 것처럼 깊이 한숨을 내뿜어 입김을 만들어냈다. 나는 뜬금 없이 ꡐ우리 모두는 아무도 돌아가지 못한다ꡑ 이런 문장을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날이 추워지고 있었다.
1월 1일 2시 30분 용인
ꡒ어때? 그냥 빠져나가버릴까? 꼭 미시령에 가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무슨 몇 박 몇 일 여행을 가는 것도 아니고…….ꡓ
참다 못한 최정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ꡒ일단 휴게소에 들러 커피나 한 잔씩 하면서 생각해보죠. 거기 가서 미시령까지 대충 얼마나 걸릴지도 알아보고…… 그리고 운전도 시도씨에게 맡기는 게 낫겠는걸요. 아까부터 계속 하품이잖아요.ꡓ
문과장과 내가 별말이 없자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김동주가 슬쩍 말했다.
ꡒ왜요? 불안해요?ꡓ
ꡒ그럼요. 아직 애도 하나 없는데 해돋이 보러 나갔다가 비명횡사할 수야 없지.ꡓ
ꡒ기껏 아직은 못 죽는다고 이유 대는 게 ꡐ애도 하나 없는데ꡑ야? 인류학계에 작은 발자취도 남기지 못했는데, 가 아니고?ꡓ
문과장이다.
ꡒ인류학계는 무슨…….ꡓ
문과장은 미시령행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나는 속으로 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새해 첫 아침에 만나는 서설(瑞雪). 일출이 어려울 바에야 조금 고생을 하더라도 푸지게 눈 구경을 하는 쪽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ꡒ앞으로 점점 더 막힐 거래. 밤 아홉시부터 슬슬 막히기 시작했다더군. 미시령은커녕, 대관령도 가기 전에 날이 밝을 거라는대? 게다가 눈이 내릴 가능성도 큰가봐.ꡓ
최정미는 커피를 사오고, 김동주와 나는 화장실로 뛰어갔다 오고, 김동주의 아내는 제법 쌔근쌔근 숨소리까지 내어가며 차에 머무르고 있을 때 이것저것 알아보러 나갔던 문과장이 차에 오르며 말했다.
ꡒ어떡하지?ꡓ
ꡒ행선지만 결정해. 이제부터는 내가 운전할게.ꡓ
ꡒ빠져나가죠, 어디든 안 막힐 만한 데로. 난 차 막히는 건 딱 질색이야. 아주 광적으로 싫어해.ꡓ
최정미다. 운전석 옆자리로 옮겨 앉은 그녀는 왠지 부은 얼굴이다.
ꡒ하지만 일출은?ꡓ
ꡒ일출이야 어차피 그른 것 같은데? 김주사가 애를 써본다면 모를까…….ꡓ
ꡒ내가 애를 써본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ꡓ
ꡒ원시 부족 같은 데서 해 나오게 해달라고 부르는 노래나 중얼거리는 주문 같은 거 몰라요? 인류학 하는 사람이?ꡓ
문과장이다. 문과장은 아까부터 ꡐ인류학ꡑ 타령이다.
ꡒ체, 난 또 무슨 소리라고…… 알지, 내가 왜 몰라. 일출 주문 코리안 버전으로 해볼까? 해야 나오너라 쿵짜자 작작,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쿵짜자 작작, 엽저어언 열다앗 냥―.ꡓ
김동주는 술자리에서 누군가에게 노래를 시킬 때 써먹는 짧은 노래를 불러댔다. 모두들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ꡒ지금 그런 실없는 소리 할 때가 아니야. 진짜 어떡할 거야?ꡓ
ꡒ그래도 나선 걸음인데 막히더라도 가봐요. 해 구경은 못 해도 눈 구경은 할 것 같은데요?ꡓ
나다. 여러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ꡒ뭐, 눈 구경? 자기 배가 부르면 배고픈 사람 생각 못 한다고, 지숙씨 진짜 너무한다. 차 막히고 눈 내리는 상황이 운전하는 데 최악의 여건이란 거 몰라요? 게다가 지금 운전할 수 있는 두 인간이 모두 미심쩍은 인간들인데…….ꡓ
ꡒ어딜 가야 안 막힐까?ꡓ
ꡒ제부도 어때요? 이럴 땐 상식을 뒤엎는 게 최고지. 일출 보러 누가 서해로 가겠어요? 길이 뻥뻥 뚫려 있을걸?ꡓ
김동주의 새로운 제안이다.
