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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연표
1824년(포덕전36년)
1월 근암 최옥(대신사 부친), 곡산 한씨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다.
10.28 수운대신사 최제우, 경주 현곡면 가정리 315번지에서 탄신하시다.
아버지 근암 최옥, 어머니 한씨, 호는 水雲, 아명은 복술, 처음이름 제선(濟宣, 주유천하를 끝내고 용담정에 침거하면서 제우(濟愚)로 이름을 고침)태어 나실 때 생가에서 마주 보이는
구미산(龜尾山)이 사흘 밤낮으로 울었다함
1827년(포덕전33년)
3.21 경주 동촌 황오리에서 해월신사 최시형 탄신, 처음 이름은 경상(慶翔)
포덕16년 용시용활 설법후 時亨으로 고침, 아버지 최종수(宗秀) 어머니 월성 배씨의 외아들
1828년(포덕전32년)
수운, 이 무렵 아버지(남자)는 사랑과 안채는 물론 집 안팎을 자유롭게 오가는데 어머니(여자)는 안채 바깥을 자유로이 출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품다. 또 나이 많은 종이나 상민들이 아버지를 향하여 공대를 하는데 아버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하대하는 것에 의문을 품다.
1829년(포덕전31년)
수운, 어머님 환원하시다(6세)
1833년(포덕전27년)
수운 "십세를 지내나니 총명은 사광이요 재국이 비범하고 재기 과인(過人)<몽중노소문답가>하여 본격적으로 학문의 길로 나아가다.
1837년(포덕전23년)
수운, 형수를 통해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금강산 등 명산을 돌아보며 지혜로운 사람들과의 문답으로 세상사와 역사의 변천과정에 대한 견문을 넓히다.
1938년(포덕전22년)
해월, 아버님 환원하시다. (12세) 이 때부터 해월은 먼 친척집이나 남의 집을 떠돌며 머슴살이하다.
1840년(포덕전20년)
2.23 수운, 아버님 환원하시다. (17세, 근암공79세, 유고문집『근암유고』)
1842년(포덕전19년)
수운, 19세에 울산 박씨와 혼인하다.
1843년(포덕전17년)
집이 큰 불로 모두 타고 아버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전적과 유물이 모두 타 버려 자손의 불초함을 탄식하다. 양형 제환은 지동으로 수운의 가족은 용담정으로 분가하다. 가업을 떨치고 집을 나서 세상 형편을 살피다.
해월, 검곡 인근의 마부동에 있는 제지소에 취직하다.(17세)
1845년(포덕전15년)
해월, 흥해에 있는 밀양 손씨 가문의 규수와 혼인하여 농사를 짓다
(19세)
1846년(포덕전14년)
구도의 길에 나선 수운은 무예(활쏘기, 말타기 등)을 익히기도 하며 장사도 하고 참위설과 천주학 등 서양문물에도 관심을 갖다. 또한 큰절을 찾아 고승들과 문답하거나 큰마을 서제애 들러 선비들과 담론하다. 훗날 저술한 글 가운데 “편답강산 아니하면 인심풍속 이런 줄을 아니보고 어찌알며 대저 인간 백천만사 보고 나니 한이 없네”등의 구절에서 이 무렵 천하만사를 체험하며 구도하는 과정을 노래하고,
“동지섣달 설한풍에 촌촌전진 하다가서 일소일파 하여보세”등으로 구도시기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1849년(포덕전11년)
3살된 여자아이를 양녀로 맞다.
1851년(포덕전9년)
장자 세정을 낳다(字 인득) 인득은 훗 날 수운대신사님의 검무수련을 익히다.
1854년(포덕전6년)
10월 울산 처가를 찾아 박씨 사모님을 위로하고 울산 읍내에 머무르던 중 박씨 사모님과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방랑생활을 그치고 울산 유곡동(여시바윗골)에 정착, 명상으로 오랜 동안의 구도 성과를 정리하다.
해월, 경주 신광면 마북동 집강이 되다(28세)
1855년(포덕전5년)
2.1 춘암(박인호)탄생(충남 덕산군 장촌면 묘동)
3.3 수운스승님, 이승(異僧)으로부터 '천서(이서라고도 함)를 받아 3일만에 그 뜻을 모두 이해하고 하늘에 기도하는 방법으로 구도를 계속하다.
1856년(포덕전4년)
여름, 양산 통도사 내원암에 들어 49일 기천의 뜻을 세우시고 견성공부를 힘쓰던 중 47일만에 숙부의 별세를 예견하고 집으로 돌아와 상을 치르다.
1857년(포덕전3년)
7월 다시 천성산 적멸굴에 들어가 49일 공부를 끝내고 귀가, 철물점개설, 자금조달책으로 향화전6두락을 7인에 중복 매매(9월∼12월)
1859년(포덕전1년)
10월 20여년 동안 구도 고행생활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고향 경주 가정리 용담으로 돌아오다. 용담에 들어오신 다음 날부터 '불출산외'를 맹세하시고 기천수도에 들어가다. 구도의 의지를 다지며 본명 '제선'을 '제우'라 고치고 이 세상 미욱한 백성을 건지라는 확신을 표현하다(36세)
해월, 6년동안 집강 임직에 계시면서 세운 공적에 감사하며 동네사람들이 공적비를 세워 기념하다(33세). 검악산 아래 검곡에 칩거하다.
1860년(포덕1년)
*입춘일'도의 기운을 길이 보전하면 삿된 것들이 들어오지 아니하고 (도를 깨닫기 전에는) 세상의 뭇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으리라'라는 입춘시를 써 붙이고 구도의지를 다지다.
*4.5 오전11시에 용담정에서 한울님으로부터 천도(영부와 주문)를 받다.(37세, 천일기념)
*천도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주문과 참회문(축문)을 짓다.
*박씨 사모님, 최초의 문도가 되다.
*5월 용담가를 짓다.
*10월 조카 명륜이 도에 들기를 청하여 문도가 되다.
*교훈가, 처사가를 짓다.
1861년(포덕2년)
4.8 의암, 충북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서 탄신(父: 의조)
6월 수운, 아버님 산소에 성묘하고 포덕의 뜻을 세워 포덕을 시작하다.
7월 <포덕문>을 짓다. ..이 때부터 수도의 절차를 정하여 이를 지키게 하고 사람들이 찾아와 수운을 만나는 절차, 예를 표하는 절차 또한 생겨났다.
8월 특히 부녀자를 위하여 안심가를 짓다. ... 사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용담계곡으로 모여 들자 자연히 이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볼온한 모의를 꾀하는 것이라 여기는 관의 지목도 생겨났다.
