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방화 사건
숭례문 방화 사건(崇禮門放火事件)은 2008년 2월 10일부터 2월 11일에 걸쳐 서울의 숭례문이
방화로 인해 전소된 사건이다. 10일 오후 9시쯤 방화가 시작되었고 불이 난지 6분 만에 현장에
도착해 화재 초기에 불길을 잡는 듯 했다. 이때까지 소방당국은 숭례문을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
마치 비가 오는 것처럼 숭례문 지붕 위로 물을 뿌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붕 위로 피어나던 연기는 그치지 않았다. 급기야 10시 40분 2층 누각이 붕괴하였고 이어
1층에도 불이 붙어 화재 5시간 만인 1시 54분 석축을 제외한 건물이 모두 붕괴되었다. 20층
높이까지 오를 수 있는 사다리를 갖춘 소방차를 비롯해 88대가 총출동했지만 붕괴를 막지는 못하였다.
처음엔 전기시설의 누전 등으로 인한 화재라고 보도되었으나 화재 발화점인 2층에는 전기시설이 없었고
1층에 있었던 전기시설은 정상이었다고 수정보도되었다. 이에 이어 숭례문에 5~60대로 보이는 흰머리의
남성이 흰색 항공점퍼 상의를 입고 가방을 메고서 휴대용 철제 사다리를 타고 철장을 넘어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자들의 진술이 이어져 사건의 원인이 방화로 추정된다고 정정 보도되었다.
결국 방화범은 채종기(당시 69세, 경북 칠곡 출신)로 밝혀졌다. 그는 2006년 4월에도 창경궁 문정전에
방화하여 400만원 상당의 피해를 입히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는 창경궁
방화는 누명을 쓴 것이라고 했고 이것이 억울해 숭례문을 불 질렀다고 했다. 그는 구속 기소되어
10월 9일 대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방화로 불타버린 숭례문은 5년 3개월간의 복구작업을 거쳐 2013년 5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과 기념식을 가지고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투입된 총 공사비는 245억원이었고
연인원 35,000명이 동원되었다. 신응수 대목장, 이재순, 이의상 석장, 홍창원 단청장, 한형준 제와장,
이근본 번와장, 신인영 대장장 등의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참여하였다.
하지만 숭례문은 2013년 10월 18일 단청이 이미 훼손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총체적 문화재
부실 복원" 사례로 꼽히기 시작했다. 숭례문 자체로만 보면 목구조에도 심각한 문제가 드러나 기둥이
갈라졌다는 보고가 있었는가 하면, 전통 방식에 따라 제작했다는 기와 또한 겨울에는 동파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터져 나왔다.
숭례문은 조선 시대 서울을 둘러쌌던 성곽의 정문이다. 흔히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부른다. 보통
남대문이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이 붙인 명칭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이름은 숭례문을 만들
때부터 불린 이름이다.
1396년(태조 5년)에 창건되었다. 1447년(세종 29년)과 1479년(성종 10년) 고쳐 지었다. 숭례문의
현판은 "지봉유설"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현판에 관해 이설이 많다.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는데, 이런 명칭은 인(仁 : 동), 의(義 : 서), 례(禮 : 남),
지(智 : 북), 신(信 :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숭례문의 "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1904년 숭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