ꡒ제부도?ꡓ
ꡒ제부도 몰라요? 수원에서 조금 더 들어가는 데 있어요. ……거 왜, 시간에 따라 물길이 열리기도 하고 안 열리기도 하는 섬 있잖아요.ꡓ
ꡒ어떻게 할까요?ꡓ
ꡒ그러죠, 뭐. 전 아직 한 번도 안 가봤거든요. 이렇게 우연한 기회에 가보는 것도 괜찮겠죠. 게다가 길도 안 막힐 테고…….ꡓ
결국 우리는 용인으로 빠져나갔다. 정말이지 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신나게 달렸다. 김동주는 창을 조금 열고 계속 실실 웃었고, 나는 어린애처럼 ꡒ야, 달린다…… 달린다ꡓ를 연발했다. 문과장은 옆에 앉은 최정미에게 ꡒ아줌마, 좀 빠른 노래 없수?ꡓ 했고, 최정미는 조금 밝아진 얼굴로 카세트 테이프들을 만지작거렸다. 우리의 갑작스러운 소란에 잠에서 깬 김동주의 아내는 한동안 어리둥절해 있다가 ꡒ제부도?ꡓ 하기도 하고, ꡒ이거 꿈이야?ꡓ 하기도 했다. 최정미가 골라낸 테이프는 Queen의 베스트 앨범이었고, 김동주는 무슨 록커처럼 머리를 흔들어대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ꡐWe will, we will rock you! (……) singing! We will, we will rock you!!ꡑ
우리의 소란이 수그러든 것은 우리가 제부도로 달린 지 사십여 분쯤 지난 후였다. 자동차 앞유리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ꡒ어! 이거 뭐야? ……비잖아.ꡓ
문과장이다.
ꡒ비야? 지금 비 오는 거야? 에이, 뭣같이.ꡓ
최정미다.
ꡒ새해 아침부터 이게 뭐야? 되는 일도 없고…….ꡓ
김동주다.
우리는 저마다 김샜다는 식으로 내뱉었다. 나는 뜬금 없이 어느 가수의 이별 노래에선가 들어본 것 같은 ꡐ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ꡑ라는 가사를 생각해냈다. 왜 항상 ꡐ뭣 같은ꡑ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ꡒ아니야, 차라리 잘됐어. 그나마 이렇게 빠져나오길 얼마나 잘한 거야. 미시령 쪽으로 그냥 고집 세우고 갔으면 지금 어땠겠어? 차 막히고 비 오고…… 거긴 아마 눈이겠지? 차 위에 스키 매고 가던 치들 고소하다, 고소해. 오늘 새벽 내내 된통 고생이나 해보라 그래.ꡓ
우리들이 저마다 우리들의 즉흥적인 일정에 대한, 아니 1998년 전체에 대한 우울한 예감에 빠져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문과장이 만회해볼 작정으로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 말에 누구도 호응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이미 일이 꼬일 때마다 우리를 찾아오는 스스로에 대한 비하와 저주의 심사에 깊이 침윤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일출 하나도 마음놓고 못 보는 ꡐ꼬이는 인생ꡑ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ꡐ안 되는 놈은 뭘 해도 안 되는ꡑ 인생인 것이다. 새해 첫 아침에 비 내리는 서해나 찾아가는 인생인 것이다.
나는 내가 처음 만나는 제부도라는 섬에 대해, 스물아홉 첫 아침에 만나는 서해에 대해, 추적추적 비 내리는 어두운 바닷가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1월 1일 4시 제부도
ꡒ뭐야? 깜깜하고 되게 썰렁하잖아?ꡓ
물길이 열리지 않는 시간인지 무언가 경고의 의미를 띤 듯한 노란색 드럼통 세 개가 나란히 길을 막고 서 있는 제부도에 도착했을 때 문과장이 꺼낸 말은 이랬다. 급정거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달린 속도 때문인지 나는 무척이나 부당하게 그 당돌하게 보이는 노란 통들 앞에 덜컥 멈춰선 기분이었고, 금지당한 기분이었다.
ꡒ에이, 씨팔…… 뭐 이래? 왜 도대체 아무 데도 못 가게 하는 거야, 왜?ꡓ
김동주다. 그는 조금 화가 났다.