..해월 검곡에서 은거중 수운에 대한 소문을 듣고 용담정을 찾아 입도하고 매주 1회 꼴로 용담을 찾아 도를 닦고 이치를 익히다.
11월 포덕의 새로운 활로를 뚫고 관의 지목을 비껴서고자 제자 최중희를 데리고 호남 지방을 향해 길으 fEj나다. 의성 김공서 집에 들어 그 외아들의 중병을 고치고 " 이 세상의 큰 병을 고치는 도를 행하라"고 설법하여 포덕을 하다.
..무주등을 거쳐 남원땅 서공서가에서 서공서등 여러사람을 포덕한 다음 그의 인도로 남원읍 서편 20리 밖 교룡산성 내 보국사에 들어 한 칸 암자를 빌어 '은적암'이라 이름하고 수도와 경전 저술에 힘쓰다. 노승 송월당과의 일문일답을 통해 유불선 삼도의 본원으로서의 동학의 의의를 밝히다. <도수사>를 지어 각지 문도들에게 전하다.
12월 해월, 검곡에서 독공을 하며 겨울을 나는 동안 천어(양신소혜 우한천지 급좌)를 듣고 등잔불의 기름이 졸지 않는 등의 이적을 체험하다
1862년(포덕3년)
1월 무극대도의 본원을 밝히는 <동학론=(논학문)>, 권학가.도덕가를 짓다.
3월 남원에서 돌아와 경주부내 백사길의 집에 은거하다. 해월은 검곡에서 수련중 스승의환도를 미리알고 백사길의 집을 들러 수운과 서로 만나다.
수운, 해월이 지난겨울동안 수도한 과정을 듣고 포덕의 명교를 하다.
6월<수덕문><몽중노소문답가>를 짓다.
7월 말을 타고 강원보의 집으로 가는데 말이 문득 서서 사고를 면하다.
9.29 윤선달의 무고로 박대여가에서 경주 영장의 차사에게 잡혀 제자 몇 명과 함께 경주부로 향할 때 경주 서천 빨래터에 있던 머리수건을 둘러 쓴 아낙네 수십명이 수운선생님을 우러러 "귀객의 머리 위에 서기가 서려 있나이다"라고 말하다. 영장이 수운을 취죄하였으나
700여명의 문도들이 몰려와 항의하므로 윤선달은 도주하고 영장은 여소에 나와 친히 사과하고 수운을 풀어주다.
10.5 경주부에서 용담으로 돌아오다.
10.14 문도들에게 통문을 발하여 영부를 함부로 시행하지 말고 '수정(守正)'의 가르침을 힘쓰도록 당부하다.
10.26흥해군 손봉조의 집에서 <화결시>를 짓다. 이 때 어떤이가 대신사에게 "지금 문도중에 도를 통한자가 몇이나 됩니까"하고 물은 즉 "우리 도의 근본진리를 깨달은 자, 우리 대에서는 볼 수 없으리라. 그러나 후대에는 요순 공명의 材(인재)가 많이 나리라"고 답하다.
12.30교화를 더욱 원활하게 하고자 각지에 접소를 설치하고 접소에 접주를 두어 그 관내교도들을 교화하도록 하는 접주제를 실시하다(최초 교단조직)
1863년(포덕4년)
손봉조가에서 새해를 맞이하시고 이른 아침 심고 끝에 강화로 시를 얻어 도통전수의 뜻을 드러내시고 대도의 장래를 유시하시다.
1.6 임천 이방의 집에서 설법하고 <필법.를 짓다. 이 날 영덕 유생 강수(=강사원, 강시원)에게 '경재'라는 호를 주고, 수도 절차를 <좌잠>으로 교시하다....유생 강수 입교전
2월 용담정을 떠나 영천 이이방의 집을 거쳐 신녕 하처일의 집에서 머물다.
3.9 일개월만에 다시 용담정으로 돌아오시다.
4월 이 무렵 강수와 이 필제가 입교하다. 이 무렵 수운대신사님은 핍법을 익히며 글씨를 써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다.
7.23 해월 수운스승님으로부터 '해월(海月)'도호를 받다. 수운, 파접통문을 내다.(개접일 미상) 해월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도중의 모든 사무를 처리하라고 명교하다.
8.13'북법주인 해월'에게 <절구>를 주다
8.14해월에게 동학의 도통(도의 통수권)을 전수하다. (지일기념일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음)
10.28 수운, 40회 생신일에 유뷸선의 근원으로서 동학 천도를 천명하다.
10월<흥비가, 불연기연,팔절,우움,절구, 탄도유심급>등의 글을 지어 반포하다. 신변에 장차 화가 미칠 것을 제자들에게 예언하다.
11월 수운, 해월에게 "북방을 중시하라"고 명교하다. 조정에서 동학을 서학으로 지목하여 잡으려 한다고 하므로 제자들은 피신하여 화를 면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수운은 "도가 나에게서 나왔으니 내 스스로 당하리라. 어찌 몸을 피하여 누를 제군들에게 미치게 하리오"하고 순도의 결의를 드러내다.
12.9 아침에 해월이 찾아와 "선생님을 모시고 새해를 맞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그대는 이 시간부터 다시 용담에 들어서지 말라. 그대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특별히 이 말을 전하라.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 만사는 다 천명이니 조금도 어기지 말라"고 당부하다. 12월10일 새벽1시경 선전관 정운구에게 체포되어 박씨 사모님, 장자 세정외 제자등 2 여명과 함께 경주부로 향하다. (경주부에서 최자원, 이내겸 추가로 붙잡힘)수운과 이내겸만 압상키로 하고 나머지는 경주옥에 수감하다.
.영천, 대구, 선산, 보은, 충주,직산,오산을 거쳐 과천에 이르렀으나 철종임금이 승하하므로 광주, 음죽, 충주,문경, 초곡(이곳에서 새해를 맞이하다),상주 선산을 거쳐 대구로 돌려 보내지다.
1864년(포덕5년)
1.6 대구영에 도착, 수운 법정에 이르자 당시 대구감사 서헌순 수석하에 여러차례 심문당하다. (1월 10일경, 경주영의 제자들도 대구로 이송)
3.3 해월 옥중에 변장 잠입하여 수운과 마지막으로 상면하고 "등명수상 무혐극 주사고형 역유여 오순수천명 여 고비원주"의 명굘르 받다.
3.10 수운, 좌도난정률이라는 누명을 쓰고 대구장대(중구 계산동 245-1)에서 참형으로 순도. 3일 후 제자 김경필, 김경숙, 정용서, 곽덕원. 임익서, 기 덕원들은 은밀히 수운늬 시신을 거두어 구미산 아래 한 산자락에 방면하다.
3.13 박씨 사모님과 세정을 방면하다.
3.16 김경숙, 정용서, 곽덕원, 임익서등이 수운의 시신을 용담정 근처로 옮겨 17일 밤에 조카 맹륜등과 더불어 장사를 지내다.
4월 해월, 태백산에 은거하다가 안동으로 와 이 무중의 집에 머물다.
10월 해월, 수운의 탄신제례를 지내고 <사인여천>과 <평등>을 설법하다.
해월, 평해 황주일의 집에 머무르다.
*박씨 사모님과 세정등은 지동 세조의 집에서 머물다 정선 문두곡에 피신
****여기까지 수운스승님의 재세시 기록입니다****포덕146년 10월30일 부암 기록*
1865년(포덕6년)
해월, 처자를 거느리고 평해에서 울진군 죽병리에 이사하다. 박씨 사모님 및 세정, 세청과 함께 살다.
3.16 검곡에서 '적서의 차별 철폐'를 설법
6월 영양 용화동에 이사하여 치성과 공부에 열중하고 49일 기도봉행, 매년 4회의 정성을 드릴 것을 각 도인에게 비밀히 통지하여 신심을 깊게하다.
10.28"사람은 하늘이라 귀천이 없다는 인류평등의 뜻을 설법하다(검곡)
1866년(포덕7년)
11.28 수운 향례 위한 계를 조직하여 4전씩 돈을 모으기로 하다.
1867년(포덕8년)
봄, 대신사 가족을 상주 동관동으로 옮겨 연루의 화를 면코자 함
2월 예천군 산수리로 이사하여 머물다.
3.10 흥해 전광무 가에서 <양천주>설법(한울님을 잘 봉양하라)을 하다
1868년(포덕9년)
3월. 해월 영양 일월산 아래 용화동 댓치에 은거하시며 주변을 순회하고 포덕활동을 하다.
10월, 흥해에서 '시천주조화정'의 뜻을 설법하다.
1869년(포덕10년)
2월, 해월 강원도 양양에서 30여호 포덕이 있었으므로 직접 가서 설법하고 서북지방에 포덕 시작하다.
10월 공생이 수운가족을 성주 동관암에서 영월 소밀원에 옮겨 살게하다.
1870년(포덕11년)
10월. 이필제(=이필), 해월에게 수운 신원운동 승인요청, 해월., 이필제의 폭력의거 제안을 거절하다.
1871년(포덕12년) 3.10 이 필제의 교조신원운동 시작하다. 제1차 영해 관아 습격을 전개하다.
8.2 이필제 체포당하여 경성에서 교수형에 처해지다.
10월 해월, 단양 정석현가→영월 정일진가→소백산 바위골→직곡리 박용걸가로 옮겨 다니며 고생하다. 이 때 해월 손씨 사모님 단양옥에 투옥
12월 대인접물과 우묵눌을 설법하다.
1872년(포덕13년)
1월 해월, 소밀원에서 박씨 사모님을 강수와 함께 만나다. 세정이 붙잡히자 박씨 사모님. 세청 처등 박용걸의 집에 이사하여 머물게 하다.
3.23 세청의 처와 3녀가 장춘보의 집에서 붙잡혀 인제감옥에 투옥되다.
1873년(포덕14년)
5.12 세정은 양양옥(지금의 군청자리)에서 매에 맞아 환원하다.
10.16해월, 강수, 유인상등과 함께 태백산 갈래사(정암사)적조안에 피신. 주지승 철수자와 교류하며 49일 기도하시다.
12.10. 해월 태백산에서 49일 기도를 마치고 하산, 무은담 유인상 집에서 수운의 부인 박씨 사모님 환원(정선.12.9)소식 듣고 김계악과 미천(싸내)으로 가서 수습
*슬하에 세정. 세청과 딸 4명을 두었음. 막내딸은 유복녀로 알려짐. 장녀는 허씨문중, 차녀는 윤씨, 3녀는 윤씨, 4녀는 한씨문중으로 출가)
1874년(포덕15년)
2월. 해월 적조암에서 철수자를 만나 사례하고 그의 임종을 한 후 시신을 화장
3월 해월, 손씨 사모님 소식 끊겨 안동 김씨와 재혼하다.
1875년(포덕16년)
3월 단양 도솔봉 송동(송두둑)에 집을 짓고 이사하여 49일 기도봉행
8.15강수를 북접차주인. 유인상을 도접주로 삼다.
8월 유인상의 집에서 모든 의식에 청수 한 그릇으로 시행토록하다.
10월 수운의 차남 세청, 장기서의 집에서 병으로 환원하다
10.18 정선에서 <용시용활>설법하고 19일 이름을 '시형'으로 고치고 제자들의 이름도 '시'자를 넣어서 고쳐짓다.(강수→강시원,유인상→유시헌등)
12.24의암 15세로 현풍 곽씨와 혼인
1876년(포덕17년) 해월, 단양에 이사하다.
1877년(포덕18년)
10.3 해월, 정선각지에서 구성제를 다시 시행하고 치성봉행계를 조직하다.
1878년(포덕19년)
4월. 해월, 경주 최형오의 집에서 수운의 유서와 행적등을 수집하고 묘소 참배. 김씨 부인, 딸 윤 출산하다.
7.25 정선 유시헌(인상)의 집에 접소 설치 규정을 발표하고 처음으로 개접 강도 ('시'자의 뜻에 대하여 설법)
1879년(포덕20년)
3월. 해월, 영월 거석리 노정근의 집에서 "천문개탁자방문"의 계시를 받다.
3월. '인등제'재개하다
11.10강시원이 <최선생문집 도원기서>탈고
12월. '북방중시'를 설법(수운의 '오도지운 재 북방 설법을 다시 강조)
1880년(포덕21년)
1월 해월, 치성제 봉행하다
4.5 해월, 각접에서 창도후 처음으로 수운 창도 기념행사를 봉행하도록 하다.
6.15 목판 동경대전 1백여부 간행(경전 강행소, 인제군 갑둔리 김현수의 집)
7월 해월부인 손씨 사모님 송동으로 돌아오다.
1881년(포덕22년)
6월 경정개간소 단양군 남면 천동 여규덕의 집에 설치<용담유사>목판 간행
10.28 정선 유시헌의 집에서 수운탄신기년제 봉행하고 어육주초 해금 발표
1882년(포덕23년)
1월 의암 입도(22세) 매일 삼만독의 주문을 외우고 짚신 두켤레를 삼다.