ꡒ동주씨 진정해.ꡓ
ꡒ진정? 진정하게 생겼어요? 이게 무슨 꼴이야, 1월 1일에.ꡓ
ꡒ좀 가만있어봐요. ……그래, 저기 불빛이 보이긴 하네.ꡓ
사방을 훑어보던 문과장이 조금은 활기를 띠며 말했다.
ꡒ기다려봐요, 내가 나가볼게.ꡓ
ꡒ아, 아니 참아요, 정미씨. 이런 말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 관습이 그러니까…… 오늘 새해 아침 아니유, 남자가 나가야지.ꡓ
우리 차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불빛이 보였고, 거기엔 ꡐ해물탕, 바지락 손칼국수ꡑ라고 적혀 있었다. 문과장이 오른손으로 옹색하게 손우산을 만들어 간신히 이마를 가리고 뛰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최정미는 문과장이 멀어지고 나자 ꡒ밥맛 떨어져, 이 나라ꡓ라고 낮게 중얼거렸다.
문과장은 조금 오래 걸렸다. 멀찍이 문과장과 밥집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무슨 얘기인가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물길 열리는 시각까지는 많이 기다려야 하는 모양인데 밥집 남자가 자기네 식당에서 무얼 좀 먹으며 기다리라고 제안하는 모양이었다. 밥집 남자는 무척이나 여위고 추레해 보였다.
ꡒ가요, 물길은 열시에 열린답니다. 좀더 안으로 들어가보죠.ꡓ
ꡒ안으로요? 여기서 어딜 더 가요?ꡓ
ꡒ요 옆에 섬 하나 더 있어요, 대부도라고…… 거긴 시간 없이 들어가는 데예요.ꡓ
ꡒ그래요? 그런 데가 있어요? 그렇담 암튼 빨리 출발해요. 나 여기 갑자기 되게 싫어.ꡓ
대부도…… 그곳 역시 초행길이긴 마찬가지였다. 갈 수 없는 곳…… 나는 전혀 논리에 닿지 않게도 대학 때 선배들에게서 배운 <지리산>이라는 노래를 나지막이 불렀다. ꡐ나는 이 산만 보면 피가 끓는다…… 지리산 지리산, 반란의 고향, 지리산…… 일어서는 저 산, 지리산……ꡑ 그 누구도 웬 지리산 타령이냐고 퉁을 주지 않았고, 최정미는 창을 조금 열어 담배를 피웠다. 누군가 우리를 고의적으로 헤매게 만드는 것 같은 아침이었다. 우리 모두는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1월 1일 4시 40분 대부도
ꡒ여기야…… 다 왔어요.ꡓ
ꡒ젠장, 마라도나 백령도라도 온 기분이군. 국토의 끝 같애.ꡓ
ꡒ근데 왜 아무것도 안 보이죠?ꡓ
ꡒ깜깜하니까 그렇지. 하지만 저쪽은 바다야.ꡓ
ꡒ뭐라도 먹죠. 배라도 불러야 현실감이 되살아날 것 같애. 이대로 차를 되몰아 서울 갔다가 한숨 자고 깨면 진짜 꿈이었나, 할 것 같거든. 배라도 불러야 증거가 되지.ꡓ
김동주가 앞장서서 걸으며 말했다.
우리는 우리에겐 명백히 국토의 끝인 곳에서, 국토의 마지막 밥집으로 향했다. ꡐ24시간 해장국집ꡑ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고, 밥집 앞에 놓인 낡고 작은 수족관에는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나른하게 헤엄치고 있었다. 그놈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ꡒ녀석들도 산 채로 한 살씩을 더 먹는군요ꡓ라고 문과장이 등뒤에서 말했다. 농담을 던지는 말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비감하게 들리지도 않았다.
ꡒ아줌마, 여기 해장국 다섯! 아참, 새해 복 많이 받으슈, 빌어먹을.ꡓ
문과장이 주문을 했고, 그는 밥집 여인에게는 들리지 않을 말소리로 ꡐ빌어먹을ꡑ을 덧붙였다. 조잡한 꽃무늬가 그려진 먼지 낀 커튼이 쳐져 있고, 달아놓은 지 오래된 파리 잡는 끈끈이가 눈에 뜨이는 낡은 밥집이었다. 무슨 새로 개시한 메뉴처럼 천장 가까이 붙여진 종이에는 ꡐ머리 조심ꡑ이라고 씌어 있었다. 아무도, 그 누구도 말이 없었다.
ꡒ왜 다들 똥 씹은 표정들이야? 됐어, 좋게 생각해. 언제 또 이런 새해를 맞겠어? 일부러 이렇게 해보려고 해도 안 되지.ꡓ
ꡒ기분 나쁜 거 아니야. 그냥 좀 그래…… 피곤하고 지겨워.ꡓ
최정미다.
ꡒ섬 이름이 이게 뭐야? 대부? ꡐgod fatherꡑ할 때 그 대부야?ꡓ
ꡒ됐어. 안 웃겨.ꡓ
시간이 일러서일 수도 있지만, 모두들 해장국을 반 넘어 남겼다. 주방을 가로질러서 가게 되어 있는, 함석지붕을 올린 변소에는 다다다다 빗소리 정다웠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엉거주춤 밖으로 나왔다. 계산은 최정미가 했고, ꡒ어, 이거 뭐 하자는 플레이야?ꡓ 하며 팔을 잡고 막아서는 문과장에게 그녀는 ꡒ김동주씨 말마따나 이건 완전 꿈 같애. 돈이라도 없어져야 증거가 되지, 해장국 내가 제일 조금 비운 것 같은데 그나마 난 서울 가서 배도 안 부르잖아?ꡓ라고 대꾸했다. 밖으로 나왔다지만 우리는 계속 엉거주춤일 수밖에 없었다. 빗방울이 더 굵어지지는 않았지만 비는 여전히 질금질금 내리고 있었다. 김동주는 하릴없이 제자리뛰기를 하기도 하고 목운동을 하기도 하며 혼자 움직이고 있었다.
ꡒ해가 참 여러 개군.ꡓ
아직 사위가 밝지 않아 어둠 속에, 먼 바다 위에 떠 있는 불빛들을 가리키며 최정미가 말했다. 모두들 큭큭 웃었다.
ꡒ무슨 헛소리야? 저기 해 뜬 거 안 보여? 그건 바다 위에 떠 있는 불빛이고…… 저기 좀 봐, 해 떴잖아.ꡓ
무슨 소린가 하고 먼 허공을 살피는 사람들에게 문과장은 덧붙였다.
ꡒ아아, 이건 마음 착한 사람들한테만 보이는 해구만. 그럼 그렇지. 평소에 덕들 좀 쌓으시드라고. ……거 해 한번 멋지다, 어유 부셔.ꡓ
다시, 모두들 흘흘 웃었다.
ꡒ아니야. 이곳을 다녀간 우리들 마음속엔 이미 하나씩 해가 떠 있어.ꡓ
이번엔 김동주다. 이건 또 무슨 닭살 돋는 소린가 하고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그는 덧붙였다.
ꡒ개좆같이 시뻘건 해가 한 덩어리씩 들어앉게 됐다고, 젠장. ……올해도 다 글렀어, 껌껌해. 아주 꺼멓다고.ꡓ
ꡒ개좆이 시뻘게?ꡓ
최정미가 장난스럽게 받아치지 않았더라면 그날 우린 서울로 돌아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열패감과 울분에 휩싸여 우리는 그 한없이 시골스런 밥집에서 통음을 했을는지 모른다. 빗발은 조금씩 가늘어지고 있었지만, 우리들은 한없이 젖어들고 있었다.
1월 1일 8시 10분 사당역
빠르게 서울로 달렸다. 우리는 무슨 ꡐ묻지마 관광ꡑ이라도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처럼, 혹은 혼자 종로에 나갔다가 세운상가 근처의 허름한 청국장집에서 급하게 점심을 먹고는 태연히 인파 속으로 섞여드는 사람처럼 말없이 서울로, 서울로 올라갔다. 가는 도중에 약한 빗발은 눈발로 변해서 뚱해 있던 우리들을 잠시 환하게 만들었지만, 머지않아 눈도 비도 더는 내리지 않았다. 천천히 사위가 밝아오고 있었다. 해가 보이지 않아도 아침이 오면 침침하게나마 날이 밝아온다는 당연한 사실을 나는 신기하게 새기고 있었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중간에 문과장은 ꡒ어, 환하네. 해도 안 떴는데……ꡓ라고 말했다. 김동주의 아내는 창백한 낯빛을 하고 있었고, 김동주는 이른 아침에 먹은 해장국이 소화가 안 돼서인지 자주 거북한 트림을 했다. 내키지 않은 술자리에 끌려나가 밤새 술을 마시고 난 다음날처럼 머리가 멍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ꡒ사당역이야. 동주씨네랑 시도씨는 여기서 내리는 게 편하지? 지숙씨는 더 가다가 우리집 앞 매봉역에서 내려줄게.ꡓ
평소답지 않게 최정미는 피로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ꡒ조심해서 들어가세요.ꡓ
ꡒ잘 가요.ꡓ
ꡒ윤경씬 괜히 따라나섰다가 고생만 했네.ꡓ
ꡒ아니에요, 즐거웠어요.ꡓ
우리들의 이별의 장면 가운데 이처럼 의례적이고 밋밋한 이별의 장면은 없었다. 우리는 그 흔한 악수조차 나누지 않았다. 지하철역을 향해 총총히 뛰어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모든 것이, 너무도 허했다.