6월 해월 송동에서 정선군 갈천면 장정리로 이사. 49일기도봉행
1883년(포덕24년)
2월. 동경대전 간행소를 충청도 목천군 구내리 김은경 집에 설치. 1000여부 간행
3.8 춘암 박인호 입도
3.10 해월, 의암등 충청도 지방과 호남지방 지도자 3인을 면접
5월 경주 계미판 경전(동경대전)계미판 간행
*일용행사가 도 아님이 없다는 설법과 더불어 포유문 발표하다.
1884년(포덕25년)
6월 해월, 박치경의 주선으로 익산 금마면 미륵산 사자암에서 은거
9월 해월, 집안식구들을 데리고 상주군 화령면 전성촌으로 이주
10월 해월, 의암, 춘암, 송보여 등과 더불어 익산군 사자암에서 49일 기도 봉행
10.24 '천강하민'의 강시를 얻으시고 육임제를 설치하여 교단조직을 강화하다.
(육임은 교장, 교수, 도집, 집강, 대정, 중정)
1885년(포덕26년)
1월 해월, 손병희에게 포덕광제를 설법
5.6 해월, 보은 장안으로 이사. 또 영천에서 화계동에 이거. 상주군 화령면 전성촌에 가족과 함께 이사하다. 서택순의 집을 거쳐 청주에서 며느리가 베짜는 것이 한울님이 베짜는 것이라는 설법을 하다(천주직포설)
6월 해월, 공주 마곡리에 은거
7월 해월, 영천군 화계동에 은거. 의암 해월의 명으로 공주 가섭사49일기도
8월 단양군수 최희진에게가산을 몰수 당하다. 11월까지 여름 옷으로 살다가 이치흥, 박치경의 도움으로 새옷을 마련하다.
9월 '사인여천''부화부순'설법(상주 전성촌)
1886년(포덕27년)
4월. 해월, 기도와 청결에 힘쓸 것을 지시하고 상주에서 "올해는 악질이 크게 번질 것이니 성심으로 수도하면 악질을 면하리라"는 설법하다. '동학에 입도하면 악질을 면한다'는 말이 퍼져 마당 포덕이 일어나다.
1887년(포덕28년)
1.15 아들 덕기(=솔봉, 13세)를 청주 음씨와 혼인시키다.
2.24 김씨 사모님(덕기, 윤 모친)환원. 전성촌 뒷산 원통봉아래에 장사
3.21 회갑연후 손씨 부인과 합가.
4월 보은으로 이사하여 서인주. 손천민 등과 태백산 갈래사에서 49일 기도를 봉행하고 '불의 사월사월래'의 강시를 짓다.
*육임소와 정규를 정하다. 접주는 1회씩 돌아가면서 청강케하고 교도는 육임의 선단에 따라 장실에 배알케 함으로써 육임의 소임을 막중하게 함
*해월, 춘추 2회로 49일 기도할 것을 통유하고 '무극대도작심정 원통봉하우통통'이라는 시를 짓다.
1888년(포덕29년)
1월, 해월 전주 삼례 등지를 순회
2월 해월, 의암의 여동생 손씨 사모님을 맞아 혼인
*해월. 이돌로(李乭老)의 집에서 식사할 때 이적이 나타나다.
1889년(포덕30년)
*관의 지목이 심하여 육임소 일시 해산. 괴산 신양동→인제 김현경의 집→고성군 죽왕면 왕곡 김하도의 집에 2개월 동안 지내면서 10여호 포덕
11월 경상도 금산군 복호동 김창준의 집에서 여성이 수도하는 법을 담은 <내수도문>
<내칙>을 지어 각 포에 보내다.
1890년(포덕31년)
*해월 이 해에는 특히 지목이 심하여 각 지방으로 전전피신
1월 손씨 부인이 아들 동희 출산하다. 청주군 외서면 복평에 옮겨 살다.
7월 인제군 남면 성황거리 이 명수의 집에서 새소리도 시천주소리임을 설법
9월 서우순(서택순)의 주선으로 진천 금성동으로 이사하다,
11월 금산에서 각도 편의장제를 제정하다. 경상 이관영, 충청 이용구, 경기 이종훈, 우도편의장 윤상오 좌도편의장 남계천
*의암, 삼칠일 기도 3회(1회 삼칠일 기도에 주문 1백만독 공부)
1891년(포덕32년)
2월 해월, 공주 신평리로 옮겨살다. 의암의 '천지의 이기' 질문에 답하다.
5월 호남 순젖중 수운이 여자종을 해방하여 며느리와 양딸로 삼은 것을 예로 들어 '문벌과 신분차별폐지'를 강조하고 남계천을 호남좌.우편의장으로 임명한 이후의 내분을 수습하다.
10월 갱정포태지설을 설법하고 '임사실천십개조'반포하다.
12월 해월, 충주 외서촌으로 옮기다.
1892년(포덕33년)
1월 해월, 진천군 부창리에 이사하였다가 5월에는 상주 왕실촌으로 옮기다.
1.19해월, '동경대전과 가사를 읽을 때는 경건하게 하라'는 통유문을 보내다.
2.26 해월. 교도들에게 105일기도를 지시하는 통유문을 내보내다.
7월 서인주, 서병학등으로부터 교조신원운동 전개요청을 받다. 공주 감영 충청감사에게 수운의 신원과 동학탄압 중지를 요구하는 소장 제출키로 하다.
10월 공주 감영에 소장을 제출하여 답을 받고 교조신원을 위한 입의문을 지어 각 포에 발하다. 이어서 삼례집회 지시. 삼례에서 교조신원운동 전개
11.1 전주 전라감영에 소장 제출→11.6 관찰사의 제비(題批)가 내려지다...제비(소장에 대한 답변)
11.3삼례취회
11.7관찰사의 해산요구에 답하여 해월에게 '법헌'의 존호를 바치고 해산함으로써 삼례취회가 막을 내리다.
12.2보은 장내에 도소를 설치하고 육임을 두다.
1893년(포덕34년)
1월 서울 남산동 최창한의 집에 도소를 설치하고 상소 준비하다. 소두 박광호, 소문 손천민, 서가 남홍원
2.11서울 광화문 앞에서 수백명의 도인들이 3일 밤낮으로 엎드린 채 동학 탄압중지와 수운의 신원을 호소. 동학도들이 서울 경내에 외세 배척을 시위하는 rho서를 붙이다. 13일에 국왕의 제음이 있으므로 도인들이 흩어지다.
3.10보은 장내 재회합. 청산 보전리 김연국가에서보은 취회를 결정. 해월의 총지휘아래 도인 3만여명 보은 취회 전개하다. 척양척왜 운동 전개하다.
3.20/30. 보은 군수. 선무사 어윤중과 담판
4.2 어윤중이 국왕의 칙교를 전하므로 도인들에게 해산령을 내리고 해월(최시형)은 보은을 떠나 칠곡. 인동. 금산을 거쳐 청산등지로 피신
5월 칠곡 율촌리 곽우원의 집→7월 안동군 배성모의 집→금산→청산
7월 해월 서병학 등의 폭력혁명 요구 거절하다
10월 상주 왕실촌→청산 문안리 김성원의 집으로 피신
10.28강원도 인제 최영서의 집에서 수운 탄신향례 지냄
12.27해월, 강원 홍천 서면 제일리 홍창성가에서 손병희 등과 함께 과세
1894년(포덕35년)
1.10전봉준 고부접주, 정익서.김도삼과 상의하여 만석보 남쪽 말목장터에1천여 도인과 주민을 모이게 하여 고부관아를 장악하고 만석보 파괴
1.14-15. 백산에 1만여명 운집하여 기세 충천
2.25동학군 백산에서 해산
3.21무장 호산봉에서 창의문 발표하며 본격적인 혁명전쟁 시작
3.25고부를 재점령하고 이어 백산으로 이동. 동도대장 전봉준 등 혁명군 편제 정비. 군기확립을 위한 4대강령 발표(不殺人 不殺物, 忠孝雙全 濟世安民, 逐滅倭夷 懲淸成道 駒兵入京
盡滅權貴 불살인 불살물, 충효쌍전 제세안민, 축멸왜이 징청성도 구병입경 진멸권귀)
3.29 태인현 관아 접령
4.2해월, 북접에 통문을 발하여 도인을 청산에 모이게 함
4.6-7 고부 황토현 전투에서 동학군 대승(양5.10-11:황토현 전승기념일)
5.31전주성 함락후 관군과 담판
6.10 전주화약. 동학군 전주성 철수. 호남 각 군에 집강소 설치하고 민정실시
6월-9월 일본과 청나라가 우리나라에서 청일전쟁 전개. 승리한 일본군은 동학군 토벌을 위해 관군을 앞세우고 전라도 지역으로 진격
9.18 북접, 해월의 지시로 손병희통령 휘하에 집결 기포하여 남접과 결합
10월 논산에서 의암과 전봉준 장군 상면
10.15 강원도 고성 죽왕 왕곡 함일순의 집에 동학군 주둔
11.11-15 공주공방전(우금치)전개하였으나 패배하여 후퇴
12.2전봉준 피로리에서 체포당함
12.24북접군 충주에서 해산시킴
*해월, 보은 북실 전투이후 강원도 지방에 은거
*서북지방에서 동학군 계속 항거
****포덕146년 11월 2일 아침 기록**
1895년(포덕36년)
1월 해월, 의암과 함께 인제 최영서의 집으로 옮김.
의암, 해월을 모시고 이리저리 피신하다가 원산.강계등지로 행상을 겸하여 평안. 함경도 지방을 중심으로 포교활동 전개
3.29 전봉준은 동학군 대장들인 손화중, 최경선, 성두한, 김덕명등과 함께 서울에서 처형당하다.
12월 해월, 의암과 함께 원주 치악산 아래 수례너미등에 피신 의거
1896년(포덕37년)
1.5 해월, 손병희에게 "그대의 의로움은 천하에 미칠 자 없다."하고 도호(의암)을 내리다. 11월에는 손천민에게 송암, 김연국에게 구암의 도호를 주다(의암, 송암, 구암을 3암이라 통칭)
3인이 의논하여 교단을 이끌도록 함.
1월하순. 의암이 해월의 가족을 치악산 아래에 모시다.
2월. 이용구의 주선으로 해월 가족은 충주군 의성촌 마르택으로, 의암가족은 충주군 방축리로 이사하다.
3월. 해월, 의암에게 직부를 실행케하고 삼암을 시켜 '도문규칙'반포
5.3 해월, 의암에게 성경신으로 수련에 전념할 것을 당부하고 경통을 발하다.
6월 청천면 산막리로 이거
9월 상주군 화서면 높은터 기픈 산중으로 옮기다.
12월 의암, 송암, 구암에게 경심법(敬心法)을 통문으로 발표하게 함
1897년(포덕38년)
3월. 음죽군 앵산동으로 이사하다.
4.5 해월 앵산동에서 '향아설위'를 설법하고 득도 향례식을 봉행하다. 임첩에 '북접법헌'을 '용담연원'으로 다시 '용담연원 검악포덕'으로 고치다.
8월 여주군 구전거론으로 이사하다. 이천군천 이심치심의 설법을 하다.
10.28 인제군 느릅정이 최영서의집에서 수운의 탄신 향례 행함. 우리 도의 큰 운과 식고의 이치와 물약자효의 이치를 설법
12.24 해월, '너의 3인중에 또한 주장이 없지 못할지니 의암으로써 주장을 삼으라'하고 의암에게 도통을 전하다.(전거론, 인일기념)
1898년(포덕39년)
1.3 관졸이 원주 신전거론을 수색. 해월, 의암과 김낙철의 기지로 체포위기 모면하고 저평.홍천군 제일동으로 피신
2월 원주군 송동 원진여집으로 옮기다.
4.5 해월, 원주 송골에서 체포당하다(낮 12시경)
5.30 해월, '좌도난정률'의 누명으로 사형선고받다. 한성감옥으로 이감
6.2. 해월, 사형 선고 이틀 뒤에 좌포정(현 종로구 묘동 59번지.단성사 뒤)에서 교수형을 당하고 순도하다(72세/오후2시)"나 죽은 뒤 10년 내에 주문소리가 서울에 진동하리라"고 예언하다.
6.5 시구문 밖에 버려진 해월의 시신을 제자들이 은밀히 수습하여 송파 이상하의 땅에 매장하다 .
8월. 의암, 당진군 모동으로 옮기다.
1899년(포덕40년)
4월, 의암, 박인호에게 '춘암'도호를 주다
7월, 의암 '각세진경' '수수명실록'지음
8월 '명심장'과 '우음'을 지음
11.9 소파 방정환 탄생(서울 야주개, 현 당주동)
11월. 해월의 부인의 손씨 사모님 환원. 성사, 정성군 두치(청양군 정산군 말치)에서 지냄
12월 의암 정산 두치(말치:현 충남 서산)로 옮기다.
1900년(41년)
5.1 해월의 분묘를 광주군(현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천덕산에 이장하다.
7.10 의암 풍기로 옮기다.
7.20 의암 풍기현에서 대종주의식 봉행하다.
8.29 송암 손천민 관에 체포되어 순도하다.