ꡒ나 매봉역에 안 내릴래요.ꡓ
ꡒ왜, 그건 또 무슨 소리야?ꡓ
ꡒ이대로 집에 들어갔다간 하루 종일 멍할 것 같거든. 정미씨 집에 가서 따뜻한 커피라도 마셔야겠어요.ꡓ
ꡒ알았어. 무슨 소린지 알아듣겠어.ꡓ
최정미의 집으로 가는 거리는 텅텅 비어 있었다. 새해 아침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실감이 나는 풍경이었다. 최정미는 낮은 목소리로 ꡒ전염병이 창궐한 도시 같군ꡓ이라고 말했고, 나는 ꡐ우리는 이미 늦은 것이다ꡑ라는 문장을 머릿속에 적어넣었다. 무슨 뜻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1월 1일 8시 30분 최정미의 집
최정미는 확실히 무엇인가에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문을 쾅, 닫자마자 무슨 소린가를 꿍얼꿍얼거리며 바쁘게 움직였다. 집을 나설 때 그저 대충 눈에 보이는 대로 치우고 나갔기 때문에 집 안은 어수선했고 최정미는 끊임없이 투덜거리며 집을 치우기 시작했다. 지겨워, 나갈 때 불은 누가 켜고 나갔어? 왠지 불안하다고 정미씨가 켜놓고 나가자고 그랬잖아? 그랬으면 한 군데만 켜두면 되지 이게 뭐야? 이건 또 누구야, 김동주지? 여기가 무슨 식당이야? 왜 멀쩡한 재떨이 놔두고 접시에다 담배를 눌러놓은 거야? 지긋지긋해, 이게 다 뭐야?……
최정미가 바쁘게 움직였기 때문에 어정쩡하게 허리에 두 손을 얹은 채 그녀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한구석에 서 있던 나는 자동응답기의 깜빡거리는 램프를 발견하곤 확인 버튼을 눌렀다. 테이프 감기는 소리가 나자 바쁘게 움직이던 최정미도 멈춰 섰다. ꡒ삐이― 오빠다, 정초부터 청승 떨지 말고 이리로 와. 기다릴게…… 삐이― 엄마, 나야 아침부터 어디 나가셨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ꡓ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최정미는 다시 움직였다. 지겨워. 친정 식구들도 하나도 안 반가워. 이혼했다고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보살피고 걱정하고…… 왜 이렇게 살아야 돼, 한국 사람들. 내 나이가 몇인데…….
최정미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있었다. 대충 정리가 끝난 모양이었다. 그녀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고, 무엇인가 그녀의 불안을 덜어줄 일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출입문 근처에 최정미가 함부로 던져둔 신문을 집어다가 반으로 나누며 ꡒ신문 보겠어요?ꡓ 했고, 최정미는 신문을 건네 받았다. 1면에는 ꡐ우리는 해낸다ꡑ라는 60년대식 헤드라인이 크게 박혀 있었다. 최정미는 ꡒ해내긴 뭘 해내? 해가 나와야 해내지ꡓ라고 말했다. 농담인 것 같았지만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고 무슨 소린지도 잘 연결되지 않았다. 내가 반응이 없자 최정미는 ꡒ지겨워, IMF 운운하는 것도 이젠 신물이 나ꡓ라고 했다.
신경질적으로 신문을 휙휙 넘기고 있는 그녀를 한동안 나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외풍이 심한 그녀의 아파트에선 바람 소리가 들렸고, 그녀에게서는 고속도로 냄새와 해장국 냄새가 희미하게 맡아졌다. 내 눈길을 느낀 최정미가 나를 슬쩍 쳐다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ꡒ왜, 커피 한 잔 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