*의암 예산 용문사에서 21일 독강마치다. 서북지방에 도인이 급증하다.
1901년(포덕42년)
1월 의암 죽산 미륵평으로 이거 '영춘시'지음
의암 이상헌으로 변성명하고 상해, 일본 등지에서 망명하다가 귀국(세계대세를 살피려고 미국에 가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일본에 체류하다가 다시 상해로 망명) 재차 일본으로 나가 나가사끼, 나고야, 동경에 머룰다.
10월. 성경신과 노고근면으로 수도에 전력할 것을 강조하는 경통을 발함.
12월 위생에 관한 글을 도인에게 반포하다.
1902년(포덕43년)
1월, 과천에서 서강으로 집을 옮김.
3월, 의암..인재양성을 위하여 학생 24명을 선발, 일본 나라현에 데려가 일본 서경 관립중학교에 입학시키다.
*의암 정치 망명객 권동진. 오세창. 박영효 등과 서로 만나면서 포덕
1903년 (포덕44년)
2월. '삼전'에 대한 내용을 경통으로 보내다.
도운이 전국에 팽창. 비전혁신을 위한 소장을 지어 이인숙을 통해 의정대신 윤용선과 법무대신에게 보내다.
8.3 손병흠. 부산에서 갑작스레 환원하다.
*의암..'명리전''삼전론''무하설''대종정의'를 짓다.
1904년(포덕 45년)
3월 대동회 조직
7월 모화관 산방에서 '대동회'를 '중립회'로 개명
8.30 의암 주요두목을 일본으로 소집하여 진보회(회장 이용구)를 조직케하여 각도 각군 읍에 민회개최. 20여만명 일제히 단발흑의로 전국에서 개회. 개화혁신운동을 전개하다 각지에서 관민 충돌. 피해자 속출
12.2 일진회의 술수에 휘말려 진보회가 흡수합병 당하다.
*의암 청년학생 40명 다시 선발, 일본 동경의 각 학교에 유학시키다.
1905년(포덕46년)
*육임소를 서울 회현동에 설치
*권동진, 오세창, 양한묵으로 하여금 천도교 대헌을 편찬케하여 제정하다.
*궁을기 제정. 교빙 백만장 인쇄
*'천도태원경''권도문''천도교지''천도교전'을 짓다.
12.1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對告天下) 하다.
1906년(포덕47년)
1.5 교당 신축사무소 설치 광고(남서 회현방 제경동 신작로변)
1.30 의암 환국. 독립관에서 강연(청중5천여명)
2.10 천도교중앙총부 공식명칭으로 확정
2.14 황성신문. 의암의 교육열에 감사의 뜻 표명
2.16 천도교대헌(최초)반포. 중앙에 중앙총부. 지방에 교구를 설치토록 결정. 일요일을 <시일>로 정하여 예식을 올리게하고 오관과 도인의 수도 조목을 정하다. 중앙총부 최초의 시무식 거행하다.
3.12 일진회 지방지부 폐쇄 명령에 불복하다.
*서부 소학교에 40원 보조 외 23개 학교에 찬조금 10원-20원기부. 흥화학교. 사립광명학교에 30원 보조
3.19 의암 보성학교 학생에게 찬조금 80원 출연하다.
3월부터 각 지방교구 설치 문제로 해당 관청에 공함 발송
4.5 천일기념일에 지방교인 수천명 중앙총부 기념행사에 참석하다.
4.10 사립 석촌동 소학교에 15원 보조. 의암...이 무렵 심양장군에게 교도보호를 치하하는 글을 보내다.
4.26 보문관에서 신문<만세보>발간키로 결정
5.25 양한묵. 권동진. 한기준. 이겸제 4인을 감옥을 순방 설교케하다.
*72개 대교구제 실시. 교인 10만 이상 지방에 대교구, 婦人전교사 인준.
*천도교 부인전도회 조직
*보문관 설립. 만세보 신문사 창립
*오세창 등 간부들을 수운 구지(舊址)를 배심케 하다
6.10 이종구. 박명수. 한석섭을 감옥에 파견 설교케 하다.
9.20 일진회 가담 교인 다수, 동회 탈퇴를 결의하다.
9.21 한경호. 박계일. 김지련 3인을 심문후 출교처분 단행. 誠米法(성미법)제정.
남대문밖 영수산 관묘북늑에 정초하고 개기치성식 거행
10.21 일진회 가담 이 용구 등 62명의 출교처분 발표
11.7 이용구 측 천도교 공시문을 빙자 황성신문에 발표
11.12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이 용구측의 천도교명의 도용에 대해 반박 성명 발표. 이용구외 60여명 두목 출교
12.13 이 용구 시천교 설립
12.27 박인호, 내부에 지방교당 건축용 기부금 모금 금지조치를 항의
1907년(포덕48년)
2월. 중앙총부를 상다동에서 대사동으로 이거
2.10 천도교중앙총부로 공식기관 명칭 확정
2,.12서울 종로구 홍문관골(현 관철동)에 천도교중앙총부 설립
대도주제 실시(3대)
'각세진경''준비시대'출간
4월 성미법 시행 논의
5.21 성사..모범 교인 22명에게 이동인장보증 수여
6월 교리강습소 실시
7.21 정부. 수운. 해월의 신원 청원을 받아들여 죄명을 삭제
7.26 구암 김연국을 대도주로 임명
8.26 의암 대도주직을 김연국에게 선수
*수운대신사의 태묘를 이장하다
9.6 천도교중앙총부를 중서 정선방 선유동 2통6호로 이전
11월 총부 주동으로 이거
11월 '동경대전연의'간행
11.30 천도교 숙덕 42인에게 도호 사여
*'대종정의''천도태원경''삼수요지''관감록''동경대전''동경연의''천도교지''현기문답'간행
12월 '천약종정'간행
12.10 경도사 박인호를 차도주로 선수
*정주교사 29인 선임
12.21 이종훈을 성도사, 홍병기를 경도사로 임명
1908년(포덕49년)
1.18 의암 차도주 박인호를 대도주로 임명
1월. 의암 권동진을 대동하고 관동지방 순회설교와 시찰자 출발. 지방 교황을 살피다. 김연국 대도주직 사임하고 시천교로 가다.
2월 중앙총부를 주동에서 남부 홍문동(현 관철동)으로 이전하다.
2.7 의암. 황해도 서흥교구에서 설교하다.
2.9의암 평양교구에서 대성황리에 설교하다
2.10의암. 오후1시 만수산에서 수만명의 청중에게 설교하다.
3월 의암..철산에서 무뢰배에게 봉변당하다.
4,14 성사 철산 난동자에 대한 징치를 만류하고 천도교 의사기관 설립론 대두. 석방을 요청하다,
4월 성사..전라도 지방 순회 설교를 하다.
4월 부구총회 결이로 수운을 수운대신사로, 해월을 해월신사로, 의암을 의암성사로 존칭해서 부르기로 하다.
6월 서울과 각 군에 강습소 설치
6.1 갑자년(1864년) 이래의 순도자 합동위령식 봉행 (서울 남대문밖에 영수산)
수운의 초상화 완성. 재정문제로 일진회측을 평리원에 제소
6.11 보문관 출자금 청산 건으로 소송제기. 이후 수개월간 출자금 청산문제로 분규계속
10.28 남대문밖 영수산 (관왕묘 북편)에서 합동위령식 거행
11.23 천도교 교회 면목 일신코자 조문 발표
천주연비제 철폐하고 연원제 실시
총부 종로구 상다동으로 이전(현 무교동)
1909년(포덕50년)
1.25 신도사 나용환, 법도사 양한묵을 임명
1.30사범강습소 설치
3월 중앙총부를 북부대안동으로 이전하다.
3.17보문관 소송 패소. 공소원에 복소(20)
7.4 신교당 낙성(의암 사저 병용)
10월 종문사과(誠敬信法성경신법)를 실행
10.26 천.지.인 3대 기념 결정
11.4 동덕여자의숙에 의연금 10원씩 보조키로 하다. 보성전문. 중학. 소학(문창.보창)을 인수하고 지방에서도 학교인수. 교도300만에 달하다.
12.20 성사일행. 수운 성지 순방하고 양산 통도사 내원암에서 49일 기도
1910년(포덕51년)
1.3 총부 종로구 대사동(현 인사동0에 이전. 성도사. 경도사 각 기관장 경질
3월 천도교 사범 강습소 설치(서울)
4월 음력으로 시행하던 각 기념일을 양력으로 바꾸어 시행키로 하다.
4월 성사..수련법문을 내리다.
5,20 보문사 재판 공소원에서도 패소
5,26 천도교 기관지 신문발행준비. 경무총감부 관리 성사 가재를 집달
6월 성사..춘암과 함께 고암군 삼성암에서 21일 기도 봉행
6.3 보문사 건으로 주주 민건식을 지방법원에 제소
6.18 영적도 휴대하고 도청. 포교준비로 수사기관에서 내사
8.15 신사주문 반포,<천도교월보>제1호 발간이후 포덕 78년(1937년)5월15일까지 발간. 통권 295호 발행
9.3 천도교 월보사. 이교홍 병합반대 서한을 각국 영사에 보내고 원조를 요청. 동인 북부 경찰서에 체포된 후 고문
12.3 중앙총부를 중부 사동에서 북부 대안동에 이전
12.13 의암 보성학원 부채 청산코자 80원 출연
12.24 인일기념일에 신포덕공로자 2,294명 포상
1911년(포덕52년)
1월 송현동에 천도교당 신축. 신대헌 제정
*성사..보성, 동덕 학생 200여명 인솔 경주 성지 순례
2월 송현동(종로구 안국동)에 2층 양옥을 건축하고 대사동 중앙총부를 이전
3월 오관제 정함(주문, 청수, 시일, 성미, 기도)
4.5 제51회 천일기념식이 송현동 신축교당에서 거행. 3천여명 모임
4.8 성사 50회 생신날 보성 소학교 학생100여명이 축가불러 대성황이룸
4.28 보성학교에서 천도교교리 과목 편입건으로 분규발생
4.30 일제의 강압으로 성미법읊 폐지하다
5.2 보성사 운영안에 경비 지출 난색 시사
5.18 성사..총부 대두목과 보성학교 직원 일동 및 학생 200 여명과 함께 성지 순례차 용담정 방문
6월 장로제 실시
7월 우이동 임야 27,946평 매입(8천원)
10.10 일제 천도교에 대한 경고문 발표
1912년(포덕53년)
2.10 종학강습소 설치
*교서. 도경. 성미편. 천도교문. 현야. 정학공부.이일록. 사과요의. 체리종적.대종선후 교우자성 간행
3.16 <무체법경><후경>간행
4.15 전국에서 두목 21명을 선발. 도선사에서 49일간 연성수련 실시(1차), 이후 지방두목 483명을 선발 7차에 걸쳐 봉황각에서 연성 기도토록 하다.
5.17 총부에서 관리하는 보성소학교, 보성중학교, 마포보창학교, 용산 사촌양영학교, 청파 문창학교, 동덕여학교, 용산 양덕여학교 등 7개 연합운동회를 청파동에서 개최
6.9 봉황가(우이동)건립
6.22 제1회 종학생 수업식 거행. 고등과 49명. 심상과 60명
1913년(포덕54년)
1.11 봉황각 제3회 49일연성수련 시작
4월 해외 포덕 활동의 일환으로 교역자 중국에 파견
4.6 제4회 연성수련 시작
4.7 '신언'출판. 편술자 박인호. 발행자 손재용. 발행소 보성관
10.1 제5회 연성수련 시작
*'동학필독'간행, 성미제 재실시
1914년(포덕55년)
2월 두목 105인을 선발하여 제6회연성 실시
3월 무기명제 성미제실시
4.2 74대 두목이 모여 공동전수 심법식 봉행
천도교 신계획 수립 공표. 각 교구의 질의 쇄도
4.16 제7회 49일 연성수련 실시
7월 대구. 평양. 정주등에 교당을 신축하기로 결정. 37개 교구 설치
8.14 제51회 지일기념식후 천도교를 사회적으로 시위하기 위해 지방두목 500여명이 한강에서 선상회식. 회비는 1인당 1만원으로 배 40여척을 뛰움.
9.17 성사..교도들의 행동을 신중히 하도록 당부하다.
10월 105일 기도때 신사주문(신사영기 아심정 무궁조화 금일지)을 외우게 함
10.1 이듬해 1월30일까지 105일 특별기도 봉행(기도시간은 하오9시)
10.15 오응선이 용담정 재건
10.31 보성학교 신축교사 낙성
11.17 참새 수십마리가 성사 주변에 와서 노니는 광경이 연출되다.
12.24 성사..인일기념식후 "개인의 수명보다 창생의 수명을 비는 일이 시급하다"는 요지로 훈화말씀
1915년(포덕56년)
1.30 105일 기도식 종료. 성사 '기도105일'의 시를 지음
7월 상춘원 매입(4만원)
1916년(포덕57년)
성사..'이신환성'의 법설을 반포하다
4.1 특신교인에게 천훈장을 수여
4.5 천일기념식 후 원유회 5천명 참석
6월 성사.."교의 제도는 여러번 변하리니 십년 소일변, 백년중일변, 천년대일변하여 항상 신면목을 갖춤이 옳다."는 요지로 교도에게 설교
7.31 성사..본정 경찰서 사법계에서 심문. 천도교 빈민구제금 희사
12월 천도교 중앙조직을 개신. 성미 7합제
1917년(포덕 58년)
2월 홍일초 스님에게 "무불이라야 유불, 무천이라야 유천이라"라고 설법하다
성사..6도사에 명하여 지방순회. 교도들에게 수심정기에 힘쓰도록 당부
각 지방에서 설교(신앙통일 규모일치 운동 전개)
3월 도사실에 포교연구부 설치
4.8 성사 생신연에 영애(3녀)와 방정환 혼인식 봉행
6월 두목 25인에게 도호 발급. 교회에서 출교 벌칙 삭제
11.23 낙암 김낙철이 정갑수, 정원섭 등 10여명과 더불어 시천교에 포고문을 보내고 천도교로 복교하다
12,.20 김낙철을 성도사에 임명하다
*방정환, 유광열등과 함께 지하 청년운동단체<청년구락부>조직
1918년(포덕59년)
1월 오관과 사계명의 뜻을 새롭게 공포하다.
1.18 도일기념식을 행하다. 시천교인 27명이 복교하다
2.8 일진회 건으로 출교처분한 이용구등의 죄를 사면하다(종령118호)
2월 교리 연구부 설치
4월 전국9개소 대표 기도지 설정. 두목 14인에게 도호 발급
4.5 부구총회에서 중앙교당 신축을 발의
6월 성사...문도들에게 수도의 요지로 "心不離心 心無恥事 守心正氣 修而煉之(심불이심 심무치사 수심정기 수이련지)"를 말씀하다.
7,25 성사..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대동하고 금강산 유람. 비로봉위에서 "큰 바다를 멀리 바라보니 위로는 하늘과 잇닿았고 금강안의 한 폭은 나는 듯 한 것이 연기와 같으니라. 백팔구악이 다 속되지 않았고 만이천봉이 모두 옛날 그대로 있는 것 같으니라."는 시를 남기다.
8.14 지일기념식 후 장응곤 등 14인에게 도호를 주다. 각 지방 두목과 교구장들에게 "인여물개벽"의 제목으로 설법하다. 이 무렵 교세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여러 이적이 나타나다.(천도교회 월보 영적실기 편에 수록 됨) 성사...앞으로 개인 영적은 없어지고 기관영적이 나타날 것이라고 에견
8.15 천도교에서 빈궁 구제금 1천원 기부하다
11월 성사..파리강화회의 개최의 신문보도를 열독하다.
12.1 중앙대교당 신축기공예정(기금 15만원)
12.15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을 서울 동대문밖 상춘원에 모아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 결정 또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의 3대원칙을 정하다.
12.24 다음해 1.5일부터 2.20일까지 49일 기도식 봉행(12.24) 대표 기도지로 서울. 해주. 의주. 길주. 원주. 경주. 서산. 전주. 평강등을 선정
1919년(포덕60년)
1.5-2.20 전체교인 49일 기도(종령120호) 교도들에게 매호당 10원이상 특성성금 모금.
성사..일본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한 기행 계속
1.21 성사...천도교는 구역적 종교가 아니며 세계적 종교라는 설법
1.하순 성사, 3.1운동 영도. 박영효만나 시국 논의, 이즈음 구한국 고관들 포섭하기로 결정. 독립선언문 및 청원서의 작성은 최남선이 담당
2.상순 구한국고관들에 대한 포섭 실패
2.8 동경 유학생 독립선언서 발표
2.9최린, 현상윤, 최남선 상면하고 기독교측(이승훈)과의 접촉방안 협의
2.11이승훈 상경 후 송진우와 면담하여 동지규합을 약속하고 다음날 하향
2.15 독립선언서 초고 최린에게 전달
2.17이승훈 다시 송진우와 면담, 운동합류 합의 못하고 박희도와 첫 만남
2.20함태영가에서 기독교 각파 회동 학생운동 측 독립선언문 착수
2.21 최남선, 이승훈과 면담. 최린가에서 기독교측 거사자금 대여건 협의
2.22천도교 49일 기도회 종료. 독립운동거사 계획을 간부들에게 은밀히 전달
2.23천도교측에서 기독교측에 독립자금 5천원 전달
2.24천도교. 기독교. 불교 각파의 독립운동 합류를 최종 결정
2.27각 교파 대표들 '상춘원'에서 독립선언서 서명날인. 안세항 임규,독립선언문, 통고문 휴대하고 동경향발
2.26 기독교의 대표자 선정. 현미(玄梶) 상해 향발
2.27종로 경찰서 신승희 형사를 매수하여 독립선언서 인쇄사실을 감추다.
2.28독립선언서 인쇄(21,000부, 보성사)33인 성서 댁에서 최종회합. 강원도 , 함경남북도(안상덕), 황해도(이경섭)평안남북도(김상설, 조기주) 전라북도 (안종익)등이 독립선언서 배포. 성사..대도주 박인호에 유시문 내리다.
3.1민족대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 탑골공원에서 학생들 선언문을 낭독하고 민중과 함께 시위행진, 독립선언서 각지 배포 책임자편에 밀송. 독립신문인쇄. 김지환, 독립선언문을 휴대하고 안동향발(상해로 전하기 위해)
3.5성사를 비롯한 28인 서대문감옥에 수감
3.7 의암에 관한 검찰신문 기록 작성
3.10 단천 서봉화의 선도로 결렬한 만세 시위 전개
4.5 천일기념식 간소하게 거행
성사이하 32인을 예심 회부
4.10 의암등에 관한 지법(址法)예심조서 작성
4.15 제암리 사건으로 천도교인 기독교인 29명 학살
5.23 일본군 독립선언 장소인 태화관에 방화
5.26양한묵,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57세)
6.19방면된 천도교의 일부 간부들이 장래의 방침을 천명
6.28보성사, 일본인의 방화로 보이는 불로 인하여 전소
8.1민족대표 31인 예심 종결, 내란죄로 고법에 회부
9.2 천도교 청년회의 전신인<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부장 정도준)조직.
성사..이 소식을 듣고 청년들이 하는 일을 도와야 한다고 당부
10월. 경운동의 중앙대교당 공사착공(약 200평, 예산15만원)
11.28 성사..옥중 발병
12.24인일기념일, 당국에서 엄중감시
(1919년 독립선언일 까지 자료정리 20:35분)